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조선으로의 유입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40-45)

을 가장 먼저 수용한 사실을 통해 화보의 유입시기가 공재 윤두서의 졸년인 1715년 이전65)으로 주장한바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개자원화전』은 18세기 초 수용기를 거쳐 이인상, 심사정, 강세황 등 훗날 손꼽히는 문인화가들의 활동시기인 18세기 중엽에 이 르면 화보의 학습을 통한 진경산수화와 남종산수화의 성행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심사정의 경우 개자원화전에 실린 각종 형식들을 소화해 자기의 작품에 자유롭 게 구사하였고 1748년 작 <괴석초충도>를 보면 제3집의 영향을 받은 듯 하다. 강세 황의 경우에는 1748년 작 《첨재화보》를 보면 개자원화전을 그대로 방작한 작품이 있어 18세기 후반에는 『개자원화전』의 수용이 확대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실제작품이 아닌 화보를 통해 학습하게 되는 경우 몇 가지 문제점이 발 생하게 되는데 이중 하나가 묵법과 선의 비수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 분의 필선이 짧은 선처럼 표현이 되어 원래가 어떠했는지 제대로 구분하기가 어려워 먹의 농담과 분위기 있는 표현이 어려워진다.

이 때문인지 조선의 문인화에는 중국과는 다른 특징들이 있는데, 한국의 정취를 표현하고 중국에는 없는 새로운 필묵을 사용하며 세부처리를 간략하게 한다는 점이 다. 이러한 특징은 일본의 문인화인 남화에서도 보여지는데, 일본 역시 자국의 경치를 그리고 더욱더 서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사물주위를 안개가 끼인듯하게 처리 하며, 수묵화에 강한 색채를 사용하고 점묘법을 사용하는 등의 고유 표현법이 있다.

우리나라의 문인화에서는 특히 김정희의 간결함, 강세황의 《송도기행첩》의

<영동통구>에서 엿보이는 반추상적인 기법, 윤두서, 정선 등의 경우처럼 창의적인 표 현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제목은 <방○○도(倣○○圖)>라고 붙여져 있으나 중국의 같은 주제 방작 들을 보면 크게 달라 무엇을 보고 그린 것인지 의아한 작품들도 많다. 이러한 현상의 출현은 중국 화보풍의 학습을 토대로 개인의 개성을 살려 자유롭게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4) 김명선, 『조선후기 남종문인화에 미친 개자원화전의 영향』, 이화여자대학교 석사논 문, 1991, p. 36.

65) 차미애, 「공재 윤두서의 중국출판물의 수용」,『미술사학연구』264, 한국미술사학회, 2009, p.106, p. 119.

중국의 문인화는 조선중기에 화보등을 통해 유입되어 조선후기에 윤두서. 이인 상, 심사정 등 몇몇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다가 조선말기 추사김정희와 그를 추종하 는 이른바 ‘추사파’화가들에 의해 크게 성행 하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 문인화는 기원을 중국에 두고 있으며 정통 문인화와 마찬가지로 회화에 문자향, 서권기 등 화 가의 내면적인 요소를 중요시 하였다. 화풍은 화보를 통해 조선에 유입, 발전 되었으 나, 화풍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보의 학습을 토대로 독자적 이고 창의적인 표현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제 4장. 능호관 이인상 남종문인화의 형성과 특징

조선시대 후기는 우리나라의 문화나 미술사상에서 주목할 만한 새로운 업적을 남겼던 시기로,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 할 수 있는 양식들이 이 시대를 풍미 하였다. 조선초기의 미술이 송·원대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인 특성을 지녔다면 조선후 기의 미술은 명·청대미술을 소화하여 보다 뚜렷한 민족적인 자아의식을 실현66)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인상이 활동 하였던 18세기 전반기의 조선화단에서는 17 세기에 유행하던 절파화풍이 점점 쇠퇴하며 그 자리에 중국에서 명말청초에 회화의 정통으로 받아들여진 문인화풍이 유입되었다. 이 화풍은 조선에 유입되어 바로 성행 한 것은 아니나 잠복기를 거쳐 후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화면상에 보여지는 기법이나 구도상의 특징보다도 회화에서 느껴지는 사의를 중요시하는 문인화론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화풍을 적극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후기 실학의 발전은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등의 인문과학과 천문, 식물, 농업 등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 큰 성과를 낳았다. 이러한 성과들은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자아 의식 실현을 바탕으 로 한 실학의 기본 정신은 당시의 문학과 회화에도 반영 되었다.

특히 사행으로 연경을 다녀와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여 배울 것을 주창하였 던 북학파(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등)의 영향은 조선후기 회화의 발전과 관계 가 매우 깊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들을 비롯한 사행원들을 통해 청나라의 문물과 회 화는 물론 그곳에 전래되었던 서양의 문물까지도 조선회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명말 이래 중국화단에서 크게 유행하였던 남종화풍 은 화보를 통해 조선화단에 전해지게 되었다. 동시대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인 상도 17세기 후반 중국에서 유입된 다양한 화보를 통해 남종문인화풍을 학습한 것으 로 추측된다.

이러한 문예적 부흥기 속에서 이인상의 예술이 시작되었지만, 정작 누구에게 그 림수업을 받았거나 하는 기록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삼촌 이최지가 당시 서예 와 전각에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기 때문에 유년시절 이인상의 예술세계 형성에는 삼 촌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인상이 문집에 남긴 글과 서화작품들을 66) 안휘준, 「조선왕조후기회화의 신동향」,『고고미술』134, 한국미술사학회, 1977, p. 8.

통해 당시에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초기 시기 이인상회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를 통해 문인화 풍을 학습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기년이 확실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 면 알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작품전체를 똑같이 베끼려 했던 것과는 달리 이 인상은 화보 등의 부분을 따와서 그렸다. 그리고 직접적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증 거가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글과 그림을 살펴보면 관아재 조영석 등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겸재 정선 진경산수 화풍의 영향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 연구에서 이인상 회화에 대한 시대구분은 주로 생애의 주요사건을 기준 으로 하여 연대기적 순서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중국의 화보 등을 통 해 회화에 대한 학습을 했던 시기를 ‘학습기’, 이러한 시기를 거쳐 학습을 통해 자기 화 시켜 능호관 이인상만의 화풍을 구사하였던 시기를 ‘집대성기’로 칭하여 두 시기로 나누어 구분해 보기로 한다. ‘학습기’란 말 그대로 그림에 대한 학습이 진행되었던 시 기를 뜻하고, 일대기적인 순서로 보자면 초기시기, 혹은 청년기가 될 것이다. 다음으 로 ‘집대성기’란, 중국 명말청초의 서화가 동기창이 이야기하였던 ‘집대성(集大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기창에게 ‘집대성’ 이란 이상화된 회화개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폭 의 그림 속에 여러 대가들의 화풍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대가들의 모든 것 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단점을 버리고(師學舍短) 장점만을 학습하여 스스로의 일가를 이루는 것(自成一家)67)이 중요하다. 이처럼 이인상의 ‘집대성기’ 또한 중국의 화보등을 통해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학습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 능호관이인상만의 화풍을 구사하게 된 시기를 가리킨다 할 수 있다.

제 1절. 학습기

능호관 이인상의 회화를 둘러보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화풍이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다. 먼저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류 등을 통해 남종문인화풍을 수용 하였다는 점, 그리고 직접적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남겨지지 않았으나 관 아재 조영석 등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겸재 정선 화풍의 67) 조송식, 「북송 초 유도순의 <성조명화평>과 그의 회화론」, 『美學』64, 한국미학회,

2010.

영향을 꼽을 수 있다.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40-45)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