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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시단의 문학적 지향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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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련시단의 문학적 지향 연구

27)

맹 영 일*

❙국문초록❙

조선후기 특히 18·9세기에는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수많은 개성적 시인이 출현하였다. 이들의 문학 활동은 시사(詩社)를 통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시인들은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로 자신들의 문학적 재능을 표출하고, 문학적 견해를 확인하기 위해 시사를 열었다. 시인들은 시사 활동을 통해 자신들이 추구한 문학적 지향을 펼치기 위해 활발하게 노력하였다. 18세기 전반 근기 남인의 대표적인 시사는 강박, 이인복, 강필신, 이중환, 오광운에 의해 결성된 ‘백련사(白蓮社)’였다. 시사에 참여한 문인들은 18세기 전반 근기 남인의 젊은 사대부들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의지를 돈독히 하고, 문학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백련사의 모임을 가졌 다. 이후 백련사의 동인들은 비슷한 문학적 경향을 지닌 하나의 시단으로 발전하였다. 백련사 모임에 참여했던 이들의 문학적 결사체가 백련시단(白蓮詩壇)이다.

백련사 결성의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시 공부에 대한 동인(同人)들의 논의를 살펴서 몇 가지 문학적 지 향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련시단의 문학적 지향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백련시단 동인들은 시 공부 에서 ‘학시(學詩)의 단계’를 중시하였다. 동인들은 17~8세기 근기 남인의 공통된 문학론이었던 ‘상고(尙古)’의 경향에 영향을 받아 시를 공부하는데 전범을 세웠다. 동인들은 문학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기 위해 정감을 자유롭고 진실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들은 문학에서 ‘청(淸)’과 ‘청광(淸曠)’을 애호하여 작품 의 창작과 품평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

백련시단의 동인들은 함께 시를 짓고 공부하면서 비슷한 문학적 지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실제 작품의 창작과 작품의 품평에 활용하였다.

[주제어] 백련사, 백련시사, 강박, 이인복, 강필신, 이중환, 오광운, 문학 지향

❙목 차❙

Ⅰ. 서 론

Ⅱ. 학시(學詩)의 전범 제시

Ⅲ. 정감의 진실성과 개별성 추구

Ⅳ. 청(淸)과 청광(淸曠)의 추구

Ⅴ. 결 론

* 고려대학교 박사수료 / yimaeng@naver.com

(2)

Ⅰ. 서 론

조선후기는 다양한 시인들이 출현한 시기였다

.

이는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 발달로 인해 문화에 대한 관 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

·

정조 연간은 탕평책의 실시로 안정을 이룬 듯 보이면서도 노론의 호락

(

湖洛

)

분열 과 남인의 청탁

(

淸濁

)

대립에 시벽

(

時僻

)

의 갈등이 더하여 각 분파간의 정치적

,

문화적 활동은 서로 대립적인 양상을 띠었지만

,

당파를 초월하는 개방적인 집단문화 활동도 전개되었다

.

이 시기에 문예가 진작된 것은 각 분파의 대립 속에서 각 정치

·

문화 집단이 제각기 현실의 변화를 파악하고 전망을 제시하려 하였던 지적 운 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18·9

세기는 문학적 성취가 두드러져 사대부들의 한시에서 수많은 개성적 시인 이 나왔고 중인

(

여항

)

문학에서도 시사

(

詩社

)

가 활성화되었다

.

1)

이 시기 활발한 시사의 결성은 당대 문단 전체의 특징적인 면모이다

.

2) 기본적으로 시사는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로 구성된다

.

비슷한 성향의 인물들이 모여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표출하고

,

문학에 대한 견해를 확인 하는 장이 시사이다

.

대체적으로 시사의 동인

(

同人

)

들은 시사를 통해 자신들의 문학적 지향을 실제 작품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

문학이론이 실제 작품으로 이루어지는 장소가 시사였다

.

시사 활동을 통해 비슷한 문 학적 지향을 확인한 시사의 구성원들은 문학적 지향을 바탕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

즉 동일한 문학적 지향을 지닌 하나의 시단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다

.

따라서

18·9

세기에 활발하게 결성되었던 시사 를 중심으로 형성된 개별 시단을 살펴보면 이 시기 문단 전체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18

세기 전반기의 주요 문학 집단은 서울의 북악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백악시단으로 김창흡과 이병연 등 노론 계열의 문인들이었다

.

3) 그러나 소론과 남인계열의 문인들 역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

이 시기 남인문학을 주도했던 문인들은 소위 문외파

(

門外派

)

4)로 불리던 사대부들이다

.

문외파는 남하정

(

南夏正

, 1678~1751)

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었는데

,

이들은 국포

(

菊圃

)

강박

(

姜樸

, 1690~1742),

신절재

(

眘節齋

)

이인 복

(

李仁復

, 1683~1730),

청담

(

淸潭

)

이중환

(

李重煥

, 1690~1752),

약산

(

藥山

)

오광운

(

吳光運

, 1689~1745),

모헌

(

慕軒

)

강필신

(

姜必愼

, 1687~1756)

으로 모두 남인계열의 사대부들이다

.

이들은 집안끼리 서로 교유하였 으며

,

어릴 적부터 친밀했던 사이로

,

정치

·

문학 등 여러 측면에서 의견을 같이 하였다

.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던 이들은 문학에 있어서도 친밀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 18

세기 전반기 남인 문단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

본고에서는

18

세기 전반기의 근기 남인계열의 문학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백련시단

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

1) 심경호, 「조선후기 시사와 동호인 집단의 문화활동」, 󰡔민족문화연구󰡕 3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998, 100~101. 2) 안대회, 18세기 시사의 현황과 전개양상」, 󰡔고전문학연구󰡕 44, 한국고전문학회, 2013, 423~424.

3) 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의 구도󰡕, 소명출판, 1999, 25.

4)南夏正, 󰡔桐巢漫錄󰡕 권3,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景廟壬寅間, 又有一種新論, 藥峯台主之, 李仁復·李重煥, 若干人倡之. 論以眉叟爲宗, 割去驢社及睦··柳三家, 要自別於庚申己巳諸人云者, 此爲門外派, 以爲不可而排之者. 權令重經主之, 金華 ·權敍經, 若干人倡之, 此爲門內派. 又有持兩端, 遨遊其間者, 此爲跨城派, 鬧作一場風波, 擾擾不已, 人比之兩寡婦鬪鬨.”

(3)

백련시단의 동인들이 백련사 모임을 가진 가장 큰 이유는 시 공부였다

.

이들은 옛 작가들의 작품에 차운 하고

,

서로의 시에 화답하였으며

,

정경과 역사를 소재로 삼아 시를 짓기도 하였다

.

또 시를 어떻게 지어야 하고

,

시에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

이들이 백련사의 모임에서 시에 대해 어떤 논의를 했는지 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으나

,

문학에 대해 남긴 여타 논의를 통해 백련시단의 동인

(

同人

)

들이 지녔던 문학론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

이에 백련시단 동인들이 추구했던 문학론의 구체적 인 내용을 살펴

백련시단

의 문학적 지향을 확인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아 이들의 문학적 지향에 대해 연구하였다

.

