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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율법주의와 자기 의(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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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율법주의와 자기 의(義)

갈라디아서 5장 2절~4절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 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 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 로다”

지난주는 율법주의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율법주의와 자기 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 니다. 율법주의의 심장은 자기 의입니다. 율법주의의 핵이 자기 의입니다. 율법주의와 자기 의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특징인 자기 의

율법주의의 신앙의 가장 핵심은 자기 의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 헌신과 노력이 강조됩니다. 신앙에 대한 이러한 그릇된 이해를 가진 자들은 자기 행위 에 의존합니다. 그러면 자기 의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자기 의는 자기의 종교적인 행동, 자기의 종교적인 헌신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러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율법주의를 살펴볼 때 항상 어떠한 관점에서 이해를 하여야 하는 가 하면 참다운 신앙과 거짓 신앙체계의 관점에서 이해를 하여야 합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가 참다운 신앙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거짓 신앙체계에 빠지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에게서 거쳐지게 됩니다. 모양은 있으되 그 속에 실재 가 전혀 없는 껍데기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되는 데 율법주의는 거짓 신앙체계로서 이렇게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은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의 무서운 점입니다.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지면 예배가 아주 아름다운 순서를 따라서 모양 있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규모 있게, 때로는 화려한 의식을 통해, 혹은 유명한 사람들의 주악에 맞추어 예배는 드려질 수 있 어도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는 거치고, 하나님의 생명은 고갈 됩니다. 성도들이 하 나님을 경험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교회 가운데 일어나지 않습니다.

개인이 율법주의에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나름대로 전통을 따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지는 몰라도 율법주의에 빠지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며, 하나님 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서 고갈되어집니다. 그러니까 모양뿐입니다. 알맹이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의 무서운 점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예 율법주의의 가장 핵은 무엇이냐? 자기 의입니다.

율법주의에 있어서 가장 좋은 성경의 예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의 예입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자기 의)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지금 예수님이 자기 의 즉, 율법주의에 토대해서 신앙을 이해하는 거짓 신앙체계에 빠진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대표적이 예였죠. 율법주의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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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는 겁니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 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 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 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 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바리새인)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세리)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 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내용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내용입니다.

바리새인은 그 당시의 율법을 613가지로 요약을 했어요. 그래서 그 모든 규정들을 다 외울 뿐만 아 니라 그들은 이를테면 서기관이 되려면 모세 5경을 외워야 되고, 성경을 잘 알고, 613가지를 규정 을 외울 뿐만 아니라 그대로 철저하게 지킨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 는지, 또 얼마나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리는지, 얼마나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는지, 금식하는 지 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리는 그 당시에 가장 큰 죄인으로 인식되는 사람입니다. 그 세리가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님이 세리의 기도는 받으시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어요.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예를 들면 구원을 믿음 으로 받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의롭게 된다는 말 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이해를 합니다. 당연히 구원을 얻는 것이 의롭게 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요.

그런데 의롭게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해요. 의롭게 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 을 얻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이 말은 그날 세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그 말이죠.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다 그 말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어떻게 됐다고요. 내용을 자세히 보시면 알지만 버림 받았다는 것이에요. 왜 여기 예가 바로 그러한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거든요. 버림 받았다는 것이에 요.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당연하죠. 그것은 바리새인들 버림받죠.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게 만약에 예수님이 오늘날 이 비유를 드신다면 그렇게 말씀하 지 않을 것이에요. 여기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예를 든 것을 기억하셔야 돼요.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이런 내용이에요. 여기 목사와 창녀가 기도하러 갔다. 오늘날. 그런데 이 목사가 보통 목사가 아니에요. 이 목사는 예수 믿은 뒤로 여태까지 다른 여자 손은 잡아보지도 안 했어.

다방에도 한 번도 안 가봤어. 이분은 새벽기도 한 번 안 빠졌어요. 눈이 오나 바가 오나, 이렇게 눈이 30Cm 쌓여도, 새벽 3시에일어나서걸어서교회까지시간이걸려도갔으면갔지, 차로 못 가도 새벽 기도 안 빠지는 분이에요. 그분은 텔레비전도 안 보는 분이에요. 그분은 한 달에 성경을 일독씩 하 는 분이에요. 일 년에 40일 금식기도를 여태까지 예수 믿은 뒤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년 해왔 고, 이런 분하고 창녀가 기도하러 올라갔어요. 그런데 창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이러한 목사 는 버림받았습니다. 이런 내용이에요.

