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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1) - 정치성과 주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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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1) - 정치성과 주술성

■ 혜성가(彗星歌) / 융천사(融天師) / 신라 진평왕(579-632)

[三國遺事 卷五 感通. 融天師 彗星歌]

第五居烈郞 第六實處郞(一作突處郞) 第七寶同郞等 三花之徒 欲遊楓岳1) 有彗星犯心大星2) 郎徒疑之 欲罷 其行 時天師作歌歌之 星怪則滅 日本兵還國 反成福慶 大王歡喜 遣郞遊岳焉 歌曰

제5 거열랑, 제6 실처랑(혹은 돌처랑이라고 씀), 제7 보동랑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에 놀려고 하였을 때, 혜성이 심대성을 범하였다. 낭도들이 의아하여 여행을 중지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융천사가 향가를 지어 부르매 괴성이 곧 없어지고 일본병이 물러가서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대왕이 기뻐하여 낭도들을 풍악에 놀러 보냈다. 그 향가는 다음과 같다.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遊鳥隱城叱肹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 烽燒邪隱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北(*叱․比․甚?)所音叱彗叱只有叱故

< 梁柱東 해독, 彗星歌 >

녜 ㅅ믌3) 乾達婆 예전 東海 물가 ‘乾達婆의 노론 잣란4) 라고5) 논[游] 城’을랑 바라보고 예ㅅ軍두6) 옷다 “倭軍도 왔다!”고

燧얀7)8) 이슈라 烽火를 든 邊方이 있어라!

三花9) 오보샤올10) 듣고 三花의 山구경 오심을 듣고

두 즈리11) 혀렬바애12)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13) 별 라고 길 쓸 별을 바라보고

彗星여 여 사미 잇다 “彗星이여!” 사뢴 사람이 있구나!

아으 아으

 아래 갯더라 달은 저 아래로 떠갔더라,

이 어우 므슴ㅅ14) 彗ㅅ기 이실꼬 이 보아, 무슨 彗星이 있을꼬.

1) 楓岳: 금강산.

2) 心大星: 이십 팔 수(二十八宿)의 중심이 되는 별. 지금의 전갈자리.

3) 東海 물.

4) 城을란.

5) 바라보고.

6) 倭軍도.

7) 봉화를 피운.

8) 가(邊). 변방.

9) 세 花郞의.

10) 山 구경 오심을 11) 부지런히.

12) 불을 켜는데.

13) 길을 쓸.

14) 무슨.

(2)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1) - 정치성과 주술성 51

< 洪起文 해독, 彗星歌 >

녜 동ㅅ  동쪽 옛나루

건달파의 놀온 잣란 라고 건달파 노니는 고장을 바라 보고

예ㅅ 군도 옷다 왜병이 들어 왔다

봉 얀 고야 봉화를 올린 국경이고나

세 고즤 오 보샤오리 듣고 세 화랑이 명산 유람 가련다 듣고서

도 브지리 혜렬 바에 달수를 브지러니 혜여 갈제 길  벼리 라고 길을  별을 바라 보고 혜셩야 야 사미 잇다 혜성이라 여쭙는 사람이 있다

아야 아야

15) 가잇다라 드르르 갔더라

이버댜 솜 혜ㅅ기 이실고 이벗아 께름한 혜성이랄게 있을가

< 金完鎭 해독, 彗星歌 >

녀리  믌 옛날 東쪽 물가

乾達婆 노론 자랑 라고, 乾達婆의 논 城을랑 바라고,

여릿 軍도 왯다 倭軍도 왔다

홰 얀 어여 수프리야. 횃불 올린 어여 수풀이여.

三花 오롬 보시올 듣고 세 花郞의 山 보신다는 말씀 듣고,

라라도 그 자자렬 바애, 달도 갈라 그어 잦아들려 하는데,

길  벼리 라고 길 쓸 별 바라고,

彗星이여 녀16) 사미 잇다. 彗星이여 하고 사뢴 사람이 있다.

아야 라라 갯야. 아아, 달은 떠가 버렸더라.

이예 버믈 므슴ㅅ 彗ㅅ 다닛고. 이에 어울릴 무슨 彗星을 함께 하였읍니까.