Ⅱ장에서는 백련사 결성의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시 공부에 대한 백련시단 동인들의 논의를 살펴서

학시

(

學詩

)

의 단계

를 중시했던 모습을 확인하였다

.

아울러

17~8

세기 근기 남인들의 공통된 문학론 이었던

상고

(

尙古

)’

의 경향이 백련시단의 구성원들이 학시의 전범을 세우는데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

Ⅲ장 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기 위해 정감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개별성을 추구했던 이들의 문학론을 살펴보 았다

.

마지막으로 Ⅳ장에서는

청광

(

淸曠

)’

을 애호했던 이들의 논의를 살폈다

.

Ⅱ. 학시(學詩)의 전범 제시

백련시단의 동인들은 정치적으로 문외파의 젊은 문인들이었다

.

조선후기 남인들은

1722

(

경종

2)

분열이 일어나 문외파

(

門外派

문내파

(

門內派

과성파

(

跨城派

)

로 나뉘어졌다

.

문외파는 허목 등의 청남

(

淸南

)

세 력에 정당성을 부여하였고

,

이를 계승하려는 인물들이었다

.

5) 근기 남인계열의 문인들은 정치적으로 미수

(

)

허목

(

許穆

, 1595~1682)

이래 이어져 온 정치노선을 추구하였고

,

문학에서는 허목 이래 내려온 상고주의

적 문학관을 견지하였는데

,

6) 그 방법은 경전을 전범으로 하여 고학

(

古學

)

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

7) 허목의 고 학정신

(

古學精神

)

은 근기남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8) 백련시단의 동인들 역시 허목을 추숭하여 그의 문학관을 본받았다

.

허목을 비롯한 남인계열 문인들이 추구한 고학

(

古學

)

의 구체적인 방법은 육경을 문학의 근본으로 삼아 공 부하는 것이었다

.

문장을 지을 때는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으니, 근본이 확립되고 이치가 통달한 뒤라야 제자서를 널리 참고하고 백가를 포괄할 수 있다. 육경은 영원히 문장의 비조인데, 그 중에서도 동탕(動盪)한 「계 사전」과 전칙(典則)한 󰡔서경󰡕은 또 입론(立論)하고 서사(叙事)하는 문장의 비조가 된다. 󰡔중용󰡕은 「계 사전」과 매우 흡사하니, 공자 집안의 문체가 이와 같았다. 󰡔악기󰡕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역시

5) 유봉학, 「남인 분열과 기호남인 학통의 성립」,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신구문화사, 1998, 24~27. 6) 부유섭, 17~8세기 중반 近畿南人 文壇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149~151. 7) 윤재환, 󰡔조선 후기 근기 남인 시맥의 형성과 전개󰡕, 문예원, 2012, 124.

8) 송혁기, 󰡔조선후기 한문산문의 이론과 비평󰡕, 월인, 2006, 76~77.

(4)

「계사전」과 󰡔중용󰡕의 문체이다. 󰡔좌씨전󰡕은 상고시대와 거리가 멀지 않아 규범적이고 법도가 있는

󰡔서경󰡕을 깊이 체득하였으니, 후세의 외교문서[辭令]는 󰡔좌씨전󰡕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국 어󰡕는 부화하여 실질이 적고[藻華少實] 늘어져서 힘이 부족하며[彌漫寡力] 논의를 세운 것이 견강부회 하여 싫증날 만하다. 󰡔예기󰡕의 여러 편들도 대부분 󰡔국어󰡕와 비슷하니, 아마도 주나라 말기는 질박함 보다 세련됨을 숭상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 실체는 있으면서 형체가 없어 사람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 는 것을 󰡔맹자󰡕는 선명하게 형상화하면서도 평이한 말을 벗어나지 않았고, 여타의 작가들이 천 마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단궁」은 한 구절로 적절하게 형용하면서도 재단하거나 줄인 자취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것은 문장을 짓는 길로 인도하는 다리일 것이다. 󰡔장자󰡕를 읽는 자가 언어 와 생각 너머에 있는 생기발랄함[活機]을 얻는다면 참신한 구상력[匠心]이 민첩하고 오묘해서 한없이 응 용할 수 있지만, 잘 배우지 못하면 광대가 된다. 어떻게 배워야하는가? 퇴지(退之, 韓愈)와 자첨(子瞻, 蘇軾)처럼 하면 된다. 󰡔전국책󰡕과 󰡔한비자󰡕는 모두 이로움과 해로움을 설파하였는데, 󰡔전국책󰡕은 기상 이 넘치고[氣溢] 󰡔한비자󰡕는 기미가 날카롭다[機刻]. 󰡔전국책󰡕에서 터득한 자는 소씨(蘇氏) 부자이고, 󰡔한 비자󰡕에서 터득한 자는 조착(晁錯)이지만, 모두 훌륭한 군자들에게는 비판을 받는다. 󰡔사기󰡕를 읽는 자는 먼저 헤엄치는 용의 변화불측한[神變] 것을 보고, 다음으로 웅장한 기상[氣雄]을 보고, 다음으로 고결한 모습[色潔]을 보고, 다음으로 안개 낀 물결의 일렁임[澹宕]을 보게 된다. 그러나 도리에 어긋나 는 것도 있으니, 좋아하되 나쁜 점을 알아야 한다.9)

위의 글은 오광운의 문장론이 잘 드러나 있는 「문지

(

文指

)

」의 앞부분이다

.

오광운은 문장의 근본을 육경

(

六經

)

에 두었다

.

문장을 공부할 때에도 육경을 잘 익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

육경을 잘 익혀 근 본이 확립되어야 문장의 이치에 통달할 수 있고

,

그 이후에 제자서를 널리 참고하고 백가를 포괄하여 문장을 익혀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

오광운은 문장의 근본을 육경으로 삼았는데

,

그 중에서도 󰡔서경󰡕과 「계 사전」을 중요하게 여겼다

.

「계사전」은 동탕

(

動盪

)

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고

,

󰡔서경󰡕은 규범적인

[

典則

]

문체를 보여주는 경전이다

.

동탕은 형세나 정황이 불안정하고 태평하지 못한 모양으로

,

문장에 있어서 기세가 활발 함을 이야기한다

.

따라서 어떤 사실에 대해 입론을 하거나 서사하는 문장은 󰡔서경󰡕과 「계사전」을 전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

또 후대의 외교 문서를 쓰는 문인들은 규범적인 󰡔서경󰡕을 깊이 체득한 󰡔좌씨전󰡕을 전범으로 삼아서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이와 함께 문장을 배우는 사람들이 전범으로 삼아야 할 경전 은 󰡔맹자󰡕와 「단궁」이라고 보았다

.

오광운은 󰡔맹자󰡕는 실체는 있지만 형체가 없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평이한 말로써 선명하게 형상화하여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 책이고

,

「단궁」은 다른 작가들은 수많은 말을 가지고 표현해 내는 것을 흔적을 남기지 않고도 한 구절로 표현해 낸 책이라고 평가하였다

.