예수님이 오늘날 말씀하시면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에요. 그럼 이 말은 목회자에 대해서 편견을 가 지고 계시냐? 그 내용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그날 세리는 오늘날로 말하면 가장 큰 죄인이라고 인정되는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섰고, 아까 뭐라고요, 의롭 게 된다는 말은 죄 없다 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 것이에요. 기도응답을 위해서건, 여러 가지 다른 은혜를 위해서건.

그런데 왜 그러한 죄인인 세리는 은혜를 받고, 그토록 철저하게 신앙생활 한 바리새인은 버림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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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냐, 오늘날 말하면 그러한 목사는 버림받았는가, 하나님은 그러면 철저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안 기뻐하시는가, 그러면 대강 세상에서 이렇게 많이 죄를 지어야 은혜가 크단 말인가? 아니죠. 물 론 죄가 큰 곳에 은혜가 크다고 그랬습다만 그것은 이런 뜻은 아니죠.

자 그러면 왜 그랬는가?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들의 기도한 내용을 보면 알아요. 이들의 기도한 내용을 보면 왜 하나님이 그날 세리는 받으시고, 바리새인을 버리셨는지를 알 수 있어요. 기도의 내용을 봐야 알아요. 이것을 보면 아까 말한 대로 자기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요. 자기 의 가.

자 그러면 보세요.

기도의 내용?

먼저 세리의 기도를 보시죠.

세리는 가까이 오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어디 있어요. 저 뒤에, 고개를 들지 못해요. 왜 자기가 행 한 게 죄뿐이거든요. 하나님 앞에 내 놓을만한 게 있어요? 없어요? 자기한 게 죄 뿐이니까, 내 놓 을만한 게 이만큼도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누구의 은혜만을 의지해서 나와야 돼요. 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고개도 들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긍휼만을 의지해서 나오는 것이죠. 왜 자기가 내 세울만한 게 이 만큼도 없거든요. 내 세울만한 게 없거든요. 오 하나 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런데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세요.

여러분 이 바리새인은요 예수님의 이 비유 드는 자체가 그들에게 모독이었어요. 왜 모독인 줄 아세 요. 아니 자기 같은 사람을 세리와 대조 시킨다는 자체가 그들은 모독이거든요. 모독이죠. 그런데 보세요. 그렇게 훌륭한 사람입니다.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죠. 잘 보세요.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 자세도 주님이 아니에요. 저는 저 간음하는 자들, 저 토색하는 자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 니다. 이것을 보면 최소한 외부적으로 보면 이 바리새인은 한 번도 간음하지 않았어요. 한 번도 남 의 것 훔치지 않았어요.

여러분 그런데 그게 있더라고요. 이 율법주의에 빠지면 외부적으로 안 한 죄는 보여요. 그런데 중 심에서 지은 죄는 안 보여요. 어떨 때는 중심에서 지은 죄가 외부적으로 지은 죄 보다 훨씬 큰 대.

간음 토색하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나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 다. 그런데 그 다음에 뭐에요. 보세요. 하나님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나는 안식일을 지키고 나는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하고, 나는 여기에 무슨 단어가 많이 들어가요. 나(我).

자 보세요. 바리새인은 이처럼 훌륭했을지 모르지만, 뭐를 의지해서 지금 하나님 앞에 서느냐면,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해서 서는 것이에요. 하나님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습 니다.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럴 자격 이 있습니다. 뭐에요.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해서 주 앞에 서려고 하는 것이에요. 이게 자기 의 의입니다.

그런데 제 얘기 잘 들으세요.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해서 주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이 세 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 않았 습니다.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법칙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돼 요. 이런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자기의 의를 의지해서 주 앞에 서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항 상 지켜야 돼요. 단 하나의 율법이라도, 일생에 단 한 번 만이라고 어기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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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히 끊어지게 돼 있어요. 죄인이니까. 뭐하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에요. 자기의 종교적인 행 위를 의지하여 주 앞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을 그토록 훌 륭함에도 불구하고 버림 받은 것이에요. 오늘날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계신다 할지라도 만약에 그분이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니에요. 그분이 마음속에 자기가 남보다 새벽기도 잘하고, 열심히 금 식하고, 성경 많이 읽고, 자기는 텔레비전도 안 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는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버림 받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자기 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에요.

이와는 대조 자체가 무색할 만큼 그렇게 지은 것이 죄 뿐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내세 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식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만을 의지하여 주 앞에 나온 사람은 용서를 받아요. 그가 세리든지 창녀든지. 아니면 우리든지. 이해하십니까?

이처럼 율법주의는 그 핵심에 자기의 의가 있어요.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하여 주 앞에 서려 고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버림 받아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설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여러분 진짜 겸손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세상적인 지위가 이렇게 높은데도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인사를 꾸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자인데도 가난한 사람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요 아닙니다.