< 류렬 해독, 살별노래 >

니리 사ㄹ 나리 건달바히 그 옛날 동쪽바닷가의 ‘건달바의 놀혼(놀온) 자시란 바라고[라고] 노온 성(신기루)’을 바라보고

아리시 군두 오시다 왜놈의 군대도 왔다고

수리 사란 가사라고라 홰불 올린 변경이라 하는구나

서가시히 모롬 보시호ㄹ 둟고 세 화랑이 산(금강산)구경한단 말 듣고 달도 바지리자로 올바히 달도 바지런히 잘 올 때에

기ㄹ 비술버리 바라고[라고] 길 쓰는 별을 바라보고

살버리러 살바라 사람이[사이] 이시다 살별이라 아뢰라는 사람이 있다 아라 달아라 부터가 이시다라 아라, 달 아래(바다에) 떠가 있더라 이벌아 가시보솜시 살히 이실고 이벗아, 무슨 꺼림직한 살별이 있을고?

1) 乾達婆 : ①신기루 / ②금강산 / ③음악의 신(화랑의 비유?).

2) 혜성의 실존 여부 : 헬리혜성 설.

3) 전승담의 구조

문제의 발생 조 치 문제의 해결

천 상 혜성의 출현

향가의 가창

혜성의 소멸 혜성의 존재 부정(歌)

지 상 (일본병의 침입) 일본병의 퇴치

일본병의 존재 부정(歌)

15) 달 아래.

16) 사뢴.

(3)

■ 서동요(薯童謠) / 서동(薯童) / 백제 위덕왕~법왕(579-599)

[三國遺事 卷二 紀異. 武王]

第三十 武王1)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文(*交字之訛)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 常掘薯蕷 賣爲 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 第三公主 善花 (一作 善化) 美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群童 群 童親附之 乃作謠 誘群童而唱之云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 의 용과 교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을 ‘서동’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 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국인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善花 (선화)【혹은 善化(선화)라고도 쓴다】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가 서 마를 가지고 동내 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 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卵?, *?2)乙抱遣去如 *?2 = 夕 + 卩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 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王后所贈 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當作少)掘薯之地 委積如 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薯童曰可 於是聚金 積如丘陵 詣 龍華山2)師子寺3)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李載浩譯註 本子字下補入寺字)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 心 卽王位 一日 王與夫人 欲行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 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 一夜頹山塡池 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尊字之 訛)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백관이 임금에게 극렬하게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 게 하였는데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되를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갈 때 서동이 도 중에서 나와 맞이하며 모시고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는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따라가며 잠통하였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 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 가로되 “이 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 서동이 가로되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황금을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가로되 “그것은 천하의 보물이니 그대가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것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 을 모아 구릉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 가서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가 가 로되 “내가 신력으로써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

1) 武王: 古本에는 武康이라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 백제에 武康이라는 이는 없다. 백제 제 30대 무왕이 아니고 제 35대 무녕왕(武寧王)일 듯.

2) 龍華山: 지금의 익산군 미륵산.

3) 師子寺: 지금의 미륵산 사자암.

(4)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1) - 정치성과 주술성 53

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의 변통을 이 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 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 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르되 “나의 소원이 이 곳에 큰 절을 이룩하면 좋 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에게 가서 못을 메일 것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어서 미륵삼상과 회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액호를 ‘미륵사’【국사에 는 왕흥사라 하였다】라 하니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서 도와 주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있다.【삼국사

에는 이 이를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독녀의 아들이라 전하니 자세치 않다.】.

< 梁柱東 해독, 薯童謠 >

善化公主니믄 善化 공주님은,

그지4) 얼어두고5) 남 그으기 얼어 두고,

맛둥바6) 바 몰 안고가다 맛둥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 洪起文 해독, 薯童謠 >

선화공쥬니 선화공주님은

 그기 얼어 두고 남 몰래 시집 가서

셔동 지블 바므란 안고 가다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가다.

< 金完鎭 해독, 薯童謠 >

善化公主니믄 善花公主님은

 그 어러 두고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薯童 방 바매 알 안고 가다 薯童 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 류렬 해독, 마보노래 >

마가시7) 공주님은 마가시(선화) 공주님은

남거서기 얼어두고 남몰래 새서방 얼어두고

마보기실 밤이 몰 안고 가다 마보(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알고 간다.

1) 서동의 정체 : ① 실존인물 : 무왕, 동성왕(아명 牟大), 무녕왕(신라 귀족과 통혼), 원효, 마한왕 준, 불교의 남순동자(관음보살의 추종자).

~ 단정할 순 없더라도 신라 ‘진평왕’이 등장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무왕’으로 보는 편이 가장 자연스러움

② 가공인물 : 서민 영웅설화(신분 상승의 욕구), 미륵사 창건설화.

→ ‘통일 후 신라인의 백제 무왕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백제문화권의 설화.

4) 그윽히.

5) 정을 통해 두고.

