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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도동읍에서 천부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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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우리 옛길 걷기 ㅣ21

열 걸음 걸어가다 아홉 번 뒤돌아보다

신정일 |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새로 쓰는 택리지」 저자(hwang-sji@hanmail.net)

울릉도 도동읍에서 천부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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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는 독도와 함께 동해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바 람 부는 날이 많아 바람기가 잠잠한 날은 한 해에 70일 정도밖에 안 된다. 평균 풍속이 초속 4.5m에 이르며, 폭 풍이 이는 날이 179일이나 된다. 그래서 울릉도에는 풍 향에 따라 바람을 가리키는 낱말이 풍부하다. 동풍은 동 새라 하고, 서풍은 청풍·하늘바람·갈바람이라 부르 며, 남풍은 들바람·맛바람 또는 오방풍이라 한다. 북풍 은 북새·샛바람·북청이라 하고, 동남풍은 울진·들진 이라 한다. 이 밖에 북동풍은 잉감풍이라 하고, 남서풍 은 댕갈바람·처지날·댕갈·댕갈청풍이라 하며, 북서 풍은 북청바람 또는 북청이라고 부른다.

울릉도는 경상북도에 딸린 동해상의 섬으로, 아직 섬 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일주도로가 완성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보답사 코스가 제대로 완성된다면 제주올레나 동해트레일과 함께 한반도에서 매력적인 도보답사처로 각광을 받을 것이다.

울릉읍 도동리에서 저동리를 거쳐 우산국 시절의 옛 길을 걸어 석포로 가기 위해 저동으로 향했다.

도동항에서 저동항으로 가는 길은 바닷가에 연한 바 위를 이용하여 만든 길로, 푸른 바다가 바로 발밑에 있 기도 하고 파도가 손안에 잡힐 것 같기도 하다.

“여름 바다는 들어가 느끼는 게 제격이고 가을 바다는 거닐며 바라보는 것이 제격이며 겨울 바다는 멀리서 파도소리를 듣는 게 제격이다.”

그렇다면 봄바다는 어느 것이 좋을까? 생각하며 걷 다 보니 멀리 행남 등대가 보인다.

행남 등대를 바라다보고 야트막한 고개를 넘자 깎아 지른 절벽 아래로 직각으로 연결된 계단이 보인다. ‘임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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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나 심장이 약한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라는 경고문 이 엄포가 아닌 듯 빙빙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라는 황동규 시인의 시 ‘기 항지’를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저동항에 도착하자 수없 이 정박한 고깃배들이 보이고, 바닷가에 널린 오징어들, 두고 떠나온 고향인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이승을 등진 그 오징어들을 멍하게 바라보는 사이, 저동항의 상징인 촛대바위가 지척이다. 큰모시개 앞바다에 있는 약 15m 높이의 촛대바위는 마치 촛대처럼 서 있어서 부르는 이 름인데 이 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옛날에 한 노인이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딸과 함께 살 고 있었는데, 딸이 지극한 효녀였다. 어느 추운 날 아버

지가 고기를 잡으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딸은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바위가 되었다 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효녀암 또는 촉 대암이라고도 부른다.

저동리(苧洞里)는 봉래폭포의 못이 내 를 이루었으므로 못개, 모시개 또는 모식 이라고 불리다가 그 말이 변하여 저동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울릉도 개척민들 이 이곳에 있던 모시풀을 베어내고 개척했 다고도 한다.

이곳 저동리의 작은모시개는 중간모시 개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작은 마을로, 새 로 흥왕하라는 뜻으로 신흥동이라고 이름 을 바꿨다. 작은모시개에 있는 등성이도 도동리와 마찬가지로 깍껫등이 있어서 깍 께새를 잡았다고 하며, 주삿골 서쪽 위에 있는 골짜기는 까마귀가 많이 있었기 때문 에 까마귀골이라고 부른다.