박사학위가 3개인데도 아이 저는 몰라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미스 코리아인데도 아이 저는 못생겼 어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은 자기 속에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만한 아무런 의로움도 없음을 인식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한 그러한 사람이 진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이해가 쉬워요. 그 다음에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자기 의를 의지해도 그것은 전체적으로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 에요. 이게 무섭습니다.

제가 두 예를 드릴 텐데요 한 보시요.

첫 번째,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 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아멘.

여러분, 제가 설교할 때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라고 이렇게 말할 때, 오늘 날 한국교회에서 아무도 그것을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걸 반박하면 이단인데요. 우리 교리 중 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그것인데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바로 앞서서 내세웠던 것이 바로 그것인데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오직 믿음으로’인데 그걸 누가 반박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돈 가지고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 가지고 못가요, 지식 가지고 못 간다. 그 나란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다’라고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때 아무도 반박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은 자기 의’이다 이렇게 말할 때, 많은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 나 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주의가 우리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얻게 되었다는 거예요. 구원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롭게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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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씀드린 대로 구원과 연결시켜서만 생각합니다.

구원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근데 이 구절을 보시면 전혀 안 그런 걸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로는 율법주의에 엄청 나게 빠져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그 가운데 있는데, 이 구절을 보면 그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여러분, 그 로이드 존스 목사님 ‘부흥’ 책에 보면 그게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 전 에 하나님의 중요한 진리들이 재발견 되어 지는데, 그 중요한 진리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 중의 하 나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재발견 된다는 거죠.

그럼 그게 재발견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이에요? 그게 가려졌다는 거 아니에요. 숨겨졌다는 거 아니 에요. 감춰졌다는 게 아니에요.

그 진리는 이미 그 전부터 마틴 루터 이후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으로 옳게 됨’은 다 아는 데 가려졌다는 거 아니에요.

그럼 뭐가 가려졌다는 거예요? 진정한 의미가 가려졌다는 거예요.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날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이것을 반박하는 사람은 한 사람 도 없습니다. 근데 너무나 안타깝게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의미를 이 해하는 사람은 너무너무 드믑니다.

우리나라 천이백만 기독교인이 있다고 그러는데, 제가 보기는요 10%로도 안 됩니다. 그 진정한 의 미를 이해하고 인식하고 그 위에 서 있는 사람.

무슨 말이냐고요? 이 구절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 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 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맞습니까? 틀립니 까? 맞는 얘기죠. 지극히 맞는 얘기죠.

우리는 이 구절 읽을 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근데 문제를 보십시오, 이 구절을.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구절 읽으면요 많은 분들이 오늘날 이미 이건 떼었다는 거예 요. 초신자 성경공부할 때 말씀드린 대로 구원 받을 때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걸 들어서,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우린 이미 이걸 다 떼었다는 거예요.

섭렵했다는 거예요.

근데 잘 보십시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한 얘긴데요,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한 얘기입니다. 그 위에 보시면 알아요, 11절.

안디옥 교회에서 한 말인데, 안디옥 교회에서 초신자 성경공부 불러 모아 놓고 한 얘기가 아닙니 다. 이 구절이요.

이 말이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 한 말이죠? 베드로에게 한 말입니다. 이걸 보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 순간에 율법주의에 빠졌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베드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것도 베드로 하고 이렇게,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써 서로 교리가 맞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하고 둘이 교 리를 맞춰보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여기 내용을 보시면, 11절 이하를 읽어 보시면 어떻게 했는가! 지금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사람 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같은 사도인데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게 면박 주는 겁니다. 베드로를 면책하는 거예요. 꾸짖는 거예요, 한 마디로 쉽게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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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당신이 어떻게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고, 율법으로 의롭게 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당신이 율법으로 의롭게 될 것처럼 행동하느냐!’ 그 말입니다. 꾸짖는 거예요. 따 지는 거예요. 사람들 앞에서. 같은 사도끼리.

아,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길 베드로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을 보시면 알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제일 먼저 주장하는 사람이 누구예 요? 베드로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회의가 열렸거든요. 이 회의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회의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의 성격이 정해졌습니다, 올바로.

근데 여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인들, 다시 말하면 유 대인었다 기독교인 된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아직도 유대인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강조했나 하면,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거 예요. 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했고, 그 다음에 바울을 중심으로 한 바나바나 이렇게 이방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할례가 무슨 필요가 있냐! 받을 필요 없다’ 이래서 할례만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전통을 따 라야 된다, 그 전통이 중요하지 않다’ 이걸 따지는 겁니다. 지금.