6) 맛둥방을.

7) 마+가시 : 아름다움 여자아이.

(5)

(선화공주를 통해 표상되는 신라의 ‘美’를 좇고, 그에 힘입어 정치적·종교적으로 성장).

cf. <내복에 먹지> 유형 여주인공과 선화공주의 비교.

2) ‘무왕’의 실제 모습

: 三國史記·三國遺事에 따르면 무왕 3년부터 동 12년, 17년, 25년, 27년, 28년, 29년 등 총 7차례 에 걸쳐 무왕은 신라를 침략하였으며, 신라는 백제에 대하여 실지(失地) 회복을 위해 2차례만 공세 를 취했음. 따라서 설화와 같은 백제와 신라 사이의 긴밀한 협조는 사실이 될 수 없음.

3) ‘미륵사’의 문화적 상징성과 마한문화에 대한 주목

貞觀 13년(639)에 百濟 武廣王이 枳慕密地[익산]로 천도하였다.(百濟武廣王 遷都枳慕密地 新營精舍.)8)

① 30만평에 이르는 3원3탑 구조의, 9층 목탑 1개와 9층 석탑 2개를 거느린 당시 최대의 종교적 상 징물로서 백제 미륵신앙의 완성을 살징함.

② 신라 황룡사의 구조물에 끼친 백제의 영향 : 30만평 3원 1탑의 9층 목탑 1개(백제 아비지 축조) 보유.

③ 미륵사의 상징성이 신라공주의 발원, 신라인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후대 신라인의 인식 반영.

【미륵사 복원 모형】

【황룡사 복원 모형】

8) 황수영, 「익산의 백제불교사적」, 황수영전집 3 : 한국의 불교공예·탑파 (혜안, 1998). 147면 재인용 (원전은 일본 京都 발견.)

(6)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2) - 종교성 55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2) - 종교성

■ 풍요(風謠) / 경성사녀(京城士女) / 신라 선덕여왕(632~646)

[三國遺事 卷四 義解. 良志使錫]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1)頭掛一布帒 錫自飛至檀越家2)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帒滿 則飛還 故名其所住 曰錫杖寺 其神異莫測皆類此 旁通雜譽 神妙絶比 又善筆札 靈廟丈六三尊 天王像 幷殿 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3) 法林寺4)主佛三尊 左右金剛神5)等 皆所塑也 書靈廟 法林二寺額 又嘗彫磚造 一小塔 竝造三千餘佛6)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7) 以正受8)所對 爲揉式 故京城 士女爭運泥土 風謠云

양지(良志) 스님[釋]은 그 조상괴 거처가 확실치 않은데 선덕여왕 무렵에만 사적(事蹟)을 나타냈다. 석 장(錫杖) 위에 포대(布袋)를 걸어두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며 소리를 내 었다. 그 집에서 알고 재비(齋費)를 넣되 포대가 차면 날아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

라고 하였다.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신이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일방 잡예(雜藝)에도 통하여 신묘함이 비길 바 없었으며 또한 서예를 잘하여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삼존, 천왕상, 전탑의 기와와 천왕사탑 밑 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삼존, 좌우금강신 등이 모두 그의 만든 것이다. (또 그는) 영묘사와 법림사 의 현판을 썼으며 또 일지기 기와를 조각하여 한 작은 탑을 만들고 거기에 3천불을 새겨 그 탑을 절 안 에 안치하고 치경(致敬)하였다. 그가 영묘사의 장육상을 만들 때에 입정(入定)에서 정수(正受)의 태도 로 유식(揉式)9)을 삼았으므로 성중의 사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풍요>에 이르길,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至今土人舂相役作皆用之 蓋始于此 像初成之費 入穀二萬三千七百碩 (或云改金時租) 議曰 師可謂才全德充 而以大方 隱於末技者也 讚曰

지금도 향인들이 방아를 찧을 때에 그렇게 부르니, 대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상 만드는데 든 (처음) 비용이 곡식으로 2만3천7백석이었다.【혹은 황금빛으로 진흙을 칠할 때의 비용이라 한다】. 論評하노니 師는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실하여 大方家로서 末技에 숨은 이라고 하겠다. 讚하노니,

齋罷堂前錫杖閑 재를 마치니 당 앞의 석장은 한가롭도다 靜裝爐鴨自焚檀 정장한 오리모양 화로에 박달나무 향 사르며 殘經讀了無餘事 남은 경전 읽고 나니 딴일이 없도다

聊塑圓容合掌看. 원만한 소상을 만들고 합장하여 보리라.