9)吳光運, 󰡔藥山漫稿󰡕 권11, 「文指」, 한국문집총간 210, 한국고전번역원, 515~517. “爲文章, 以六經爲本, 本立而理達, 然後 可以旁參諸子, 包括百家矣. 六經爲萬古文章之祖, 而繫辭之動盪, 書之典則, 又其立論叙事之祖也. 中庸酷肖繫辭, 孔子家文體如 . 樂記未知誰所作, 而亦繫辭·中庸體也. 左氏去古未遠, 深得書之典則, 後世辭令, 當以左氏爲宗. 然國語藻華少實, 彌漫寡力, 而其立論傅會可厭. 禮記諸篇, 多與之相類, 盖周末文勝而然也. 有情而無形, 人不能說道者, 孟子貌象玲瓏, 而不出於平易之語, 他作家千言而不能盡者, 檀弓一句了當, 而不見其裁减之跡. 此其文路之津梁也歟! 讀莊子者, 得活機於言語意想之外, 則匠心敏妙, 其應不窮, 不善學則俳矣. 學之如何? 如退之·子瞻可也. 戰國策·韓非子, 皆說利害, 而戰國其氣溢, 韓非其機刻. 得之戰國者, 蘇家父子, 得之韓非者晁錯, 皆見病於大雅. 讀史遷者, 先觀其游龍神變, 次觀其氣雄, 次觀其色潔, 次觀其烟波之澹宕. 而其盭於 道理者, 愛而知其惡可也.”

(5)

광운이 육경을 문장의 근본으로 삼은 이유는 질박함 때문이었다

.

오광운은 󰡔국어󰡕가 부화하여 실질이 적고 늘어져서 힘이 부족하게 된 이유로 세련됨을 숭상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

이는 󰡔맹자󰡕와 「단궁」이 지 닌 문학적 특징과 반대되는 요소들이다

.

오광운은 육경에 문장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를 통해 문장을 배워야 제대로 문학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

여러 요소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질박함이었다

.

강박도 오광운과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

강박은 문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옛 도를 회복하는 것이 며

,

그 방법은 육경을 근원으로 삼는 것이라고 보았다

.

이를 위해 강박은 두보와 고풍을 학시의 기본으로 삼 았다

.

강박은 시는 두보를

,

문장은 한유를 법

(

)

으로 삼아 문학을 익혔다

.

10) 강박에게 학시

(

學詩

)

의 기본은 두보였다

.

11)

어려서 처음 학문을 알고 문장을 지으며 경전에 근본하여 음과 뜻을 짐작하였고, 󰡔사기󰡕를 참고하 여 사업을 단련하였으며, 널리 제자백가 중에서 노담·장주·굴원·양웅·반고·사마천의 기이하고 높으며 괴이하고 이상한 말을 추구하여 갔습니다. 아래로는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이몽양[空 同]·왕세정[]·모곤[鹿]에 이르기까지 갈래에 통달하여 아취를 넓혀 갔으니, 비록 성취할 바가 있어 서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합격을 추구하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고자한들 어찌 사장에 빠져 과거에 부림을 당하여 그 본래 가진 것을 잃어버리길 수릉여자(壽陵餘子)가 한단에서 자신의 걸음걸이를 잃어 버린 것과 같이 하겠습니까?12)

위의 글은 강박이 황수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

편지에서 강박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문장과 학 문을 할 때 경전에 근본을 두어 글의 음과 뜻을 공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

경전에 근본을 두어 공부를 한 이 후에 󰡔사기󰡕와 제자백가의 글들을 익혔다는 것이다

.

강박의 문장 학습 방법은 오광운이 「문지」에서 밝힌 문 장 학습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

두 사람 모두 먼저 육경에서 문장의 학습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

오광운이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하였다면

,

강박은 육경을 통해 글자의 음과 뜻을 익혔다

.

또 두 사람은 󰡔사기󰡕의 특징 에 주목하였다

.

오광운은 󰡔사기󰡕를 읽게 되면 신묘하여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부분

,

웅장한 기상

,

고결함

,

또 안개가 낀 물결처럼 일렁이는 특징들을 보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

그러면서도 󰡔사기󰡕의 문장에는 도리에 어긋나는 부분도 있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장

·

단점을 분명하게 깨달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

강박 역시 󰡔사 기󰡕를 참고하여 문장을 익혔다고 하였는데

,

오광운이 󰡔사기󰡕에는 나쁜 부분도 있으므로 이를 정확히 알고 익

10) 姜樸, 󰡔菊圃先生集󰡕 권12, 「韓文杜詩」, 여강출판사, 1991, 908. “退之之文, 子美之詩, 譬如鄕黨一篇, 雖其衣服飮食, 常文 踈節, 皆可爲後世法.”

11) 姜樸, 󰡔菊圃先生集󰡕 권11, 「書虞集杜律註後」, 여강출판사, 1991, 872~874; 「子美詩至日一聯」, 󰡔菊圃先生集󰡕 권12, 906~

907; 「次老杜詠懷古跡三首」·「步杜韻, 贈人」·「夜坐, 詠杜工部十七日夜對月詩, 感所値適同, 遂次」, 󰡔菊圃先生集󰡕 권1.

12) 姜樸, 󰡔菊圃先生集󰡕 권8, 「答黃守愚書【辛卯】」, 여강출판사, 1991, 608~609. “少始知學, 作爲文章, 本之經傳, 斟酌乎訓 , 參之󰡔史記󰡕, 礱磨乎事業, 旁推於諸子百家老聃·莊周·屈原·楊雄·班固·司馬遷奇高跪異之說. 下逮韓···· 空同··鹿, 暢其支而博其趣, 雖甞欲有所成就, 應試而求擧, 若前所謂者, 豈可溺詞章役科程, 而亡其所固有, 若壽陵餘子之 失步於邯鄲者耶?”

(6)

혀야 한다고 한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

두 사람 모두 제자백가와 후대 문장가들의 글을 제외하지 않았다는 면도 비슷하다

.

이들의 문장에 대한 견해를 당시 근기 남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견해와 비교해보면 유사한 측 면을 확인할 수 있다

.

이들이 주장했던 고학의 방법은 허목의 상고주의적 문학관의 영향으로

,

당시 남인가에 서 이루어졌던 독서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

심재의 󰡔송천필담󰡕에 의하면

,

당시 남인 가문 중에서는 육경을 읽고난 뒤 󰡔좌전󰡕

·

󰡔국어󰡕

·

󰡔장자󰡕

·

󰡔사기󰡕 등을 독서하도록 하는 집안이 있었는데

,

이는 당시 일반적인 사대부들의 독서 방법과는 다른 모습이다

.

13)

두 사람 모두 문장에 있어서 가장 근본을 둔 것은 경전이었다

.

이러한 견해는 시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

아! 󰡔시경󰡕 이후에 시가 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한·위·진·송·제·양·진·수 이래로 더불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14)

강박은 󰡔시경󰡕 이후로 시가 망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

즉 한나라 이후로 제대로 일컬을 만한 시가 없다는 것이다

.