그래서 마찰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인 회의가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여 기 회의인데, 여기에서 올바로 ‘오직 믿음으로’ 이렇게 결정이 났죠. 이 올바른 결정을 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베드로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시면 알지만,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교회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을 쭉 얘기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베드로가 뭐라고 그랬는가? 베드로가 일어서서 말하는 겁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의 집이었죠. 그 이방인의 집에 제일 먼저 복음 전한 사람이 누구죠? 베드로입니다. 고넬료의 집 에. 이방인에 집에 제일 먼저 복음 전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그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이방인의 집 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근데 내가 가서 그들에게 할례를 전한 것도 아니고, 유대인의 전통을 전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가서 예수 이름을 전했는데, 저들의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믿는 저들에 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을 증명하셨다. 오순절 날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신 것처럼 저들에게 부으셨다.”

다시 말하면 이겁니다. 저들이 할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전통을 따른 것도 아닌데, 마음 에 예수를 믿으매 하나님이 그 징표로 성령을 부으셨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가 우리 조상들이 지키지 못한 짐을 왜 저들에게 지우려 하느 냐?” 그러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걸 강조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그날 올바로 결정이 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러면 누구보다 의롭다 되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누구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근데 바울이 지금 베드로에게 따지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요? ‘왜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처럼 행동하느냐!’, ‘왜 복음에 반대되게 행동하느냐!’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책망을 주는 겁니다. 같은 사도끼리. 얼마나 베드로가 창피했겠어요. 성도 들이 보는 앞에서. 사도끼리.

왜 복음에 반대되게 행동하느냐! 왜 행함으로 의롭게 될 것처럼 행동하느냐! 그 얘기입니다.

그럼 뭘 두고 하는 얘기에요? 여가 본문에 나오잖아요. 뭐라고요?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방인 중심으로···. 그러니까 식사를 할 때, 이방인도 같이 식사 를 했어요. 그런데 잘 보세요.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왔어요. 그런데 아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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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요. 예루살렘교회는 아직 유대인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고요. 유대인의 전통 중에 하나가 뭐예요. 이방인들과 식사를 안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식사를 안 하는 줄 아세요?

유대인들은 음식을 만들데 구약에 나와 있는 법칙을 따라서 만들어요. 피를 뺀다든가, 뭐 못 먹는 음식, 요즘도 여러분 미국에 유대인들이 600만 명이나 있는데요. 그들 중에 보수의 사람들은 절대 로 돼지기름에 튀긴 음식은 안 먹습니다. 어떤 아이가 소풍을 갔는데 감자깡 같은 것을 먹는데 옆 에 같은 유대인이 돼지기름에 튀겼다고 하니까 당장 버리 더라잖아요. 그들은 안 먹습니다. 왜냐하 면 이 말씀 따라 살기위해서···. 오늘날도.

자 그런데 보세요. 성경에 나와 있는 법도를 따라, 구약이지요. 준비하는데 유대인들 은···. 이방인들은 신경을 씁니까? 안 씁니까? 안 쓰죠. 자 그러면 왜? 그들은 이방인 들과 식사를 안 했냐 하면 말이죠.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다보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은 음 식을 먹게 됨으로써 뭐하게 된다? 부정하게 된다는 거예요. 부정하게 된다는 말은 쉽게 말하면 부 정 탄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무당들이 부정 탄다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비슷한 내 용이에요. 부정하게 됨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없다? 못 나간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앞 에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기 위해서, 깨끗하기 위해서, 음식을 이방인들과 같이 안 먹었죠. 자 그런 배경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이 오니까 그전까지는 베드로가 식 사를 같이 잘 하고 있다가 오니까 저들이 볼 때 베드로가 같이 식사를 하고 있으면 뭐라고 하겠어 요? “어~. 베드로사도가 이방인들과 식사 하네” 그리고 가서 이를 것 아니에요? 이러한 여러 가 지 때문에 베드로가 같이 식사하다가 어떻게 해요? 가만히 일어나가지고 따로 앉았어요. 그랬더니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왔던 사람들도 일어나서 따로 앉았고, 그랬더니 바나바도 따로 앉았어 요. 이것을 두고 바울이 한 얘기입니다. 여기보시면 바나바도 외식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율법주의 에 빠졌다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꾸짖는 겁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거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게 될 것처럼 행동하느냐? 왜? 바나 바도 외식에 참여하느냐?” 그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자, 율법주의는 어디에 있다고요? 생 각 속에 있다고요. 여러분! 음식을 먹고 안 먹는 게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율법주의는 생각에 있습 니다.

