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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님을 아는 것과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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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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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님을 아는 것과 성화

고린도후서 3장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 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오늘은 주님을 아는 것과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의 형상으로 우리들이 변화 되는 것 혹은 거룩한 삶과 주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 니다.

첫째, 두 종류의 거룩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어서 거룩함은 필수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레위인이 하나님의 언약궤(하나님의 임재를 상징)를 지고 갑니다. 이것은 하나님 의 거룩함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자이건, 설교를 인도하는 자이건 엄청난 사탄 의 공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강단이 거룩히 보존될 수 있도록, 또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히 보존될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도 말하지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특별히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상황에서 거룩한 삶은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삶에 핵심이고 필수인데 그러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이 무엇이냐 하면 두 종류의 거룩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거룩함 중에 하나는 신분적인 거룩함이고, 또 하나는 지속적인 성화입니다.

여러분, 거룩함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만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게 될 때에만 우리가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 분만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은 그 분의 생 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 가운데 통치하시면서, 다스리시면서 우리 가운데 그분의 생명이 넘치게 될 때에 우리가 거룩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만 거룩 합니다.

신분적인 거룩함이라는 말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속하게 하시므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 것을 신분적인 거룩함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그 를 믿는 모든 자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신분적 인 거룩함이라고 부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선포하 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들을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 화시키시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백성인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들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신분적인 거룩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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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성경적인 예는 히브리서 10장 10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 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여기에 보시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가 이미 거룩함을 얻었 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 게”자 여기에 보시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편지하는데요,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에 있는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편지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진’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거룩하여 졌다는 것입니다.(완료형)

그리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이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자’들이라 그 말입니다.(The Holy Ones)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 져서 거룩한 자들이라 불리우는 그들에게 편지하노니’ 그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고린도 교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 거룩한 사람들이 사는 교 회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심지어 자기 의붓어머니를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이라고 그렇게 자랑했습니다. 그만 그렇게 자랑한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라고 그렇게 생각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 가운데도 없는 죄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용납되느냐고 저를 사단에 게 내어 주라. 육신은 죽을지라도 영혼이라고 구원받도록 그렇게 얘기하고 있거든요. 뿐만 아니라 성도들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고소하느냐면 안 믿는 재판장 앞에 고소하는 것입니 다. 서로 그냥 상대방을 욕하고, 서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고 자기 옳은 것을 내세우고 그러면서 안 믿는 재판장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 망신 다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일이 완전히 땅에 떨어지는 것이죠. 그랬더니 성경에 보면 ‘나중에 교회가 천사들을 심판하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차라리 손해보고 말지 안 믿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그 고린도 교회 가운데는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죽으면 끝이야’ 그래서 사 는 날 동안에 그저 잘 먹고 잘 살면 돼, 케세라 세라야,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 떤 사람들은 은사가 강력하게 나타난다고 그런다고 그래서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멸시 하고 조롱하는 사람들, 겉으로는 안 그럴지 모르지만 마음속으로는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는 은사가 잘 안 나타나니까 늘 열등감 가운 데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나는 바울파니, 나는 아볼로파니, 나는 베드로파니, 서로 싸웁 니다. 우리가 최고야. 그랬더니 그중에 어떤 사람들이 그냥 우리는 예수파야, 우리가 오리지날이 야, 베드로는 사도였고, 베드로도 사도였는데, 우리는 예수께 직접 물려받은 예수파야, 그런데 바 로 이들이 사도 바울을 쫓아낸 장본인들입니다. 이게 고린도 교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교회를 어떻게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교회를 향해서 편지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진 거룩한 자들이라 불리우는 너희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신분적인 거 룩함입니다.

신분적인 거룩함이라는 것은?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행실로 우리의 헌신이나 봉사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로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어서 우리가 거룩하여 졌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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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우리가 거룩함을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신분적인 거룩함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일을 깨닫고 그것을 믿음으로 신뢰하는 만큼 우리는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녁 예배 시간에는 몇 주간에 걸쳐서 이 부분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쭉 살펴봤습니다만, 로 마서 6장 6절-8절, 11절을 한 번 보시죠.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 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 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자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3단계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첫째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중 하나가 뭐냐? 우리의 옛사람이 죽게 하신 것입니다. 같이.

