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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특별한 귀국 이야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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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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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

국민외교 디자인단 엮음

(2)

우리의 특별한 귀국 이야기 2020

국민외교는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국민 참여를 활성화함으로써 국민의 외교 역량을 결집해 ‘국민 중심, 국익 중심의 외교’를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국민외교 디자인단은 외교정책 추진 과정에의 국민 소통과 참여 확대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민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국민외교 행사를 함께 기획하고 홍보하면서, 국민과 외교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019년 7월 발대식을 통해 구성된 국민외교 디자인단 2기는 국민외교 모바일 앱 홍보를 위한 카드 뉴스 및 동영상을 직접 제작하고, 2019년 11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등 주요 행사 계기 국민 소통 행사를 취재하면서 경험을 공유하는 등 중요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3)

우리의 특별한 귀국 이야기 2020

코로나 위기 속에서 희망을

함께 만들며…

(4)

우리는 국민과 외교부 사이 다양한 소통과 참여 행사를 외교부와 함께 준비해오고 있는 국민외교 디자인단입니다. 국민외교에 큰 관심을 갖고, 많은 사람들에게 국민외교를 알리고 싶다는 열정으로 모인 청년들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초부터 TV를 통해 코로나 사태로 귀국하지 못하고 세계 곳곳에서 발이 묶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다행히 많은 국민들이 외교부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귀국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교민 철수에 애써주신 분들을 보면서 국가를 느꼈다”라는 교민분의 인터뷰를 읽으며, 외교부가 국민들을 위해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국민외교 디자인단으로서 국민들의 진솔한 귀국 이야기를 모아 책을 만들어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과 함께 외교부, 재외공관, 한인회 등 많은 분들이 힘을 모아 국민의 안전한 귀국을 이루어낸 과정은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코로나 상황에서 많은 부처가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외교부도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코로나 대응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재외국민 수만 명의 귀국을 지원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들어가면서

2020년 6월 국민외교 디자인단 2기 선진국에서는 자국민이 해외에서 자연 재난 등으로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다양한 수단을 통해 귀국 지원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제 우리나라도 이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에 들어섰다는 자부심도 느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외교부 국민외교 팀의 도움을 받아 수기집이 제작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수기를 모으는 과정에서는 재외공관과 한인회 등이 도와주셨습니다.

수기집을 만들면서 국민을 위해 힘써주시는 다양한 분들의 수고를 알게 되었고, 추상적으로만 생각해왔던 외교가 사실은 우리 생활의 일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수기집 제작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많은 보람과 뿌듯함을 느낍니다.

수기집 속 귀국 이야기들을 읽어보니, 언론 보도에서 듣던 것보다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국민과 외교부, 재외공관 등 다 함께 힘을 모은 과정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저력이 아닐까요. 모두가 함께 힘을 모은다면 코로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5)

16

10

250

252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18 가봉

20 나미비아 27 나이지리아 30 마다가스카르 33 모로코

41 수단

43 아랍에미리트 47 알제리 52 요르단 56 우간다

71 이란

75 이집트 79 카메룬

아시아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114 몽골

120 미얀마 123 베트남 126 우즈베키스탄 134 인도 140 중국 160 카자흐스탄 170 키르기스스탄 183 피지 186 필리핀 188 신속대응팀

아메리카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84 도미니카공화국 85 멕시코

87 미국

89 브라질 92 우루과이 98 파라과이 102 페루

유럽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198 네덜란드

200 러시아 209 몬테네그로 211 불가리아 215 세르비아 224 이탈리아 231 체코 234 터키

국민 귀국 수기

목차

험난했던 귀국 과정

재외국민

귀국 지원 현황

만든 이들의 이야기

기고문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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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했던

귀국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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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은 예고 없는 기간 동안 폐쇄되었고,

24시간 이동 금지명령에 따라서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초반에는 마스크 한 장조차 구할 수 없었고, 식량을 사러 마트에 가는 것도 몇 시간씩 강한 햇빛 아래에서

기다려야 하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오도가도 못 하는

불안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가 큰 힘이 되었다

확진자의 가족이라 대면을 꺼릴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가족들의 출국을 위해 바이러스 검사에서부터 공항 출국 절차까지

도와주신 외교관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교민의 울음에 공감해주고 위로해주신 영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습니다.

