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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6년 2월 석사학위 논문

朝鮮後期 凌壺觀 李麟祥의 文人畵 世界 硏究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 학 미 술 사 학 과

김 송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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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凌壺觀 李麟祥의 文人畵 世界 硏究

A study on the Literati Painting of Neung-ho-kwan Lee In-sang

in Late Chosun Period.

2016년 2월 25일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 학 미 술 사 학 과

김 송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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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凌壺觀 李麟祥의 文人畵 世界 硏究

지도교수 조 송 식

이 논문을 미학미술사학 석사학위신청 논문으로 제출함 2015년 10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 학 미 술 사 학 과

김 송 이

(5)

김송이의 석사학위논문을 인준함

위원장 조선대학교 교수 김 하 림 (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장 민 한 (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조 송 식 (인)

2015년 11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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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도판목록 Abstract.

제 1장. 서론

제1절. 선행 연구 검토 ···1 제2절. 연구의 목적 및 배경 ···3

제 2장. 능호관 이인상 예술세계의 형성 배경

제1절. 출생과 성장 배경 ···5 제2절. 관직생활과 교유 관계 ···8 제3절. 은거시절과 말년 ···17

제 3장 남종문인화의 의미와 조선으로의 유입

제1절. 남종문인화의 개념과 역사···21 제2절. 남종문인화의 흐름-조선으로의 유입···26

제 4장 능호관 이인상 남종문인화의 형성과 특징

제1절. 학습기···34 1.중국화보의 영향- 남종문인화풍의 학습

2.겸재정선의 영향- 진경산수화풍의 학습

제2절. 집대성기···44 1.산수화

2.사군자

(7)

제 5장 능호관 이인상의 남종문인화 이론

제1절. 졸박함···69

제2절. 담박함···72

제3절. 근골기운···74

제4절. 문자향과 서권기···75

제 6장 결론 제1절. 능호관 이인상과 후대의 문인화가···81

제2절. 동아시아의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85

참고문헌 ··· 87

부록 ··· 91

1.능호관 이인상연보

2.『芥子園畵傳』에 나타난「松枝法」

(8)

도판목록

(그림 1) 한거도, 29.7×29.7㎝, 1734년,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2) 송하간서도, 28.5×40.7㎝, 연대미상, 지본담채, 간송문화재단 소장.

(그림 3) 누각산수도, 27.0×62.5㎝, 연도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그림 4) 은선대 55.0×34.0㎝, 1737년, 지본담채, 간송문화재단 소장.

(그림 5) 옥류동 58.5×34.0㎝, 1737년, 지본담채, 간송문화재단 소장.

(그림 6) 동음풍패도 28.2×40.8㎝, 연도미상, 지본담채, 간송문화재단소장.

(그림 7) 수하한담도, 33.7×59.7㎝, 1739, 지본수묵, 개인소장.

(그림 8) 아집도, 24.5×46.0㎝, 연도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9) 구룡폭도, 58.5×118.2㎝, 1752년,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0) 무인유운도, 18.2×56.5㎝, 연도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1) 장백산도, 20.2×122.0㎝, 연대미상, 지본수묵, 개인소장.

(그림12) 청호녹음도, 53.5㎝(선면화), 1740,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3) 송하관폭도,63.2㎝(선면화), 연대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4) 송계누정도, 22.0×63.0㎝, 연도미상, 지본담채, 개인 소장.

(그림15) 모정추강도, 23.7×65.0㎝, 1749,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그림16) 강남춘의도, 28.5×66.0㎝, 연도미상,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7) 누상관폭도, 27.3×63.5㎝, 연도미상,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8) 한유시의도, 18.2×54.2㎝, 연도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19) 강협선유도, 61.0㎝(선면화), 1753년,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20) 야매도, 30.0×21.5㎝, 연대미상,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21) 묵란도, 연대미상, 지본수묵, 간송문화재단 소장.

(그림22) 병국도, 28.6×14.9㎝, 연도미상,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23) 설송도, 117.0×53.0㎝, 연대미상,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24) 송하독좌도, 80.0×40.0㎝, 1754년, 지본수묵, 개인소장

(그림25) 수석도, 109.0×57.0㎝, 1738년,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9)

(그림26) 검선도, 96.7×61.8㎝, 연대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27) 도봉계류도, 20.5×47.6㎝, 1757년, 학고재소장

(참고도판 1)『개자원화전』-시환아독서 김홍도 <씨름>

겸재정선 <송하관폭도>

(참고도판 2) 김홍도《금강산 사군첩》中 <은선대십이폭>

(참고도판 3) 겸재정선 <인왕제색도>, <박연폭포>, <청풍계>

(참고도판 4) 홍인 <우여류색도>

(참고도판 5) 김정희 <세한도>

(참고도판 6) 작자미상<여동빈상>

(참고도판 7) 이윤영 <경송초루도>,<고란사도>

(참고도판 8) 윤제홍 <고사도>, <옥순봉도>

(10)

Abstract

A study on the Literati Painting of

Neung-ho-kwan Lee In-sang in Late Chosun Period.

Kim Song Ei

Advisor :Prof. Cho Song Sik

Department of Aesthetic and Art History Graduate School of Chosun University

Neung-ho-kwan Lee In-sang earned a reputation as the literati painter who portrayed plainly but clearly in late Joseon Dynasty. He was from loyal family but his grand-grand father was concubines son. Thus, he lived in paradox of position for his whole life. According to his literary work, however, he associated with more than one-hundred people, and there were a lot more people who respected him due to his state of consciousness and his paintings even after he died.

He is well-known as a painter who mastered the style of literati painting, which was introduced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n became popular around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he painting of literati does not put emphasis on just portraying a form, but on understanding by seeing through true nature, which we call spiritual art style. In other words, people can get sense of artist’s personality by appreciating artist’s art work based on internal aspects.

Nobody knows when the painting of literati started, but we can guess that according to the 南北宗論 which is started by Dong Gi-chang, it was originated in 渲染法 by Wang Yu from Tang Dynasty. The painting of Literati portrays the spirit or intelligence of the painter formatively, and it is introduced by the books which were brought by some people who adventured in the middle of Joseon Dynasty. To name a few books, for example, there were『芥子園畵傳』or 『唐詩畵

(11)

譜』.

Lee In-sang did not leave any theory about his style of painting, but we could speculate from his art works. From the letter which Lee sent to Kim Sang-suk, we could guess that he emphasized the clearness and liveliness of spirit(筋骨氣韻). From the quotation of the Kim Jung-hee who mastered calligraphic works in the late Joseon Dynasty, he could understand what the ‘文字 香’ and ‘書卷氣’ truly were, so he spoke very highly of Lee’s world of art when he saw style of painting and writing.

(12)

제 1장. 서론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서화가 이자 문인화가이다.

이인상은 담백하고 격조있는 문인화를 그린 조선후기의 화가로, 글씨와 그림은 가장 문인화적이며 수준 높은 경지를 이루어 당대와 후대의 문사들에게 극찬을 받았다.1)

이들 평가에서 이인상에 대한 공통적인 것은 그의 작품에서 ‘문자향’과 ‘서권기’

가 흐른다는 것이다. 문인화는 서양의 회화와는 다르게 내면적인 인격을 중요시하여 내면적인 품격을 담아내고 문자향, 서권기가 갖춰져 있는 그림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 에, 이에 근거한다면 이인상은 가장 남종화의 특색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인상은 조선 후기의 많은 문인화가들 중에서도 개성있고 깔끔한 화풍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는 서얼출신이라는 신 분적 한계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예술과 학문에만 전념하였던 그의 고고한 삶에서 비롯되었다. 이인상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소나무는 이인상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인상은 소나무처럼 곧은 절개와 굳은 의지로 동시 대와 후대의 문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특히 조선말기의 서화가 추사 김정희가 능호 관을 보면 문자향과 서권기를 알 수 있다고 극찬 할 정도로 제대로 된 남종 문인화 풍을 구사하였다.