또 그 예를 들죠. 제가 신학대학원에 있을 때 조직신학 교수님이 닥터 보이드 헌트라는 분이었는 데, 그분이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어떤 부흥 강사가 부흥회를 인도합니다. 그러면서 흙탕물 들은 컵을 가져왔어요. 보여 줍니다.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이렇게 타락해서 죄로 가득하 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망치를 꺼냅니다. 이것을 놓고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망치를 놓고서 내리칩니다. 사람들이 저거 깨지면 어떻 게 할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이 부흥강사 목사님이 비장의 카드를 내놓습니다. 뒤에다 양철떼 기를 숨겨 놨다가 탁 내리치면서 딱 막아섰습니다. 그랬더니 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립니다. 그 마 이크 앞에서. 그러면서 그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 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게 잘 설명하게 위함이죠.

그러면서 그 교수님이 하신 얘기가 이거였습니다. 이 예는 한편으로는 맞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요? 예수님이 우리를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의미에서.

그런데 두 가지면서 틀리다는 것이죠. 이 예가

첫째는 이 예에 의하면 그러니까 많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에요. 심판 하시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뭔가 두려워 겁이나 예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에요. 우 리를 위해 돌아가신 사랑의 주님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잘 반영하지 못한 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예수님 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심으로 그 십자가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러니까 우리 환경에 어떠한 일이 닥치든지 그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해서 우리를 향하신 변치 않는 십자가의 확증된 그 사랑을 토대 로 해서 환경을 보아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볼 수 있다고요. 첫째는 그거고.

두 번째는 뭐가 그 예가 잘못됐느냐?

이 예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지고 갈 형벌을 대신 지시사 우리를 사 망에서 건져 주신 것은 맞지만 이 경우에는 컵은 그대로 있다는 것이죠. 전혀 변치 않았다는 것입 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 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 리의 옛사람이 같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죄로 오염된 옛사람이, 죄의 몸이 같이 멸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으면 침례(세례)를 받죠. 침례가 이렇게 물이 들어갑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 리가 흔히 세례라고 하는 것은 물에 들어간 침례를 가리킵니다. 밥티죠라는 단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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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물에 들어가는데, 여러분 로마서 6장에 보시면 뭘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가 물에 들어갈 때 뭘 상징하느냐면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십 자가에 죽어 장사된 바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저 물에.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침례 줄 때 몽땅 잠급니다. 좀 이렇게 밖으로 나오면 다시 집어넣어요. 미국에서 침례를 주는 어떤 할아버 지가 물에 들어가는 게 두려워서 가지고, 막 벌벌 떨다가 발이 쑥 나왔어요.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다시 집어넣었어요.

그러니까 물에 들어가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면? 성경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 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의 몸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 장사 지낸 바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럼 나오는 것은 뭘 상징하느냐? 우리가 이제는 새 사람으 로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가 너희 육신은 죄에 대한 죽은 자요 의에 대해는 사한 자로 간주하라 너희 지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1) 다시는 더 이상 죄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실 때 이미 이것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더 할 일은 이만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승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경험되어 지는가?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깨닫고, 우리가 그 위에 믿음으로 설 때, 그 때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립니다만, 한 번은 과거에 제가 죄에 넘어졌어요. 그랬더니 그렇게 마음이 아 프더라고요. 우리가 다 그렇듯이.

그래서 마음이 아파요. 죄책감도 들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애통해 하면서 있 는데, 하나님께서 선명히 그 부분을 깨닫게 하시더라고요.

무슨 부분?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음을. 나는 더 이상 죄에 속해 있지 않음을.

내가 비록 넘어져서 그 죄에 빠질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 것이고, 나 때 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세상과 죄에 대해서 이미 죽었음을,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거기에 속해 있지 않음을,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그래서 내가 말씀드린 대로 넘어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 것이요, 이제 나는 내 지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하여 되어졌음을 선명히 비추시더라고요.

그랬더니 제 마음에 얼마나 놀라운 평화가 넘치는지요. 얼마나 놀라운 마음의 평강이 넘치고, 확신 이 넘치고, 승리가 넘치는지요.