그럼 잘 들으십시오. 이겁니다. 자, 보세요. 얼마든지 유대인들끼리 식사할 수 있어요. 얼마든지 이방인들끼리 식사할 수 있고, 같이 식사할 수 도 있고, 문제가 되지 않는데, 베드로가 식사하다가 자기에서 일어나서 얼마든지 옮겨갈 수 있어요. 그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문제는 뭐냐 하면 식사 를 하다가 옆으로 갔는데 그 머릿속에 무슨 인식으로 받아들였기에 이방인들과 식사하면 부정하게 되어진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어지려면 유대인들끼리 식사해야 한다. 이 인식을 받아 들인 거죠. 제 얘기 잘 들으세요. 너무너무 중요한 얘기에요. 많은 분들이 이걸 아는 것 같은데요, 잘 몰라요. 자 여기 이 말은 이 뜻이에요. 사도 바울이 이걸 말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 여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은 무엇으로만 가능하다고요? 믿음으로만, 이건 구원받을 때 만 아니라, 순간순간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만 주 앞에 설 수 있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이 행동 뒤에 나타난 가치관이 뭐예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특정한 음식을 먹고 안 먹고 가?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것처럼, 어떤 특 정한 사람들과 먹고 안 먹는 것이 자기를 거룩하게 하는 이러한 가치관을 심고 있다고요. 뭐를요?

자기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가치관이 있다고요. 율법주의. 그러니까 이렇게 대적하는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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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이해하십니까?

자, 그러면 보시죠. 제가 오늘도 이렇게 양복을 안 입고 왔습니다만. 물론, 넥타이는 맸는데 오늘, 제가 가끔 양복을 입고 오기도 하고 안 입고 오기도 합니다만. 대부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아는데 요. 어떤 분은 제가 수없이 설교했는데도요. 가끔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걸 보면,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제가 말한 것처럼 얘기를 해놨더라고요. 그러니까 제 얘기를 잘 들으세요. 우리 둘째 아이도 그러더라고요. 왜? 교회에선 찬송가 안 해요? 찬송 안 하는 게 아니죠. 수없이 설명했는데 대강 뭔지는 알겠는데 친구가 물어보니까 설명을 못하겠더래요. 왜? 또 잘못하면, 잘못 말할까봐?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그런 것 같아요.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정확하게 뭔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해 요. 그래서 설명을 잘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막연하게 이해하는 것 같아요. 잘 들으셔야 합니 다. 예배시간에 양복을 입는 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운을 입어도 문제되지 않고, 가운 안 입 어도 문제되지 않고, 양복을 안 입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 되는가? 이게 문제됩 니다. 제가 어떤 분을 만났다고 그랬잖아요. 과거에···. 만났는데,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다른 분들은 어느 분을 이단이니 그러는데 자기가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안데요. 그래서 다 받아 들 인데요. 그런데 자기가 가서 보니까 다른 건 좋은데 한 가지만은 도저히 자기는 받아들일 수 없더 래요.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면 어떻게 주일날 대예배시간에 목사가 청바지를 입어 그런 경건하지 못한 자세를 갖는 게 너무너무 자기는 그것만은 못 받아들이겠더래요. 제 얘기 잘 들으세요. 그게 율법주의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얘기에요. 그러면 목사가 청바지 입은 게 잘한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저도 청바지를 잘 안 입 습니다 만은, 혹은 양복 입으면 잘못됐다 그 얘기 아니에요. 제 가 말하는 가치관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종 류의 옷을 입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공 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믿을 때뿐만이 아니라 순간순간, 순간 순간 주님 앞에 서서, 아까 세리의 예를 든 것처럼 우리 속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어떠한 선 함도 없음을 인식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겸손하게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서, 주님 앞에 서 서, 우리의 전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삶, 그 주님과 친밀함의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 리 가운데 통치하실 때에만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해되십니까? 우리에게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평상 복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서 가운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서 넥타이를 맬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서 넥타이 안 맬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서 청바지를 입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경건함을 외부적인 모양에 두는 거죠. 그러면 외부적인 모 양에 두는 게 뭐냐 하면 양복을 깨끗하게 입고, 가운을 입을 때면 경건하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속은 전혀 경건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이해가 달라져 있거든요. 이게 바로 율법주의라는 거죠. 이 게 바로 베드로의 사건이라는 거죠. 제가 그 전에 계속 양복을 입고 왔더니 예배가 형식화되는 것 같아서 양복 안 입겠다고 했잖아요. 여러분 조심하실 것이 있습니다. 예배는 절대로 예배가 형식적 이 되어서는 안 되고요. 예배는 습관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요. 예배는 의식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 다. 절대로 그러면 타락한 겁니다. 이게 하나의 의식으로 전락해 버리면, 그러니까 소위 말하면 성 수주의, 주일날 예배드리는 의식, 그래서 종교적 의식을 다한 것으로 이해하면 이게 율법주의입니 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나와야 합니다. 만남은 누구 의 공로로만 설 수 있어요?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의지하여 서야 됩니다. 그러나 아 까 말한 대로, 이렇게 외부적인 모양에 두면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하는 것 이 아니라 외부적인 모양에 두게 됩니다. 율법주의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때로는 좋은 옷을 입 고 와서 단정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가지만,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도 없고, 우리 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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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다뤄집니까? 안 다뤄지죠.