(8)

그리고 마침내…

하늘길이 열렸다

담당 영사는 할머니와 손자들을 차에 태우고 직접 운전하여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일요일이었지만 대사관의 여러 직원들이 출근하여 신속히 긴급 여권을 발급했습니다.

한국을 못 갈까 봐 눈물을 글썽이던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새롭게 발급한 긴급 여권을 손에 쥐고 마침내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방역 장비가 잘 갖춰져 있는 한국의 의료진과 단계별로 코로나19를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뉴스로만 접하던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에 놀라고, 불철주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가의 모습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한국으로 갈 수 있다’

우리 집으로!

(9)

외교부가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국립인천공항검역소,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협업하에 진행한 주한 외교사절단 대상 인천공항 출입국

검역 현장 참관 모습 코로나19로 베트남에 격리된 우리 국민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정부합동 신속대응팀의 출국 모습

베트남에 신속대응팀 출국 2020년 3월 5일

주한 외교사절단 대상 인천공항 출입국 검역 현장 2020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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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가봉 18

나미비아 20

나이지리아 27

마다가스카르 30

모로코 33

수단 41

아랍에미리트 43

알제리 47

요르단 52

우간다 56

이란 71

이집트 75

카메룬 79

국민 귀국 수기

(11)

그리던 가족 품으로 날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비행기 출발일이 확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드디어 꿈에도 잊지 못할 4월 9일이 되었고, 새벽부터 단잠을 설치고 달려오신 류창수 주가봉대사님과 대사관 직원분들의 아름다운 배웅을 받으며 회사 동료 3명과 함께 우리 일행은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빌려 임차 전세기를 내어준 가봉 정부와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까지 안전하게 귀국시키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을 류창수 대사님과 우리 대사관 직원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자 한다.

우리 대사관이 있었기에 타국에서 건강히 지낼 수 있었고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었다. 하루빨리 코로나 상황이 종식되어 모두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재외국민 안전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우리 가봉 대사관 직원분들의 건강을 빈다.

가봉 전역에서 수행된 약 2년간의 광통신망 구축 공사(CAB4)를 무사히 마친 올해 3월만 해도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봉 수도 리브르빌에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밀림 속에서 생활한 탓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나는 그저 어려운 공사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심취해 있었으나, 귀국을 기다리며 설렜던 마음은 한 통의 전화로 절망으로 바뀌었다. 가봉 정부의 갑작스러운 항공편 전면 운항 중단 및 국경 폐쇄 발표로 하늘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가봉에서는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었고, 부모님 시대에나 있었던 야간 통금이 시작되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렇게 시일이 흘러가던 중 미국행 임시 항공편을 통해 귀국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고 들뜬 마음으로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갑자기 탑승할 수 없다는 공항에서의 통보에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공항에서 돌아와 숙소로 다시 향하는 발걸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4월 5일 주가봉 우리 대사관으로부터 정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리 진단 키트 구입을 위한 가봉 정부 임차 전세기 편으로 조만간 귀국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쁜 나머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손꼽아

하늘을 날아

가봉에서 한국까지

민병호 가봉(귀국 국민)

미국행 임시 항공편을 통해 귀국을 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고 들뜬 마음으로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갑자기 탑승할 수 없다는 공항에서의 통보에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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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적절한 색감의 하늘색 하늘, 낮게 깔려 있는 새하얀 구름, 특이하게 생긴 나무들과 불그스름한 사막 위에 솟아 있는 언덕, 운전하다가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동물들, 그리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이곳 아프리카. 다람쥐 부부가 세계 여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5개월, 아시아 대륙을 끝내고 기대하던 아프리카를 탐험하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 남아프리카의 코로나 확진자를 알아보니 3명이라고 한다. 아직 감염자가 적고, 우리는 남아프리카를 떠나 짐바브웨까지 이동하기 때문에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들뜬 마음으로 출발했다.

트럭을 타고 여행 5일 차, 현지 가이드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남아프리카에 코로나19 감염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서일까, 가이드의 안색은 어둡고, 여행이 도중에 중단될 수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여행 가이드는 코로나19의 매서운 확산으로 인해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경이 폐쇄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여행이 중단될 것이며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로 이동하여 개인이 직접 귀국 편을 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트럭으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엔 사막의 모래만 보이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핸드폰으로 인터넷에 연결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항공권을 구매하지 못한 채 우리는 나미비아의 수도에 도착했다.

