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중국의 문인화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37-40)

중국의 문인화는 북송시대부터 청대까지 즉 11세기부터 18세기 까지 오랜 시간 에 걸쳐 전개되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이론과 실제 작품에서 표현법이 시기별로 달 랐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화단에 전래될 때에는 순차적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비교 적 짧은 시간동안 한꺼번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그 표현기법과 이론 간의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때문에 시기별로 나누어 중국의 문인화가 어떻게 변화되어 갔 는지를 먼저 살펴 본 후 우리나라에 유입된 문인화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문인화가 시작된 북송대(北宋代)에는 사실적인 측면보다는 작품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형사 즉 형태의 사실성에 너무 치중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림을 형사(形似)로서 논한다면, 그 식견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

시를 짓는데 반드시 이렇게 지어야 한다면 진정 시를 아는 이라고 할 수 없다.

시와 그림은 본래 하나이니,

천공(天工)하고 청신(淸新)해야 하는 것이다. 60)

여기에서 소식은 실제 사물의 자세한 모습을 드러내는 형사적인 측면보다는 작 품 전체에서 느껴지는 천담스러운 미감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적이거나 파격 적인 표현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소식과 함께 ‘평담천진’을 주장했던 미불 또한 작 품의 전체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북송대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표현기법이나 복 고적인 경향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시기 작품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묵죽화(墨竹畵), 미법산수(米法山水) 등 새로 운 장르의 출현이다. 문동과 소식의 묵죽화는 모두 서예의 기법으로 그린 것 인데 윤 곽선을 그리고 안을 채색으로 채웠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다. 미법산수는 간 결함과 운치를 함께 보여주는 것으로 이전의 곽희나 이성의 방식과는 매우 다른 것이 60) 소식, 『소동파전집』전집 권16. (번역은 한정희,「문인화의 개념과 한국의 문인화」참

고.)

다. 육조나 당대 산수의 세부표현을 북송대의 공간법에 담는 방식은 문인들의 취향을 반영한 새로운 문인산수화의 상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남송대(南宋代)로 넘어오면 화단에서 문인화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으나 북송시 대 문인화의 전통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불의 아들인 미우인이 새로운 미법산 수의 전통을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간략한 미불의 미법산수를 북송대의 대관산수와 결합시켜 미법식 대관산수를 남겼는데, 풍부한 먹의 사용과 운치는 수묵문인화의 새 로운 경지 였다. 미우인은 이런 것을 ‘묵희(墨喜)’라 칭하였는데 먹을 즐겁게 희롱한다 는 의미로 문인적인 자유스러움을 상징한다. 남송대에는 문인화보다는 화원화가 강세 를 보였는데, 이것은 화원이 안정되어 마원, 하규 같은 영향력있는 화원화가가 배출되 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몽고족이 세운 원(元)에서는 화원의 필요도가 낮아 왕실의 초상화나 수렵 도등을 그리는 정도로 활동이 줄어들게 되었다. 몽고족들은 정치적으로 한족들을 규 제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국문인들은 강남지방에 머무르며 서화나 시를 읊고 소일 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화원의 부재에 따른 화단의 공백을 이들이 제작한 문 인화가 채운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대의 화가들은 모두 이전시대의 화가들과 같이 고화의 여러 요소를 그 시 대의 공간법에 담아 그린 복고적인 취향을 구사했다. 그들이 살리고자 했던 옛 전통 은 당대의 채색산수법, 북송대 이성과 곽희의 화법, 오대 동원과 거연의 화법 등이었 다. 이론상으로도 조맹부는 ‘고의’를 논하며 복고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예찬은 ‘한기’

라 하여 문인의 초일한 내면세계를 형상화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다. 또 황공망은 동원의 화풍을 양식적으로 연구하고 화풍의 특색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했다.

원대의 복고적 이론과 더불어 실제 작품으로도 복고적 회화가 등장하였다. 전선, 조맹 부가 이성과 곽희를, 그리고 원말사대가로 불리우는 오진, 왕몽, 예찬, 황공망이 동원 과 거연의 화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인화를 제작했다. 특히 이 원말사대가의 작품들 은 후에 명대 오파와 송강파 그리고 청대 안휘파와 정통파화가들의 조류형성에 기초 가 되었으므로 중국문인화의 큰 흐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원대에서는 아직 체계적이고 분석적이지는 못하지만 회화이론과 실제에서 모두 복고 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명대(明代)로 들어서자 원대에 시작된 복고적인 경향은 보다 강화되었고 심주와

문징명을 거쳐 더욱 다양해졌다. 특히 문징명은 채색산수를 좋아하여 남송풍 청록산 수를 즐겨 그리며 수묵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문인화의 개념이 어 느 정도 성립된 단계였기 때문에 이제는 기법에 대한 문제와 문인화의 계보를 형성하 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앞서 언급했던 동기창의 남북 종론을 들 수 있다. 동기창에 이르러 문인화는 이론과 회화창작면 모두에서 극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발전의 정점과 동시에 쇠퇴가 시작 되었는데 그가 제 시한 방작(倣作)은 이후 패턴화 되어 창의력의 상실을 도래하였다. 또한 명중기부터 문인화의 상품화 및 상업화가 진행되어 명말기에 이르자 문인화를 직업화가들이 쉽게 모방하였는데 그 길을 터준 것이 방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직업화가, 승려 화가, 사대부화가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화풍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문인화가 되고 말았다.

청대(靑代)에 들어서는 동기창의 방작을 따르는 화가들이 더욱 증가하여 문인화 의 극전성기를 맞게 되었지만 창의성과 개성이 떨어지는 방작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방작을 지양하고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작품을 지향하는 화가들이 나타나 게 되었는데 소위 개성화파라 불리우는 팔대산인, 홍인, 석도와 같은 화가들이다. 이 들은 실제경치에서 영감을 받아 그리는 실경산수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얻는 사생화 등 방작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그들 그림의 목적이 비상업적 이었다는 점, 필묵의 미와 문기의 표출을 중요시했다는 점 등에서 이전 문인화의 특 성을 나타내고 있어 문인화의 계보를 이어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직업화 가들 또한 전통적 문인화풍을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대부터는 문인화에 대한 구 분이 애매해진 것이다.

결국 청말기에 가면 문인화와 비문인화의 구분은 별의미가 없어지고 거의 모든 그림이 매매의 대상이 되어 순순한 문인화는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 을 ‘신문인화61)’라 지칭하는 견해도 있으나 어찌되었건 전통적 문인화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겠다.

61)신 문인화라는 용어의 등장은 청강 김영기, 『동양미술론』,우일출판사 , 1980, pp.

83-84.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37-40)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