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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은혜에 의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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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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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은혜에 의한 삶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 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때 내 걸었던 기치 중에 하나가 ‘오직 은혜로’라는 것이었습니 다. 그처럼 우리 신앙의 한 부분은 오직 은혜에 의한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직 은혜에 의한 삶을 살아갈 때 진정으로 겸손한 삶을 살 수 있고, 그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도 버림 받지 아니하고 주님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 중 은혜에 의한 삶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에 의한 삶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우리 신앙은 우리의 모든 면에서 오직 하나님에 의한 은혜에 의한 삶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로마서 3:24에 이렇게 말하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그러나 성경에 보면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을 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모든 면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의 서신에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에베소서 3:7-8에 보시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소명을 맡겨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 어진 것이다고 말합니다.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하나님의 일군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 게 전하게 하시고”이 말씀을 보아도 우리가 신앙의 성숙하고 하는 한 가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 혜에 의한 것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갈라디아서는 사 도 바울 선생님이 쓰신 서신서 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서신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사도 바울은 구원 받고 10년 동안 연단 받고 또 안디옥교회에서 1년 동안 섬기는 가운데 그 이후로 보내 져서 세계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다가 갈라디아서는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쓰여졌 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도 예수를 믿는 기간이 길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오래 됐지만 갈라 디아서 2장에 보면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 베드로, 야고보 등의 사도에 대해 지징하면서 그 훌륭한 사도들 그러나 내가 그들에 대해서 별로 뒤질 것이 있느냐? 이러한 취지의 말을 하고 있 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에 쓰여진 고린도전서 15장은 갈라디아서보다 좀 뒤에 쓰여졌습니다. 거기 에 보면 모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그만큼 성숙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더 늦게 쓰여졌습니다. 옥중서신 중에 하나죠. 거기에 보면 뭐라고 말하고 있느 냐면 모든 성도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소명을 주시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라는 것을 보면 그가 성숙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되고, 성숙할수록 자기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삶으로 되어졌음 을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겉으로 겸손한 척하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죄를 더 많이 지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면 살수록, 우리가 불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림자가 커지듯이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할수록 하나님의 기준에 비쳐진 자신의 턱없이 부족함을 더 많이 보게 되고 그럴수록 더 겸손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을 더 인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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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중에 가장 늦게 쓰여진 서신입니다. 거기에 보면 자신은 괴인의 괴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들 별거 있냐? 나도 사도 못지않다는 식의 말씀을 했다 가, 그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했다가, 이제는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자 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모든 죄인의 괴수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숙한다는 한 가지가 주님 안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더 많이 보는 것 같고 사실 주님의 기준이 비쳐지니까 그러거든요.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삶을 깨달을수록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붙들림 을 살 수 있고, 하나님께 쓰임 받고도 버림 받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이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소명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서 그 소명을 감당한 것도 소명을 감당하되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감당한 것도 더 나아가서는 자기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 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구절을 쭉 읽어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사도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인 것을 알았거든요. 이방인의 사도 중에서도 터를 닦는 사도인 것을 알았어요. 교회가 없는 곳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하나님의 교회 를 세우는 교회의 터를 닦는 사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는다는 말은 자기의 소명을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명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질 뿐만 아니라 그 소명을 감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 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이것을 보면 이처럼 터를 닦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 소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졌을 뿐만 아니라 소명을 감당하되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진실 함으로 감당했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 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현재 상태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심지어 모든 사도보 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여러분, 고린도후서 6장이나 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주의 복음을 위해 얼 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가? 얼마나 많이 수고했는가? 나옵니다.) 그것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고 말함으로서 우리 신앙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을 말 씀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의 정의

그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우리는 다 이렇게 말하죠. 뭐 다 은혜로 된 것이죠. 제가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은혜죠. 우리는 다 이렇게 애기하는데 속으론 그렇게 생각 안 하죠.