제 1절. 선행 연구 검토

이인상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생애와 같은 연대기적 연구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능호관 이인상에 관한 주요 연구성과로는 유홍준2)이 있다. 주로 이인상의 회화를 중심으로 한 생애와 예술세계를 서술한 논문으로 이후 이인상에 대

1) 뒷장(본 논문 p. 73)에서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2) 유홍준,『능호관 이인상의 생애와 예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논문, 1983. 「문인화가 이인상의 작가성 연구」, 『정신문화연구』1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이인상 회화의 형성과 변천」, 『미술자료』161,국립중앙박물관, 1984. 「능 호관 이인상」, 『화인열전』2, 역사비평사, 2001. 능호관 이인상에 관한 최초의 논문 으로는 홍석란 『능호관 이인상의 회화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동양화 전 공 석사논문, 1982.가 있다.

(13)

한 연구는 그의 석사 연구논문의 내용에 기인한 것이 대부분이다.3) 유홍준 이후 능호 관 이인상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다른 저서나 논문에서 능호관이 언급된 경우가 많아 그가 조선화단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보여준 다.

가장 최근의 주요한 연구 성과로는 류승민4)의 논문이 있다. 류승민은 능호관의

‘서예’ 혹은 ‘회화’에만 치우쳤던 기존연구와는 달리 ‘서화가’로서의 이인상을 고찰 하 였으며 그의 시문집『뇌상관집(雷象觀集)』(연세대학교, 대전대학교 소장)을 새로이 소 개한 것은 이인상의 예술세계를 심층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다.

능호관의 회화연구는 이 외에 문학연구에 대한 논문도 등장하였다. 김민영 『능 호관 이인상 산문연구』5)와 김수진 『능호관 이인상 문학연구』6)가 그것이다. 김민 영의 논문은 최근 발굴된 자료인 『뇌상관집』에 수록된 산문을 분석, 연구하였으며, 김수진의 논문은 서화가가 아닌 문학가로서 이인상의 면모를 밝히고 『능호집(凌 集)』, 『뇌상관집』,『뇌상관고』등 현존 문집에 대한 상호작용 및 분석을 시도하여 능호관의 예술세계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김민영, 김수진의 지도교수인 서울

3) 이후 발표된 논문은 다음과 같다. 장진성, 「이인상의 서얼의식 : 국립중앙박물관 소 장 <검선도>를 중심으로」, 『미술사와 시각문화』1,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02.

이인상의 신분적인 제약을 바탕으로 그의 작품에 드러난 이인상의 의식세계와 작품의 해석을 시도하였다. 신은숙, 『능호관 이인상의 예술정신연구』, 성균관대학교 유 학대학원 석사논문, 2004. 권지민, 『능호관 이인상의 서예연구』, 대전대 대학원 서예학과 석사논문, 2005.에서는 이인상의 서예만 독립적으로 연구하였다. 박재성,

『능호관 이인상의 예술세계 연구 : 소나무 그림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6. 정예지, 『능호관 이인상 문인화의 미학적 연구』, 성균관대학교 유 학대학원 석사논문, 2012. 이인상의 작품세계를 도/유가적인 미학적 관점에서 설명 하였다. 김기홍, 「18세기 남종문인화의 신경향」, 『간송문화』42, 1992. 유홍준의 논문에 이어 이인상 화풍의 분석을 시도하였다. 한정희, 「조선후기 회화에 미친 중 국의 영향」, 『미술사학연구』 206, 한국미술사학회, 1995.은 조선후기 중국화보의 영향을 설명하면서 이인상 회화를 언급하였다.

4) 류승민, 『능호관 이인상의 서예와 회화의 서화사적 위상』,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재 협동과정 석사논문, 2005. 「능호관 이인상의 산수화 연구」, 『미술사학연구』, 한국 미술사학회, 2007.

5) 김민영,『능호관 이인상 산문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논문, 2012.

6) 김수진, 『능호관 이인상 문학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논문, 2012.

(14)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문학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이인상의 <검선도>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논문7) 을 발표하였다.

또한 가장 주목할 만한 연구성과로는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능호관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능호관 이인상, 소나무에 뜻을 담다》展의 개최이 다. 이 전시의 의의는 몇몇 학자들과 학계에서만 논의되었던 능호관의 회화적인 위상 이 대중에게도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이 능호관 이인상을 통해 제대로 된 문 인화의 경지를 알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한편 아주 최근인 2015년4월 16일 현재 이인상의 출생지로 볼 수 있는 경기도 양주시에서는 능호관 이인상을 기념하는 ‘이인상 기념사업회’ 발족하였고, 이와 함께 양주시 회암사지 박물관에서는 특별전시《능호관 이인상, 즐거움과 품격으로 산수를 보다》를 개최하는 등 그간 조명 받지 못했던 능호관 이인상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제 2절. 연구의 목적 및 내용

한국 회화사를 논의할 때에 가장 전성기로 꼽히는 시기는 조선후기(1700-183 0)8)이다. 진경산수화, 풍속화, 남종화, 서양화풍이 성행하였던 조선후기는 가장 한국적 인 미술이 전개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중국이 아닌 우리의 산하를 우리의 화법으로 그렸으며,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등의 풍속화도 한국인 의 생활 풍습을 그렸는데, 이는 가장 한국적인 회화라 할 수 있다.9)

이러한 18세기의 회화 현상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16-17세기에 걸쳐서 형성된 조선의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영향을 받았다. 조선의 중화사상은 조선 성리학을 바탕 으로 17세기 전반에 등장한 청(淸)에 대한 반감과 우월 의식에 힘입은 바가 크다. 따 라서 우리가 청과는 다르며 명(明)을 계승하고 있다는 조선 중화사상에 의해 우리의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의식체계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회화로 표현된 것이 진경산수화 7) 박희병, 「기획논문 : 한국 고전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이인상(李麟祥) <검선도(劒僊

圖)>의 재해석」『국문학연구』26, 국문학회, 2012, pp. 33-55.

8) 본 논문에서는 안휘준 교수의 시대구분에 따라 조선시대 회화를 초기(1392-1550), 중기 (1550-1700), 후기(1700-1850), 말기(1850-1910) 등 4시기로 나눈다.(안휘준, 『한국회 화사』, 일지사, 1981.)

9) 최순우, 「산수화전」, 『간송문화』21집, 1981, pp. 42-48.

(15)

이고 풍속화이다. 나아가서 현재 심사정 등에 의해 유입, 발전된 문인화풍도 조선 문 인화라 하였는데, 조선의 주체적인 자의식이 이 시대 미술의 특색으로 간주되었다.

겸재의 진경산수나 단원과 혜원을 중심으로 한 풍속화의 경우 꾸준한 관심과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두 화풍에 큰 영향력을 끼친 남종문인화에 대한 연구 는 그 중요성에 비해 여전히 미진하여 아쉬움이 따른다. 최근에 와서 연구가 본격적 으로 시작되고는 있으나, 그것은 표암 강세황을 중심으로 한 연구와 그의 저서 《표 암유고》의 번역 등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10)

따라서, 능호관 이인상에 대한 최초의 연구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고 새로운 문 집의 발굴과 그에 따른 연구가 진행 되는 등 그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다양한 관 점의 연구가 나타나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기존의 성과와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회 화세계를 다시 되돌아보고 이인상의 그림에서 높이 평가되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무 엇인지, 그것이 남종화의 양식적인 특징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논의해 보 고자 한다. 이인상은 특별히 화론이라 할 만한 글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남긴 시나 그림의 제발 등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었던 회화론을 유추해 볼 것이다. 특히 아직까지는 조선의 문인화에만 국한되어 거론되었던 이인상의 회화를 정통 문인화의 근원지인 중국의 화론과 대입시켜 논하고자 한다. 회화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전하 지 않으나 그의 회화나 문집에 남겨진 글을 통해 그가 중국의 서화가나 화론을 어느 정도 익히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연구를 통해 능호관이인상이 동아시아전반의 남종문인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본 논문은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그의 예술세계가 형성되는데 배경이 되는 생애와 교유관계를 간략히 다룬 뒤, 회화에 나타난 화풍을 토대로 학습기와 집대성기의 두 시기로 구분하여 그의 예 술세계를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과 그의 문집에 남겨진 그의 글들을 바 탕으로 그에게 나타나는 남종문인화론의 영향과 미학적인 세계를 살펴볼 것이다.