1) 錫杖: 스님들이 짚는 지팡이.

2) 檀越家: 시주가(施主家)

3) 八部神將: 불법을 지키는 여덟 神將.

4) 法林寺: 慶州에 있던 절.

5) 金剛神: 金剛力士. 仁王이라고도 한다. 오백 夜叉神을 시켜서 賢法千佛의 법을 지킨다는 두 神.

6) 三千餘佛: 과거․현세․미래 三世의 三千佛.

7) 入定: 선(禪)과 같음. 마음을 한 곳에 정하고 고요한 경지에 드는 일.

8) 正受: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정하고 고요한 경지에 드는 일.

9) 揉式: 인도풍의 미술 격식.

(7)

< 梁柱東 해독, 風謠 >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셔럽다라10) 오다, 서럽더라!

셔럽다 의내여11) 서럽다, 우리들이여,

功德 라 오다 功德 닦으라 오다.

< 洪起文 해독, 風謠 >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셜더라 오라 서럽더라

셜다 의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닷라 오라 공덕 닦으러 오라

< 金完鎭 해독, 風謠 >

오다 오다 오다. 온다 온다 온다.

오다 셜 해라. 온다 서러운 이 많아라. [因]

셜 하 물아. 서러운 衆生의 무리여.

功德 닷라 오다. 功德 닦으러 온다. [緣]

< 류렬 해독, 風謠 >

오다 오다 오다 온다 온다 온다

오다 서러버다라 온다 서럽더라

서러버다 이 나라 서럽다 이들이라

功德다라라 오다 공덕 닦으러 온다

< 박재민 해독, 오다노래 > : 후대의 <방아타령>으로부터 유추한 재구성

(메기는 소리) 오다 (받는 소리) 오다

(메기는 소리) 오다 (받는 소리) 오다

(메기는 소리) 괴로운 세상, 괴로운 세상의 무리들아 공덕 닦아라!

(받는 소리) 오다

※ 이국풍의 예술품 제작(양지) 효과

①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인한 호기심으로부터 불교에 대한 관심 증대.

②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의 심화.

③ 종교적 감성의 발생 : ‘설움’과 ‘공덕’의 상호 작용에 대한 문학적 인식 촉발.

10) 서럽더라. ‘서러운 사람이 많아라’로 읽은 이도 있다.

11) 우리들이여. ‘중생의 무리여’로 읽은 이도 있다.

(8)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2) - 종교성 57

※ <풍요>를 통한 종교적 감성의 표현

① ‘설움’의 해결책 : ‘공덕’ → ‘정토’의 시각적 구현체로서 양지의 조상이 지닌 아름다움에 주목.

② ‘조상의 아름다움’ 자체를 주목하여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정토신앙의 문화사적 역할 시작.

→ ‘정토’에 이르는 길(방법)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달’의 역할에 주목 : 후대의 <원왕생가>.

【양지의 사천왕상과 복원도 1】

【양지의 사천왕상과 복원도 2】

【감은사 서탑 외함 사천왕상】

【석장사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금동신장입상】

(9)

■ 원왕생가(願往生歌) / 광덕(廣德) / 신라 문무왕(661-681)

[三國遺事 卷五 感通. 廣德 嚴莊]

文武王代 有沙門名廣德嚴莊(*本文或作藏)二人 友善 日夕約曰 先歸安養1)者須告之 德隱居芬皇西里(或云 皇龍寺有西去房 未知孰是) 蒲鞋爲業 挾妻子而居 莊庵栖南岳 大(*當作火)種刀耕 一日 日影拖紅 松陰靜暮 窓外有聲 報云 某已西往矣 惟君好住 速從我來 莊排闥而出顧之 雲外有天樂聲 光明屬地 明日歸訪其居 德 果亡矣 於是乃與其婦收骸 同營蒿里2) 旣事(*恐是畢字之訛) 乃謂婦曰 夫子逝矣 偕處何如 婦曰可 遂留夜 宿 將欲通焉 婦斳之曰 師求淨土 可謂求魚緣木 莊驚怪問曰 德旣乃爾 予又何妨 婦曰 夫子與我 同居十餘載 未嘗一夕同床而枕 況觸汚乎 但每夜端身正坐 一聲念阿彌陀佛號 或作十六觀3) 觀旣熟 明月入戶 時昇其光 加趺於上 竭誠若此 雖欲勿西奚往 夫適千里者 一步可規 今師之觀 可云東矣 西則未可知也 莊愧赧而退 便 詣元曉法師處 懇求津要 曉作錚(*恐是淨字之訛下例倣此)觀誘之 藏(*本條標題及上文皆作莊)於是潔己悔責 一意修觀 亦得西昇 錚觀在曉師本傳 與海東僧傳中 其婦乃芬皇寺之婢 盖十九應身4)之一 德嘗有歌云