이 번에 아들이 대학에 입학했어요. 그러면 이제 아 축합니다! 그러면 아이구 하나님의 은혜죠. 그 러면 속으로는 그래 니네들이 새벽기도를 알어! 내가 한 번도 안 빠지고 새벽기도 했으니까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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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갔지, 당신 아들 머리하고 내 아들의 머리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죠. 말은 안 해도. 그러니까 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러는데,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제가 좀 예를 적나라 하게 들었나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러는데, 은혜의 의한 삶은 살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 는 주된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 혜하면 우리는 막연하게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 님의 선물이라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를 그렇게 이해 하면 아까 여태까지 읽은 이 성경구절들은 다 이해가 안 되요. 그러니까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 그러면 이해가 됩니다. 왜 우리는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구원 받을 만한 자격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 이해가 돼요. 또 소명을 우리에게 그렇게 선물로 주셨다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소명을 받을 만한 자격 있는 사람이 아닌데 받을만한 자격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소명을 주셨다 이해가 되는데, 그럼 아까 뭐라고 그랬냐면 내가 그 소명을 감당하되 하나님의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감 당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랬는데 그럼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 그냥 가만히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말이 안 되죠.

특별히 아까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뭐라고 그랬냐면? 내가 다른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했 다. 고린도후서 6장과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주를 위해 당한 그 고난과 헌신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죠.

그럼 우리에겐 선물로 안 주시고, 그에겐 선물로 주셨다. 사도 바울은 가만히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서 그게 가능케 하셨다 그 얘기입니까? 한편으로 맞는데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만 이해하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입니 다.

그럼 은혜가 뭐냐?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를 우리로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 능 력인데요,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십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이 말한 하나님 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바를 우리로 하여금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 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받을 만한 자격 없는 자에 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선물로 주십니다.

무슨 말인가? 제가 좀 설명을 하죠.

제가 제 아들에게 생일날 자전거를 선물로 사줬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면 자전거를 선물로 준 것이죠. 그런데 선물로 주었으되 그 아이가 특별히 자전거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준 것이 아니고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에게 선물로 준 것이죠. 값없이 선물로 주었어요. 그런데 자전거를 선물로 준 것은 분명히 맞지만 자전거가 뭐냐 그렇게 물으면 선물이요 이렇게 말하면 틀리지요. 그 러니까 자전거를 선물로 주었지, 자전거가 곧 선물을 말하는 것은 아니죠. 자전거는 두발 달린 교 통수단이거나 레저수단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 또한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 께서 값없이 선물로 주신 게 맞습니다. 선물로 주시는데 은혜가 선물은 아닙니다. 자전거가 선물이 아니듯이.

그러면 은혜는 뭐냐?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바를 우리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 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무슨 말인지 예를 들께요. 제가 이렇게 여기 책에도 나와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떨 때 저에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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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들을 비쳐 주셨거든요. 처음에 저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구나 그렇게만 이해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지내놓고 보니까 그 하나하나가 이렇게 주님을 따라 가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그 말씀하신 바를 선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비쳐 주신 것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예를 들 때에 반복되는 예지만 계속 그 예를 듭니다. 왜냐하면 그 예를 들 면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이렇게 선명히 비쳐져요.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경험하 게 하신 것 같더라고요.