10) 표암 강세황에 대한 연구성과로는 변영섭, 『豹菴 姜世晃의 繪畵硏究』, 이화여자대학 교 사학과 석사논문, 1987. 김종진 외 역,『표암유고』, 지식산업사, 2010. 한국미 술사학회 편 『표암 강세황 : 조선후기 문인화가의 표상』, 경인문화사, 2013. 등 다 수.

(16)

제 2장. 능호관 이인상 예술세계의 형성배경

이인상의 생애에 관한 연구는 기존에 완산이씨 족보나 능호집 등을 바탕으로 한 기존의 연구결과11)가 많다.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에 관한 연구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그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인상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하는 차원으로 서술하겠다.

제 1절. 이인상의 출생과 성장배경

능호관 이인상은 1710(숙종 36)년 4월 26일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 모정리에서 이정지(李挺之 1685-1718)와 죽산 안씨 사이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인상의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 보산자(寶山子), 종강칩부(鐘崗蟄夫), 뇌상관(雷 象觀), 운담인(雲潭人) 등을 사용하였다. 부친 이정지의 품계는 통덕량 (정5품) 이었으 나, 아무런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이인상이 9세가 되던 해에 34세의 일기로 짧은 생 을 마감하였다. 때문에 이인상은 형 이기상(李麒祥 1706-1778)과 편모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인상의 본관은 전주이씨 밀성군파이며, 그의 시조는 세종의 다섯째 서자인 밀 성군 이침(密城君 李琛 1430-1479)이다. 이 집안은 명문으로, 그 문벌을 앞세우기 위 하여 다른 전주이씨와 구분하여 완산이씨라는 별칭을 사용할 정도 였다. 특히 능호관 의 고조부인 백강 이경여 (李敬輿 1585-1659) 이후 이 집안은 크게 번성 하였다.12) 이경여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친명배청론(親明排淸論)을 주장하여 한때는 심양에 억류된 적이 있었던 인물이다. 이경여의 이러한 지조와 정치적인 입장은 훗날 까지도 노론 사회에서 매우 존중받는 바가 되었다. 그의 자손들 중에서는 5명의 정승 과 3대에 걸쳐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또한 완산이씨 집안은 이경여 이래로 노론의 골 수로써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 중 두 인물인 이이명과 이건명이 백강의 자손이었다.

11) 능호관 이인상의 생애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는 유홍준. 최근 『뇌상관집』의 최초발 굴로 생애에 관한 견해가 추가, 수정되었다-류승민 위의논문.

12) 능호관 이인상의 가계는 『全州李氏密城君派世譜』1·2, 完山李氏密城君派宗親, 1983.

(17)

이후노론의 전권시대로 접어들면서 종가의 권세에 힘입어 그 음보가 방계인 이인상 집안까지 내려오게 된다.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李敏叙 1633-1688)는 송시열의 문인으로 대제학을 지냈 고, 민서의 아들인 이관명(李觀命 1661-1733) 또한 양관대제학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인 이건명(李建命 1663-1722)은 숙종 때 좌의정을, 그의 사촌인 이이명(李頤命 1658-1722) 또한 좌의정을, 그리고 건명의 아들인 이휘지(李徽之 1715-1785)는 영조 때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냄으로써 이인상이 태어날 무렵 이 집안은 전성기를 맞게 된 다.

이인상의 집안은 이처럼 당대의 명문이었으나 이인상의 증조부인 민계(敏啓 1806-1876)가 이경여의 서자였기 때문에 이인상은 명문가의 서출(庶出)이라는 미묘한 신분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18세기의 조선은 신분제도에 의해 서얼 출신이라면 『경 국대전經國大典』의 조항에 따라 문과나 생원, 진사시에 응시 할 수 없었고 별도의 특 혜로 임용된다 하더라도 「한품서용(限品叙用)」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그리하여 서 출은 잡과를 통하여 기술관직에 주로 종사하였고, 신분으로는 중인에 가까웠다.

당시 조선사회는 전통적 신분차별사회로, 각 출신 신분에 따라 사회 진출의 기 회에 차등이 주어졌다. 첩의 소생인 서얼들을 명시적으로 차별하게 된 것은 태종 15 년(1415) “서얼에게는 현직(顯職)을 금한다.” 는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이 성문화된 뒤부터이다. 그 후 세조, 성종 연간에 『경국대전』이 편찬되어 법제화됨으로써 구체 화 되었는데 「경국대전주해」에 ‘서얼신분의 적용은 자자손손에 이른다.’ 하였으며 양첩의 소생은 ‘서(庶)’, 천첩의 소생은 ‘얼(孼)’이라고 구분하였다. 또한 사회진출에 대 한 제한이 가해졌는데 이는 양반 관료들이 그들의 첩 소생 자손에 대한 배려와 양반 관료층을 중심으로 한 신분제사회의 구축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두 측면을 절충하여 마련한 제도이다. 특히 관리로서의 진출에 있어서는 한품서용법13)이 적용되었는데

「한품서용(限品敍用)」에서는 문무관 2품 이상의 양인 첩의 자손은 정3품, 천인 첩의 자손(아들 및 손자)은 정5품, 6품 이상 관원의 양인 첩의 자손은 정4품 등으로 하여 관직 진출에 제약을 가했는데 2품 이상 관료의 첩 소생 자손은 재능에 따라 사역원, 관상감, 전의감, 내수사, 혜민서, 도화서, 산학, 율학의 관직 등 기술관직에 많이 종사 하게 되었으며 신분적으로는 중인에 가까웠다.

13) 신분과 직종에 따라 품계(品階)를 제한하여 관리를 서용하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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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인상은 훗날 진사시에 입격하고 관직에 나아갔다. 또한 그의 문집인 『능호집(凌壺集)』에 거론된 인물만 100여명이 넘는 등 활발한 교유관계를 유지하며 당시 사대부 사회에서 크게 존중받았다.14) 이러 한 현상의 배경에는 비록 서출이었으나 당시 노론의 권세 하에 추앙받던 인물인 이경 여의 후손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부친 이정지가 일찍 세상을 뜬 까닭에 이인상의 성장기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숙부인 이최지(李最之 1696-1774)15) 이다. 최근 발굴된 시집『뇌상관집(雷象觀集)』의 첫 번째 시가 이최지에게 바치는 시16)라는 점과 삼촌 과 주고받은 편지17)를 살펴보면 이인상은 삼촌을 친부처럼 생각하며 지내온 것을 알 수 있다. 이인상의 문집 중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삼촌 이최지가 당시 명필과 전 각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기 때문에 성장기 이인상의 글과 그림에 큰 영향을 주었 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은 이인상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어려서 놀기를 좋아하 지 않고 곧바로 글에 힘쓰며 기억력이 뛰어났고 …… 계부 정산공에게 수업하고 경전 의 조그만 문구나 큰 줄거리를 보면 즉시 그 대의를 알아챘다.”18)고 말했고, 황경원 (黃景源 1709-1787)은 “이인상이 어려서부터 예(藝)를 좋아하여 전주체(篆籒體)를 잘 쓰고 산수그리기를 좋아 하였으며 옛 노래에 능했다.”19)라고 하였다. 실제 이인상은 17세에 「야좌(夜坐)」라는 시를 짓고 1728년 19세 때에는 <예천명발(醴泉銘跋)>에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에 대한 의견을 쓴 글이 남아있다.

