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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의 영향- 진경산수화풍의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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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_3 <누각산수도> 27.0×62.5㎝, 연도미상, 지본담채,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

지산도초본발」에 ‘내가 안음 조공을 관아재로 찾아뵈고…’71)라며 존칭을 사용했고 그 를 선생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이인상은 조영석의 <지산도초본>

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특히 조영석은 지촌 이희조(1655-1725)의 문인으로 완산이씨 집안과는 학통을 같이하고 있었고, 조영석 또한 사대부로서의 정절을 매우 중요시했 기 때문에 이인상이 그를 따랐을 것으로 생각 된다. 한편 조영석은 담헌 이하곤 (1677-1724)을 중심으로 하여 겸재 정선과 평생의 지기로 지냈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조영석과의 교류를 통한 간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대에 이미 유명했던 겸재 정선을 따라 이른바 “겸재파”72)라 불리우며 금강산을 중심으로 진경산 수를 즐겨 그렸던 이들이 있었기 떄문에 어떤 경로로든 겸재 정선의 회화를 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인상이 겸재정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가장 큰 근거는 진경산수화를 그렸다는 점이다. 현전하고 있지는 않으나, 『뇌상관집』권1에 수록된 친족 이준상에게 준 것으 로 보이는 시 「증원방씨」에 의하면 이인상이 가끔 금강산을 소재로한 진경산수화를 그렸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5월28일에 천식재에서 원방형님을 만났다. 흐르는 샘물에서 한 해 동 안 익힌 술을 꺼내 영남지방의 죽순채로 안주삼아 마셨다. 취기가 오른 뒤 에 반죽 접부채에 정양사에서 보이는 만봉을 그렸다. 실컷 취해서는 자리를 파했다.…(후략)73)

이인상 회화 초년기 정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 진경산수화풍그림으 로는 <은선대(隱僊臺)>(그림_4)와 <옥류동(玉流洞)>(그림_5)이 있다.

71) 이인상, 「관아재지산도초본발」,『능호집』권4, p. 4.

72) 정선파 혹은 겸재파. 강희언, 김윤겸(김윤겸은 능호집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최북, 김응환, 김유성, 이인문, 정충엽 등이 해당된다.

73) 이인상, 『雷象觀集』卷1,「贈元房氏」(류승민, 위의 논문 p. 103에서 재인용)

그림_4 <은선대> 55.0×34.0㎝, 1737년, 지본담채, 간송문화재단 소장.

<은선대>는 1737년 가을 금강산 여행 후 기행시와 함께 남긴 작품으로, 오른쪽 상단에 예서체로 쓴 제목이 있다. <은선대>는 <옥류동>과 함께 외금강의 절경을 그 린 작품이다. 이 그림과 관련된 자료로는 문집에 「은신대(隱身臺)」라는 제목의 시 가 있다.74) 조선후기에 유행하였던 진경산수에 많이 등장하였던 금강산 은선대의 십 이폭포를 그린 <은선대>는 외금강의 첫 번째 고개로 은선대 북쪽으로 시원한 바다 경치가 펼쳐져 있어 단원 김홍도의 <금강산사군첩>(참고도판 2)처럼 화면의 오른쪽 을 수평선으로 펼쳐 놓는 것이 대부분 인데, 이인상은 실경에 근접하여 마치 망원렌 즈로 포착한 듯한 시각으로 은선대를 나타냈다. 또한 선염위주의 고운 채색과 이인상 의 독특한 엷은 묵법이 강조되어 실경의 박진감보다도 은은하고 담박한 문인화의 정 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74) 『뇌상관집』과 『능호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연경재 성 해응(硏經齊 成海應1760-1839)이 편찬한 전국의 명승지에 대한 책인 『東國名山記(동 국명산기)』「金剛山(금강산)」에 ‘隱身臺(은신대)’는 ‘隱僊臺(은선대)’의 또다른 이름으 로 기록 되어 있다.

참고도판 2

김홍도《금강산 사군첩》中 <은선대십이폭>

주 경물을 앞으로 당기고 후경과 대조시켜 주 대상 주변의 경물을 단순화시키 는 구도는 이인상 초년기 회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법인 듯하다. 가장 뚜렷한 점은 이러한 기법을 통해 전경의 주 경물을 선명하게 강조하고 후경을 흐리게 처리하여 공 간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회화에서 근경이 선명하고 원경이 흐릿한 표현 법은 일상적이나 이인상은 다른 화가들보다 더 대담하고 능숙하고 대담하게 표현해내 고 있다. 특히 관람자로부터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수목들이 매우 자세히 묘사되 어 있는 것을 통해 주 경물인 은선대 바위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선명히 각인 시켜 주고, 그 뒤로 보이는 구룡폭포는 유백으로 표현한 희미한 물줄기와 채색한 좌 우 바위벽으로서 존재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화가가 주 정물에 집중하여 상 대적으로 돋보이면서 주제를 부각하려는 의도를 가졌음을 나타낸다.