문무왕대에 사문 광덕과 엄장이란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하되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 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자고 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에 은거하여 신 삼는 것을 업으로 하며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거기에 거하여 숲의 나무를 베어 화전을 하였다. 어 느날 해 그림자가 붉은 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 밖에 소리가 나며 말하기를 “나 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하였다. 장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구름 저편에 하늘의 음악 소리가 나고 광명은 땅에 뻗쳤다. 다음날 장이 광덕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과연 덕 이 죽어 있었다.

이에 그 처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고 그 처에게 이르되 “남편이 죽었으니 같이 삶이 어떠하 냐?” 하매 그 처가 좋다 하여 드디어 유숙하였다. 밤에 잘 때 남녀의 정을 통하려 하니 그녀가 부끄러이 여기며 말하되 “스님[師]가 서방정토를 구함은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 다. 엄장이 놀라서 물어 가로되 “광덕이 이미 그랬거늘 난들 어찌 아니 되겠느냐?” 처가 말하되 “남편께 서 나와 10여 년이나 동거하였으되 아직 하룻저녁도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거늘 하물며 더러운 짓을 하 였으랴? 다만 매일밤 몸을 단정히 하고 정좌(正坐)하여 한소리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고 혹은 십육 관을 지어 관이 이미 숙달하여 명월이 창에 비치면 그 빛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로 가지 않고자 한들 어디로 가리요. 대개 천리를 가는 자는 그 첫걸음으로써 규정할 수 있나니 지금 사의 관은 동으로 간다 할지언정 서으로는 갈 수 없다” 하였다.

장이 부끄러워 물러가 곧 원효법사에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절히 구했다. 효가 쟁관법(錚觀法)을 지 어 지도하였다. 장이 그제야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자책하며 일심으로 관을 닦아 또한 극락으로 갔 다. 쟁관법은 <원효법사본전>과 <해동승전> 중에 있다.

그 부인은 즉 분황사의 종이니 대개 19응신의 하나다. 덕이 일찍이 노래를 지어 이르되……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多可攴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攴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當作句而看)

1) 安養: 아미타불의 정토(淨土). 극락세계.

2) 蒿里: 중국 태산 남쪽에 있는 땅 이름. 사람이 죽으면 이 곳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서, 무덤 또는 장사지낸다는 뜻으로 쓰임.

3) 十六觀: 중생이 죽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닦는 16가지의 법.

4) 十九應身: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응하여 나타나는 관음보살의 19가지의 모습.

(10)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2) - 종교성 59

阿邪 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 梁柱東 해독, 願往生歌 >

하 이뎨 달하, 이제

西方장 가샤리고 西方꺼정 가셔서

無量壽佛5)前에 無量壽佛 前에

닏곰다가6) 고샤셔7)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딤8) 기프샨 尊어9) 울워리 다짐[誓] 깊으신 尊을 우러러

두손 모도호10) 두 손을 도두와

願往生 願往生11) ‘願往生, 願往生’

그릴사 잇다 고샤셔12) 그릴 사람 있다! 고 사뢰소서.

아으 이몸 기텨13) 두고 아으, 이 몸을 길어 두고

四十八大願14) 일고샬까 四十八大願 이루실까[젛사옵네].

< 洪起文 해독, 願往生歌 >

하 이뎨, 달아 이제

서방(西方) 녀러 가샤리고 서쪽을 지나 갈 것가?

무량수불(無量壽佛)저네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엳옴 다가디 고샤셔 말씀을 가져다 전해 다오 다딤 기프샨 존(尊)아 울월디 다짐이 깊으신 부처님 우러러 두 손 모도 고초  두손 모와 꽂으며 사뢰기를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그리 사 잇다 고샤셔 념원하는 사람 있다 전해 다오

아야 아야

이 몸 기텨 두고 이 몸을 끼쳐 두고

四十八 대원(大願) 일우고샤가 四十八 큰 소원 이루실가?

< 金完鎭 해독, 願往生歌 >

라리 엇뎨역 달이 어째서

西方장 가시리고. 西方까지 가시겠읍니까.

無量壽佛前의 無量壽佛前에

곰 함 고쇼셔. 報告의 말씀 빠짐없이 사뢰소서.

5) 수명이 무한한 부처님의 덕을 찬양하여 일컫는 말. 곧 아미타불.