또 이인상의 성장기에 영향을 준 사람들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은 섬촌 민우수 (蟾村 閔遇洙 1694-1756)가 있다. 민우수는 영조 때의 문신이며 김창협의 제자로 뛰어

14) 유홍준, 『淩壺觀 李麟祥의 生涯와 藝術』,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3 p.3.

15) 삼촌 이최지는 자를 계량, 호를 연심재, 회암거사, 모정야수라 하였고 음보로 정산 현 감을 지냈다. 이최지 또한 서출이라 높은 벼슬에는 나아갈 수 없었지만 학문이 깊고 전각에 명성이 높았다. 이인상의 뛰어난 전각 솜씨 또한 이최지에게 배운 것으로 추 정 할 수 있다.

16) 『뇌상관집』卷之二, 「차천운경정계부귀회암전사」이 시는 1724년에 쓰여졌다.

17) 임창순 역, 「李麟祥의 手簡」, 『美術資料』, 국립중앙박물관, 1970.

18) 오희상, 「능호이공행장(凌壺李公行狀)」, 『老州集(노주집)』 第20券.

19) 황경원 「이원령묘지명(李元靈墓誌銘)」, 『江黃集(강한집)』 第17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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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_27 <도봉계류도> 20.5×47.6㎝, 1757년, 학고재 소장

난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신임사화(新任史禍)때 관직에서 물러나 경전을 연구하였던 인물이다. 이인상은 당대의 노론청년들을 이끌었던 민우수를 스승으로 섬기고, 학문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인상이 민우수를 존경함은 물론이고 민우수 또한 이인 상을 각별히 생각했는데, 이러한 교류의 흔적은 문헌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1756년 민우수가 사망했을 때에 이인상은 비통함과 고인의 문집을 편찬할 것을 제안하는 편 지글을 보냈고, 1757년작 <도봉계류도>(그림_27)에 남긴 글을 보면 민우수 사망 1주 기를 맞아 벗들과 함께 도봉서원에서 그를 추모하는 모임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인상은 후년까지도 그를 존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제 2절. 관직과 교유관계

1. 서울생활

이인상의 『능호집』에 “신해년(1731)내가 보산을 떠나 서울에 왔을 때 처음사 귄 벗이 양재였다.…(중략)…보산우인이 울며 적다.”20)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인상이 고향인 보산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 것은 1731년 22세 즈음의 일이다. 서울 생활을 하 는 동안 이인상은 덕수장씨(1714-1757)와 혼인하여 1737년 장남 영연(李英淵 20) 이인상, 「김상굉유서지(金良哉遺書識)」, 『凌壺集(능호집)』 第4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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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1760)을 낳았고 1744년 차남 영장(李英章 1744-1832)을 낳았다. 그리고 외직에 머무는 동안 삼남 영하 (李英夏 1748-1768) 와 사남 영집(李英集 1752-1776)을 낳았 다. 삼남과 사남 사이에 태어난 딸이 있는듯하나 정확한 생몰년은 전하지 않고 있으 며 후에 수원백씨 백동우에게 시집간 것으로 되어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병약하여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가. 교유관계

이인상에게 있어 서울생활은 넓은 교유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였으며, 그와 동시 에 그의 예술이 꽃을 피우게 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와 교유하게 되는 인물 은 『능호집』에 나오는 인물만해도 거의 1백여 명에 달하는데 특히 이윤영·이운영 형제, 임과·임매 형제, 송명흠·송문흠 형제, 김무택·김순택 형제, 신소·신익 형제, 황경 원, 오찬, 김종수, 홍재 등의 인물과 가깝게 지냈다.

○단릉 이윤영(丹陵 李胤永 1714-175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윤지(胤之), 호는 단릉(丹陵) 또는 담화재(澹華齋)이다.

이색(李穡)의 14대손으로 담양부사 이기중(李箕重)의 아들이며, 판서 이태중(李台重)의 조카이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와 더불어 평생을 보냈다. 평소에 단양 의 산수를 좋아하여 즐겨 찾더니, 부친이 담양 부사로 재직한 일을 계기로 구담(龜潭) 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단릉산인(丹陵散人)이라 하였다. 윤리에 돈독 하고 강직한 지조를 존중하여 이인상과 절친한 벗으로 지냈다. 성품은 후덕하고 명료 하였고, 큰아버지 태중의 영향으로 고기물(古器物)을 즐겼다고 한다. 노론의 문사들과 교유하며 지은 많은 시문이 『단릉유고(丹陵遺稿)』, 『단릉산인유집(丹陵散人遺集)』

에 실려 있다. 글씨는 특히 예서와 전서에 뛰어나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畵題)를 많이 썼다.

그림의 소재로는 모정을 중심으로 한 누각산수, 바위와 소나무, 연꽃 등을 주로 그렸다. 명대 오파(吳派)와 안휘파(安徽派) 화풍을 수용하여 문기 있고 깨끗한 표현을 구사하였다. 그의 그림은 이인상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나 필치가 한결 부드 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청호녹음도(淸湖綠陰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송초루도(經松草樓圖)>(개인 소장) 등과 같은 전형적 문인화풍의 그림과 <삼척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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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대(三陟凌波臺)>(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고란사도(皐蘭寺圖)>(개인 소장)와 같이 실경을 남종화풍으로 그린 것이 있다.

○송문흠(宋文欽 1710-1752)

조선의 서예가로 자는 사행(士行). 호는 한정당(閒靜堂)이며, 본관은 은진(恩津),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39년(영조 9) 사마시에 급제, 1739년 음보로 장릉 참봉이 되 었고, 이어 시직ㆍ부솔ㆍ종부시 주부ㆍ형조 좌랑을 거쳐 문의 현령에 이르렀다. 문장 과 시에도 뛰어났으며, 글씨는 특히 예서를 잘 써서, 전서의 이인상과 함께 조선 왕조 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불리었다.

○신 소(申韶 1714-1755)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중(成仲), 호는 함일재(涵一齋) 이다. 증조부는 신명규(申命圭), 조부는 1704년(숙종 30) 갑신춘당대문과(甲申春塘臺文 科)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대사간을 역임한 신심(申鐔)이고, 부친은 신사건(申思 建)이다. 모친은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승지와 강원감사를 역임한 광산(光山) 김진 옥(金鎭玉)의 딸이다. 신소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진하여 경전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 으나, 일찍 죽었다.

○오 찬(吳瓚 1717-1751)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경부(敬夫), 호는 청수재(淸修齋)이다. 증조부는 오숙(吳 䎘), 조부는 오두인(吳斗寅), 생부 오진주(吳晉周)와 서씨 사이에서 4남 중 4남으로 태 어났으며, 오이주(吳履周)에 입적되었다. 외조부는 이숙(李䎘), 처부는 심사주(沈師周) 이며, 이복형 대제학 오원(吳瑗)이 있고, 동생으로는 오완(吳琬), 오관(吳瓘), 오찬(吳 璨)이 있으며, 서제 오무(吳珷)가 있다. 35세 때 1751년(영조 27) 신미 춘당대시(春塘 臺試)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51년에 정언에 제수된 후 오찬은 징토를 엄히 할 것과 시비를 분명히 할 것 등을 상서(上書)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어서 사직(司直) 이종성(李宗城)이 흉역(凶逆)들과 어울린다는 상서를 계속 올리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피임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같은 해 내수사(內需司)를 파할 것을 청하자 급기야 영조는 진노하여, 오찬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성문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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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쫒아냈다. 후에 삼수(함경남도 삼수군)로 귀양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는데 관직 에 오른 지 1년 만이었다.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으로 관직에 오른 지 얼마 되지도 않 아서 변방으로 쫓겨 가 그곳에서 죽자 사람들이 가엾게 여겼으며, 경쇠(磬―)를 매우 좋아하였다.