금강산의 옥류동을 그린 <옥류동>은 앞에서 살펴본 <은선대>와 같은시기에 제 작된 것이다. 이 작품의 중심 경물은 앞선 작품과는 달리 각이진 암벽과 주변의 수목 그리고 흐르는 개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에서는 이인상 특유의 암벽 표현법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원말사대가중의 한 사람인 예찬의 절대준(折帶皴)75)을 바탕으로 75) 절대준 : 띠를 접은 것처럼 보이는 준법, 붓을 옆으로 긋고 곧 직각으로 돌려서 내려

여기에 농담의 묵법으로 깍아 지르는 듯한 바위의 양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앞서 살펴본 1738년 작 <수석도>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바위의 묘사법은 이시기의 특징인 것으로 보여진다. 작품에 보이는 바위와 금강산 옥 류동의 실경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위가 실제로도 매우 유사한 것을 보면 그러한 바 위 묘법이 실제 경물을 그대로 옮겨 그리려는 진경산수화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오른쪽 상단에 그려진 수목들의 표현기법은 북송 회화에서부 터 널리 사용되었던 고식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이 수목의 표현방식은 <은선 대>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이인상 초년기의 수지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림_5 <옥류동> 58.5×34.0㎝, 1737년, 지본담채, 간송문화재단 소장.

한편, 화면 왼쪽 암석의 표현에 사용한 ‘Y’자형 선묘76) 또한 <은선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원나라 말 황공망이 「사산수결」에서 언급한 이 래 황공망을 따랐던 명말의 화가 추지린 (鄒之麟1585-1664)이 준찰과 음영을 동원하 여 삼면을 갖춘 바위에서 나아가 선만으로 바위의 각을 살려낸 기법에 가깝고, 이러 그는 기법이다. 바위의 세세하면서 거친 표면의 질감을 나타내는데 용이하며, 예찬말 년의 산수화에 자주 나타나는 준법이다.

76) 최경원, 『조선후기 대청 회화 교류와 청회화양식의 수용』,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6.에서는 이것을 지칭하여 ‘Y’준으로 정의 하고 있다.

한 표현기법은 이인상의 중년기 회화에서도 종종 보여진다.

이인상의 작품 중 이러한 ‘Y’자형태의 선을 사용해 암벽을 묘사한 작품이 또 있 는데 <동음풍패도(洞陰風珮圖)>(그림_6)가 바로 그것이다. 앞선 작품 <은선대>, <옥 류동>에서 보여진 ‘Y’지형 선으로 표현한 바위가 전경에 등장하고 있으며, 직사각형 의 경사진 바위는 <은선대>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윤습한 묵선으로 윤 곽선을 처리 하였다. 묵법의 경우 부벽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적묵기법이 그대 로 쓰이는 등 이미 일면으로는 양식화 되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이인상 초기회화의 전형적인 표현기법을 띄고 있어 작품의 제작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림_6 <동음풍패도> 28.2×40.8㎝, 연도미상, 지본담채, 간송문화재단 소장.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의 뛰어난 점은 구도의 참신성 그리고 실경의 과장과 변 형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인상도 이러한 선배화가의 뛰어난 점을 받아 들였으 나 정선과 이인상의 묵법과 필법에서는 그 차이점이 드러난다. 즉, 정선은 실경산수에

참고도판 3

<인왕제색도> <박연폭포> <청풍계>

서 과감한 묵법과 세련된 용필을 자랑하였으나, 이인상은 선묵 위주의 용묵법에 강한 필치를 이용한 윤곽선을 즐겨 이용했기 때문이다. 정선은 묘사 대상의 특성을 파악하 고 그것에 맞도록 적절한 필법과 묵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편이다. <인왕제색도>, <박연폭포>, <청풍계>(참고도판 3)등을 살펴보면 필법과 기 교가 섬세하고 극치에 이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인상으로서는 굳이 이를 따르 려 애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인상은 정선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세련된 기교보다는 ‘심상(心象)’을 중시하고 그것을 재현 하는데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림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사의’에 가까웠으나 이인상이 정 선보다 더 서정적인 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인상이 정선의 회화를 통해 배운 것은 구성의 방법이며, 그 구성을 채워 넣는 세부적인 기법에서는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남종화의 정통에 기반하여 자신의

개성을 형성해 가며 점차 전면으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인상 다운 사의 적인 특징을 띄는 작품들은 늦은 시기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능호관 이인상의 학습기회화는 전통의 학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당대 의 회화적 유행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고 오히려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 것이다. 조선후기 문인서화가들에게서 공통적이었던 화보의 학습과정을 거쳤음은 물론, 18세기 조선회화의 중심이었던 겸재 정선의 화풍을 익히고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을 받아들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능호관 이인상 다운 특징을 작품에 나타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 2절. 집대성기

집대성기로 구분할 수 있는 1739년 이후부터는 회화작품에 이인상만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배경으로는 말단직이기는 하지만 1739년 관직으로의 진 출과 그로 인한 활발한 교유관계의 확대와 1741년 남산에 집을 마련하는 등 이전 시 기와는 달리 비교적 안정된 생활에 접어들었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적 요소들은 능호관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활발한 교유 관계의 확대로 인해 선면화의 비중이 매우 큰편이다. 이인상의 교유관계와 부채그림 의 상관관계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될 것이다. 예로부터 부채는 부피가 작고 짐이 되지 않으며 중요한 선물로 빠지지 않았다. 부채를 받은 이는 이를 즐겁고 기쁘 게 여겼다. 한 개의 부채 안에 친분의 기대와 감사의 심정이 내재 되어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은 한, 중, 일 삼국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전해져 내려 왔다.

선물용 부채는 그 목적에 따라 선면에 담기는 서화의 주제나 표현방식이 다양 했으며 제시에 증답의 내용을 담아 가까운 벗에게 선물하거나 특정인에게 헌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77) 때문에 문헌에 밝혀지지 않은 교유 관계 등을 확인 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능호관의 현전 작품 중 절반이상이 선면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선면화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활발한 교유관계 와 함께 그의 회화 세계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77) 선면화에 대한 연구는 김윤희, 『조선시대 선면화 연구 : 접선화를 중심으로』 이화여 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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