6) 일러다가.

7) 사뢰소서.

8) 다짐(誓).

9) 尊을. 부처님을.

10) 모아 합장하여.

11) 願往生極樂의 준말. 죽어서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싶도다.

12) 사뢰소서.

13) 남겨.

14) 아미타불이 法藏比丘였을 때 세운 48가지의 소원.

(11)

다딤 기프신 옷 라 울워러, 誓願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두 손 모도 고조 두 손 곧추 모아

願往生願往生 願往生願往生

그리리 잇다 고쇼셔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아야 이 모마 기텨 두고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四十八大願 일고실가 四十八大願 이루실까.

< 류렬 해독, 극락노래 >

달하 이더히 달아 이러히

서(갈모) 니히 가시리고 서쪽으로 극락다녀 가시리오?

무량수불전아 무량수불부처앞에

나리곰 다가리 사고시서 드릴 말씀 가져다 아뢰소서 다딤 보신 존이히 우럴디 다짐 깊은 부처님께 우러러

두손 모도고소 사라 두손 곧추 모아 사뢰여

가나가지러다 가나가지러다 가고싶소이다 가고싶소이다 그릴 사 이시다 사라고시서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다라 이 몸 긷어두고 아라 이 몸 남겨두고

사십받대운 이고실가 마흔여덟 온 소원 이루실가?

※ <원왕생가> 작가에 대한 제설 : ①광덕 ②광덕처(관음보살) ③엄장 ④원효 ⑤전승민요 ⑥불찬가.

→ 한번 유혹에 빠졌다가 개심한 ‘엄장’을 텍스트의 주체로 봤을 때 감동의 폭이 커짐.

따라서 문면의 정확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엄장설이 힘을 얻어 왔음.

※ 시적 자아에 따라 달라지는 <원왕생가>의 의미 행 단락

시적 자아

1~4행 (메신저 달에게 빎)

5~8행

(달에게 주는 메시지)

9~10행

(무량수불에의 구속주술) 광 덕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과거의 마음

부부관계 이상의 순수한 그리움

쌍방간의 의무·권리에 대한 확인

엄 장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간절함

실생활과 밀접하고 보다 쉬운 쟁관법 수행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위축된 자신감 당대의 일반 독자 잘못을 개심하는

마음의 가치 발견

‘엄장’의 처지와 자신을 동일시함

미타신앙에 대한 감성적 차원의 이해

→ ‘이렇게 열심히 한 나를 버려두고 48대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광덕)’와 ‘과거의 잘못 때문에 나를 버리고 48대원을 이루려 합니까?(엄장)’의 차이.

※ ‘○관법’ : ① ‘○’의 관법. ② ‘○’을 통한 관법(원효의 저술).

(12)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3) - 시적 자아의 발견 61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3) - 시적 자아의 발견

■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 득오[得烏谷] / 신라 효소왕(692-702)

[三國遺事 卷二 紀異. 孝昭王代 竹旨郞]

第三十二 孝昭王代 竹曼郞1)之徒 有得烏2)(一云谷)級干3) 隷名於風流黃卷4) 追日仕進 隔旬日不見 郞喚其 母問 爾子何在 母曰 幢典5)牟梁益宣阿干6) 以我子差富山城倉直 馳去 行急未暇告辭於郞 郞曰 汝子若私事 適彼 則不須尋訪 今以公事進去 須歸享矣 乃以舌餠一合 酒一缸 卒(*率字之訛)左人(鄕云皆叱知 言奴僕也) 而行 郎徒百三十七人 亦具儀侍從 到富山城 問閽人 得烏失奚在 人曰 今在益宣田 隨例赴役 郎歸田 以所將 酒餠饗之 請暇於益宣 將欲偕還 益宣固禁不許 時有使(*頁第四九行作史上)吏7)侃珍 管收推火郡8) 能節租三 十石 輸送城中 美郞之重士風味 鄙宣暗塞不通 乃以所領三十石 贈益宣勸請 猶不許 又以珍節舍知9)騎馬鞍 具貽之 乃許 朝廷花主10)聞之 遣使取益宣 將洗浴其垢醜 宣逃隱 掠其長子而去 時仲冬極寒之日 浴洗於城 內池中 仍合(*疑是令字之訛)凍死 大王聞之 勅牟梁里人從官者 竝合黜遣 更不接公署 不着黑衣 若爲僧者 不合入鐘鼓寺中 勅史上(*本頁第二行作使吏)侃珍子孫 爲枰定戶孫11) 標異之 時圓測法師是海東高德 以牟 梁里人 故不授僧職 初述宗公爲朔州都督使 將歸理(*避高麗成宗諱治下例倣此)所 時三韓兵亂 以騎兵三千護 送之 行至竹旨嶺 有一居士 平理其嶺路 公見之歎美 居士亦善公之威勢赫甚 相感於心 公赴州里(*見上) 隔 一朔 夢見居士入于房中 室家同夢 驚怪十(*恐是太字或尤字)甚 翌日使人問其居士安否 人曰 居士死有日矣 使來還告 其死與夢同日矣 公曰 殆居士誕於吾家爾 更發卒修葬於嶺上北峯 造石彌勒一軀 安於塚前 妻氏自 夢之日有娠 旣誕 因名竹旨 壯而出仕 與庾信公爲副帥 統三韓 眞德 大(*太)宗 文武 神文四代爲冢宰 安定 厥邦 初得烏谷 慕郞而作歌曰