○황경원(黃景源 1709-1787)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 유로(江漢遺老). 휘(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처신(處信)이고, 아버지는 통 덕랑 기(璣)이며, 어머니는 권취(權冣)의 딸이다. 승원(昇源)의 형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27년(영조 3) 1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이어 예문관검열·병조좌랑을 거 쳐,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추사(追祀)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성·대사간·대사헌 겸 양관제학 등의 청화직을 거쳐, 1761년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나, 고서(姑壻) 이정(李涏)의 상언사건(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합천으로 이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방환되었고, 이듬해에는 풍천 부사로 복관되어 영조가 죽기까지 12년 동안 호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 겸 대제 학과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등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모두 사양 하고 중추부판사로 죽었다.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예학에 정통하고 고문에도 밝아, 오원·이천보·남유용 등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춘추대의로 자임하여 1418년부터 1645년까 지의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하였고, 또 명나라 의종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의 전기인 『명조배신전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강 한집 江漢集』 이 있다.

나. 관직생활

이인상은 1736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몇 년 후인 1739년부터 관직생활을 시 작하게 되었다.21) 서얼출신이기에 얻은 관직은 비록 말단인 참봉이었으나, 맡은바 임 21) 오희상이 쓴 이인상 행장에는 26세에 진사가 되었다고 했으나 바로 북부참봉이 되었 다고 하지는 않았으며, 북부참봉에 제수된 시기는 몇 년 후인 1739년이라는 류승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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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에 성실하게 임하였다. 이후 몇 가지 관직을 맡게 되었는데22), 그 후의 관직이동에 대해서는 오희상의 행장과 황경원의 묘지명 그리고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기 록이 남아있다.

26세에 진사가 되고 북부 참봉에 보직되며, 전옥서 봉사로 옮긴 뒤, 사재감 직장을 거쳐 통례원 인의로 승진되고 다시 내자시 주부가 된 다음 사근도 찰방이 되어 외직으로 나가며, 영조 26년에 음죽현감이 되었는데 3 년 후 관찰사와 다투고는 관직을 버렸다. 23)

또한, 이 시기에는 변변한 집이 없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곤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1736년 진사시에 급제한 이인상은 1737년 가을 금강산 기행을 다녀왔다. 이때 지은 43수의 시들은 『동관록』으로 묶여 그의 문집에 수록 되어 있다. 그리고 함께 기행을 다녀온 사람들 중 주목이 필요한 사람은 임안세 (任安世 1691-?)이다. 훗날 이인상은 1752년 제작된 <구룡폭>을 임안세에게 선물하기도 하며, 1748년에 그와 함 께 유람했던 일화를 담은 시도 문집에 남아있다.

임안세 어른께서 내게 편지를 보내 삼동(경산도 안음)으로 유람을 가 자고 하셨다. 약속한 날이 되었는데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공 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 생각해 말을 재촉해 산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공께서는 이미 대나무 가마에 검은 소를 매어 오셨다. 이 때 공께서는 합주 군수로 계셨었는데, 한질을 앓다가 덜 나으셨는데도 목도 리만 두른 채 오셨던 것이다. 마주하여 환하게 웃고는 개울을 건너 사낙정 에서 쉬었다. 24)

의견에 따른다.

22) 『承政院日記』 영조 15년 (1739년 7월 28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인상이이 해 처음 관직을 받아 북부참봉이 되었고, 이후 1747년에 경상도 사근도 찰방으로 나가기까지 5개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어느 해에 어느 직책을 맡게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23) 吳熙常, 「凌壺李公行狀」,『老州集』 第20券 . 黃景源, 「李元靈墓誌銘」, 『江黃 集』 第17券.

24) 이인상, 『뇌상관집』권2 (한국어 번역은 류승민, 위의 논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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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년 7월 28일 드디어 이인상은 북부참봉에 제수되어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 게 된다. 영조 16년인 1740년 4월에 임금을 알현하여 직무에 대해 보고하는 윤대(輪 對)에 들게된다. 이 자리에서 이인상은 영조에게 업무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이에 정 확한 답을 한 것으로 보아 주어진 업무에 성실히 임했음을 알 수 있다. 25)

2년간 북부참봉으로 근무하던 이인상은 1740년 6월 종8품인 사옹원봉사(司饔院 奉事)에 임명되었으나 서얼신분으로 인해 20일 후 환차 당했다.26)

전옥서에 근무하던 이인상은 열심히 관직 생활에 임했으나 여전히 집을 마련하 지 못해 이사 다니느라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벗 신소와 송문 흠이 남산에 집을 마련해 주었고 송문흠은 이집에 ‘능호관(凌壺觀)’이라는 이름을 붙 여주었다.27) 능호관을 조성한 이후 이인상은 벗들의 집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뱃놀이 와 여행을 하는 등 더욱더 활발한 교유활동을 펼쳤다. 1743년 가을에는 송문흠 등 여 러 벗들과 함께 단양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1744년 겨울에는 오찬의 집에서 한 달 동안 벗들과 독서회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벗들과 함께 종종 이러한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에 대한 글과 그림이 남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뒷장 Ⅳ.능호 관 이인상의 남종문인화에서 논의하겠다.

갑자년 겨울 오경부(오찬)와 그 두 명의 조카 재순, 재유가 계산동에 서 독서를 했는데, 이윤지(이윤영) 김유문(김순택), 윤자목(윤면동)과 인상이 모두 이 모임에 왔다. 책을 들고 물으러 온 아이가 세 명이며 자목은 『논 어』를 유문은 『맹자』를 나머지 사람들은 『서전』을 읽었다. 조반을 먹 고 함께 『주서』를 일고 거의 달이 뜨고서야 끝났다.28)

이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이인상은 즉석에서 <북동아회도>를 그렸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고, 김순택은 모임에 대한 글을 남겼다. 김순택의 글은 현재 전하는 작 품 중 <아집도>와 유사하여 <아집도>가 <북동아회도>와 연관을 지닌 것으로 생각

25) 1740년 4월 11일『승정원일기』.

26) 1740년 6월 7일 『승정원일기』.

27) 유승민의 석사논문에서 능호관 마련시기를 족보와 이전 연구성과의 1750년에서 1741 년으로 수정한 바 있다.『뇌상관집』에 남겨진 시를 살펴보면 1741년 겨울 이인상은 남산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집을 ‘능호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28) 이인상, 『뇌상관집』권2, 「계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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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갑자년 11월 북산 아래에서 독서를 하다가 작은 그림을 그리고 기록 한다. 촛불 아래 안석에 기대 앉은 사람이 오경부(오찬)이고 오경부와 마주 앉은 사람이 이윤지(이윤영) 이며 앉아서 단정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사 람은 이원령(이인상)이다. 안석 위에는 문왕의 제기와 닮은 오래된 솥, 오래 된 소라 술잔과 검, 붓통이 각각 하나씩 있다. 이윤지의 왼쪽에 뒷짐을 지 고 서서 돌아보고 있는 사람은 김유문(김순택)이다. …… 모두 안석이 셋, 책이 몇질, 그림 두루마리가 셋, 벼루가 하나이며 병풍 남쪽에 파초와 대나 무 화분이 하나씩이다. 차 달이는 화로를 안고 남쪽 난간 아래 있는 사람은 어린 사내종 태휘이다. 순택이 쓰다.29)

1742년 3월, 이인상은 종6품인 종부사직장(宗簿司直長)으로 승진했으나 2년 전 사옹원 봉사 때와 같은 이유로 또 다시 환차 당했다. 이듬해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를 겸직으로 맡았고 36세가 된 1745년까지 사재감(司宰監에) 있다가 내자시주부(內資 寺注簿로 자리를 옮겼다. 이듬해 4월 다시 윤대 하게 되었는데 이인상은 이 자리에서 정확한 업무보고로 영조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다. 내자시주부가 이인상의 마지막 경 관직이었다.