이처럼 신분적인 거룩함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다른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우리 죄를 멸하셨죠. 사단의 권세를 파하셨죠. 우리의 죄의 몸을 이미 멸하 셨죠. 우리를 향한 사단의 권세를 하나님이 깨뜨리셨다니까요. 우리를 고소하는 모든 율법의 요구 를 다 이루셨죠.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이미 못 박혀 죽게 하셨죠. 세상이 우리에 대해서 이미 하 직하게 하셨죠. 하나님을 향한 길을 여셨죠.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이루셨습니다.

근데 이 승리를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깨닫고, 여기 성령의 도움이

1) 로마서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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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죠.

인식하고, 깨닫고, 우리가 그 주님이 행하신 일에 믿음으로 서게 될 때에 그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 게 됩니다.

이게 신분적인 거룩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신을 이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합니다. 내 육신을 죽여 야 할 텐데, 육신을 죽여야 할 텐데.

근데 자기 육신을 죽이려고 노력하고 노력할수록 못 죽이는 겁니다. 뭐처럼? 두더지 게임처럼 이거 두드리면 저게 툭~ 살아나고, 저거 두드리면 이게 툭~ 살아나고.

그래서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반복적으로 좌절하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러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바울처럼 그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는 대로 이렇게 됩니 다.

왜요? 그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근데 여러분 기억하셔야 할 것은 우리는 육신을 이기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셔야 되요.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육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셔야 되요.

그리고 그 위에 믿음으로 서게 될 때에 그만큼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집회 다니다 보면요, 어떤 사람들은 늘 사단의 억압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요.

‘기도해 주세요. 저에게 사단의 억압이 너무너무 커요.’ 늘 그렇게 하고 살아요. 그들은 늘 사단 이 자기를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기 가서 기도 받고, 저기 가서 기도 받고. 기도 받 으면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이래도 억압이 찾아 온다고 생각해요.

그들은요, 기억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사단의 권세 는, 머리는 이미 깨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요. 인식하는 게 중요해요.

우리가 사단에게 혹은 죄에게 반복적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줄 때 사단의 억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가 그 근거를 마련해 주었으니까. 근거를 마련해 주었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어둠의 세력이 방해를 예수님을 대적하면 끌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사단의 권세는 근본적으로 파해졌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식하 고, 그 위에 믿음으로 서는 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넘어질진 몰라도 넘어지면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우리를 향한 사단의 권세는 이미 파해졌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신분적인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세 번째, 주님을 아는 것과 성화입니다.

히브리서 12:14를 다시 한 번 보시죠.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 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 “좇으라” 그랬는데, 여기 NIV성경에 보면,

“Make every effort” 그랬어요. 모든 노력을 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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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live in peace with all men” 모든 사람과 함께 평강 가운데 살기를.

“and to be holy” 그리고 거룩하기를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라.

“without holiness” 거룩함이 없이는.

“no one will see the Lord”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자, 여기 보시면, 아까는 신분적인 거룩함은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가 죄 용서함 받고, 주님께 속하여 져서 거룩하게 되었다’ 그랬어요.

그러면 여기는 또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거룩하기 위해서 너희의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신분적인 거룩함과 지속적인 성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거룩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하라는 말은 뭐냐? 이것은 지속적인 성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 다. 지속적인 성화!

자,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거룩함은 우리의 노력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 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거룩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만 거룩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온전히 통치하시며, 다스리시며,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될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되고, 그 하나님의 생명 중에 하나가 거룩함이기 때문에 그 때만 우리가 거룩합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 말하는 대로 ‘거룩하기 위해서 너의 노력을 다 하라’는 말은 그럼 무슨 뜻인 가? 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지속적인 성화를 우리 삶 속에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크게 세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성화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 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아멘?

아까 읽은 거기 보십시오. 오늘 본문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 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 린도후서 3:18”

여기 보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화하는 것이 주의 영, 성령으로 가능하다 그 말입니다. 성 령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장도 보십시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만 21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 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기에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영어 NIV성 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Now it is God who makes both us and you stand firm in Christ.”