부산에 가면 이홍 목사님이라고 계신데, 그분이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 책을 가지고 설교를 하셨 데요. 그러면서 이제 설교를 들으면 집회 참석하거나 인테넷을 들으면 매번 똑 같은 예를 들잖아 요. 그러니까 그분이 생각하기를 무슨 예까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나 왜 똑 같은 예만 왜 맨날 드나 그러셨데요. 그러다가 어떨 때는 설교를 실컷 했는데 성도들이 못 알아 듣는 것같더래요. 그 래서 나중에는 예화까지 책에 있는 그대로 한 번 해봤대요. 그랬더니 성도들이 와가지고 목사님 은 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예화에 기름 부음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한 번 들었 습니다. 예화에 기름부음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부분을 비추시기 위해서 특별히 이렇게 깨 닫게 하기 위해서 비추신 사건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한 번은 요즈음 결혼 주례를 많이 섭니다마는 제가 처음 결혼주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 당와서 했는데요 그 다음에 두 번째 결혼 주례를 딱 일주일 만에 했어요. 그런데 첫 번째 결혼 주 례하는데, 제 고등학교 후배를 결혼주례 하게 되었어요. 교회 오게 되어서, 그런데 송파구에 있는 한 예식장에서 했는데요 그 예식장 분위기 다 아시잖아요. 뭐 안 믿는 사람부터 식구들 다오니까, 그런데 쭉 두 줄로 서 있는데, 앞에 이렇게 강단이 있는데, 거기는 대부분 예식장 가면 신랑 신부 가 서는 장소가 주례자가 서는 데 보다 좀 낫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똑같애요. 그런데 신랑이 되게 커요. 제 앞에 서니까 나무 큰 게 가린 것처럼 딱 가려서 시야가 안보이는 것이에요. 자 그래서 예 식장에서 예배 드려봐야 얼마나 드립니까, 그껏해야 35분 드립니다. 왜냐하면 빨리 사진 찍고 그 다음 와야 되니까? 35분 중에 설교 얼마나 합니까, 15분에서 20분까지도 거의 안 갑니다. 설교 한 15분 정도 합니다. 그러면 15분 설교 해가지고 무슨 예식장에서 안믿는 사람도 많고 분위기 자체도 그런데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날 참 함께 하시더라고요. 예식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이렇게 압 도하시는 것을 느끼거든요. 안믿는 사람들이 많은데도요. 그러니까 분위기 자체가 이렇게 조용해 요. 그 설교 해봐야 무슨 특별한 설교 하겠습니까? 잘살어! 이혼하라는 뜻이 아니고 뭐, 남편 아내 사랑하고 이런 거 대개 하잖아요. 저도 그날도 특별한 게 아니고 보편적인 설교했어요. 또 이렇게 잘 안보이니까 이렇게 해 가변서 뭐 큰 나무가 가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설교 했는데, 그런데 하 나님 참 함께 하시더라고요. 그래 가지고요 뭐 앉아 듣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막 우는 것이에 요. 물론 식구 중에 이들을 결혼시키는 게 감격스러워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막 우는 것이에요.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이에요.

그리고 일주일 만에 결혼 주례가 있었어요. 그때는 저기 분당 뒤라고 그랬잖아요. 어디서 했느냐면 여전도회관, 저기 종로5가에, 분당에서 거기까지 차를 타고 가니까 그 당시 봉고 타고 가니까 피곤 하지요. 갔더니 이제 한 30분 전에 도착했어요. 이제 미리 가야 되니까. 갔더니 앞에 팀들이 마치 고 사진 찍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서 한쪽 의자에 앉았어요. 피곤하잖아요. 우리 오면 습관적으 로 기도하는 것 있죠, 어디 앉으면, 많은 경우에 습관적으로 기도하죠. 저는 식사기도 하다가 2번 기도하는 적이 종종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기도한 것을 잊어 먹고 두 번째 또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두 번 기도하면 하나님 꼭 그것을 지적하세요. 너 아까 기도했잖냐. 그러면 뭐 보이 시냐면 제 기도가 얼마나 습관적이었는가를 보이세요. 형식적이었나 그러면 회개해요. 하나님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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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기도를 소홀히 했으면 형식적으로 했으면 기도한 것도 잊어 먹고 또 기도하나요 하나님. 그 래서 그럴 때마다 하나님 이렇게 꼭 짚으세요. 그런 적이 몇 번 있어요. 그런데 우리 어디 가면 앉 아서 습관적으로 기도하잖아요. 근데 그날도 앉아가지고요 이렇게 왔으니까 딱 기도하는데, 뭐 마 음이 모아진 것도 아니고 피곤한 채로 기도하려고 엎드렸는데요, 무슨 생각이 딱 떠오르나 하면, 제가 그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런 생각 할 필요는 없으니. 근데 떠오르나 하면, 이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오늘도 내가 왔는데 함께 하시겠지’

그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근데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또렷하게 뭐라고 저한테 그러시냐 하면요,

‘내가 여태까지 너와 함께 한 것은 한 번도 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은혜였 다.’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요.

대강 앉아 있다가요 자세를 똑바로 고치고 앉아가지고 ‘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주님 은혜를 부어 주세요.’

그렇게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전 주간에 예식장 분위기인데도 하나님이 압도하시며, 때로는 그 짧은 설교 가운데 사람 들과 감동을 받으며 눈물을 흘린 게 저 때문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제가 특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제가 기도 많이 하기 때문도 아니었고,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나하고 상관없는 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 계셨기 때문에 그랬다는 거예요.

제가 다른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일을 생각하면요 내 자신이 내려져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순간도 설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고요, ‘하나님, 오늘도 저는 하 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고 기도가 나오게 되더라고요.

근데 언제나 항상 그것을 인식하느냐가 문제죠.