제32대 효소왕 때에 죽만랑(죽지랑)의 무리 중에 득오【혹은 득곡이라함】급간이 있어 풍류황권에 이 름이 올라 날마다 출근하더니 한 열흘동안 보이지 아니하였다. 랑이 그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 있는 가 물으니 대답하되, “당전 모량부 익선 아간이 내 아들을 부산성 창직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급히 달려가 느라고 랑에게 고하지도 못하였노라.” 하였다. 郞이 가로되, “네 아들이 만일 사사로이 갔다면 찾아볼 필 요가 없지만 공사로 갔다니 응당 가서 대접하리라.” 하고, 설병 한 합과 술 한병을 가지고 좌인【우리말 에 ‘개질지’니 노복을 말함】을 거느리고 가며 랑의 무리 137인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 르러 문직에게 득오실이 어디 있는가고 물으니, 가로되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다고 하였다. 랑이 밭으로 찾아가 가지고간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도록 청하였 으나 익선이 굳게 거부하여 허락치 아니하였다. 이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 능절의 토지세 30석을 거두어 성중으로 전송하다가, 랑의 중사(重士)의 기풍을 아름다이 여기고 익선의 어리석고 융통성 없음을 더럽 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요청하였으나 그래도 허락치 아니하므로, 또 진절 사지의 말 안장과 도구를 주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익선을

1) 竹旨郞: 竹曼郞이라고도 하며, 또는 智官이라 했다.

2) 得烏: 得烏谷 또는 得烏失이라고도 함. 실(失)은 谷, 곧 골짜기.

3) 級干: 신라의 官等 제 9위.

4) 風流黃卷: 화랑도의 명부.

5) 幢典: 신라 군직(軍職)의 이름. 부대장격.

6) 阿干: 신라 官等 제 6위.

7) 使吏: 수송의 임무를 맡은 관리.

8) 推火郡: 지금의 밀양군.

9) 舍知: 신라 17官等 중의 제 13위.

10) 花主: 화랑 단체를 관장하던 관직.

11) 枰定戶孫: 당나라 제도에 한 마을의 사무를 관장하는 호(戶)를 평정호라 함.

(13)

잡아다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주려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거늘, 그의 장자를 대신 잡아갔다. 그 때는 추위가 극한 날로, 성 안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얼어붙어 죽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명령하기 를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하는 자를 모두 몰아내어 다시는 관공서에 부치지 못하게 하고 흑의(黑衣)를 입지 못하게 하며 만약 중이 된대도 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사상 간진의 자손은 명하여 평정호 손장을 삼아서 표창하였다. 이때 원측법사는 해동의 고승이로되 모량리 사람이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임소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삼한에 병란이 있어 기병 3천으로써 호 송하였다.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이 보고 찬미하였고 거사도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당당한 것을 좋게 여겨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다. 공이 임소에 간지 한 달이 되 어서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부가 꼭 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괴상히 여겨 이 튿날 사람을 보내어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지방 사람이 가로되 거사가 죽은지 며칠 되었다 하였다. 사 자가 돌아와 거사의 죽음을 고하매 날짜를 따져보니 그의 죽음이 바로 꿈꾸던 날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집에 태어날 것”이라 하고 다시 군사를 보내어 영상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을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는 과연 꿈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이를 낳으매 이름을 죽 지라 하였다. 그 아기가 자라서 출사하여 유신공과 더불어 부원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태종·문 무·신문의 4대에 걸쳐 대신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 하였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어 가로되, …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 梁柱東 해독, 慕竹旨郞歌 >

간봄 그리매 간 봄 그리매

모 것 우리12) 시름 모든것사 설이 시름하는데, 아13) 나토샤온14) 아름다움 나타내신

즈15) 살쯈16) 디니져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내다.

