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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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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_7 <수하한담도> 33.7×59.7㎝, 1739, 지본수묵, 개인소장.

먼저, 이인상의 집대성기 회화중에 가장 먼저 살펴볼 작품은 제작시기가 1739 년으로 추정되는 <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그림_7)이다. 이 그림에는 여러개의 제시 가 적혀있다. 그중 이인상이 이 그림을 그린까닭이 적혀있는데 이것을 보면 이인상이 가깝게 지냈던 벗인 임매(任邁 1711-1779)에게 준 그림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임매는 내 그림을 애써 받고는 그의 너그러운 성품 때문에 다른 가져 가도 상관 않으니 내 그림이 하나도 남지 않아 이번에는 그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임매가 내 소심함을 비웃을 것을 무릅쓰고 이를 쓴 다.78)

이인상의 문집에 임매와 만났던 기록이 1739년과 1741년 사이에 몇 번 확인이 되는 데, 그 중 1739년 7월15일의 기록이 <수하한담도>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화폭의 양옆에 큰 바위가 있고 가운데에는 바위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 두 그루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두인물이 마주 앉아 있으며 종 으로 보이는 인물이 수행하고 있다. 앞선 작품의 날카롭고 각이선 바위 표현법과는 다르게,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필치로 바위를 표현 하였고, 수목의 표현법 또 한 담묵을 이용해 무성한 이파리를 표현하였다.

이인상이 벗들과의 아회를 묘사한 작품과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기록으로 전해 지는 <북동아회도(北洞雅會圖)>1744년 이인상과 여덞명의 모임을 그린 작품이다. 아 쉽게도 <북동아회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다행히 김순택과 이인상이 이날 에 대해 남긴 기록과 <북동아회도> 유사한 모습으로 생각되는 작품 <아집도>(그림 _8) 가 남아 <북동아회도>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갑자년 11월 북산 아래에서 글을 읽으며 작은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적는다. 촛불 아래 안상에 기대앉은 이는 오찬이고, 오찬과 마주앉은 이는 이윤영이며, 앉은 채 단정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이는 이인상이다. 안상 위에 오래된 정이 있는데 문왕의 존이를 본뜬 것과 오래된 나배, 검과 붓통 이 하나씩 있다. 이윤영의 왼쪽에는 뒷짐을 지고 서서 막 돌아보려는 이가 김순택이며, 이인상을 모시고 선 아이는 김순택의 아들 원대(遠大)다. 매화 아래 앉아 있는 두 사람과 책을 들고 오찬을 향해 서있는 이는 그의 조카 오재순(載純), 자정(子正-麟男)이다. 대게 상이 셋, 책 몇 질과 그림이 세 점, 벼루가 하나 있었고, 병풍 아래로는 파초와 대가 각각 화분에 하나씩 있다. 화로를 끼고 남쪽난간 아래에 있는 아이는 몸종 태휘이다. 순택이 쓰 다.79)

78) 任邁伯玄 心 (번역문은 최순우, 『한국회화』3권, 도산문화사, 1981, p. 130참고) 79) 오재순, 「北洞雅會圖後識」, 『醇庵集』券6. (번역은 유승민, 위의논문 참고)

이 글은 1744년 갑자년에 쓴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인상이 1746년 남긴 기록에 서도 이와 같은 날의 기록인 것으로 보이는 글을 찾을 수 있다.

갑자년 겨울, 오찬이 조카 재순과 재유를 데리고 계산동에서 글을 읽 었다. 이윤영, 김순택, 윤면동과 내가 함께 모였고, 책을 들고 문안 온 아이 들이 셋 있었다. 윤면동은 논어를, 김무택이 맹자를, 나머지는 서경을 읽었 는데 조반을 먹고는 다함께 주서 몇편을 읽었다. 한달을 넘겨서야 끝이 났 는데, 골짜기가 깊어 하루가 고요하며 오가는 사람이 적었다. 다만 송문흠 과 김무택이 한번 밤중에 찾아 왔었고 권형숙은 이틑날 떠났다. 오성임은 병으로 모임에서 빠졌으나, 간혹 날을 골라 오가곤 했다. 또 매감과 죽석을 자리 옆으로 옮겨 놓고 화분에 심은 파초를 그에 맞추면, 집안이 매우 따뜻 했는지 파초잎이 푸르러 시들지 않았다. 항아리에 붕어 대여섯 마리를 길렀 는데 활발히 움직이는 모습이 구경할 만했다. 향로와 성검, 문방아구를 다 갖추고 때때로 품평하다가 해를 넘기기도 하여 책읽기가 간혹 끊어지기도 하며,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웃기도 했다. 그러나 강독하는 즐거움은 이 모임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쉬는 날에는 당세의 일, 벗의 사귐, 출처의 의 리를 강론하며 통절하게 토론하며, 속내를 다 드러내고는 했다. 그래서 벗 과 사귐에 관한 것이나 언론의 이합(離合) 같은 것들이 모두 활발하게 다루 어져, 이 모임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대개 뜻을 같이 하는 이드로가 한 방 에서 지내면서 그들과 오래 같이 기거하게 되니 더욱 그들의 꾸밈없는 모 습을 보았다. 두 해가 지난 병인(丙寅)년, 인상이 그때 얻은 시 몇 편과 그 모임의 지(識)를 남긴다.80)

