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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명학은 禪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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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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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양명학의 주체성과 창조정신 6주차】

5. 계곡 장유의

주체적 학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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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谿谷 張維

▷ (1587~1638)

▷ 字: 指國, 號: 谿谷, 黙所

▷ 孝宗妃 仁宣王后의 父, 金長生의 문인,

▷ 병자호란 때 최명길과 함께 講和를 주장

▷ 仁祖反正에 참여, 김상헌의 처숙

▷ 주자의 中庸章句 비판, 知行合一說 소개

唯心論, 氣一元論, 實心, 愼獨說, 良知論 주장

2. 조선조의 程朱學 일색 비판

중국의 학술은 갈래가 많아서 정학正學과 선학禪學�단학丹學 이 있으며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가 있고, 육씨陸氏(육상산)를 배우는 자도 있어서 문로門路가 하나만이 아니다. 그런데 우 리나라는 유식�무식을 논할 것 없이 책을 끼고 글을 읽는 자라 면 모두 정주의 학문을 욀 뿐이고 딴 학문이 있다는 것을 듣 지 못한다. 어찌 우리나라의 선비의 풍습이 중국보다 나은 것 이리요. 말하자면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에는 학자가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학자가 없다. 대개 중국 사람은 재주와 뜻이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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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碌碌하지 않으므로 시대마다 뜻이 있는 선비가 실심實心으 로써 학문을 닦는다. 까닭에 각자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학문 하는 것이 동일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충실한 공부가 있었 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생각하는 것이 옹졸하 고 도무지 뜻과 기개가 없다. 다만 정주의 학문을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들어서, 입으로 말하고 겉으로 높일 뿐이다.(谿谷漫筆권1)

3. 양명학은 禪學이 아니다.

▷ 양명학은 禪學이나 主靜學이 아니며, 정주학의 窮理․格物說 과도 다르다고 주장

양명과 백사白沙를 평론하는 자는 아울러 선학禪學이라 일컫 는다. 백사의 학문은 진실로 정靜에 치우쳐서 적寂으로 흐른 것이 있다. 하지만 양명의 양지良知라는 가르침 같은 것은 그 실지 공부를 오직 성찰省察과 확충擴充에 두어서, 매양 배우 는 자들이 고요함을 즐기고 움직임을 싫어하는 것을 경계토록 하였다. 따라서 백사의 학문과는 월등하게 다르다. 다만 궁리 窮理와 격물格物을 논한 것이 정주程朱와 더불어 아주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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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이것이 그 학문의 길을 달리 세우게 된 까닭이다.(谿谷 漫筆권1)

▷ 양명은 사실상 主靜을 비판한다.

단지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해야만(去人欲存天理)’

해야만 비로소 공부이다. 고요할 때에도 늘 去人欲存天理할 것을 생각하고, 움직일 대도 늘 去人欲存天理할 것을 생각해 야, 편안하고 고요한지의 여부와는 전혀 무관하다. 만약 저 편 안하고 고요한 것에 의존한다면 점차 고요함을 좋아하고 움직 임을 싫어하는 폐단이 생길 것이며,(若靠那寧靜, 不惟漸有喜 靜厭動之弊) 그 가운데 수많은 병폐가 잠재되어 있어서 끝내 제거할 수 없으며, 일을 만났을 때 그 병폐가 여전히 자라날 거이다. (傳習錄(上), �陸澄錄�, 28조목)

내가 예전에 저주滁州에 머물 때 학생들이 대부분 지적인 이 해에 힘쓰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같고 다름만을 논쟁하여 아무런 보탬도 없는 것을 보고는 잠시 그들에게 靜 坐를 가르쳤었다. 한때 그들은 광경을 얼핏보고 자못 근접한 효험을 거두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고요함을 좋아하 고 움직임을 싫어하여 마치 마른 나무처럼 (생기를 잃어 어떤 감응도 일으키지 않는) 병폐에 흘러 들어가거나,(漸有喜靜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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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 流入枯槁之病) 혹은 현묘한 깨달음에 힘써서 듣는 사람 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요즘에는 다만 致良知를 말할 뿐이 다. 良知가 명백하다면 그대가 고요한 곳을 따라 체득해도 좋 고, 구체적인 일에서 연마해도 좋다.(傳習錄(下), �黃省曾 錄�, 262조목)