왜냐하면 우리는 망각의 은사가 너무나 풍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받을만한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요, 그 선물 자체가 은혜의 정의가 아니고, 선물로 주시되 은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우리가 행할 수 있 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에요.

그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그저 주어졌기 때문에, 저절로 되어졌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그와 함께 하고 계셔서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 그를 통해 역사하심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했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바울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 으로 인하여 바울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셔서 그와 함께 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함께 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게 은혜입니다.

세 번째, 은혜와 일의 관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절로 인하여 혼동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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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로마서 11:6 예를 들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 면 은혜 되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여기에 보면 은혜와 행위가 반대예요.

은혜 되어진 것이면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로 되어진 것이라면 은혜가 아니라는 거예요. 되 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은혜를 선물이라고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행위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근데 그렇게 이해하니까 아까 말씀드린 다른 구절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특별히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거기는 또 달라요.

여기에 보면 뭐라고 그랬냐 하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하여 내가 모든 사 도보다 더 수고했다”

여기 보면 행위에 따라요.

왜? 더 많이 수고했으니까 행위가 따라요.

그런데 자기가 한 게 아니고 은혜가 했대요.

그러니까 처음에 로마서 11장에는 행위와 은혜가 반대 되고, 고린도전서 15장에는 행위와 은혜가 같이 가요.

그러니까 어떨 때는 행위와 은혜가 같이 가고, 어떨 때는 행위와 은혜가 반대 되니까 많은 사람들 이 혼동을 겪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똑같이 행위라도 행위로써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그 의미를 알아야죠.

자, 그럼 이겁니다.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되지 않는다” 여기 행위는 ‘자기 의’입니다.

자기의 종교적인 행실이나, 헌신이나, 자기의! 한 마디로 말해서.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던지, 소명을 주시던지, 기타 여기 나오는 이 모든 것들을 주시되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잘 지키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원하되, 우리의 종교적인 행실과 우리의 공로를 의지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하면 이것은 더 이상 은혜 되지 못한다는 거죠.

은혜 되지 못한다는 거죠.

그게 율법주의죠. 자기 의죠.

예를 들면, 목사님은 눈이 많이 오니까 새벽기도를 빠지되 자기는 안 빠졌어요.

기도하는데 목사님 한 20~30분 기도하고 집에 들어가는 것 같아요. 자기는 한 시간씩 기도하는데.

목사님은 금식도 안 하는 것 같아요. 자기는 일년에 몇 차례 꼭 금식하는데.

장로님은 성경도 안 보는 것 같아요. 자기는 일년에 일독 이상은 성경 읽는데.

그러니까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겉으로는 “아이고, 목사님 제가 뭐 할 수 있나요” 이렇게 말하지 만, 속으로는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누가 받아야 되?’ 자기가 제일 먼저 받 아야 되지 않겠냐 이 말이죠.

만약에 하나님님께서 우리 교회에 은사를 부어주신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기가 제일 먼저 받아야 된 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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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행위에 의존하는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되 자기의 행실을 의지하여 나아가고 있거든요.

이것은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교만으로 이르게 됩니다.

영적인 우월감으로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이거죠. 은혜로 따진다면 이겁니다.

자기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떨 때는 걸어서 허벅지까지 눈이 빠지는 대도 5리를 걸어서, 시골에 서는 옛날에 그렇게 많이 했죠, 새벽예배를 가되 한 번도 새벽예배 빠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할 때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면 큰 뜨거운 기도가 나오면서, 눈물이 쏟아지면서, 그냥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 같고, 어떨 때는 그 기도 하게 하신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많이 경험했어요.

그래서 과거에는 자기가 잘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깨닫고 보니까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으 로 받을 만한 자격 없는 자에게 임재의 능력으로 와서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다 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 되었을 때 자기가 누구보다 더 많이 기도했을지 몰라도,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 요,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던 것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말하는 바입니다.

이게 성경에 말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의 은혜가 걷혔다면 이것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가능하지 않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와 행위의 관계는 이 행위가 ‘자기 의’를 의미할 때는 은혜의 반대가 되는 것이고요,

‘자기 의’를 의지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끊어지는 것이고요,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삶’을 살게 될 때 은혜로 주님이 명령하신 바를 우리가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 음을 인식하게 될 때, 이 때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와 같이 갑니다.

은혜와 행위의 관계입니다.