시기, 질투, 다툼, 미움, 후욕, 세상사랑, 간음, 정욕 다루어집니까? 안 다루어지죠. 그냥 포장할 뿐이죠. 청바지 입는게 옳다는 얘기가 아니고 가운 입는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전혀 아니라, 문제는 그 가치관이 율법주의라는거죠. 여러분 이게 바로 베드로의 사건입니다. 이걸 보면 우리 가운데 얼 마나 심각하게 우리 교회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해도 실제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선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러한 행위로 서고자 하는 자세가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교회 는 예배시간 가운데 사도신경 외우지 않습니다. 침례교회는 대부분 외우지 않습니다. 제 얘기 잘 들으세요. 외우는게 잘못되었다는 것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사도신경만이 아니구요 성경에 합 한 신앙고백이면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또박또박 신앙고백 하는 것 대단히 좋습니다. 대단히 좋습 니다. 그리고 거기 파워가 있습니다. 그냥 말하는 것이 파워가 있는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을 또박또박-성경적이어야 되겠죠 그 신앙고백은-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 대단히 능 력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자, 사도신경의 내용을 부인하면 문제죠. 성경에 합한 내용을. 그러나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운다고 해서 혹은 안 외운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건 아니 죠. 외워도 상관없고 안 외워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문제는 뭐냐하면 이거죠. 예배시간에 사도신경 이 빠지면 그 예배가 참다운 예배가 안 되는 것처럼 그런 인식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배가 참된 예 배가 되게 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보혈 밖에 없습니다. 이해되세요?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나아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도신경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 이후에 쓰여진 것이니까. 성경에 안 나옵니다. 그 내용이 성경적이죠.

저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믿습니다. 제가 사도신경을 안 외운다고 해서 내용을 전혀 부 인하는게 아니에요. 내용을 다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게 카톨릭이라고 해서 표현을 가지고 문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런 부분들은 놔두고 그 주된 내용들은 성경적인 내용이라고 다 믿습니 다. 문제는 우리가 예배 시간에 그것을 외워도 되고 안 외워도 됩니다. 그 내용을 부인하면 문제 죠. 그러나 진짜 문제는 뭐냐하면 예배 시간에 그것을 외워야만 그 예배가 참다운 예배가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율법주의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행위를 의지해서 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너 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여 러분 제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 많이 얘기합니다만 거기서도 보셨죠. 하나님의 부흥의 때일 수 록 뭐예요? 옷을 차려입는 것, 외부적인 모양을 갖추는 것, 정해진 순서와 절차 이게 무시되고 하 나님과의 친밀한 만남, 주님의 임재, 주님과의 교제가 있다는 거죠. 사도행전처럼. 그런데 신앙이 타락할수록 그건 사라지고 뭐만 남아요? 모양만 남는다는 거예요. 절차, 순서 그리고 그 절차와 순 서를 잘 하면 예배 잘 드린 것처럼-그건 껍데기에 불과한데... 율법주의죠. 껍데기가 알맹이로 변 하는게 율법주의라니까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분들은 이럴 수 있어요. 아 그 러면... 한 가지 더 얘기하고 하죠. 제가 책에 이런 내용을 썼어요. 어느 한 분의 예인데, 그분이 요즘 ( )에 좀 잘 오세요. 바뀌어가고 있어요. 너무 너무 감사하더라구요. 「어떤 집사님 부부 는 극심한 어려움에 처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200일 작정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그 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작정기도를 한 두번 빠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며 하나님을 너무한 분이라고 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얘기에요. 어떤 분들이 어려움 을 당했어요.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바꿔가고 계세요. 우리 ( )에 나오시 는 분들이에요. 오늘 안 오셨는데 자주 오시는 분이에요. 주일 낮에도 가끔 오시구요. 그 부부인 데, 그분들이 처음에 그전에 그랬어요. 어려움을 당하니까 IMF 지난 뒤 바로 지금 자기 뿐만 아니 라 자기 친척들의 모든 집이 날라가게 생겼거든요. 왜냐하면 다 담보해서 해놓았는데. 그러니까 그 분들이 어떻게 했냐 하면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작정기도를 시작한거에요. 100일.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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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작정기도 했는데 응답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 100일을 더하시라고 하나 보다 그래서 200일 작정기도 했어요. 그래도 응답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분이 그 당시에 교회를 그만 다니려고 하는 상황에서 어떤 분이 소개해서 기도 받으러 온 거에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이 너무하신 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99를 해도 안 들어주신다는 거죠. 그게 무슨말이냐고 했더니 이분이 뭐 라고 하냐면 200일 작정 중에 너무 피곤해서 한 번인가 두 번을 빠졌다는 거예요. 그분의 인식은 뭐냐하면 자기가 두 번 마저 했더라면 하나님이 들어 줄텐데 그 한 두번 빠졌다고 하나님 안 들어 주셨으니 너무하시다는 거죠. 99로 해도 안 들어주신다는 거죠. 전혀 하나님 그런 분이 아닙니다.