작은모시개 뒤편에 있는 등성이를 깍껫 등 또는 깍셋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사연 이 안타깝다. 조선 후기 고종 때 울릉도 개 척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밤마다 이곳에 와서 장작불을 피워 놓았다. 불을 보고 곽새 또는 깍새 라고 부르는 새가 날아와서 돌다가 날개가 불에 타서 떨 어지면 잡아서 구워먹고 나머지는 불에 그슬려서 저장 해놓고 양식처럼 먹었다. 그렇게 너무 많이 잡아먹다 보 니 일제강점기 중반에는 이미 멸종위기로 접어들었고, 현재는 겨우 명맥만을 잇고 있을 뿐이다. 울릉도에서만 번식하는 여름철새인 곽새의 학명은 슴새로서, 날개가 너무 길어 곧장 날아오르지 못하고 땅 위를 달리거나 절 벽에서 껑충거리다가 보니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잡히 게 되었다.

수협은행과 한국전력을 지나자 내수전(內水田) 마을 ㅣ 우리 옛길 걷기 ㅣ21

울릉도 내수전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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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던 김내수(金內水)라는 사람이 이곳에 와서 화전(火 田)을 일구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고기를 잡거나 다른 일로 생계를 꾸 려가는 저동 사람들과 달리 오로지 비탈진 곳을 일구어 그곳에 나물을 재배해서 생계를 잇고 있다.

내수전 북쪽 바닷가에 있는 용굴은 굴이 매우 깊은데 용이 나와서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고 한다.

내수전에서 내수전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 르다.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시간에 전망대로 가는 길 과 천부동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데, 여기서부터 천부리 의 석포로 가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걷는 수밖에 없다.

울릉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이 길이라면 과찬

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내가 이 길을 걸어갈 때는 어떻 게 달라져 있을까?

숲이 빼곡하도록 밀집되어 있는 천연림이 길을 덮고 있기 때문에 안전한 길이라고 여겨지지만 이 길이 차마 고도처럼 벌거벗은 산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길 아래 는 새파란 동해바다고, 길은 겨우 두어 사람 지나갈 정 도로 좁으니, 그보다 더 아찔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나와 같은 나그네만 지나는 이 길을 천부리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채취한 해산물이나 나물 등을 이고 지고 수도 없이 오고 갔으리라.

이렇게 호젓하고 한적한 산길을 가는 나그네를 마가 목, 해송, 동백을 비롯한 수많은 나무들이 벗해 주는데 20~30분 걸었을까? 물소리도 우렁찬 골짜기에 걸린 다

저동 가는 길 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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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건너자 정매화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정매화곡 쉼 터에 이른다.

석포리까지는 2,100m, 저동까지는 1,300m라고 쓰 여진 이곳은 저동과 천부리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다.

정매화라는 사람이 울릉도 개척 초기에 이곳에서 살았 기 때문에 정매화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그 뒤인 1962년에 이곳으로 이주해와서 1981년까지 20여 년간 살았던 사람이 이호영 씨 일가족이다.

그들은 이곳에 집을 짓고서 뒷산 5천여 평을 개간하 여 농사를 짓고 살다가 산사태로 도저히 살 수 없게 되 자 결국 하산하고 말았다.

그들이 사는 동안 이 길을 가다가 조난당한 사람 약 300명을 구조했다고 적혀 있는 간판 하나가 남아 그들 의 지난했던 삶을 떠올릴 수 있다.

“열 걸음을 걸어가다 아홉 번쯤 뒤돌아보았다”라는 누군가의 글처럼 휘어 돌아가는 숲길을 얼마쯤 가자 쓰

러져가는 전봇대 뒤편에 북면이라고 쓰여진 입간판이 나온다.

조금 지나자 울릉읍과 북면 경계라는 안내판이 보이 고, 이곳에서 저동까지는 2천m, 석포는 1,400m라고 표 시되어 있다.

그곳에서 길은 오르막길이다.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우거진 길을 천천히 가자고 다짐하며 오른다. 20~30분 올라갔을까, 길은 다시 평지로 이어진다.