네 번째, 은혜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성경에 보면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대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은혜로만 가능한데, 우리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세요.

성경 몇 구절 보죠.

첫째,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여기 하나님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풍성 하신 은혜가 있어요.

에베소서2: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우리하나님의 은혜는 지극히 풍성해요. 뭐와 똑같은 가하면 이거예요. 여러분 비행기타고 미국 가 보셨죠. 안 가 보셨어요. 인천에서 미국을 가려면 태평양을 건너는데 아마 10시간이상 타야 될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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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비행기를···. 그런데 그 아래가 전부다 바다죠. 저번에 남아공 가는데 보니까요.

홍콩에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까지 가는데 그 아래도 역시 바다인데 10시간이 훨씬 넘게 걸려요.

전부 바다에요. 그 바다는 그 깊이까지 하면 그 물은 우리 상상을 초월하죠. 그런데 그 엄청난 태 평양과 대서양이 다 연결된 바다, 여러분이 컵을 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게 다 생수에요.

컵을 들어서 먹어보세요. 여러분이 아무리 먹고먹고 먹고 먹어도 그대로 있을 걸요. 하나님의 은혜 가 그와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무리 받고받고 받아도 그 은혜는 그렇게 풍성 하게 거기에 여전히 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잖아요. “은혜가 지극히 풍성한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렇게 풍성하신 은혜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다섯 번째,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돼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돼요.

히브리서4:14-16을 보십시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 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 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은 은혜가 지극히 풍성하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보좌를 뭐라고 부르는가 하면 은혜의 보좌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에게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필요합 니다. 모든 종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 지극히 풍성하신 은혜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되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그 앞에 서라 그 말 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는 것은 이제 앞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자기의 종 교적인 행위와 자기의 종교적인 헌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 라 그 말입니다.

바리새인은요. 자기의 행실을 의지하여 주 앞에 서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기도하기를 “하나님이 여, 나는 저 토색하는 자들 저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세리와도 같 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레에 이틀을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기의 종교적인 행실을 의지하여 주 앞에 서고 있어요. “하나님 나는 이렇게 했고, 나는 이렇게 했고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그랬더 니 그날 버림받았어요.

왜요? 자기의 종교적인 행실을 의지해서 주 앞에 설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되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해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여 하나님 앞에 서야 돼요.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아는 마르크 비틀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세요. 그분은 몇 년전 까 지 미국의 켄사스 시티에서 교회를 담임했는데 교인만 한 3천명 이상 되는 교회였거든요. 미국 내 에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교회 중에 하나였어요. 아주 활력이 넘치고요. 또 하나님이 참 놀라 운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언제부턴가 자기의 소명은 목회가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의 소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자기 소명임을 알게 하셨어요. 뿐만 아니라 기도하되 하나님 앞에 금식하는 삶을 살도록, 그러니까 삶 자체가 금식으 로 드려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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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켄사스 시티에 갔을 때 그 당시에 그 교회에 나가는 한국분이 한 분 있었는데요. 그 지역 은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 분집에 가서 얘기를 나누는 중에 그 목사님이 하루는 담임목사님 이 심방을 왔더래요. 그런데 양말이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왔더래요. 미국 사람들은 구멍 난 거 별 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렇게 검소하면서 3천명이 넘는 교회의 담임목회 자인데 그러면서 많은 부분을 구제를 위해 사용하고, 금식하는 삶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금식을 정 기적으로 하면서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봐도 그렇게 못하겠더래 요. 특별히 교회를 사임한다는 것 자체도 쉽지 않고 그래서 그분이 3년 동안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했데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심을 분명히 알았는데 “하나님 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저에게 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하게 하신 다니까요.

3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명령하신 바대로 살도록 저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3년 후에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은혜를 주셨어요. 벌써 몇 년 됐습니다만은 교회를 사임하시고요.