󰡔시경󰡕 이후 시가 쇠퇴해졌지만

,

그래도 본받을 만한 시인으로 강박은 두보를 꼽았다

.

백련시단의 동인들이 시의 전범으로 삼았던 작가는 두보였다

.

두보에 대한 추숭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져 백련시단 동인들만의 문학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

15) 학시의 전범으로 삼아 닮고자 했던 대상으로 삼았다 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백련시단 동인이 추구했던 시 공부의 구체적인 전범은 오광운을 통해 알 수 있다

.

오광운의 문학론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문학을 공부하기 위한 전범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

우선 오광운은 시의 전범을 성당

(

盛 唐

)

이전의 시에서 찾았다

.

특히 각 시체별로 전범의 대상을 설정했는데

,

가장 많이 언급된 이가 두보였다

.

오언 고시는 박고(樸高)하고 지원(旨遠)한 것을 높이 친다. 그러므로 한나라와 위나라의 시풍을 배워 야 하니, 배웠는데도 능숙하지 못하다면 완적·좌사·포조·사령운을 배워야 하고, 배웠는데도 능숙하 지 못하다면 도잠과 위응물을 배워야 하고, 배웠는데도 능숙하지 못한 뒤에는 두보와 한유를 배워야 한 다. 칠언 고시는 풍화(風華)하고 재장(才長)한 시를 높이 친다. 그러므로 이백과 두보를 종장으로 삼고 고적·잠삼·왕유·이기로서 보좌를 삼아야 한다. 오언 절구는 현묘(玄妙)한 시가 상랑(爽朗)한 것보다 좋다. 그러므로 우승(右丞, 王維)을 취하고 청련(靑蓮, 李白)으로서 짝을 삼아야 한다. 칠언 절구는 표일 (飄逸)한 시가 완유(婉柔)한 것보다 낫다. 그러므로 청련을 지표로 삼고 그 다음은 소백(少伯, 王昌齡) 을 지표로 삼되 소릉(少陵, 두보)은 경계해야 한다. 오언 율시는 신경(神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 로 소릉을 전범으로 삼되 흥취는 왕유와 맹호연에게 붙여야 한다. 칠언 율시는 격조(格調)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왕유·이기·고적·잠삼을 표준으로 삼되 기골(氣骨)은 소릉을 참고해야 한다. 배율은 소릉을

13) 부유섭, 앞의 논문, 2009, 115.

14) 姜樸, 󰡔菊圃先生集󰡕 권8, 「答黃守愚書【辛卯】」, 여강출판사, 1991, 610. “! 三百篇後, 詩亡久矣. ····· ··隋以來, 無可與稱.”

15) 부유섭은 17~8세기 중반 근기 남인문단에서 지양했던 특징의 하나로 두보의 시학과 정서의 수용을 들었다. 앞의 논문, 2009, 130~138.

(7)

추대하여 도목수로 삼은 뒤라야 웅혼(雄渾)하고 장려(壯麗)하며 청담(淸淡)하고 한원(閒遠)하여 벼슬아 치의 기상과 은자들의 기운을 잃지 않아 졸렬한 시인들의 나쁜 길로 떨어지지 않는다.16)

위의 글은 오광운이 시를 잘 쓰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한 「시지

(

詩指

)

」의 일부분이다

.

이 글은 시에 대한 오광운의 견해를 설명해주는 글로 여러 연구자들에게 주목을 받아왔다

.

특히 학시의 전범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남인계열 문인들이 추구했던 시 학습의 일단을 보여준 글이다

.

17) 오광운은 우선 시의 각 체에서 모범으로 삼아야할 특징과 시인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

즉 시를 배울 때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 야 할 내용들을 각 시체별로 설명하였다

.

오광운은 각 시체별로 특징을 파악하여 그 특징을 잘 배울 수 있는 전범을 제시하였다

.

오광운은 주

·

(

·

)

에서 당

·

(

·

)

에 이르는 걸작들을 모범으로 삼아 창작을 하되 시대적 요인과 개인의 개성적 요인을 중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

18)

오광운이 제시한 구체적인 전범을 살펴보면

,

우선 각 시체의 특징과 배워야할 시인들을 서술하였다

. 5

언 고시를 잘 짓기 위해서는 박고

(

樸高

)

하고 지원

(

旨遠

)

한 한나라와 위나라의 시를 배워야 한다

.

·

위의 고시 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다음으로는 완적

(

阮籍

좌사

(

左思

포조

(

鮑照

사령운

(

謝靈運

)

을 배워야 하고

,

그래도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도연명

(

陶淵明

)

과 위응물

(

韋應物

)

을 익혀야 한다

.

만약 그래도 익숙해지지 못한 다면 두보와 한유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5

언 고시의 전범을 한

·

위의 시에 둔 것은 근기남인 계열의 문인들의 상고주의적 문학관과 일치하는 견해이다

.

19)

7

언 고시는 풍화

(

風華

)

하고 재장

(

才長

)

한 이백과 두보 의 시를 배워야 하고

,

고적

(

高適

잠삼

(

岑參

왕유

(

王維

이기

(

李頎

)

를 아울러 함께 배워야 한다

. 5

언 절 구는 현묘

(

玄妙

)

한 시를 으뜸으로 삼기에 왕유와 이백의 시를 배워야 한다

. 7

언 절구는 표일

(

飄逸

)

한 시를 중시함으로 이백과 왕창령

,

두보의 순으로 중시해서 익혀야 한다

. 5

언 율시는 신경

(

神境

)

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두보를 중심으로 삼아 배우고

,

왕유와 맹호연의 흥취를 함께 공부해야 한다

. 7

언 율시는 격조

(

格調

)

를 중시하여 왕유

·

이기

·

고적

·

잠삼을 표준으로 삼아 익히면서 두보의 기골을 아울러 공부해야 한다

.

배율 은 두보를 배워 웅혼

(

雄渾

)

하고 장려

(

壯麗

)

하며 청담

(

淸淡

)

하고 한원

(

閒遠

)

한 풍격의 시를 짓도록 해야 한다

.

각 시체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특징은 다르지만 시기적으로는 성당

(

盛唐

)

이전의 시를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

성당 이전의 시인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언급된 이는 두보였다

.

두보는 각 시체에서 빠지지 않 고 배워야할 전범으로 등장하였다

.

이는 강박의 두보 추숭과 유사하다

.

그런데 이중환은 두보를 시의 전범으 로 삼는 것에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

이는 송나라 이후에 두보를 배운 자들이 두보의 청광을 얻지 못하 여 두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두보의 졸루한 곳에 귀착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

20)이중환은

고시는 두보에

16) 吳光運, 󰡔藥山漫稿󰡕 권11, 「詩指」, 한국문집총간 210, 한국고전번역원, 517. “五言古, 尙樸高旨遠. 故學漢魏, 未能則阮· ··, 未能則陶·, 未能而後杜·. 七言古, 尙風華才長. 故以李·杜爲宗, 而輔以高···. 五言絶, 玄妙上 於爽朗. 故取右丞而配以靑蓮. 七言絶, 飄逸長於婉柔. 故標靑蓮而次者少伯, 以少陵爲禁戒. 五言律主神境. 故型範少陵而興趣 寄於王·. 七言律重格調. 故準的王···岑而氣骨參之少陵. 排律推少陵爲都料匠, 然後雄渾壯麗, 淸淡閒遠, 不失冠冕 之象烟霞之氣, 而不落小家惡道矣.”

