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사군자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68-105)

이인상의 현전하는 사군자 작품으로는 <야매도(夜梅圖)>(그림_20)와 간송미술관 소장 <묵란도(墨蘭圖)>(그림_21) 그리고 일반적인 국화그림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 는 <병국도 (炳菊圖)>(그림_22)가 있다.

<야매도>는 <병국도>나 <구룡폭도>의 가늘고 날카로운 필선과는 달리 촉촉하 게 물기를 머금은 듯 먹을 사용하였고 “희미한 달빛 주름에 비치어 황금가루가 차갑 고 맑고 서늘한 바람이 벽에 부니 푸른 가지가 길다.”91) 라는 제시가 화면하단에 남 아 있다. 이인상은 매화를 직접 가꾸며 매우 소중하게 여겼는데, 형편이 어려워 땔감 이 없어 겨울철에 매화가 얼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송문흠의 집에 잠시 맡겨 두었다 가 이듬해 정월에 <송오도(松梧圖)>를 그려주고 찾아와 주변에 책을 쌓아 추위를 막 90) 장진성, 「이인상의 서얼의식-국립박물관 소장 <검선도>를 중심으로」,『미술사와 시

각문화』,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02.

91) 번역은 『능호관 이인상 소나무에 뜻을 담다』, 국립중앙박물관, 2010, p. 41.

아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림_20 <야매도> 30.0×21.5㎝, 연대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_21 <묵란도> 연대미상, 지본수묵, 간송문화재단 소장.

갈필과 보산인(寶山人) 이라는 낙관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후년기 작으로 생각 되는 <병국도>에는 “남계의 겨울날 우연히 시든 국화를 그렸다. 보산인”92)이라는 제 시가 적혀 있다. 제시의 필치가 중년기이후의 것으로 보이며 중심 경물을 강조하는 구도는 후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구룡폭도>에서처럼 날카로운 필치가 사 용되고 있어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메마른 필치로 고개를 떨 군 꽃송이와 시들해 보이는 이파리가 줄기에 매달린 가을날의 시들어가는 국화를 그 린 이작품은 쓸쓸하고 적막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조선의 문인들은 도연명의 고사를 따라 국화를 많이 길럿다고 한다. 이인상 또한 남산의 능호관 울타리 주변에 국화를 많이 심었다고 하는데, 그의 벗 송문흠이 국화를 좋아 했던 것 같다. 국화를 보면 송문흠을 떠올리는 시가 여러 수 남아 있다.

『뇌상관집』에는 19세 때인 1728년 병든 국화에 대해 읊은 시가 남아있다.93) 92) “南溪冬日만?菊 寶山人.“ (『능호관 이인상 소나무에 뜻을 담다』, 국립중앙박물관,

2010, p. 41 참고.)

93) 이인상, 「병국」, 『뇌상관집』권1.“시든 꽃도 떨어지지 않아서 새 꽃도 걱정스럽네,

그림_22 <병국도> 28.6×14.9㎝, 연도미상,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화는 사군자 중의 하나로 기상과 절개를 의미한다. 한 해 중 가장 늦게 피고 꽃잎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가장 늦도록 향기를 잃지 않기 때문에 그 정절을 칭송 받는 것이다. 사군자 중의 하나 라고는 하지만 조선시대에 국화를 소재로 삼은 그림 은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의미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연대가 정확하지 않지만 회 화 상의 특징과 필치로 보아 후년기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인생의 말년에 정들고 외로 운 자신의 심정을 국화에 반영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인상은 여러 시기에 걸쳐 소나무가 들어간 몇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일찍이 소나무는 장수의 상징이었고, 가구의 재료로 사용되는 등 실용적인 측면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사시사철 푸르다는 점은 어떠한 시련에도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사람을 지칭하는데 사용했다. 소나무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늦가을 바람이 또 세차더니 꺾어져 떨어지니 가을을 이기지는 못했구나.”(류승민, 위 의논문, 2005, p. 137, 註)242 참고.)