눈 돌칠17) 이예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맛보디 지리18) 만나뵙도록 (기회를) 지으리이다.

郞이여 그릴  녀올길 郎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이

다봊19) 20) 잘밤 이시리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12) 서럽게.

13) 아름다움. ‘殿閣을’이나 ‘살뜰한’ 등으로 읽은 이가 있다.(?) 14) 나타내신.

15) 모습.

16) 주름살. ‘해가 갈수록’이라 읽은 이가 있다.(?) 17) 돌이킬.

18) 만드리.

19) 다북쑥.

20) 마을에.

(14)

7세기 향가의 현실주의적 지향(3) - 시적 자아의 발견 63

< 洪起文 해독, 慕竹旨郞歌 >

간 봄 다리 가는 봄 보내며

모 사 우리 시름 그 분이 안 계시여 울음과 시름

어두름 나토디샤온 사랑해 주시던

 여줌 디 녀져 이 몸을 그르칠세라. 조심해 나가자

눈 도칠 의 눈을 돌칠 사이에

맛보디 아디 지아리 그 분을 또 다시 만나게 되리라

랑야 그릴  랑이여 그릴 마음의

녀훌 길 나가는 그 길은

아야 아야

다봊짓 골안 다복쑥 욱어진 골목안

잘 밤 이시아리. 어느 밤 잠 올 줄 있으랴

< 金完鎭 해독, 慕竹旨郞歌 > (1985 수정)

간 봄 몯 오리매 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

모 기샤 우롤 이 시름.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곳 기시온 殿閣을 밝히오신

(1985 : 두던 곳 됴시온) (1985 : 볼두덩 논두덩 좋으시던) 즈  혜나 헐니져.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 가도다.

누늬 도랄 업시 뎌옷 눈의 돌음 없이 저를

맛보기 엇디 일오아리.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郎이여 그릴  즛 녀올 길 郎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보짓 굴헝 잘 밤 이샤리. 다복 굴헝에서 잘 밤 있으리.

< 류렬 해독, 다마라화랑노래 >

간봄 그리미 지난 봄 생각해보니

모 사사 우를이 시름 그대 살아있지 못한 것이야 울음과 시름 아름다움

아 나시기시혼 어진 마음 나타내시온

지시 리니름 디디 니지 그 모습 해달의 지남-세월아 더디가자

눈 도라딜 리히 눈 돌아칠 깜박 사이에

맛보기라디 지소하리 그 분을 다시 만나 보게 되오리 나하 그릴 마미 니홀 길 그대여 그리워하는 마음에 다닐 길 다보지시 굴히 잘 밤 이시하리 다북덕쑥 구렁에 잘 밤 있으오리

※ 화랑단의 몰락과 왕당파의 화랑단 포섭 시도 : 정치적 失勢에도 문화적 상징으로서 권위 지속.

① 통삼 이후 무사로서 화랑단의 비중 축소와 귀족·호족 사병집단의 대두.

   ② 김유신 후손의 몰락과 전제왕권 실현에 반발하는 귀족 세력 견제를 위한 시도.

   ③ 정치 세력보다는 문화 담당층으로서 화랑의 역할 부활

(15)

: ‘중사의 풍’, 성자(聖者) 형상으로서 화랑의 발견(<모죽지랑가> → <찬기파랑가>).

~ 하나의 소재로서 인물 형상에 시간적·공간적 의미를 결부시키는 서정성의 새로운 영역

※ <모죽지랑가>의 구조 : 인물 형상과 시간·공간 인식을 중심으로

간 봄 (1행)-(과거) : 시간적 배경의 제시

계시지 못한 시름 (2행)-(현재) : 제재의 不在 인식 → “시름”

좋았던 과거의 모습 (3행)-(과거) : 아름다웠던 과거의 형상 묘사 늙어가는 현재의 모습 (4행)-(현재) : 쇠락해가는 현재의 모습 묘사

눈을 돌이키는 나 (5행)-(외형) : 서정주체의 움직임

만날 수 없음 (6행)-(내면) : 마음의 자세(반어 혹은 역설적 의미) 님을 그리워하여 가는 길 (7행)-(외형) : 감탄어 + 움직임의 방향

다보짖 구렁에 잘 밤 (8행)-(내면) : 서정주체의 신념·확신

※ 창작 시기의 문제 : ①득오가 강제부역할 때, ②죽지랑이 사망했을 때, ③전승담 이전의 어느 시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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