4. ‘修道之謂敎’에 대한 반주자적 해석

▷ 중용修道之謂敎에 대한 해석에 있어 주자를 비판하고 양 명의 입장을 긍정

中庸첫 장에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 했으니, 中庸은 修道하는 敎를 위해 지은 것이다. 까닭에 아래의 글귀에 잇달아서 말하였다. ‘道는 잠깐 사이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니다.’ 이와 같이 戒懼하 고 愼獨하여 致中和의 일을 말하였으니, 곧 修道하는 알맹이 다.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닦아 밝히고 몸을 닦아 다스린다는 것으로서 ‘君子는 수양하여 吉하게 한다’는 그 수양과 같 은 뜻이다. 그런데 (주자의) 章句에 수양은 品節함이요, 敎는 禮樂刑政 같은 것이라 하였다. 品節로 修를 해석한 것은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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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하지 못하다. 禮樂이 비록 몸을 다스리는 것이지만 戒懼하 고 愼獨하는 것과 비교하면 좀 맞지 않는 것 같고, 더구나 刑 政 같은 것은 다스리는 도구이니, 원래부터가 학자의 몸과 마 음에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修道라 한다면 心外로 한 것이 아닐까. 本章에 있는 戒懼�愼獨�致中和 등의 절실하 고 가까운 가르침을 버리고 멀리 禮樂刑政으로써 가르침을 삼는다는 것을 말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의심하는 첫째이다.

(谿谷漫筆권1)

※ 中庸1장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에 대한 주자와 양명의 차이

A. 주자의 입장

① 天命之謂性 ⇒ 性卽理의 보편성

② 率性之謂道 ⇒ 循理의 당위성

修道之謂敎

聖人의 敎化

▸品節 ▸禮樂刑政

☞ 인간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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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命之謂性’에 대한 해석 부분이다. 性卽理라고 주장하는 주 희는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化生함에 있어 氣로써 형 체를 이루고 理를 부여하는 바, 사람과 사물이 부여받는 理는 健順․五常의 德으로서 이것이 바로 ‘性’이라고 주장한다. 理 氣이원과 性形이원을 전제로 天命으로서의 ‘性은 理만을 의미’

한다고 말할 수 있다.

ⓑ ‘率性之謂道’에 대한 해석이다. 性卽理의 보편성을 근거로 사 람과 사물이 연속적 삶의 과정에서 각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性의 본질 즉 당위의 규범으로서의 理를 수행해 나가는 것을

‘道’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道는 인간이 理에 순응하여 理를 실천해야 하는 ‘보편적 당위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 ‘修道之謂敎’에 대한 해석이다. 인간은 性과 道의 보편성을 지니는 반면 氣稟의 차별성으로 인해 지나치거나 부족한 층차 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聖人이 性과 道의 보편성을 토대로 ‘등 급과 제한을 정하여’ 천하의 법으로 삼는 바, 이러한 ‘성인의 敎化’가 바로 修道의 敎로서 ‘禮樂刑政’이 이 敎에 속한다는 것이다.(中庸集註, 1장 1절 : 脩品節之也, 性道雖同, 而氣稟 或異, 故不能無過不及之差, 聖人因人物之所當行者, 而品節之, 以爲法於天下, 則謂之敎, 若禮樂刑政之屬是也.) 修道의 敎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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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차별성에 근거한 성인의 교화로만 한정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도修道를 성인의 교화로만 한정함으로써 인간 개 개인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사실상 배제시키고 있다.

B. 양명의 입장

① 心․性․理․天의 일원적 체계

② 率性之謂道 ⇒ 道心과 聖人之事

③ 修道之謂敎 ⇒ 凡人之事

④ 率性과 修道는

致良知로 일원화

☞ 인간에게 주체성과 능동성 부여

性卽理에 근거하여 하늘이 부여한 性만을 理로 보는 주희와 달 리 왕양명은 하늘을 마음의 본질적 속성인 性의 근원처로 보고 본성만이 아니라 마음 또한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으로 규정 한다.(傳習錄(中), 答顧東橋書 , 134조목 : 夫心之體, 性也.