글을 남긴 시기는 1746년 이지만, 두 해가 지난 병인년에 남겼다고 했으니, 글 의 내용은 1744년의 일을 기록 한 것이다. 이글을 근거로 보아 모임이 이루어진 곳은 계산동(桂山洞, 현재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 서쪽부근)이며, 오찬과 그의 조카인 재순, 재유, 이인상, 이윤영, 김순택, 윤면동 등이 모였고 송문흠과 김무택 등 몇몇이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모임에 대해 이인상이 그림을 그렸고 김순택은 글을 남겼 다. 이때 이인상이 그린 그림은 전해지지 않으나, 현전하고 있는 <아집도>와 글의 내 용이 매우 유사하다.

80) 이인상.,「계산록」,『뇌상관집』권2.(류승민, 위의논문, pp. 129-130)

그림_8 <아집도> 24.5×46.0㎝, 연도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 개의 상, 오래된 정과 검, 붓통, 책과 그림, 벼루 등의 사물을 묘사한 것과 인물의 위치묘사가 유사하다. 물론 다른 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집도> 또한 이 인상과 벗들의 모임과 관련성을 지니고 있으며, 문헌 등을 참고로 한 연구가 더 필요 할 것이다.

43세때인 1752년 작 <구룡폭도(九龍瀑圖)>(그림_9)이다. 보일 듯 말 듯 아주 얇 고 희미한 필선으로 구룡폭포를 묘사한 이 작품의 왼쪽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다.

정사년 (1737년) 가을에 삼청도 임씨 어른 (임안세)을 뵈옵고 구룡연 을 본지 15년 만에 삼가 이 그림을 그려 올립니다. 모지라진 붓에 그을음을 묻혀, 그 뼈대만을 그렸을 뿐 살집은 그리지 않았고, 색을 칠하지 않은 것 은 감히 거만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한 것에 두었기 때문입 니다. 이인상 올림. 81)

81) 국립중앙박물관 《2010 서화관 테마전 능호관이인상 소나무에 뜻을 담다》에서 재인 용 p. 33.

그림_9 <구룡폭도> 58.5×118.2㎝, 1752년,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1936).

이인상은 15년 전(28세, 1737년) 임안세와 함께 했던 금강산 기행을 추억함으로 써 그림에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성행하였던

겸재 정선 등 진경산수화풍을 구사한 화가들이 그린 구룡폭은 실제의 구룡폭포와 너 무 닮아 그림만 보고도 어디를 그린 것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인상의

<구룡폭>은 사뭇 다른 점을 띄고 있다. 구룡폭이라고 하지만 구룡폭 같지 않은 모습 이다. 이인상은 구룡폭의 형태를 그대로 베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며 일부로 뼈 대만 그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 작품에서도 준법과 채색을 사용하지 않고 얇은 필치를 사용해 윤곽만을 그려낸 것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마음으로 이해(心會)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부러 모지라진 붓으로 뼈대만을 그렸고 색을 칠하 지 않았다. 기법적으로 서툰 것이 아니라 일부러 닮지 않게 그린 것이다.

보이는 그대로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이인상의 모습은 또 다른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이인상이 연암 박지원의 처숙부였던 이양천 (李亮天 1713-1755)이 측백나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전서로「설부(雪賦)」를 써서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설부를 받고도 그림을 달라 재촉하는 이양천에게 이인상은

“ 자네 아직도 모르고 있나? 진작에 보냈다네. 측백나무는 그 안에 있네, 무릇 서리바람 매서울 때 능히 변치 않는 것이 무엇인가? 자네가 측 백을 보고자 하거든 그 눈 속에서나 찾아보게.”82)

라고 했다. 이인상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사물의 본질이나 의미를 중요시 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화풍의 작품으로는 <병국도(病菊圖)>와 <장백산도(長白山圖)>

가 있다. 그리고 이인상의 낙관이 없으나 서체나 화풍으로 보아 <구룡폭>과 비슷해 이 시기 이인상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는 간송미술관 소장 <무인유운도(無人有雲 圖)>(그림_10)가 있다. 윤곽선 만으로 각진 바위와 산을 묘사하고 그것을 바위나 산처 럼 보이기 위한 준법이나 색채는 사용하지 않았다. 구룡폭과 유사하다.