1746년은 이인상에게 있어 기록할만한 중요한 일 이 있었던 해로, 이인상의 회 화관 및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관아재 조영석(觀我齎 趙榮祏1686-1761)을 만나 게 된다. 조영석은 노론의 인사들 가운데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였다. 민우수가 이인 상의 학문·사상적 스승이었다면, 조영석은 이인상의 예술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인상은 조영석의 집인 관아재에 방문하여 1709년 관아 재에서 있었던 노론인사들의 모임을 기록하며 그린 <지산도(芝山圖)>초본을 구경하 며 그날 모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능호집』의 기록30)처럼 조영석이 <지산도>

의 초본을 이인상에게 주었다는 것은 조영석의 화풍이 이인상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중국의 화보를 접하게 되는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 다.

29) 이글은 오재순의 문집에 실려 있다. 「北洞雅會圖後識」, 『醇庵集』券6. (한국어 번역 은 류승민, 위의논문 p. 128.)

30) 이인상, 『능호집』권4, 「관아재지산도초본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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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외직생활

이인상의 첫 외직인 사근도(沙斤道) 찰방의 재임기간은 1747년 7월부터 1749년 8월까지 만 2년의 기간이었다. 이 때 이인상은 가족은 두고 서울에서 홀로 내려와 객 지에서의 외로움을 느꼈다. 당시 그의 심정을 삼촌 이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느낄 수 있다.

조카는 병세도 차츰 좋아지고 먹고 자는 것이 모두 정상입니다. 다만 객지생활의 쓰라림을 느낄 뿐입니다. 온종일 입을 다물고 서로 얘기할 사람 도 없고 또한 산책할 만한 곳도 없사오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31)

이러한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이인상은 없는 집안 형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객지에서의 관직생활을 계속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질 방도를 보 이지 않는 집안 형편에 괴로워하는 이인상의 심정이 다음의 편지글에 드러나 있다.

추석에 쓸 제물이 형편없게 되었사오나 사정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다시 힘을 쓰겠습니다. …… 날씨가 차츰 추워지는데 방에 제대로 불을 때지 못할 터이니 병환이 쾌차되기를 쉽사리 기대할 수 없사온즉 이 를 어찌하면 좋을런지요?32)

추위에 요양 중 매우 건강하시다 하오니 일변 놀랍고 일변 다행스러 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서울에 계신 여러 집안에서 고생하시는 형편은 생 각만 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아무리 더운방에서 거처하고 배부르게 먹고 지 낼지라도 옛 사람이 이른바 “외로운 그림자가 하늘 끝에 나그네로 돌아다 니는 마음이니 벼슬살이가 무엇이 좋으랴?”라는 말이 곧 저의 심정입니 다.33)

또한 이인상은 외직생활 중 공무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31) 임창순 역, 「李麟祥의 手簡」, 『美術資料』, 국립중앙박물관, 1970, p. 31 ⑮.

32) 임창순 역, 「李麟祥의 手簡」, 『美術資料』, 국립중앙박물관, 1970, p. 31 ⑮.

33) 임창순 역, 「李麟祥의 手簡」, 『美術資料』, 국립중앙박물관, 1970, p. 31 ⑯.

(27)

말단 지방관으로서 관찰사영이나 통제영 등의 상관과 부딪치는 문제는 강직하고 지조 높은 사대부였던 이인상에게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삼촌에게 보낸 편지 중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월리전을 받아 낸다는 것은 남의 등을 쳐먹는 놈들이 저들의 욕심에 차지 않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간 관청하인을 조종하여 관리를 유인 위협하 려는 것이오니 그 버릇이 말할 수 없이 나쁩니다. 작년 이후로 무리하게 늘 어놓은 빚을 가지고 각역의 물자를 긁어 먹은 것이 2천여냥이 넘었고, 금년 정월부터 5월 이전까지의 빚이 또 4~5백냥이 되는데 이것은 모두 관청하인 들과 공모해서 거둬들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사실을 영에 보고하여 곤장 을 때려서 죄를 다스리려 했습니다만은 사건이 전임관과 관련되기에 꾹참 고 있었던 것인데, 이제 듣자온즉 이번에 올라간 하인이 또 저의 집 여편네 에게 협박하여 여러 차례 우리 집안을 시끄럽게 하였다니 이런 해괴하고 통탄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관에 돌아가서 이대로 용서 할 수가 없으니 곤장을 치려 합니다.34)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인상은 1747년 7월 사근찰방으로 부임하여 2년 뒤인 1749년 8월에 임기를 다 채우 고 함양을 떠났는데, 훗날 같은 곳으로 부임한 이덕무(李德懋 1741-1793)35)가 전임자 들을 언급하는 글에서 이인상을 가장 이름 있는 사람으로 뽑았다.

능호 이인상이 사근역 찰방이 되었을 때에 설치 한 것이 많고 마음가 짐을 공명하고 염직하게 하여 관리들을 단속하였다. 내가 늙은 아전에게 오

34) 임창순 역, 「李麟祥의 手簡」, 『美術資料』, 국립중앙박물관, 1970, p. 31 ⑯.

35)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가지를 형성한 이 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 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이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 (四書)에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 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발탁되 기도 했다. 박물학에 정통한 이덕무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 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28)

육십년 이래로 어떤 관원이 가장 훌륭하게 다스렸느냐고 물으니 그 아전이 능호라고 답하였다. 대개 서화와 문사에 종사하는 사람은 거의가 사무를 알 지 못하는 자들이 많으니, 미불과 예찬같은 사람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능 호는 이치를 겸할 수 있었다.36)

사근도 찰방 재임 기간 동안 벗인 이윤영, 송문흠, 김무택이 이곳을 방문하여 이인상을 위로 하였다. 1749년 8월, 이곳을 떠나기 직전 이인상은 삼년에 걸친 찰방 생활을 그만두는 소감을 담은 시를 남겼는데, 이 시에서 그간의 외로움과 벗들에 대 한 그리움이 엿보인다.

8월, 달빛은 밝기만 한데 역 남루에 올라 북소리를 들었다. 나이든 여 종이 술을 가지고 와 권하기에 너덧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이곳으로 온 뒤, 술을 조심했는데 처음으로 취했다. 큰 길까지 걸어가자 도랑물 소리만 요란 한데 사방에는 인적없이 고요했다. 장난삼아 종놈을 불러 백마 두 필을 내 오게 했더니 마구가 뜰에 가득 반짝였다. 또 걸어 수수정에 닿아서는 노랗 게 핀 국화를 돌아보자니 문득 친구 송문흠이 떠올랐다.37)

이렇게 외로웠던 외직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인상은 한동안 벗들과 회 포를 푸는데 시간을 보냈다. 1750년 4월 이인상은 마지막 관직인 음죽현감(陰竹縣 監)38)에 임명되어 그해 가을에 부임 하였다. 이 기간 동안은 기록이 전하지 않아 그 의 행보를 알 수 없다. 이후 3년만인 1752년 관찰사영과의 관계가 나빠져 그만두었다 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39)

36) 이덕무, <소근방승선생안>, 「한죽당섭필」상, 『청장관전서』권68.