17) 여운필, 「오광운의 시인식에 관한 연구」, 󰡔역주 약산시부󰡕2, 월인, 2012.

18) 張炳漢, 「藥山 吳光運의 文學論에 관한 연구: 心靜 및 神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7.

19) 윤재환, 앞의 책, 2012, 350~360; 부유섭, 앞의 논문, 2009, 110~125.

(8)

와서 망했다

.”

21)라고 할 정도로

,

문인들의 시 공부 방법을 비판하였다

.

대신 이중환은 󰡔시경󰡕과 「고시십구수」

의 진수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22) 이는 오광운이

5

언 고시의 전범을 한

·

위의 시에 둔 것과 비슷하 다

.

이중환은 두보의 시를 평가 절하한 것이 아니라 시를 배우는 이들이 잘못 배울까 염려하여 논의한 것이 다

.

그렇지만 오광운은 성당 이후에 창작된 시들을 시 공부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하지 않았다

.

자신의 기업(基業)과 문호(門戶)가 이미 정해졌다면 이 아래 중당과 만당의 여러 시인으로부터 송· 원·명의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점만을 취하고 정수만을 캐내어 자신의 재능과 문학의 재료로 쓰면 된다. 그러나 전기와 유장경 이전은 노추(鑪錘, 시의 창작)의 안에 두고 전체를 취하며, 원진과 백거이 이후는 노추의 밖에 두고 취할지 말지를 살펴보는 것이 옳다. 소식·황정견·진사도·육유의 취(趣)는 시도(詩道)에 가깝지만 정(情)·성(聲)·색(色)은 사실에 가려졌기 때문에 비루함에 빠졌다. 하경명·이몽양·이반룡·왕세정의 소리와 색깔은 시도와 닮았지만 감정과 운치가 격률에 갇혔기 때 문에 거짓됨으로 들어갔다. 비루함과 거짓됨은 시도가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서곤체는 시구의 안배 [飣餖]를 부채의 양면이 합치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므로 강서파가 편고대와 요체로써 바로잡았으나 격식을 훼손하고 법도를 손상시켜 잘못됨이 더욱 크니, 모두 취할 것은 적고 버릴 것만 많다. 또 수준 이 떨어지는 진소석·장타유·유절양은 얼뜨기가 박수치고 장사가 몰래 웃는 것처럼 한결같이 이런 병폐에 들어갔으니 함께 시를 말할 만하지 않다.23)

오광운이 시의 전범으로 삼았던 작품들은 성당 이전 시기의 작품들이었다

.

그렇지만 중당

(

中唐

)

이후의 시 들을 시 학습에서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

오광운은 자신의 견해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중당과 만당

(

晩唐

)

이후의 시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고 여겼다

.

즉 중당 이후 여러 시인으로부터 송

·

·

명의 작가 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점만을 취하고 정수만을 캐내어 자신의 재능과 문학의 재료로 쓰게 되면 좋은 작품 을 지을 수 있다고 보았다

.

이와 함께 성당 이후 작가들의 시를 공부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언급하였다

.

오광운은 우선 전기

(

錢起

, 722~780)

와 유장경

(

劉長卿

, 709~786)

은 노추

(

鑪錘

)

의 안에 두고 전체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

노추는 달구고 저울질하는 것으로 즉 시를 짓는 일을 말한다

.

전기와 유장경의 시를 짓는 과 정을 잘 살펴 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

이후의 작가들에 대해서는 각각 조심해야 할 점을 언급하였다

.

먼저 원진

(

元稹

, 779~831)

과 백거이

(

白居易

, 772~846)

의 경우에는 시를 짓는 일에서 배우지 말고

,

작품에서 배워야 할 점과 배우지 말아야 할 점을 분별해서 시를 공부하도록 하였다

.

송나라의 소

20) 강준흠 지음, 민족문학사연구소 한문학분과 옮김, 󰡔삼명시화󰡕, 소명출판, 2006, 198. “是故宋後學杜者, 終不得杜之淸曠, 則不得不歸宿於杜之拙陋.”

21) 강준흠, 위의 책, 2006, 198. “余謂古詩亡於少陵.”

22) 강준흠, 위의 책, 2006, 198. “諸君子且置陳·陸不論, 先從少陵, 撇去安下, 則歧路旣異, 門戶自別, 可以直紹三百·十九之 , 而納納乾坤, 又可優游自在, 各隨天分, 止於其止.”

23) 吳光運, 󰡔藥山漫稿󰡕 권11, 「詩指」, 한국문집총간 210, 한국고전번역원, 517. “吾之基業門戶已定, 則下此而中晩諸家, 至宋 元明作者, 皆可取其長而採其精, 以資吾材具筆路爾. 然自錢·劉以上, 寘之鑪錘之內而取其全體, 自元·白以下, 寘之鑪錘之外 而審其取舍可也. ···陸相近者趣, 而情聲色爲事實所揜, 故流於陋. ···弇所肖者聲色, 而情趣爲格律所牿, 故入於贗. 陋與贗, 詩道不由也. 西崑體飣餖合扇. 故江西派矯以偏枯生拗, 毁格傷雅, 其失尤甚, 皆可取者少, 而可棄者多. 降而秦小石·張打油·劉折楊, 俚夫鼓掌, 莊士竊笑, 一入此窠, 不可復與言詩也.”

(9)

(

蘇軾

, 1036~1101)·

황정견

(

黃庭堅

, 1045~1105)·

진사도

(

陳師道

, 1053~1102)·

육유

(

陸游

, 1125~1210)

의 시에서 취할 점은 취

(

)

라고 보았다

.

이는 취가 시도

(

詩道

)

에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다만 정

(

(

(

)

은 사실에 가려졌기 때문에 비루함에 빠졌으므로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

오광운의 이와 같은 견해는 송시에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

.

송나라 시의 이지적

(

理智的

)

인 특징에 주의해 배워야 한다는 것 이다

.

명나라의 대표적 시인인 하경명

(

何景明

, 1483~1521)·

이몽양

(

李夢陽

, 1475~1531)·

이반룡

(

李攀龍

, 1514~1570)·

왕세정

(

王世貞

, 1526~1590)

의 시에 대해서는 소리와 색깔은 모범으로 삼는 시도와 닮았지만 감정과 운치가 격률에 갇혔기 때문에 거짓됨으로 들어갔다고 보았다

.

시도에서 배우지 말아야 하는 비루함과 거짓됨을 지닌 송

·

명 시인들의 시를 분별해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

서곤체

(

西崑體

)

와 강서파

(

江西派

)

의 시인들은 격식을 훼손하고 법도를 손상시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하였다

.

오광운이 중당 이 후 시인들의 장단점을 판단하는 기준은 시도였다

.