우리와 너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He anointed us” 그리고 그 분이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여기에 보시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며, 우 리를 거룩케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변화시키는 분은,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도 뭐라고 말씀하신가 하면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 분이 그리스도의 날 까지 그것을 완성하시리라” 이것은 여러 가지 가 포함됩니다만 은 구원의 완성도 됩니다. 우리가 성화되어서 영화롭게 되기까지 이 모든 과정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둘째, 우리는 주님의 손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셋째, 주님이 빚으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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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주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원수 되었던 우리, 죄로 인하여 지옥을 향해 치닫고 있던 우리, 하나님과는 근본적으로 끊어져 있던 우리, 사단의 노예였던 우리를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하나님 의 소유 삼으시고 거룩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일을 시작하신 이분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를 빚어 가시고 우리를 거룩케 하시고 우리를 만져가지는데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 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느냐? 아니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거룩하기 위해서 너희 모든 노력을 다 하라” 그랬죠.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냐? 하나님이 하시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안에, 주님의 손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를 빚 으시도록 주님의 손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두 번째 주님이 우리를 빚어 가실 때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빚으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해야 할 일입 니다. 그러면 주님이 빚어 가십니다. 주님이 주님의 때에 우리를 만져 가십니다.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자, 그러면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손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붙어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하라” 그랬는데 우리가 노력을 어디에 투자해야 되느냐? 주님 안에 붙어있기 위해 투자해야 합니 다. 가끔 가다보면 기도사역 하다보면 이런 감동을 주실 때가 있거든요. 어떤 죄를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넘어지고, 노력하고 또 넘어지고 우리가 그럴 때가 많잖아요! 그죠. 그럴 때 기도사역 해 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어요. “그거 이기려고 하지 말고 나를 보라” 그러면 이거 이기려고 하지 말고 방치하고 마음대로 그렇게 살라는 말인가요? 절대 그게 아닙니다. 그 말 은 뭐냐 하면 이것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이러한 죄를 이기려고,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자기노력 에 달려있지 않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노력으로 이것을 이기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어요. 왜? 우리 힘으로는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까 그러면 이것을 방치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느냐? 주님을 찾으라는 겁니다. 눈을 떼어 주님을 보라는 겁니다. 왜요? 우리는 주님을 아는 것만큼 죄를 이길 수 있거든 요. 그러니까 우리의 초점이 죄에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초점이 주님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여 러분 우리를 빚어 가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빚으시려면 주님의 손에 우리 가 머물러 있어야 되는데 주님의 손에 머물러있다는 말은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머물 러있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초점은 어디에 있어야 되는가? 우리가 주님을 더 알기 원 하며 주님을 지속적으로 사모하며 사랑하기 원하는 그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주님을 아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왜 필수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요.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거룩함 자체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값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노력으로 얻 어내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데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가? 우리가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 그 분을 사랑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 그분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열망하고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고 하나 님을 가까이할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거하시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 그분을 찾고 하나님 그분을 알기를 사모하고 우리의 전존재로 그분을 사랑할 때 그분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거하십니 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그분의 생명이 넘치고 그분의 생명 중에 하나가 거룩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구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또 하나 여기 고린도후서 3장에서 말한 것처럼 하 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게 하신다고 그랬고, 그 것은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그랬는데 언제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비추시는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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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의 길과 목적을 비추시는가?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비추시는가? 그래서 우리로 하나님을 더 신 뢰하게 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분 손에 붙 어있을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을 전존재로 추구할 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비추십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만큼 변화되고요.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우리 자신을 보는 만큼 변화됩니다. 바 리새인들과 같은 삶을 살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계사회에서 이것이 죄라고 규정하는 그러한 것 들을 지키지 않는 그러한 삶은 살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중심은 절대로 변화지 않습니다. 우리 중 심은 하나님이 비춰주셔야 변화됩니다.

그런데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비춰주시는가? 주님을 추구하고 따라가고 구하면 그렇잖아요.