37) 이인상, 『雷象管集』券之三.

38) 음죽은 현재 경기도 이천 장호원읍 선읍리 일대

39) 황경원, 『江潢集』券17, 「李元靈墓誌銘」.“음죽현의 현감이 되었다. 법을 받들어 권 귀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으나 3년 뒤 관찰사를 거스르고는 관직을 버리고 떠 났다.(監陰竹懸. 能奉法, 不撓權貴. 居三年, 忤觀察使, 棄觀去.)”

(29)

제 3절. 은거 시절과 말년

이인상은 일찍부터 고향인 보산으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단양(丹陽) 같은 곳에 서 은거(隱居)하여 살고자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서생살이 10년 동안 주자를 읊조리고, 남쪽밭에 기장이나 심었지만 띠풀만 무성해.

겨울산 눈에 갇혀 난초 둔 방에나 들어 있다가,

봄물 속에 꽃잎 어지러운 못생긴 돌다리나 거닐어 보네.

다시 뭇 속물들을 벗어나 날짐승·길짐승 따라가리니, 때맞춰 세상을 기롱하며 어부나 따라야지.

자네와 귀담(龜潭)가에서 탁족하길 기대하리니,

갈필에 먹을 적셔 너럭바위에 「대목」이나 써 보세.40)

이인상은 마지막 관직이었던 음죽현감 시절에 관직생활은 별 보람이 없고 매력 이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오직 은거에 관한 생각 뿐 이었던 모양이다. 1751년 5월 삼 촌 이최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근자에 들은즉 보산 서북쪽 용문사 근처에 회북동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바깥쪽은 좁고 안에는 넓으며 총석이 사면에 둘러 있고 물이 맑고 깊은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 하오니 은거생활에 알맞은 곳 인 듯 합니다. 지역이 선조의 산소와도 가깝사오니 뒤에 만일 봉급에서 남은 돈이 생기거든 집을 짓고 팔 밭을 이룰 수 있는 자금을 만들어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병이 좀 호전되면 간다할지라도 온 가족이 다 모여살 기는 어려울 것이고 양근은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이 많습니다.41)

그러나 이인상은 보산이 아닌 이윤영이 자리 잡고 있던 단양에 작은 은거처를 마련하여 ‘다백운루(多白雲樓)’42)라 이름 붙였다. 이것이 음죽현감에 재직 중이던 1751 년의 일이다. 그러나 끝내 이인상은 은거의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에 대한 황경원 의 글이 남아 있다.

40) 이인상, 『雷象管集』券之一.

41) 임창순 역, 「李麟祥의 手簡」, 『美術資料』, 국립중앙박물관, 1970, p. 29, ⑥.

42) 도연명의 「은거시」에서 일절을 따 지은 이름

(30)

(영조)26년에 음죽현감이 되어 법을 지키는데 권귀에 흔들림이 없었 으며, 3년 후 관찰사와 다투고는 관직을 버렸다. 단양군에는 이름난 산수가 많은데 군은 배를 타고 옥순봉에서 송문흠을 따라 영용성에 들어가 구심 남쪽에 정거를 짓고 그 루를 다백운이라 하고 장차 처자를 데리고 돌아와 은거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났다.43)

또한, 이인상이 단양에 은거할 뜻을 이루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늙은 어머니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윤영과 오희상의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장차 세상을 버리고 홀로 살아갈 것을 마음 먹었으나 노친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얼마 안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44)

구담과 옥순봉 사이에는 적성산과 마주보는 루가 있었으니 벗 원령이 은거할 곳이다.…그러나 원령의 집은 가난하여 돈이 없어 산을 살 수 없었 다.…더욱이 원령의 집에는 그 뜻에 따라 멀리 갈 수 없는 노친이 계셨 다.45)

음죽현감에서 사직한 후 사망까지의 10년간은 이인상에게 희비가 교차하는 시 간들 이었다. 희망 없고 자존심이 상하는 관직생활에서 벗어나 벗들과 함게 풍류를 즐기며 생활 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가난과 지병에서 벗어 날 수 없었 고, 꿈꾸던 은거 생활마저 할 수 없었으며 각별했던 벗들의 죽음과 이별이 연속되어 나타났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1750년 유경명이 죽었고, 이듬해 오찬이 북쪽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오찬이 떠날 때에 이인상은 몸이 아파 몸져 누워있었고 이윤영 마저 단양에 있어 그 를 송별하지 못했던 탓인지 이인상은 벗의 죽음에 한없이 통곡 하였다.46) 그리고 이 43) 황경원, 「이원령묘지명(李元靈墓誌銘)」, 『강한집(江漢集)』제17권.

44) 오희상, 「능호이공행장(凌壺李公行狀)」, 『노주집(老州集)』제20권. “…若將遺世獨往 者 而親老未果 未幾疾卒…”

45) 이윤영, 『단릉유고(丹陵遺稿)』제 11권.

46) 이인상, 『능호집(凌壺集)』제4권, p. 9.

(31)

듬해인 1752년에는 절친한 벗인 송문흠이 사망하였다.

1753년 이최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본인도 지병이 여전하고 처도 병이 점점 더해가는 데다가 딸도 1년이 넘도록 위독한 상태라고 할 정도로 집안에 우환이 그치 지 않았다.47) 또한 막내아들을 낳은 후에는 “복없는 사람은 자식을 많이 두는 것도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닐세”48)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1755년에는 ‘능호관’을 마련해 주었던 신소마저 세상을 떠났다. 1757년에는 아내 인 덕수장씨와 스승으로 섬겼던 민우수가 타계했다. 이듬해에는 이윤영마저도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에는 이인상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여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저 병상에서 시를 지어 아이들에게 보여주거나 할 뿐이었다.49) 이듬해 1760년 8월 15 일 향년 51세에 이인상도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안산의 언덕에 묻혔으나, 2년 후 부 인인 덕수장씨와 함께 경기도 포천으로 이장되었다.

같은 해 장남 영연이 사망하여 차남인 영장이 1779년 부친의 유고를 모아 문집 으로 편찬하게 되었다.

이인상의 현실적 삶과 처지는 매우 불우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인상의 일상 생활과 정신세계는 이상적인 문인의 삶을 실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로인해 그의 예술세계는 진정한 문인화의 경지에 이르러 당대와 후대에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47) 임창순 역,「李麟祥의 手簡」, 『美術資料』, 국립중앙박물관, 1970, p. 30, ⑨.

48) 임창순 역,「李麟祥의 手簡」, 『美術資料』, 국립중앙박물관, 1970, p. 31, ⑭.

49) 이인상, 「炳枕漫承書示兒輩」·「秋日使兒輩拈韻共賦」,『능호집』제2권, p. 44.

(32)

제 3장. 남종문인화의 의미와 조선으로의 유입

제 1절. 남종문인화의 개념과 역사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 문인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 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화풍이 유입되고 성행하였던 조선시대 는 물론이고 현대까지도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에서 유사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문인화는 남종화와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합하여 남종문인화(南 宗文人畵)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중국의 문인화와 구별을 두기위해 각 각 ‘선비그림’과 ‘남화(南畵)’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문인화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문인화(文人畵)는 동아시아 회화사 연구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중 의 하나이다. 문인화는 대상의 형사(形寫)만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사의(寫意)적 예술 형식으로써 외적인 것보다 내면적인 내용을 중요시하여 작품을 보면 작가의 인품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옛 문사들은 학식과 인품이 뒷받침되면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을 남종화의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인화’라는 용어의 첫 등장은 명말청초의 서화가인 동기 창(董其昌 1555-1636)으로 부터50)이다. 동기창은 그의 저서인 『화안(畵眼)』,『용대 집(容臺集)』등에서 문인화에 대해 ‘文人之畵’라 칭하며 언급 하였다.