뭐에요?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해서 주님 앞에 서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200번 다 채웠 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겁니다. 원수 된겁니다. 왜 원수되는가? 주 앞에 설 수 있는, 기도응답을 위해서든 주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해서 서야 되는데 지금 무엇으로 서려고 하는데요?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로 서려고 하는거에요. 이제 어떤 분들은 혼 동되기 시작합니다. 자. 제가 말할께요. 도 어떤 분들은 이런 분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무슨 문제 가 생기면 금식하잖아요. 그러면 에를 들어 열흘 작정 기도해요. 열흘 작정 금식. 열흘 작정금식 하는데, 아침에 식사 차려주다가 맛을 봐 버렸어. 무효야. 다시 해요.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 잘 들으세요. 잘 들으셔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한 쪽만 듣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한 쪽남 듣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조금 있다 설명드릴텐데, 처음에 뭐라고 말씀드렸냐 하면 반드 시 여러분이 이 부분을 신앙의 본질과 거짓신앙체계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구요. 이걸 봐야 돼 요. 무슨 말이냐? 이거에요. 왜 그게 율법주의냐 하면, 그 인식에 자기가 며칠 동안을 먹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해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텐데... 그러니까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토대로 뭘 가지고 있느냐 하면 자기의 종교적인 헌신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자기의 종교적인 헌 신.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 이래야 응답을 주실텐데 자기가 그걸 못했기 때문에 안 주신다는 거죠.

이건 뭐예요? 율법주의에요. 여러분 율법주의는 그 핵심이 뭐라구요? 자기 의. 자기 의를 다른 말 로 뭐냐하면 공로사상이에요. 자기의 공을 통해서 응답을 받으려고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여기에 또 혼동이 있어요. 그 혼동이 뭐냐하면 이거예요. 다른 분들은 그러니까 그러면 작정기도도 하지 말고 금식기도도 하지 말고 새벽기도도 안 빠지고 나오는 것 그것이 유법주의면 그러면 뭐 주일에 나오는 것도 율법주의야. 그럼 주일에 놀러가고 뭐 금식기도 안 하고 뭐 그게 자유한 삶인 줄 알아 요. 아니라니까요. 핵심이 뭐라구요? 신앙의 본질과 거짓신앙체계의 차이에서 이해해야 돼요. 신앙 의 본질이 뭡니까?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우리의 전존재로 그분을 사랑하는 거에요. 우리가 주 일에 예배에 못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동기가 여러분이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렇게 했으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분은 저를 이상하다 생각할 지 모르지만 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해서 그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랬더라면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예를 들면, 뭐 내 일 먼저 다 해놓고 그리고 주의 일이 가장 나중 인 식의 그러한 자세는 그러면서 자유함은 이건 전혀 신앙이 아니고 방종이에요. 방종이에요. 반면 에 또 이런 부분이 있죠. 그럼, 순종과 율법주의는 어떻게 다르냐? 뭐라구요? 성경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고 십일조 드리면 복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심으라 심으면 거둔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이건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는 거죠. 많은 분들이 혼동되거든요.

심어야 걷는 것으로 아는데... 율법주의의 핵심은 뭐라구요? 공사상. 자기 의. 자, 그럼, 이겁니 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것이 종교적인 헌신이든 희생이든 자기가 심었기 때문에 대가로 하나님 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은 그건 율법주의입니다. 철저하게 타락한 율법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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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예배에도 참 중요한 부분이 다루어졌거든요. 하나님 중심, 내 중심이 다루어졌는데, 자 보세 요.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다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안하시니까 내 방법, 내 수단으로 하는 것은 뭐 예요? 그것은 인본주의입니다. 타락한 것입니다. 자기가 한 것입니다. 자기 방법입니다.