82) 박지원,『연암집』,제3권. (오주석, 『그림속에 노닐다.』,솔, 2008, pp. 57-59.에서 재인 용.)

그림_10 <무인유운도,>18.2×56.5㎝, 연도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백산도>는 <구룡폭도> 와 비슷하게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작 품으로 보인다. 이인상의 현전하는 작품 중 유일하게 가로의 장폭형태로 이뤄진 <장 백산도>(그림_11)는 전형적인 예찬의 구도로 보여 진다. 특히 안휘파 화가들에게서 유 행했던 예찬식 구도의 산수화와 유사하다. 전경에 나무와 언덕이 있고 중경의 수면을 건너 멀리 원경에는 가로로 늘어진 산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선면화 중에도 이와 유사한 구도를 보이는 작품이 몇 있으나 선면화의 특성상 작은 화폭 안에 이를 구사해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장백산도>에서는 가로로 탁 트인 화폭 안에 이를 유 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림_11 <장백산도> 20.2×122.0㎝, 연대미상, 지본수묵, 개인소장.

한편 이 작품에서는 <구룡폭>과 다른 점 또한 눈에 띄는데, 이전 까지 보여지 던 날카로운 필치가 조금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림의 제시에 나타나고 있다.

가을비 내리는 가운데 계윤 (김상숙)을 찾아갔다. 종이를 꺼내놓고 그 림을 요구 하길래 ‘곽충서의 종이연 고사’처럼 했다. 계윤이 웃으며 “자네 너무 게으르구먼! 장백산을 그리면서 방필放筆 로 그렸네!” 하기에 함께 웃 었다83)

이러한 제시 등을 바탕으로 이인상이 직접적으로 거론한 회화론은 남아있지 않 지만, 그것을 가늠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이러한 제시를 통한 이인상의 미학 사상에 대한 분석은 뒷장 제 5장. 능호관 이인상의 남종문인화에서 시도해보도록 하 겠다.

다음은 1740년 작 <청호녹음도(淸湖綠陰圖)>(그림_12)이다. <청호녹음도>는 선 면화로 작품 오른쪽에 해서체로 제작시기를 써 두었다.84) 이 작품은 구도 면에서 이 전 금강산 실경산수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20대 시절의 그림과는 달리 이 작 품은 중국 회화에 대한 학습의 정도를 보일 만큼 능숙한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근경 의 언덕과 물가의 정자, 이어지는 수면, 그 뒤로 가로막고 있는 암벽과 산이 전경에서 후경으로 펼쳐지고 있는 구도는 전형적인 명대 오파의 구도와 유사성을 보인다.

그림_ 12<청호녹음도> 53.5㎝(선면화), 1740,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덕 1032).

그리고 화면 가운데 보이는 암벽의 윤곽선이 각지고 중첩되는 것은 명말청초 83) 류승민, 위의논문에서 재인용.

84) “淸湖綠陰 庚申五月 麟祥寫.”

참고도판4 홍인 <우여류색도>

안휘파 작가들의 암벽 표현법과 유사하다. 준법을 사용하지 않고 윤곽선만으로 산이나 바위의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은 조선후기와 중국 명·

청대 회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 중의 하나 였다. 준법을 쓰지 않는 것은 원말에 시작되어 명대 문징명과 같은 화가에 의해 많이 시도되었으나, 명 말에 나타난 현상은 이전시기와는 다르게 기하학적 인 표현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화풍은 주로 안휘파 화가들 특히 홍인 (弘仁 1610-1663)에게서 주로 나 타났다. 홍인의 <우여류색도(雨餘柳色圖)>(참고도판 4)를 살펴보면 큰 암벽으로 이루어진 황산의 모습이 긴 하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서양의 입체파를 연상85)시키기도 하는데 이시기 이인상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앞서 초기시기의 것 으로 분류한 <수석도>나 후기시기에 언급할 <송하

관폭도>(그림_13)의 바위표현법들이 이러한 특징을 지닌다. 1739년 이인상이 이들 안 휘파 화가들의 화첩을 본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86)

그림_13 < 송하관폭도>, 63.2㎝(선면화), 연대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5) 한정희, 「조선후기 회화에 미친 중국의 영향」, 『미술사학연구』 206, 한국미술사학 회, 1995, p. 78.

86) 이인상, 『능호첩』제1권, pp.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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