오광운이 시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시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시지」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

대저 시에는 여섯 가지의 요소가 있으니, 격(格)·조(調)·정(情)·성(聲)·색(色)·취(趣)이다. 여 섯 가지 중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시가 아니다. 격은 명당(明堂)의 제도처럼 해야 한다. 조는 방울소 리가 절도 있게 울리는 것처럼 해야 한다. 정은 천지의 온화한 기운이 온갖 풀에 꽃을 피우는 것처럼 해야 한다. 성은 큰 종이 우렁차고 맑게 울리거나 붉은 현에 소리가 느릿느릿한 것처럼 해야 한다. 색 은 상서로운 햇살에 비친 채색 구름, 환한 달빛 속의 성긴 별과 같게 해야 한다. 취는 긴 낮 동안 향로 에서 향이 피워 오르는데 새가 울자 꽃이 지는 것처럼 해야 하고, 금(琴)을 안고 한가로운 구름 속에서 느릿느릿 나는 학을 멀리 바라보는 것처럼 해야 한다. 시에는 경계해야 할 것이 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속(俚俗)·초급(噍急)·유괴(幽怪)·섬세(纖細)·다인사(多引事)·희영물(喜咏物)이다. 여섯 가지 중 에 하나라도 범하면 시가 아니다. 이속은 아녀자가 조잘조잘 생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첨꾼이 침을 튀기며 명리(名利)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초급은 길거리의 아이들이 씩씩거리며 남을 꾸 짖고, 천박한 사람이 눈에 쌍불을 켜고 싸우러 가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유괴는 낡은 성곽에서 반딧불 이가 날고 음습한 언덕에서 도깨비가 날뛰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섬세는 거미줄과 곤충의 소굴에서 지렁이가 울고 매미가 우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다인사는 귀신의 장부를 뒤지거나 수달이 물고기를 제사지내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희영물은 편(篇)은 늙은 유자(儒者)나 늙은 기생 같고, 구(句)는 물새 가 머리를 끄덕거리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인사(引事)와 영물(咏物)은 역시 각 체(體) 중에 없을 수 없으나, 다만 재료로써 신운(神韻)을 얽어매거나 작은 기교로써 아도(雅道)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게다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의(意)를 정(情)이라 여기고 미(味)을 취(趣)라고 여기는데, 아니다. 정 은 텅 비어 있지만 의는 꽉 차 있고, 정은 맑지만 의는 흐리며, 취는 심원하지만 미는 천근하고, 취는 고매하지만 미는 속되니, 변별하지 않을 수 없다.24)

24) 吳光運, 󰡔藥山漫稿󰡕 권11, 「詩指」, 한국문집총간 210, 한국고전번역원, 517. “大抵詩有六物, 格也調也情也聲也色也趣也. 六者闕其一, 非詩也. 格欲如明堂制度也. 調欲如和鑾節奏也. 情欲如天地氤氳, 百卉含葩也. 聲欲如大鍾弘亮, 朱絃䟽越也. 欲如瑞日卿雲, 踈星朗月也. 趣欲如永晝爐薰, 鳥啼花落, 抱琴引睇, 閒雲倦鶴也. 詩有六戒, 俚俗也噍急也幽怪也纖細也多引事 也喜咏物也. 六者犯其一, 非詩也. 俚俗, 如婦女昵昵話産業, 夸毗子津津談名利也. 噍急, 如街童握拳罵人, 賤夫弩眼赴閧也. 幽怪, 如古壘飛螢, 陰崖舞魈也. 纖細, 如蛛絲虫窠, 蚓鳴螗嘈也. 多引事, 如拈鬼簿獺祭魚之類也. 喜咏物, 篇如老儒老妓, 句如

(10)

오광운은 시에서 갖추어야할 조건과 경계해야할 조건을 제시하여 시 공부에서 중점을 두어야 할 요소를 제시하였다

.

시에서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는 격

(

(

調

(

(

(

(

)

6

가지이고

,

경계해야할 요소는 이속

(

俚俗

초급

(

噍急

유괴

(

幽怪

섬세

(

纖細

다인사

(

多引事

희영물

(

喜咏物

)

6

가지이다

.

특히 경계해야할 요소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포함될 경우에는 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

또한 정과 의

,

미와 취도 잘 변별해서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당시의 사람들이 의

(

)

를 정

(

)

이라 여기고 미

(

)

를 취

(

)

라고 여기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

정은 텅 비어 있지만 의는 꽉 차 있고

,

정은 맑지 만 의는 흐리며

,

취는 심원하지만 미는 천근하고

,

취는 고매하지만 미는 속됨으로 잘 변별해야 한다고 보았 다

.

문장에서 부화하고 실질이 적으며

,

힘이 빠진 작품을 싫어하며 질박함을 좋아했던 오광운은 시에서도 괴 이하고 화려하며 지엽적인 부분에 치중하는 작품을 경계하였다

.

이는 당대 주류 시단이 기궤첨신

(

奇詭尖新

)

과 한수고고

(

寒瘦枯槁

)

로 흐르는 경향을 비판한 것이다

.

25) 시를 바라보는 강박의 관점도 이와 비슷하다

.

대개 시인이 한 순간 만나게 된 말과 감정을 가탁한 말과 같은 종류는 자취를 찾아 형상화하기 어렵 다. 비록 그 시를 지은 사람에게 풀이하게 하더라도 아마도 혹은 유감이 있을 것이니, 하물며 후대 사 람이 함부로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시에 반드시 주(註)가 있을 필요는 없고, 주가 있어도 또한 반드시 볼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를 보는 것은 다만 먼저 자신의 속된 혈기와 화려한 상 상을 버리고 고요하게 한가로이 즐기는 곳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보아야 한다. 바야흐로 시를 볼 때 에는 눈과 마음이 함께 이르되, 다만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또 그 말을 감상하는데 그치지 말고 반드 시 언외(言外)의 뜻을 찾으려고 해야 하며, 언외(言外)의 뜻을 찾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소 가설하여 작자가 되어 구상할 때의 광경을 보려고 해야 한다. 그런 후에 전후 사정을 합하여 맑은 음성 을 읊으며 음미하고, 전시대 사람들의 비평을 천천히 취하며 자신의 의견을 참고해 득실을 따져본다면, 은연중에 날마다 나아가는 바가 있어 장차 옛 사람들의 심오함에 거의 가까워질 것이다. 또 어찌 구구 한 시골 학자들처럼 어렵게 주각(註脚)을 다는가? 겸은재(兼隱齋)에 있다가 우연히 󰡔우주두율(虞註杜 律)󰡕을 보게 되어 이와 같이 거침없이 쓴다.26)

위의 글은 「우집

(

虞集

)

의 󰡔우주두율

(

虞註杜律

)

󰡕을 읽고 쓰다」라는 작품이다

.

우집

(

虞集

, 1272~1348)

은 원시

4

대가

(

元詩四大家

)

중의 한 사람이다

.

󰡔우주두율󰡕은 우집이 두보시 중 칠언율시 백여 편을 골라 주희의

󰡔시집전

(

詩集傳

)

󰡕을 모방하여 주석한 것이라 전해지던 사본

(

寫本

)

을 명나라의 주웅

(

朱熊

)

1434

년에 판각 하여 간행한 것이다

.