性之原, 天也.……天之所以命於我者, 心也, 性也.) 마음을 단지 보편적 당위의 규범에 일치하는 본성을 구비하고 이에 지각 작용 을 하는 기능적 측면만을 지닌 것으로 정의하는 주희와 달리 왕 양명은 마음 그 자체가 天理를 본질적 속성(體)으로 하여 실천 조리(理)와 실천 행위를 창출(用)하는 주체로서, 마음은 天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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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理와 일원적 체계를 지닌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본성은 자연만물을 창생․양육하는 하늘의 본질적 속성 과 일치한다고 하는 측면과(中庸, 20장 : 誠者, 天之道也. 傳 習錄(上), 薛侃錄 , 121조목 : 誠是心之本體.) 인간의 본심이 곧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마음이 곧 하늘이라 할 수 있으므로,(王陽明全集․答李明德, 권6 : 人者, 天地萬物之心 也; 心者, 天地萬物之主也. 心卽天.) 마음과 본성과 하늘 또한 일원적 체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傳習錄(中), 答聶文蔚

, 192조목 : 心也, 性也, 天也, 一也.)

이러한 일원적 체계를 바탕으로 왕양명은 ‘修道之謂敎’를 禮樂 刑政과 같은 성인의 교화로만 보는 주희의 입장을 문제삼는다.

일원적 체계를 지닌 道․性․命은 그 자체가 완전하기 때문에 별도의 성인의 品節을 필요치 않는다고 주장하고, 더욱이 ‘敎로 부터 道로 들어가는 일’에 대해 중용에서는 개개인의 戒愼恐 懼의 노력만을 말하고 있을 뿐 성인의 禮樂刑政에 대해서는 언 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희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한 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양명은 率性之謂道와 修道之謂敎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子思는 性�道�敎를 모두 본원을 따라 말한 것이다. 하늘이 사 람에게 명한 즉 命은 곧 性이라 이르는 것이다. 性을 따라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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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즉 性은 곧 道라 이르는 것이다. 道를 닦아 배운 즉 道를 敎라 이르는 것이다. 率性은 誠의 일이니, 이른바 ‘ 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性이라 이른다’ 는 것이다. 修道는 誠之 의 일이니, 이른바 ‘ 明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을 敎라 이른 다’ 는 것이다. 성인은 性을 따라 행하니 곧 道이다. 성인 이 하의 사람들은 性을 따를 수가 없어서 道에 지나치거나 미치 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修道해야만 한다.

修道하면 어질고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지 아니하고 어리석고 불초한 자는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다. 모두 이 道를 따르고 자 하는 것으로 道가 곧 敎이다. … 사람이 修道할 수 있은 연후에 道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그 性의 본체를 회복할 수 있 으니, 또한 성인의 率性의 道인 것이다. 아래의 戒愼恐懼는 곧 修道의 공부이다. 中和는 곧 그 본성의 본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易의 ‘ 窮理盡性하여 命에 이른다’ (易經, �說 卦傳�, 제1장)는 말과 같다. 中和位育은 곧 盡性�至命이다.(

傳習錄(上), �薛侃錄�, 127조목)

‘率性의 道’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현․

실현해 가는 성인의 일이라면, ‘修道의 敎’는 자발적 노력을 통 해 본성을 회복함으로써 성인과 같이 본성을 발현․실현해 가는 일반인의 일로 정의되고 있다. 전자는 天道로서의 誠이고, 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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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人道로서의 誠之이다. 비록 성인과 일반인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주희와 같이 성인에 의한 일방적 교화가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자발적 노력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아 인간에게 주체성과 능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아울러 성인의 率性을 통한 본성 실현이나 일반인들의 修道를 통한 본 성 실현은 모두가 천지의 생명 창생․양육 과정에 참여하는 한 가지 일로 귀결된다.