어떤 때는 제가 그 나름대로 목회하면서 성실하게 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뚜껑을 싸악 열 으시면 제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교만이 있었는지 비추시잖아요. 그러면 얼굴을 들 수가 없죠. 저 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목회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는 하나님이 싸악 들추시는데요. 그전에 목회할 때 연세 드신 분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분이 이렇게 좀 지금쯤은 예수 믿은 지 오래 됐고 변할 때가 됐는데 안 변해요.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 그런 것에 대한 불평이랄까 불만이랄까 그 안타까움이 늘 있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싸악 비추시면서 제 마음속에 그분을 멸시하는, 무시하는 마음이 있는걸 보이시면서 “내가 거룩하게 한 것을 네가 감히 속되다 하지 말라”그러시 는 것 같더라고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들춰주셔야 우리가 변합니다. 여러분 변화되는 거요.

가장 먼저는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변합니다. 사고의 변화가 있어야 변합니다. 관점의 변화가 있 어야 변합니다. 비춰지지 않으면 안변합니다. 안변합니다. 그런데 이 비춰지는 것은 성령님만이 비 춰질 수 있습니다. 성령님만이 비춰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안변합니다. 왜? 우리는 나름대로 잘한 다고 생각하니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비춰주시는가? 주님을 구할 때 비춰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에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구속하시고 그분이 빚어 가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손에 붙어있어야 그분이 빚으십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빚어 가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비추실 때, 여기선 두 가지가 들어가지요. 주님이 비추실 때 우리의 삶을 조정하고 순종해야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노력이 또한 들어가는 겁니다. 여기에···.

오늘 아침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펴보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거든요.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 두 번 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어떤 진리에 마음이 가게하시거나 깨 닫게 하시거나 마음을 집중하게 하시거나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가 그것을 묵상하고 그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우리가 잠기도록 한다. 네 번째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삶을 조정한다. 다섯 번 째는 순종한다. 그러면 여섯 번째,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정리하고 있거든요. 그 리고 예를 들고 있어요. 성경을 읽는 중에 “악인은 꾸운 것을 갚지 아니하며” 이런 성경구절을 볼 때 자꾸 마음에 와 다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뭔가 관심이 거기에 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것을 유념해서 하나님 앞에 묵상한다는 거지요. 악인은 꾸운 것을 갚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악인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당연히 빌린 것을 갚아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 께서 왜 이것을 나에게 말씀하시고 왜 여기에 관심을 가게 하실까? 그러면 자기가 묵상하면서 ‘하 나님! 내 삶에 꾼 것이 있으면 깨닫게 해주세요. 갚지 않은 것이 있으면 깨닫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는 중에 꾸고 갚지 않은 것이 발견되어졌으면 이제 그것을 갚도록 삶을 조정해야 한다는 거죠.

지금 갚을 수 있는 것이면 당연히 갚아야 되지만 지금 너무나 커서 갚을 수 없는 것이면 그것을 갚 을 수 있도록 마음을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고 하나님의 도움 을 구한다는 거죠. 이것이 삶을 조정하는 것이고 그리고 실제로 갚는 것이 순종하는 겁니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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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거죠. 제 얘기는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해 가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안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만지시고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지도하시고 지시하시는데 이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조정하여 순종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때로는 많은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습니 다. 그러니까 삶을 조정하여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빚어지는 거죠. 주님의 손에서... 날이 갈수록 주님의 형상을 닮아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으로 인도 된다 그 말입니다. 오 늘 저는 주님을 아는 것과 거룩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거룩함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 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본질인 주님을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주님을 아는 것이 없으면 거룩한 삶이 가능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그렇게 신앙생 활 했지만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전혀 거룩하지 못했다고, 회칠한 무덤처럼 외부적으 로는 종교적인 모양은 갖추었으나 그 속에는 온갖 탐심과 세상 사랑과 정욕과 시기와 다툼과 미움 이 가득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와 불법이 가득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니는 자 들은 거룩해야 했습니다.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나르는 자들이라면, 하나 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라도 더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님만이 더 우리의 목표와 목적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추구하기를 축복합니 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예배 나올 때에도 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고 하 나님께 가까이 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 가운데 오셔야 합니다. 왜요? 이것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비추시거든요. 우리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세상을 이길 수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완성하심으로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삶 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아멘. 우리 경배와 찬양 하나 같이 하시겠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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