27)

沙鳥點頭之類也. 引事咏物, 亦各體中不可無者, 但不當以材料累神韻, 小巧傷雅道爾. 且世人多有認意爲情, 認味爲趣者, 非也. 情虛而意實, 情淸而意濁, 趣遠而味近, 趣高而味俗, 不可不辨也.”

25) 여운필, 앞의 논문, 2012, 439.

26) 姜樸, 󰡔菊圃先生集󰡕 권11, 「書虞集杜律註後」, 여강출판사, 1991, 873~874. “蓋詩人一時會境之語, 寓憾之詞類, 難以跡求 而形模. 雖使作之者解之, 恐或不能無憾, 況從後妄道哉? 余故曰, ‘詩不必有註, 有亦不必看.’ 看詩者, 但先去吾葷血氣芬華想, 從淨靜暇豫地, 坐臥自在看. 方其看時, 心眼幷到, 但勿縛住. 不止玩其辭, 必尋其言外, 不止尋其言外, 必以吾身設爲作者, 以求 見其屬思時光景. 然後合首尾, 楚音詠味, 徐取前人批評, 參己意究其得失, 則闇然之間, 日有所進, 將庶幾於古人之閫奧矣. 又何 用區區村秀才, 囏難註脚爲也? 在兼隱齋中, 偶閱虞註, 謾書之如此.”

(11)

강박은 위의 글에서 시를 배울 때의 과정을 설명하였다

.

우선 시를 볼 때 주석을 통해 시를 이해하는 일반 적인 견해에 반대하였다

.

시를 볼 때 외부의 다른 요소에 얽매여 시를 보게 되면 시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

시를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고요하게 한가로운 장소를 찾아 편안하고 자유롭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혈기와 상상마저 버리고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시를 볼 때에야 눈 과 마음이 비로소 함께 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눈과 마음으로 시를 바라보게 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얽매여서 안된다고 보았다

.

시를 이해할 때에 눈과 마음이 시어에만 얽매여서 감상하는 태도는 올바 른 시의 감상법이 아니므로

,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언외

(

言外

)

의 뜻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한 단 계 더 나아가 언외

(

言外

)

의 뜻을 찾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작가가 되어 작가가 작품을 구상할 때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상상해 볼 때 비로소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앞선 사람들의 비평을 살펴서 시의 감상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자신들이 시 공부의 모범 으로 삼았던 옛 사람들의 시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보았다

.

강박은 시를 감상할 때에 남의 견해에 얽매여 시 를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고

,

시 자체를 통해 옛 사람들의 시도를 이해하고자 했다

.

이는 상고주의적 문학관 으로 시를 공부하고자 했던 백련시단 문인들의 문학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

Ⅲ. 정감의 진실성과 개별성 추구

백련시단의 동인들은 시에 있어서 성정의 표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

과연 그대가 보여준 바와 같습니다. 또한 ‘성정에 근본하지 아니하고 조탁에 각고의 노력을 하여 문 장의 공교함에 불과할 따름이다.’라고 한 것에 이르렀으니 역시 미혹된 바가 있습니다. 두보[草堂]의 충 성스럽고 의로운 기운은 가을 하늘과 높이를 다투고 장편과 단편은 하나라도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렇다면 그가 읊은 것은 성정에서 나왔다고 말해야 할 까요, 성정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요? 세상에서 두보의 시가 조탁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식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그의 시는 실로 전아 (典雅)함과 간실(簡實)을 주로 하고 겸하여 우울과 슬픔을 기탁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천박한 식견으로 그의 작품을 조탁에 각고의 노력을 한 것으로 보니, 몹시 실상에 가깝지 않습니다. 누가 그대 의 명석했던 식견이 또 여기에 이를 줄 생각이나 했을까요? 한스럽고 한스럽습니다! 또 “시는 성에서 나왔으나 성을 해치는 것이 시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대의 잘못을 어찌해야 할까요? 무릇 시가 성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성에 해가 됩니다. 과연 성에서 나왔다면 어찌 성에 해가 되겠습니까? 성에서 나왔으나 성에 해가 된다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성에서 나와 성에 해가 된다면 󰡔시경󰡕의

27) 심경호,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일지사, 1999, 342~351; 이의강, 「조선시대 유행 두시집 󰡔우주두율(虞註杜律)󰡕의 문헌학적 연구」, 한국한문학연구 제28, 2001, 37~62쪽 참고.

(12)

시는 실로 성에서 나왔으니 또 성에 해가 된다는 것인가요?28)

강박이 황수우

(

黃守愚

)

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

황수우가 강박에게

성정에 근본을 두지 않고 조탁에 만 힘쓴다

.”

고 비판하자

,

강박은 자신의 시가 성정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밝혔다

.

강박은 두보의 시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

세상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 조탁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 였다고 비판하지만

,

이는 잘못된 견해라고 강조하였다

.

그러면서

시가 성에서 나왔으나 성을 해치는 것이 시이다

.”

라는 황수우의 견해를 󰡔시경󰡕의 예를 들어 비판하였다

.

강박의

시가 성정에 근본하고 있다

.’

라는 견 해는 명말 중국에서 일어났던 경릉파의 견해와 비슷하다

.

경릉파의 대표적 인물인 종성은

시는 성정

(

性情

)

을 말로 나타내는 것이다

.

말하는데 있어서는 마음속의 없애버릴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

일로 인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

일로 인하여 반드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명판을 얻기 위한 말이다

.

부득이 해서 하는 말

,

마음속의 없애버릴 수 없어서 하는 말이 성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

29)라고 하여 시가 성정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

시인은 자기의 마음속에서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일어날 때 이를 시로 표현해낸다는 것이다

.

강박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드러냈다

.

사람들은 이래초(李來初)의 「지구락사(地驅樂詞)」가 외설에 가까워 병통이라 하나 이는 시도를 모 르는 말이다. 시가 정(情)을 낳고, 정(情)이 교(巧)를 낳고, 교(巧)가 염(艶)을 만든다. 그 지극한 것이 대개 ‘그렇게 될 것이라 기약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된 것’이 있으니, 진실로 이를 병통으로 여긴다면 차 라리 시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 도령의 한정과 송광평의 매화가 어찌 그 성(性)이겠는가? 담원춘이 말 하길 “재자가 비록 지극히 방정하여 범하기 어려워도 붓을 내려 염사를 지으면 스스로 일체의 탕자보 다 더 깊어진다.”라 하였다. 이 말은 이래초에 대한 혐의를 벗길 수 있을 것이고 도·송 두 사람의 누 명도 벗길 것이다.30)

이인복

(

李仁復

)

의 「지구락사

(

地驅樂詞

)

」가 음란하다는 평을 받자

,

강박은 이를 반박하는 글을 써서 정경의 자유로운 표출이 정

(

)

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

시는 정

(

)

을 표현해 내고

,

(

)

은 교

(

)

를 이루며

,

(

)

는 염

(

)

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의 지극한 이치이다

.