‘率性之謂道’ 자체를 道心으로 규정하는(傳習錄(下), 黃省 曾錄 , 250조목 : 率性之謂道便是道心.) 왕양명은 본성과 道를 일원화시키면서 도를 마음의 본질적 시비준칙이자 시비판단력으 로서의 良知로 규정하고 있다.1) 따라서 본성을 따르는 ‘率性의 道’는 주희와 같이 마음에 대한 循理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아 니라 마음 그 자체의 본성의 자연한 발현 과정을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다. 마음의 본성(心體)은 하늘의 본성과 일치하며 率性 하는 도는 마음의 본성의 자연한 발현이기 때문에 마음과 하늘과 도 또한 일원적 체계를 지니게 된다.2) 이에 修道의 敎를 성인의 교화로 보는 주희와 달리 왕양명은 자연한 본성 발현으로서의 率 性의 道를 성인의 본성 실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본성의 자연한 발현으로서의 率性의 道 즉 양지는 인간 누구나

1) 傳習錄(下), 黃省曾錄 , 265조목 : 率性之謂道, 性卽是道. … 道卽是良知. 良知完完全全, 是的還他是, 非的還他 非, 是非只依著他, 更無有不是處. 這良知還是你的明師.

2) 傳習錄(上), 陸澄錄 , 66조목 : 道卽是天. 若識得時, 何適而非道? … 若解向裏尋求, 見得自己心體, 卽無時無處 不是此道. 亘古亘今, 無終無始, 更有甚同異? 心卽道, 道卽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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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하고 있지만, 양지는 物欲(私欲)에 의해 차폐될 경우 자연스 럽게 발현되지 못한다. 성인 이하의 일반인들은 단지 이러한 물 욕의 차폐로 인해 양지가 자연스럽게 발현되지 못하는 것뿐이 다.3) 그러나 양지가 물욕에 의해 차폐되었다고 하여 양지가 완전 히 상실되는 것은 아니므로, 양지의 시비 판단에 의거하여 물욕 을 제거하여 양지가 온전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전 제되어야 한다.4) 이러한 물욕을 제거하고 마음의 본성을 회복․ 발현코자 하는 일반인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노력의 과정이 바로 修道의 敎로 정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수도의 교의 귀결처는 성인과 같이 마음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현시켜 나가는 솔성의 도와 동일하기 때문에, 수도의 교와 솔성의 도는 한 가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心․性․天 및 性․道․敎의 일원적 체계화는 인간 마 음을 보편적․외재적 당위의 규범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반면, 모든 인간의 마음에 천지의 생명 창생․양육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동성과 역동성을 부여해 준다고 하는 의미를 지닌다.

3) 傳習錄(中), 答陸原靜書 , 165조목 : 夫良知卽是道, 良知之在人心, 不但聖賢, 雖常人亦無不如此. 若無有物欲牽 蔽, 但循著良知發用流行將去, 卽無不是道. 但在常人多爲物欲牽蔽, 不能循得良知.

4) 傳習錄(下), 陳九川錄 , 221조목 : 這良知人人皆有, … 衆人自孩提之童, 莫不完具此知, 只是障蔽多, 然本體之知 自難泯息, 雖問學克治也只憑他; 只是學的分數多, 所以謂之學知利行.

(13)

5. 양명의 지행합일설에 대한 긍정적 평가

▷ 양명의 격물설은 주자처럼 단지 지식을 이루는 공부가 아니라 知行을 겸비하는 공부로 보는 양명의 견해에 동조

先儒(주자)는 窮理를 格物致知하는 일로 삼아서 오로지 知에 다 귀속시켰는데, 오직 왕양명은 窮理 공부는 知行을 겸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범순부范淳夫가 ‘임금과 신하로 말하면, 임금으로서는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궁리이다. 그런데 이치대로 다 하면 타고난 성품껏 하게 되고, 타고난 성품껏 하게 되면 천명天命을 알기에 이른 다’고 하였으니 양명의 말과 합치된다.(谿谷漫筆)