나무 숲 사이로 멀리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섬이 죽도 또는 대섬이라고 불리는 섬이다. 대섬은 와달리 동 쪽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섬으로, 4면이 절벽으로 이루어 져 있고 그 위가 평평하다. 대나무가 많이 있어 대섬으 로 불리는 이 섬에는 예전에 3세대가 살고 있었다. 그들 은 주로 수박재배를 하거나 소를 키우며 살았다. 교통 이 불편해서 절벽에 사닥다리를 놓고 오르내렸다. 육지 에서 송아지를 사가지고 배로 섬 밑에 이른 뒤에 송아지 를 등에 업고 사닥다리를 올라가서 소를 키웠다. 그 소 가 다 크게 되면 소를 잡아서 고기를 짊어지고 다시 사 닥다리를 타고 내려와 배를 타고 육지에 내다 팔아서 곡 식을 구해다 먹었다. 만일 식량이나 물이 떨어지고, 주 민이 병이 들게 되면 봉화를 들어 나리분지의 섬목과 연 락을 취했다고 한다. 지금은 1세대에 부자(父子)가 더덕 과 나물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내수전에서 북면 천부리로 가는 길은 우산국 시대에 나 있는 길 그대로일 것 같이 옛스럽다. 소나무 숲이 양 옆에 우거진 길을 지나자 산길이 끝나고 천부리 석포로 가는 길이다.

천부리는 석포동과 나리동 일부를 병합하여 천부동 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섬목 마을은 정들깨 동쪽에 있 는 목으로 섬매기 또는 도항이라고 부른다. 산이 동쪽 바다 속으로 뻗다가 중간이 끊어져 배가 드나들게 되고, 다시 일어서서 깍세섬이 되었다.

깍세섬은 천부리 섬목 동쪽에 있는 섬으로 순 바위 ㅣ 우리 옛길 걷기 ㅣ21

천부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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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빛을 따라 오색 또는 일곱 색으로 변화가 많다고 한다.

북면 천부리의 정들깨(일명 석 포) 마을은 3면이 절벽으로 된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인데, 전라도 개척민 중 한 사람이 이 곳 색시에게 정을 들여놓고 떠났 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들깨 남서쪽에 있는 백운동 마을은 늘 흰 구름이 끼어 있어서 부르는 이 름이다.

정들깨 북동쪽 바닷가에 서 있

는 세 개의 바위를 삼선암(三仙岩)이라고 부른다. 높이 16m쯤 되는 세 개의 바위가 촛대처럼 서 있는데, 예전 에 세 명의 신선이 그 위에서 놀았다고 하며, 삼선암 중 가장 끝에 있는 바위는 그 꼭대기가 가위처럼 벌어져 있 어서 가새 바우라고 부른다.

선창 옆에 있는 마을은 앞에 삼선암이 있어 마치 세 문이 있는 듯 보인다고 해서 삼문 다지라고 부르며, 천 부리에서 가장 큰 선창 마을은 조선시대 왜선들이 이곳 에 머물며 배를 만들고 고기를 빼앗아가자 숙종 19년인 1693년에 안용복이 왜적을 무찌르고 수호했던 섬이다.

안용복은 그해에 참소를 입어 나라에 불려가 고문을 받 기도 했으나 그 충의가 드러나서 마침내 울릉도 수포장 (搜捕將)이 되었고 왜적들을 범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1711년 5월에 삼척영장 박석창(朴錫昌)이 울릉도 수 도관이 되어 이곳에 머물면서 섬을 순찰하고 그 일을 기 념하기 위해서 작은 바위에 그때의 일과 데리고 온 사람 들의 이름을 낱낱이 새겼는데, 그 바위가 현재 울릉군청 국기 게양대 옆에 옮겨져 있다.

천부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을 천년포라고 부르는데, 그 앞에 천년방우라는 바위가 있다. 천년포 앞에 있는 홍도동은 홍살메기라고도 부르는데, 나리재에 있는 큰 나무 두 그루의 윗가지가 서로 얽히어 홍예문처럼 되어 서 행인들이 그 사이로 왕래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삼선암을 바라보고 있는 산이 두루봉(120m)인데 그 모양이 둥글게 생겼으며, 대방우 앞 바다 가운데 외따 로 서 있는 바위는 딴방우라고 부르는데 대나무가 많 이 있었다.

북면 나리와 현포리 사이에서 가장 돋보이는 산이 바 로 송곳산이다. 높이가 606m인 이 산은 하늘이라도 뚫 을 듯이 뾰족해서 어디서든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도동항에서 저동을 거쳐 천부리로 오던 길이 아스라 하게 머리를 스치는 사이 나리분지로 가는 버스가 내 앞 에 마법의 상자처럼 사뿐히 다가섰다.

천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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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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