시에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는 것은 작가가 일부러

28) 姜樸, 󰡔菊圃先生集󰡕 권8, 「答黃守愚書【辛卯】」, 여강출판사, 1991, 605~611. “果如吾子所示. 而至於亦不本性情, 刻苦雕 , 不過工文章而已云, 則亦有所惑焉. 草堂忠義之氣, 與秋色爭高, 而長篇短詠, 無一不出於愛君憂國之意, 則其可謂出於性情者 , 其可謂不出於性情者乎? 世甞說草堂詩, 刻苦雕琢, 是無見耳. 愚以爲其詩, 實主於典雅簡實, 兼寓其憂憤閔欝, 而世之人, 以薄見陋識, 把作刻苦雕琢看了, 甚不近也. 誰謂吾子之明見, 復至於是耶? 可恨可恨! 且曰, ‘詩出於性, 而害性者詩.’ 何吾子之誤 ? 凡詩不出於性, 故害於性. 果出乎性, 豈害於性哉? 出乎性而害於性, 愚未之聞也. 出乎性而害於性, 則三百篇之詩, 實出於性, 亦果害於性也耶?”

29) 鐘惺, 󰡔隱秀軒集󰡕, 「部郞草序」, 上海:上海古籍出版社, 1992. “夫詩, 道性性情者也. 發而爲言, 言其心之所不能不有, 非爲其事 之小不可無而必欲有言也. 以爲事之所不可無而必欲有言者, 聲譽之言也. 不得已而有言. 言其心之所不能不有者, 性情之言也.”;

高仁德, 「경릉파의 시론과 󰡔시귀󰡕」, 󰡔中國語文學誌󰡕 5, 중국어문학회, 1998, 117.

30) 姜樸, 󰡔菊圃先生集󰡕 권12, 「李來初詞辨」, 여강출판사, 1991, 907. “人或以來初地驅樂詞, 近褻爲病. 此不知詩道之言也. 生情, 情生巧, 巧生艶, 其至也, 盖有不期然而然者. 苟以是爲病, 則寧無詩也. 陶令閑情, 宋廣平梅花, 豈其性哉. 譚元春曰, ‘ 子雖極方正難犯, 下筆作豔詞, 自深於一切蕩子.’ 此言可爲來初解圍, 亦可爲陶宋二家, 雪冤.”

(13)

(

)

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치에 의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

외설적이거나 공교함은 인간의 본성으로

,

이 본성이 시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병통이라 여기는 것은 시도

(

詩道

)

를 모르는 것 으로

,

시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

경릉파의 핵심인물인 담원춘

(

譚元春

)

의 논의를 근거로 하여 방정 한 성품을 가진 시인도 정

(

)

이 저절로 나타나 염사

(

艶詞

)

를 짓는 것이 탕자보다 더 농도 짙어질 수 있음을 말하였다

.

담원춘은 시에서 성정을 중요하게 여겼던 인물이다

.

담원춘은

시인의 감정이 홀로 움직이면 만물

(

萬物

)

이 모두 열려

,

입은 문득 읊조리고 손은 문득 쓰기 시작하여 손과 입을 원래 가슴속으로부터 흘러나오 는 것에 맡겨 버렸으니 손과 입도 무엇을 읊조리고 무엇을 쓸 것인지를 추측할 수가 없다

.

마음은 원래 손과 입이 멈추는 것에 맡겨버렸으니 마음도 언제 멈출지를 강제할 수 없다

.”

31)라고 하였다

.

즉 성정에서 나온 시 는 어떤 말이든 강제로 막을 수 없으며

,

이는 진실 된 마음의 표현이므로

,

방정한 선비가 염사를 짓게 되면 더욱 농도짙은 작품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

담원춘은 성정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였다

.

강박은 비록 절제하 지 않으면 정

·

(

·

)

의 번음

(

繁音

)

과 제

·

(

·

)

의 미어

(

靡語

)

로 빠질 수 있다는 단서를 두기는 하 였지만 개인의 정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해내는 남녀 간의 말이 풍인

(

風人

)

의 성정지정

(

性情之正

)

을 해치는 것 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

32) 강박은 시는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니 시가 성정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성을 해치는 것이지

,

성정에서 나왔다면 시가 성정을 해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

33)이는 앞에서 언급한 「황수우 에게 답한 편지

[

答黃守愚書

]

」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

즉 시는 성정에 근원을 두고 창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성정에 근원하여 이루어진 작품은 일정한 경지를 이루게 된다

.

이인복도 천기가 자연스럽게 발휘된 시를 높 이 평가하였다

.

사람들이 항상 말하길 ‘남자는 통하고 여자는 막혔다.’라고 하는데,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해 준 것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밝은 본성[慧性], 가슴 속 회포[靈襟], 신묘한 깨달음[神解], 기이한 앎[奇識]은 때때로 아녀자에게서 거듭 보인다. 시율의 교묘함이 천기의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데 이른다면 사내장 부의 힘으로 따라가려 해도 미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또 많다.34)

위의 글은 이인복이 신순일의 부인 설봉 이씨의 유고집에 써준 시문이다

.

하늘이 부여해준 바에 따르면 남자는 통하고 여자는 통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

그런데 여성의 작품에 밝은 본성

·

가슴 속 회포

·

신묘한 깨달음

·

기이한 앎 등이 담겨 있기도 한다

.

이는 천기가 자연스럽게 발현되어졌기 때문이다

.

즉 이인복은 시

31) 譚元春, 󰡔譚友夏合集󰡕 卷9, 「汪子戊巳詩序」, 續修 四庫全書 1385, 上海:上海古籍出版社, 1995. “夫作詩者一情獨往, 萬象俱 , 口忽然音, 手忽然書, 則手口原聽我胸中之所流, 手口不能測, 卽胸中原聽我手口之所止. 胸中不可强.”; 高仁德, 앞의 논문, 1998, 117~118.

32) 姜樸, 󰡔菊圃先生集󰡕 권2, 「麗鳥詞」, 여강출판사, 1991, 143~144. “如雪梅詞以下諸作, 出於一時戱劇, 多落艶體, 男女姙席 之語, 固不害於風人情性之正而一味濫觴, 莫之或節, 則易趍於鄭衛繁音, 齊梁靡語, 可不懼哉. 繼自今, 筒遞往復, 用以爲戒, 切屛去此等體, 惟以伯仲篪壎之例, 共勉晧首崇德之義, 如何如何.”

33) 姜樸, 󰡔菊圃先生集󰡕 권8, 「答黃守愚書【辛卯】」, 여강출판사, 1991, 611. “且曰, 詩出於性, 而害性者詩, 何吾子之誤也. 詩不出於性, 故害於性, 果出乎性, 豈害於性哉.”

34) 李仁復, 󰡔先稿󰡕, 「雪峰李夫人遺稿序」, 충현박물관 소장. “人有恒言曰, ‘男通而女塞言天之賦于人者然也. 然其慧性靈襟神解 奇識, 往往累見於閨房之間. 至若詩律之妙, 出天氣之自然, 則丈夫之力追而不能及者, 抑又多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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