6. 一源論과 一體論 주장

▷ 體用一源과 心과 理, 物과 我의 一體를 주장 ⇒ 主體의 心과 객체로서의 事物의 통일성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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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은 색깔이며, 귀에 들리는 것은 소리이며, 코로 맡는 것은 냄새이며, 입으로 맛보는 것은 맛이며, 마음이 인식 하는 것은 理이다. 눈은 능히 보나, 보아서 그 색깔을 지각하 는 것은 눈이 아니며, 귀는 능히 들어서 그 소리를 지각하는 것은 귀가 아니지만, 눈과 귀가 아니면 능히 보고 들을 수 없 다. … 그런 까닭에 마음이 理를 인식하는 것이 또한 外物을 기다릴 것인가? 말하기를 理는 반드시 사물이 있고, 心의 用 은 필시 物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소리, 형체, 냄새와 맛은 物 의 바탕(用)이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것은 心의 작용(用)이다. 形色臭味가 없으면 物은 없다. 物이 없으면 理 가 없다. 視聽臭嘗이 없으면 心의 작용도 없으며, 心의 작용 이 없으면 비록 理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알 도리가 없다.

… 이것이 體用一源, 顯微無間의 妙이며, 이것이 理이다.(

谿谷集, 권3, �雜著�)

▷ 양명의 心理와 物我 一體 ⇒ 物과 心을 良知로 통일

눈은 體가 없다. 만물의 色으로서 體를 삼는다. 귀는 體가 없 다. 萬物의 聲으로서 體를 삼는다. 코는 體가 없다. 만물의 臭로서 體를 삼는다. 입은 體가 없다. 萬物의 味로서 體를 삼 는다. 마음은 體가 없다. 天地萬物과의 感應의 是非로서 體 를 삼는다.(傳習錄(下), �黃省曾錄�, 277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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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너의 마음이다. 너의 마음이 보는 것은 눈에서 하는 것이요, 너의 마음이 듣는 것 은 귀에서 하는 것이요, 너의 마음이 말하는 것은 입에서 하 는 것이요, 너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몸에서 하는 것이다.

만일 너의 마음이 없다면 귀�눈�코�입도 없다. 이른바 너의 마 음이라는 것은 또한 오로지 하나의 혈육이 아니다. 만일 (마 음이) 하나의 혈육이라면 이제 이미 죽은 사람은 이 하나의 혈육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어찌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인가? 이른바 너의 마음은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 일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성性이고 천리天理이다. 이 성이 있어야 성의 생리生理가 생겨 날 수 있으며, 그것을 인仁이라 한다. 이 성의 생리가 눈에서 발휘되면 볼 수 있게 되고, 귀에 서 발휘되면 들을 수 있게 되며, 입에서 발휘되면 말할 수 있 게 되고, 사지에서 발휘되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즉 이 모든 것은 천리의 발생일 따름이다. 그것은 한 몸을 주재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라 부르는 것이다.(傳習錄(上), �薛侃錄�, 122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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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양명의 詩를 인용하여 양명의 사상에 동조

양명의 詩에 “수많은 聖人도 본래 마음 밖의 要訣이 없고 六經도 모름지기 거울 속 티끌부터 털어야 한다. 물고기는 물 밑바닥에 잠겨서도 마음의 要訣을 전하며, 새는 나뭇가지에 깃들이면서도 道의 眞理를 말하는구나. 사람은 저마다 指南 針이 있는데 萬化의 근원은 본래 마음에 있다. 도리어 우습구 나, 지난날 그릇된 소견이 가지마다 잎새마다 바깥에만 찾았 네. 乾坤이 易이라 원래부터 卦劃은 아니었다. 心性은 어찌 형용하랴. 형용하면 티끌이 생긴다. 日常의 행동 안에서 이탈 하지 않으면서 바로 先天末劃 이전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 는 것이 있는데, 諸儒들이 지나치게 高遠하여 禪에 가깝다고 비방한다. 그러나 스스로 뛰어난 造詣로 사람을 움직인다.(

谿谷漫筆)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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