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커뮤니케이션 5>한국의 여론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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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여론의 반영이며, 여론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행위가 선거. 즉 투표행 위→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가변적이고 다양한 여론을 효율적으로 살펴보는 일반적인 도구가 여론조사 -한국 정치커뮤니케이션에서 여론조사 방법의 변화와 그 결과는 정치의 향방 을 가름
-여론조사는 참고용으로 출발했으나 데이터가 축적되고 조사 기법이 다양해지 면서 정확성과 공정성을 확보→참고자료의 수준을 넘어 결정자료
1.여론조사의 출발 1)1987년 13대 대선
-민정당의 노태우, 민주당의 김영삼(YS), 평민당의 김대중(DJ), 신민주 공화당 의 김종필(JP)
-1987년 6·10 민주항쟁이후 민정당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대통령 직선제 요구 수용
-이로써 8대~12대 대통령선거까지 16년 동안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 종지부
-집권당인 민정당은 여론조사팀과 안기부(오늘의 국정원),경찰의 정보력을 갖 추었으나 야당은 고정 지지층과 지역 구도에 의한 4자 필승론
-여론조사기관 ‘한국 갤럽조사연구소’가 유일
*당시 12월16일 대선 투표일 전에 갤럽에서 여론조사 실시했으나 주목을 받 지 못함. 여론조사 결과는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는 것으로 나타남→실제 결과 는 노태우 36.6%, 김영삼 28.0%,
*당시 김영삼 후보 측의 제안으로 김종필 후보와 후보 단일화 논의가 있었으 나 성사되지 못함
*대학가의 모의투표 유행 *선거결과 불복→컴퓨터 부정
2.여론조사 정착 1)1992년 14대 대선
-신한국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13대 대선 시기와는 다르게 인식의 변화가 뚜렷하게 생김
-집 전화를 통한 여론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정확한 답변을 회피해 부동층이
30% 이상이나 나타남→부동층을 분석할만한 통계가 아직 없어 정확성에 의문 -‘숨어있는 야권 지지층’이라는 여론조사의 맹점이 이 시기에 표출
-당시 경향신문 등이 발표한 선거전 여론사결과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 35.1%, 민주당 김대중 후보 21.3%, 국민당 정주영 후보 10.0%
-실제 결과 김영삼 42.0%, 김대중 33.8%,정주영 16.3%
-민주당 김대중 후보 선거 패배 인정 후 정계은퇴
--여론조사기관 ‘한국 갤럽조사연구소’를 중심으로 태동기
3.여론조사 필수 시기 1)1997년 15대 대선
-1995년 제 1회 지방선거를 계기로 선거에 여론조사가 필수 항목으로 등장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후보 경선 시대를 연 것은 1997년 7월21일 신한국당 전당대회→이른바 9 룡과 대의원 투표
-신한국당 이인제 후보의 경선 불복과 민주신당 후보로 선출됨에 따라 처음 후보군은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 보. 민주당 조순 후보, 자민련의 김종필 후보로 5자 구도→선거전 조사결과 김 대중 30.5%, 이인제 24.5%, 이회창 22.9%, 조순 11.2%, 김종필 6.4%
-활발한 여론조사로 후보간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가능해짐→DJP 연합, 이 회창-조순의 연합(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변경)
-선거전 여론조사 결과는 김대중 34.9%, 이회창 26.5%, 이인제 23.2%
-실제 결과는 김대중 40.3%, 이회창 38.7%,이인제 19.2%
-대선이 끝나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집권여당이 된 국민회의에 흡수 통 합됨
-여론조사기관으로는 한국갤럽 이에 코리아 리서치, 월드 리서치, 리서치 앤 리서치, 동서 리서치
4.여론조사 중흥 시기 1)2002년 16대 대선
-여론조사가 가른 극적인 대통령 선거로 기록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민주당 노무현 후보,민주 노동당 권영길 후보 3.9%
-집권여당인 민주당에서 처음으로 국민경선제(대의원 50%, 일반국민 50%) 를 도입해 전국을 돌며 후보 경선을 실시→이인제 후보의 압승을 예고한 가운 데 시작되었으나 광주에서 노무현 바람이 불기 시작해 대선 후보로 결정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 하락과 함께 월드컵 이후 국민통합 21의 정 몽준 후보와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세 차례 대통령 선거를 거치 면서 여론조사의 정확도가 입증된 만큼 단일화 요구가 거셈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 승부를 100% 여론조사기관에 의존해 결정하기로 하고 권위 있는 여론조사기관 두 곳을 선정해 여론조사를 실시→노무현 후보로 최종 결정
-휴대전화를 이용한 여론조사의 중요성이 부각된 첫 시기로 휴대폰 문자와 ,인증샷, SNS의 위력을 처음 보여준 선거
-실제 선거결과는 노무현 후보 48.8%, 이회창 후보 46.6%
2)2007년 17대 대선
-대선결과는 한나라당 이명박 48.7%, 민주신당 정동영 26.1%, 무소속 이회 창 15.1%, 창조한국당 문국현 5.8%
-국민경선제가 일반적 추세가 됨. 특히 한나라당에서도 국민경선제를 처음 실시돼 대의원 지지율에서 패배했으나 일반 국민지지에서 이긴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결정. 박근혜 후보 승복
-유한캠벌리 CEO 출신인 문국현 후보가 대중적 인지도와 지지도를 바탕으 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기존 정치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기대가 만들어 낸 현상
-스마트 폰의 등장으로 휴대전화 조사에 대한 중요성이 점증되는 시기
3)2012년 18대 대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51.6%,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48.0%
-여론조사결과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예측하는 기관이 많았으나 일부 문재 인 후보의 당선을 예상한 기관도 등장
-박빙의 승부인데다 집 전화 의존도가 높은 기존 여론조사 방식에 문제점 을 드러냄→휴대폰 여론조사 일상화
-이러한 문제점은 이미 2010년 지방선거에서 드러났는데, 당시 여론조사 기관의 예측이 대부분 빗나감→조사방식과 기법, 조사대상에 대한 정밀한 연구 와 사례가 집중 개발됨
4)2017년 19대 대선?
-새누리당 김무성, 오세훈, 김문수, 유승민, 민주당 문재인, 국민의당 안철 수, 반기문
5.여론조사 이후 변화
①선거여론조사는 부정선거 검증의 기능→대규모 부정선거의 가능성을 차단 하는 효과(댓글)
②13대 대선에서 보여준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유세 문화의 변화→정보 통 신의 발달과 TV토론 등 미디어를 활용한 선거가 가장 큰 요인
③막대한 선거비용 방지
④정책공약 개발과 같은 다양한 선거 전략과 기법 개발
6.여론조사의 문제점
-일천한 역사→다양한 모델을 개발함으로써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했으나 선 진국에 비하면 60년 이상 뒤짐
*미국은 본격적으로 여론조사를 활용한 대통령 선거가 1936년 민주당의 플랭 클린 루즈벨트와 공화당의 알프 랜던 후보간 대결→정치학자들은 박빙을 예상 했으나 여론조사는 루즈벨트 후보의 압승을 예측
-RDD(Random Digit Dialing ; 임의번호 걸기) 방식으로 집 전화와 휴대전 화 병행방식 도입→소규모 선거에는 한계점 노출
-전화면접조사와 ARS(자동응답시스템) -유·무선의 비율 조정→50대 50
-3~4% 오차 범위 내에서의 차이는 의미가 없는 허수인데도, 투표성향에 변 화를 불러오거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부작용을 초래→지역주의, 이념. 계층, 세대, 빈부간의 갈등 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