반면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런 사람도 있어요. “당연히 하나님이 하시죠. 하나님이 천지를 창 조하시고, 이번 건축만 하더라도. 하나님 하시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그런데 자기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 달란트입니다.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 아시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신 한 달 란트가 어떤 사람인줄 아세요?

그 내용을 보시면 “하나님은 굳으신 분이고, 대단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뿌리지 않아도 능히 거두 실 수 있고, 내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우리가 꼭 양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많더라고요. 그것은 한 달란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며, 앞서 가신 주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되, 순종함에 있어서 우리의 삶에 조정과 우리의 삶에 순종이 필요합니다. 댓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야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데 순종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주의가 뭐냐 하면?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의 행하 심에 우리가 동참하는 삶이 아니라 순종이나, 종교적인 헌신, 자기 공, 그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는 가치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십일조 드리면 하나님이 복주십니까? 안주십니까? 주십니다. 약속이기 때문에.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율법주의 사고가 벗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없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주와 동행하는 삶은 되어지지 않습 니다. 그 사고가 율법주의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율법주의를 우리가 아는 것 같지만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는, 그러니까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성수주일만 하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잘못하면 바리새인처럼 예배 잘드리는 것이 공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율법주의로 빠지는 반면에 대강 적당히 하는 것이 자유한 것처럼 방종으로 빠지는,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 신앙의 본질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우리 신앙의 본질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님의 인도를 따라, 우리의 전존재로 동참하여, 순종 하는 삶을 살 때,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이러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삶 속에서 율법주의가 철저히 벗겨져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율법주의 위험이 뭐냐 하면? 본문 말씀입니다.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 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뭐하면? 할례를 받으면.

할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배경이 뭐라고요? 거짓 사도들이 왔는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다 가르쳤습니다. 다 받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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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뭐라고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언약의 징표로 할례를 주었는데 할례를 받 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할례라는 종교적인 행위를 추 가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다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옷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성수주일이 될 수 있고, 십일조가 될 수 있고, 부분적으 로라도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의지해서 서려고 하면, 전적인 종교적인 행위에 서는 것 같아서 이 런 경우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고, 주님의 은혜에서 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앞으로 제가 시리즈로 준비되는 대로 이 시리즈가 마쳐지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통치하시고, 임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가운데 우리가 머무는 곳에 하나님 의 모든 생명이 거기에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죄의 용서,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 지키시는 삶, 보호,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과 감격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우리의 아버지 되시며, 이 모든 것이 그 외에도 더 많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근데 이렇게 율법주의로 빠져버려서,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가 지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면, 모든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뭐만 남느냐? 종교적인 모양만 남되 실재는 걷치게 됩니다.

이들이 훨씬 더 종교적인 모양은 가졌습니다. 왜? 열심히 규칙을 따라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본질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가 무섭습니다.

오늘은 자기의 의 다시 말하면 공사상과 율법주의와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율법주의가 강합니다.

가보면 필리핀도 율법주의가 있고, 미국도, 일본도, 아프리카도, 율법주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훨씬 더 강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우리 민족은 종교적인 민족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길들여져 있느냐 하면 공사상입니다.

옛날부터 정한수 떠놓고, 공을 잘 드리면 무슨 신인지 몰라도 응답하는, 그런 조상 때부터 내려오 는 인식이 있습니다. 심지어 약재를 만들어 대접해도, 그 내용물 보다 정성이 중요한.

이러한 사고 가운데 살아왔기 때문에 그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의입니다.

공사상의 뿌리입니다. 어느 나라보다 율법주의가 강합니다.

여러분들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난번에 피터 외그너 박사가 한국에 왔다가 하는 이야기는 “지금 한국은 기독교인이 40%는 돼야 한답니다”. 왜? 80년대 초반에 이미 25%였거든요.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대로만 성장했다면, 지금은 40%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관건이 뭔지 아십니까? 한국 교회에서 율법주의 깨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삶이 회복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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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도태됩니다.

지금 교회 가운데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너무 너무 심각하더하고요. 교회 의 50%이상이 50대, 60대입니다. 너무 너무 심각합니다. 20년만 지나보십시오. 교회가 어떻게 되는 가?

그 가장 주된 이유 중에 하나가 율법주의입니다. 깨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생명이 교회 가운 데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우리 가운데 행하시고, 또 선교회 활동을 통해서 행하고 계시는데, 우리들이 율법주의를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 믿음으로 의지해서,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 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앞서 가신 주님을 우리의 전존재로 따라 동참하는 순종하 는 삶 가운데로, 회복되어질 때,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승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와 같은 승리가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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