24시간 중보 기도하는 기도의 집을 세우고요. 구제하는 삶을 살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분은 한 달에 3일은 금식을 합니다. 매달···. 그리고 마지막 12월은 1주일 그러며 1년에 40일씩, 그것 을 자기의 의로써가 아니라 금식하면서 뭐하느냐? 미국에 세계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 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사역이 확장되어서 기도의 집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 역들이 있지만 가장 중심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지요.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 가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지극히 풍성하셔서 태평양보다도 더 크고 그 래서 여러분이 태평양이 생수라고 생각하되 그 앞에 컵을 들고 선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 의 은혜는 그보다 더 큽니다. 은혜가 풍성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오되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나아와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본질, 우리가 전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삶, 내 자신, 내 주권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 는 실제적인 권한이 하나님께 양도되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것이 구제건, 헌금이건 기꺼 이 쓰기를 원하는 준비된 자세, 그럴 때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꺼이 빛도 없이 이 름도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면 감당하고자 하는 것, 내 가장 가까운 식구마저도 하나님 앞에 내려진 그 삶, 실제론 그렇게 될 때에 우리가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우리가 세상의 것을 얻으 려 하면 그것이 우상숭배로서 하나님을 잃게 되고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거라 그랬는데 여러분 그 삶이요? 하나님 은혜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기준이 비춰 질 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자기 스스로 해보고자 하는 자기 노력을 의지하는 것이 있을 수가 있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라고요.

지극히 은혜가 풍성하신 그 하나님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되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를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서 주 앞에 나아가 믿 음으로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에베소서 1장 6절을 한 번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누구 안에 은혜가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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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예수님 안에.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 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뭐가 충만하다구요? 은혜와 진리) 은혜 위 에 은혜러라” 보십시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극히 은혜 가 풍성하신 하나님인데 그 은혜가 어디에 넘치냐 하면 예수님 안에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님 안에 거하게 될 때 거기에 은혜가 넘칩니다. 또한 우리가 은혜를 받되 예수님의 공로로 받습니 다. 다른 어떤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과 은혜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 리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서 나의 의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 하여 서서 우리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 주님 안에 거할수록 하나님 은혜가 넘치고 또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또한 그런 삶을 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성경 한 구절 보겠습니 다. 사도행전 11장입니다. 19절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 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 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 권 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아멘. 여기 아주 중요한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살펴보기도 한 것 같습니다마는, 초대 교회에 스데반의 핍박이 일어났죠. 그러면서 에루살렘 교회가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무 엇과 같냐 하면, 모닥불을 펴 놓았다가 몽둥이로 팍 때리면 불이 팍 번져나가잖아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는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자기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참 좋고 하나님의 은혜로 함께하시는데, 나가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거기에 핍박이 왔습니다. 핍박이 와서 어떻게 됐냐 하면 모닥불이 모여 있는데 큰 몽둥이로 내리친 것처첨 내리치니까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 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흩어져서 어떻게 됐냐 하면 사마리아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고 이방 여러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되 주로 누구에 의해 복음을 전하냐 하 면 에루살렘에서 보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전하되 누구에게 주 로 전하냐 하면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구브 로와 구레네 사람 몇 사람, 이들은 이방인들입니다. 또 평신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사람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처음부터 있었던 그 무리도 아닙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헬라인 이방 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방인이 이방인들에게 평신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사람들도 아닌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서 그렇게 해서 생긴 교회가 안디옥교회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 당시는 아 직 이방인과 유대인의 그 갭이 컸기 때문에 특별히 예수를 믿어도 유대인들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 속에 영적인 우월감이 아주 대단했기 때문에 이방인의 교회에는 매우 그 시대에 어떻게 보면 변두리의 교회입니다. 그것도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예루살렘에서 보내진 사 람들이 아닌 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교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세계선 교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 이름 중에 안디옥 교회라는 이름도 많습니다. 세계선교를 이 루셨을 뿐 아니라 여기 보시면, 거기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함을 얻었어요. 놀랍게 교회 가 성장하고 성도들의 삶이 변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작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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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라 불려서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그런 하 나님의 교회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 얘기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될 때 사람들 생각 합니다. 아! 저들이 기도 많이 해서. 아! 저들이 금식 많이 하니까. 아! 바울이 그 시대에 하나님 의 위대한 종으로서 바울이 거기서 목회했으니까. 바나바와 바울이 가르쳤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사람 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으로 이해합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도 아닙니다. 수많은 다 른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시면,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 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사람 때문에 되어진 것 같지만 성경은 뭐라고 말 씀하는가 하면 사람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보실래 요? 21절 보시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운행하고 계십니다. 하나 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런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23절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가 그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 송하는데, 바나바가 가서 보니 뭐라구요?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에 함께 하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 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에게, 특 별히 그 교회만 하더라도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내세울만한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그러한 곳에 하나 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은혜로 지금 와 계신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에 계셨기에 주 님의 일이 이루어진 겁니다. 왜냐하면 주의 일은 주의 은혜가 이루는 것이니까요. 주의 은혜가 이 루는 거니까요. 그러면서 바나바가 그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주의 은혜가 함께하신 것 을 보면서 저들에게 권면하기를 ‘주께 굳게 붙어있으라’ 이 말은 신앙의 본질인 주님을 알고, 사 랑하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굳게 머물러 있으라는 말입니다.