『개자원화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94)

소나무는 단정하고 올바른 인물과도 같아 비록 구불구불한 자태를 하 고서 깊은 골짜기를 꾸미고 있는 것 같더라고 일종의 우뚝한 기상과 범접 하기 어려운 늠름함을 갖추고 있다. 소나무를 그리려는 사람은 마땅히 이러 한 뜻을 마음속에 담아야 하며, 그렇게 된다면 붓끝으로 뛰어난 경계가 나 올 것이다.95)

이것을 근거로 한다면 당시 소나무를 그리는 것은 소나무의 기상과 늠름함을 옮기는 행위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인상은 곧게 뻗은 나무와 한쪽으로 심하게 구부러진 나무 두 그루가 이루는 X자형의 소나무를 자주 그 렸는데, 소나무의 상징성인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전하고자 했다면 꼿꼿이 서 있는 나무 하나만으로도 충분 했을 것이다.. 이인상은 서얼 출신이었기 때문에 곧은 행실과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도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였고 올곧은 성품 때문에 벼슬 살이를 하면서도 윗사람과 많이 부딪히게 되었다. 가난과 질병 등으로 인해 평생의 소망이었던 은거 생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인상 의 곧은 성품, 뛰어난 학문, 명나라에 대한 의리, 선비의 지조, 은거에의 동경 등의 기 본 성향은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에 비견되며, 신분의 제약, 유민의식, 윗사람과의 갈 등, 가난과 질병 등은 구부러진 소나무에 담겨진 것으로 해석된다. 이인상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형태의 소나무 도상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 에 대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나무는 예로부터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킨 공자의 언급에 의해 시련에도 굽히거나 변절하지 않는 사람 혹은 벗의 은유 로 쓰이게 되었다. 추운 겨울에 독야청정하여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였고 대표 적인 예로는 김정희의 <세한도>(참고도판 5)를 들 수 있다.

94) 『芥子園畵傳』에 나타난「松枝法」은 부록(p. 93)참고.

95) 『芥子園畵傳』,《樹譜》,「畵松法」

참고도판 5

김정희 <세한도>

또한 이 시기에 소나무가 중심이 되는 작품들 중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는 데 바로 겨울철 눈 쌓인 소나무의 모습을 그린 <설송도(雪松圖)>(그림_23)이다. <검 선도>의 배경에 그려진 소나무처럼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와 오른쪽으로 확 굽어진 소나무 두 그루의 X자형 구도를 볼 수 있다.

1754년 작 <송하독좌도(松下獨坐圖)>(그림_24)에는 화폭하단에 “갑술년에 원령 이 술에 취해 그리다.”96)라고 쓰여 있다. 화면의 중앙 보다는 살짝 오른 쪽에 나무한 그루를 클로즈업 시켜 나무 전체의 모습이 아닌 나무줄기의 부분만 등장하고 있으며, 화폭의 왼편으로는 언덕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나 무는 <검선도>에서 볼 수 있는 표현법으로 가지 위로 넝쿨이 드리워져 아래로 늘어 진 모양으로 장식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소나무의 모습은 화폭안에 소나무 전체의 모습이 들어온 것이 아니 고 밑둥 부분부터 시작해 줄기의 중간에서 잘린 모습이다. 그리고 먹을 사용해 눈 쌓인 소나무를 표현했는데, 이인상은 눈이 쌓은 부분만 남겨두고 먹을 칠하는 유백법 (留白法)을 이용해 눈을 표현했다.

다음은 1738년에 제작된 <수석도(樹石圖)>(그림_25)이다. <수석도>는 초년기작 품들 중 비교적 크기가 큰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이왕가박물관에 있다가 경매에 출품 되었던 적이 있는 작품이다.97) 화면의 오른쪽을 살펴보면 ‘나무는 차되 빼어나고, 바

96) “甲戌年 元靈 醉寫.”

97) 김상엽 황정수 편, 『경매된 서화: 일제시대 경매도록 수록의 고서화』, 시공아트, 2005.

그림_23 <설송도> 117.0×53.0㎝,

연대미상,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_24 <송하독좌도> 80.0×40.0㎝, 1754년, 지본수묵, 개인소장 .

위는 문채가 있되 거치네.’98)라고 적혀 있다. 원경에는 담묵의 윤곽선과 옅은 먹으로 음영을 표현한 산이 있고 이것은 오대 때의 거연이나 원말 황공망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중첩된 형태의 산악유형을 보이고 있다. 키가 큰 소나무 한그루를 중심으로 좌 측으로 기울어진 나무 한 그루 등 세 그루의 나무와 바위가 중심경물으로 표현 되어 있는데, 상단에 집중된 소나무 잎과 뒤틀려 위에서 아래로 뻗은 가지가 시선을 아래 의 바위로 향하게 한다. 소나무의 표현법은 『개자원화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 이며 나머지 두 그루 나무의 표현 또한 화보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나무와 함께 중심경물으로 표현된 바위의 표현법은 담묵법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나 붓을 종이에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며 비수를 보여주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은선대>(그림_4) 의 바위 표현기법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또한 이러한 바위 윤곽선 처리방식 은 앞에서 살펴본 <송하간서도>에 사용된 방법과도 유사하여 기년이 정확하지 않은

<송하간서도>가 <수석도>와 함께 1730년 후반 작품으로 추정 할 수 있다.