문인의 그림은 왕우승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로 동원․거연·이 성․범관이 적자(嫡子)가 되고, 이용면․왕진경․미남궁 및 (미)호아는 모두 동원․거연으로부터 배웠다. 원의 사대가인 황자구․왕숙명․예원진․오중 규에 곧바로 이르기까지, 모두 正傳이고, 우리왕조(明)의 문징명과 심주는 또 멀리서 의발을 접하였다. 마원․하규 및 이당․유송년과 같은 사람은 또 대이장군(大李將軍)의 화파이니, 우리들이 배워서는 안된다.51)

50) 남북종론 최초 제창자를 두고 진계유, 막시룡, 동기창등에 관한 논의 가 있었으나. 남 북종론 최초의 제창자는 동기창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한정희, 「문인화의 개념과 한 국의 문인화」,『미술사논단』4, 한국미술연구소, 1997, p. 42에서 재인용.)

51) 董其昌,『畵眼』, 제 24항 “文人之畵, 自王右丞始, 其後董源巨然李成范寬爲嫡者, 李龍眠 王晉卿米南宮及虎兒, 皆從董巨得來, 直至元四大家, 黃子久王叔明倪元鎭吳仲圭, 皆其正

(33)

문인화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이 글에서는 문인화의 개념 설명이 아니라 단 지 문인화의 계보만을 논하고 있으며, 마지막 구절에 “마원․하규 및 이당․유송년과 같은 사람은 또 대이장군(大李將軍-이사훈)의 화파이니, 우리들이 배워서는 안된다.”

라고 언급한 것을 보아 대이장군의 화파에 비교하며 문인화파의 우월성을 이야기 하 는 것 같다. 또 다른 동기창의 글에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선가에 남종과 북종 두 종파가 있으니, 당나라 때 처음 나뉘어졌다.

그림의 남북 두 종파도 당나라 때 나뉘어졌는데, 그 사람(의 출신)이 남북 이라는 것은 아니다. 북종은 이사훈 부자의 착색산수가 전해내려와 송의 조 간 · 조백구 · 조백숙이 되었고, 마원 · 하규의 무리에 이르렀다. 남종은 왕 유가 처음으로 선담을 사용하여 구연(拘硏)의 법을 일변시켰는데, 그것이 전하여 장조 · 형호 · 관동 · 동원 · 거연 · 곽충서 · 미가 부자(의 화법)가 되었으며, 원의 4대가에 이르렀다. (이것은) 육조 이후에 마구 · 운문 · 임 제 등의 자손이 성하고 북종이 쇠미해진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왕유가

“구름에 쌓인 산봉우리와 바위 모습은 멀리 천기(天機)에서 나오고, 필의는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조화에 참여하였구나”라 한 것과 소식이 <오도자와 왕유가 그린 벽화에 대해 찬함>이라는 글에서 “나와 왕유(그림)에 대해서 는 아무런 문제삼을 것이 없다”라 한 것은 ‘지언(知言)’이라고 할 것이다.52)

이 글은 이미 잘 알려진 남북종론에 대한 글로, 동기창이 중국산수화의 역사를 선가의 남종선과 북종선에 빗대어 주창한 것이다. 선종의 북종과 남종은 당 중기 이 후에 양자강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어 발전하였기 때문에 지역성이 내포되 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동기창의 저서 화안의 27항에 남북종론의 구분 기준 이 “그 사람의 출신이 남북이라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동기창의 회화 傳, 吾朝文沈, 則又遠接衣鉢, 若馬夏及李唐劉松年, 又是大李將軍之派, 非吾曹當學也.”

(한국어 번역은 조송식 외 역, 『화안』, 시공사, 2003, p. 76.)

52) 董其昌,『畵眼』,제 27항 “禪家有南北二宗, 唐時始分, 畵之南北二宗, 亦唐時分也. 但其 人非南北耳. 北宗則李思訓父子着色山水, 流傳而爲宋之趙幹趙伯駒伯驌, 以至馬夏輩, 南 宗則王摩詰始用渲淡, 一變拘硏之法, 其傳爲張璪荊關董巨郭忠恕米家父子, 以至元之四大 家, 亦如六祖之後, 有馬駒雲門臨濟兒孫之盛, 而北宗微矣. 要之摩詰所謂雲峰石迹, 逈出 天機, 筆意縱橫, 參乎造化, 東坡贊吳道元王維畵壁亦云, 吾於維也無間然, 知言哉.” (한국 어 번역은 조송식 외 역, 『화안』, 시공사, 2003, pp. 83-85.)

(34)

구분이 지역적인 문화개념으로 산수화와 선종을 연관 시킨 것은 아니다.

동기창은 불교 선종(禪宗)의 수련방식과 역사적인 전개 이 두 가지를 중국의 산수화가 남북종으로 나뉘는 근거로 제시하였다. 선종은 당 중기 이후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수련방식에 따라 혜능의 남종선과 신수의 북종선으로 분파되어 서로 경 쟁하면서 발전하다가 명중기 이후 북종선은 쇠퇴하고 남종성만이 융성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산수화의 발전과정에서 송,원대를 거쳐 명대에 이르러 절파(浙派)가 너무 거 칠고 격정적인 것에 대한 비난을 받은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를 거쳐 남영(藍瑛 1585-1664)에 이르러 문인화적인 취향으로 변화하여 결국 절파가 소멸하게 되는 상황 을 동기창은 중국 수묵화와 선종의 역사적인 전개가 상응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당 중기 산수화는 왕유의 수묵산수화와 이사훈의 착색산수(청록산수)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왕유의 수묵산수화는 우연적인 흥취를 중요히 여기면서 이의 즉각 적인 표현을 강조하기 때문에 한 번에 초월하여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들어서는 남종 선의 돈오와 비슷하고 이사훈의 착색산수화는 가릉산수에 대한 오도자의 일화53)에도 나타나듯이 그림을 그리기 전 수많은 밑그림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하므 로 매우 금욕적이고 고통스러우며 긴 시간을 들여 점차적으로 수행을 쌓아야 비로써 보살이 되는 점차적인 수련방식인 점오와 비슷하다는 것이다.54)

또한, 이글에 의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문인화는 기본적으로 구륵법보다는 선염 법을 사용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인화의 확실한 개념에 대한 설 명은 빠져있다. 그리고 남·북종화의 구분이 인물의 출신이 남쪽인지 북쪽인지에 의해 나누어진 것은 아니라는 언급만 있을 뿐 남·북종화의 정확한 구분의 기준이나 근거에 대한 설명은 빠져있다. 동기창이 화가를 남·북종으로 구분해 둔 것을 살펴보면 비직 업적이고 여기적인 문인출신의 화가들은 남종으로, 문인출신이 아니거나 직업적인 화 원 출신화가들을 북종으로 구분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구분의 기준은 한가지 가 아닌 신분과 화풍의 종합적 사고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조백숙, 조백간 형 제는 북송 종실집안 출신이므로 사대부 화가들이었지만 기법적으로 채색산수를 즐겨

53) 朱景玄, 『唐朝名畵錄』, 「吳道玄」 당 현종이 오도자와 이사훈에게 가릉산수를 대동 전에 그리라고 하자 오도자는 가릉강의 삼백여리나 되는 산수를 하루 만에 다 그렸 고, 이사훈은 수개월 지나서 비로소 완성하였다고 한다.

54) 조송식, 「董其昌대의 회화사관 및 예술사상-南北宗論를 중심으로」, 『美學』제36집, 한국미학회, 2003, pp. 51-5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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