왜 굳게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시느냐?

그렇게 주께 붙어 있어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그 은혜가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자비 로 인하여, 하나님이 은혜를 쏟아 부어주시지만 이로 인해서, 그들이 은혜로 인하여, 자기들의 마 음이 높아지고, 은혜로 인하여 교만해져서, 전적으로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 있기 보다 그 은혜로 인하여 자신들의 마음이 높아지면 머지 않아 그 은혜는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것이 은혜로 되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택한 것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열방 나라 중 에서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 삼으시며, 특별한 소유 삼으시고,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 삼으시고, 거룩한 백성 삼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으로, 거기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심 으로 하나님이 권능의 팔을 펴사 그들을 건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 성경에 보면 자기들 가운데 함께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 자기들로 인함인 줄 알고, 오히려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버림 받아서 그 백성이 완전히 멸해진 것은 아니라도 그 남은 자만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요, 그 외는 다 버림 받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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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저나 여러분 때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은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일반적인 성도들과 비해 불 때 못한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많은 성도들 만큼 우리가 기도합니까? 금식합니까?

안디옥 교회는 그 당시 사회에서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교회, 그것도 이방인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평신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지도 않고, 복음을 듣는 자들이 구 원 받고, 전하는 열악함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함께하셨 습니다.

성경에 보면 “너희의 택하심을 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잘나고 변변한 자 어디 있느냐? 오 히려 하나님은 못난 자를 택해서 잘 난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무식한 자를 택해서 유식한 자를 부 끄럽게 하심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라고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장 열악한 교회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은혜를 보내셨습니 다. 이 은혜가 와 계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주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은혜가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권능의 손이 역사하사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하게 하셨고, 이 은혜의 손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르침을 통해서 성도들의 삶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1년 동안 가르쳐서 변화된 줄로 아십니까?

다른 교회는 바울이 3년 동안 머무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1년 반 머무는 지역도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같은 경우는 1년 반 머물렀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역시 은혜 로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도 어느 교회 못지 않게 어린 교회였습니다. 은사는 부족함이 없이 나타났으나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저들은 아직 어린 아이로서 굳은 음식을 먹을 단계가 되지 못해서 가장 기 본적인 것을 다시 먹여야 할 그런 상황이고,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1년 동안 바울과 바나바가 가르쳐서 그들의 삶이 놀라웁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초신자였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를 닮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특별한 줄로 아십니까? 바울이 특별했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나바가 저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은혜가 함께하시는 징표를 보면서 “주께 붙어 있으 라”, “굳게 주께 붙어 있으라”, “주님 안에 거하라”, “예수님 안에 거하라” 이것이 거기에 은혜가 지속될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 은혜에 의한 개념을 알면 우리는 겸손해 집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교회로 인해서,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은사로 인해서, 혹은 교회와 선교회와 여러 분 삶속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서, 여러분 부분적으로라도 우월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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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나님이 은혜로 하시는 것을 마치 여러분으로 인하여 되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이 열려서 그것이 전혀 아닌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은혜로 와 계신 것을 보아야 합니 다.

그래야 사도 바울처럼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인 것을 깨닫게 되고,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설 수 없는 것을 인식하게 되기에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납짝 내려 놓고 “오 주님,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제가 설 수 없사오니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게 되어지고, 주님 안에 매달려 있지 않으면 그 은 혜가 거두어 질 수 밖에 없는 것을 인식하게 되기에 오늘도 주님을 구하여 달려갈 수밖에 없는 그 러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십시오.

그리고 꿈에서 깨십시오.

잠에서 깨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역사가 여러분의 어떠한 것으로 인한 것처럼 착각하는 잠에서 깨십시오.

우리의 눈이 열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선명히 보게 되기를, 그리 고 우리가 다시 주님 앞에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겸손히 그리고 절박한 마음으로 엎드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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