98) “樹寒而秀, 石文而醜.”

그림_25 수석도, 109.0×57.0㎝, 1738년,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그림_13)에서도 이처럼 심하게 구부러져 있는 소나무 가 등장 한다. <송하관폭도>는 이인상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99) 이며, 이인상 회화의 특징인 깔끔함과 담백함을 완성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 폭의 중앙, 폭포와 폭포사이에 위치해 오른편으로 심하게 구부러진 이인상 특유의 소 나무 한 그루와 절벽 끝에 앉은 인물의 시선은 폭포가 아닌 구부러진 소나무를 향하 고 있어 이 그림의 주제는 관폭(觀瀑)이 아닌 관송(觀松)이 되고 있다. 다른 작품의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나무줄기의 껍질과 옹이 그리고 솔잎의 세세한 묘사가 돋보인 다. 소나무 이외에 바위의 표현에 있어서도 이인상 특유의 바위표현법과 각이진 윤각 선에 선염을 사용하여 바위의 느낌을 강조하였다.

99) 안휘준,『한국회화사』, 일지사, 1980.과 유홍준 『능호관 이인상의 생애와 예술』, 홍 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논문, 1983.을 통해 통론화 되었다.

소나무가 그려진 작품 중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더 있는데, <검선도(劍僊圖)>

(그림_26)가 있다. <검선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물의 뒤쪽으로 곧게 뻗은 소나무의 줄기와 옆으로 휘어진 줄기이다. <검선도>는 후기의 작품으로 볼 수 있으며 수하인 물도(樹下人物圖)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나무아래에 있는 인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물의 모습이 확대되어 상반신만 자세히 묘사된 인물중심의 초상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검선도>는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그려졌던 사대부나 공신들의 초상화와는 다른 양상을 띄며 명·청대에 다양하게 그려진 산수를 배경으로 한 인물초 상화의 양식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살펴보면 화폭의 전면부에 수염을 길게 길어 바람에 흩날리는 인물이 있고 인물의 우측으로는 칼자루로 보이는 물체의 손잡이가 보여 진다. 이 칼로 인해

이 인물은 동양에서 칼과 관련이 있는 신선으로 알려진 여동빈(呂洞賓 798-?)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동빈은 벼슬에서 물러나 화산華山에 은거중인 도교 팔대선인 종리권(鍾離權 ?-?)을 만나 불사(不死)의 비결과 검술을 배워 선인이 되었다고 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중국그림에서 여동빈의 도상적 특징은 대부분 칼을 소매에 감추고 있거나 등에 걸쳐 메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며(참고도판 6)

조선후기의 회화 중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신선도에서 나타나는 여동빈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100) <검선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인의

검선도를 모방하여 그린 이 그림을 취설옹에게 바친다.”라는 화제로 보아 이인상이 모방한 작품이 여동빈의 도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배제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유후에 관한 이덕무의 기록을 살펴보면 유후의 외형적인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취설 유후의 자는 자상인데, 용모가 청수하고 성품이 맑았으며 수염 이 아름다워 훤칠한 선인의 기상이 있었다. 그가 정묘년에 통신사서기로 일 본에 갔는데, 장중하고 위의가 넘치는 그의 태도에 일본 인사들이 모두 공 경하고 조심스러워 해다. 계미년에 또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사람들이 그의 안부를 물었는데, 통역관이 “그분은 작고했다.”고 잘못 대답 하자 그 사람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원현천(원중거元重擧 1719-1790)이 자 세히 설명하기를 “지금 그 분은 아무 탈없이 건강하게 잘 지냐면서 날마다 시를 읊조리므로 사람들이 그를 걸어다니는 신선이라 일컫는다오.”라고 자 100) <신선도(神仙圖)8첩병풍>(1779년 작), <삼선도(三仙圖)>,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8

첩병풍>, <해상군선도권(海上群仙圖卷)>등.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68-105)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