나는 왜 국가를

자랑스러워하게 되었을까

우상범, 김소민 나미비아(귀국 국민)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빈트후크의 숙소에 도착하여 뉴스를 보니 남아프리카 대통령의 발표로 모두가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다. 2020년 3월 27일 불행하게도 공식적으로 대통령이 록다운을 발표하여 모든 항공이 취소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언어, 인종, 문화가 다른 낯선 나라에 고립되었다. 도시 봉쇄 전에 마트에서 식량을 구입했지만, 수프와 스파게티로 3주를 버텨야 했다.

나미비아에는 대한민국 대사관이 없었다. 대신 앙골라 대사관이 겸임한다고 하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앙골라 대사관에 메일을 보냈는데, 뜻밖에도 빠르게 답장이 왔다. 영화에서 보던 공무원은 사무적이고 권위적이었는데 이곳 대사관은 직접 카카오톡 아이디까지 공유해주며 영사관에 대한 존재와 협력원의 정보를 공유해주었다. 그로 인해 알게 된 것이 나미비아에 고립된 한국인들이 우리 말고도 7명이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앙골라 대사관 김주훈 영사님, 도영구 서기관님, 곽금용 실무관님은 우리와 같이 고립된 사람들을 위해 업무 외적인 시간에도 그룹 채팅방에서 실시간으로

여행 가이드는 코로나19의 매서운 확산으로 인해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경이 폐쇄되었다고 말했다. 우리의 여행이 중단될 것이며 개인이 직접 귀국 편을 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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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상황 정보를 공유해주시며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안내해주셨다. 또한, UNICEF 한승관님과 영사 협력원 박예찬님, 그리고 교민분이 한국 음식과 전기밥솥 등 필요한 물품을 지원해주셨다.

우리나라 전세기를 띄우려면 최소 100명이 예약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미비아에 살고 있는 교민들을 합쳐도 50명이 채 되지 않는 이곳에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 대사관 관계자님들의 노력으로 2020년 4월 4일 우리는 독일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전세기를 타고 나미비아에서 독일, 프랑스를 경유하여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밤늦은 시간 아프리카에서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가는 것이 걱정되었으나 교민분의 도움으로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차량을 지원받아 우리는 안전하게 나미비아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20년 4월 6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방역 장비가 잘 갖춰져 있는 한국의 의료진과 단계별로 코로나19를 검사하는 것이었다. 검사 또한 세심했고 이후, 개별 차량을 통해서 귀가 서비스를 제공하며 비상식량도 지원해줬다. 그동안 뉴스로만 접하던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에 놀라고, 불철주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국가의 모습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았다.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 되어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이 우리 부부의 애국심을 불타게 했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가슴 깊이 울리는 시간이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부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절실히 느끼고 정부 조치에 감사하며 향후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한편의 드라마 같았던 이야기를 한 달이 더 지난 이날에 다시 돌이켜보니 그 모든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즈음에 다시 돌이켜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국력과 아울러 우리나라 외교부의 탁월한 외교 수완과 업무력, 주 앙골라 대사관과 주 나미비아 협력원 관련 모든 외교관과 주재원, 민간 외교관들의 투철한 직무능력과 훈훈한 인간애를 난생처음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 주 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 주 나미비아 UNICEF 등 여러 국가 기관의 외교관들… 고립무원의 지경에서 도움을 주신 것에 고마움을 전한다.

Phase #1; 2020.2.25.

절친한 길벗 다섯 명은 평생 꿈꾸었던 세계 여행을 나섰다. 당시는 여행에 들떠 막 이슈가 된 코로나19와 대한민국 외교부의 일은 그저 남의 일처럼 느꼈다.

Phase #2; 2020.2.26.~3.22

아프리카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공항에 도착, 입국 신고 시 뭔가 다른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이곳 탄자니아도 여행 주의 국가라는 문자를 받았기

14일 간의

나미비아로부터의 귀국기

김기준

나미비아(귀국 국민)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14)

때문이었다.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국 대기열에 줄지어 서 있었더니 공항 관계자가 한국인은 이쪽으로 오라 한다. 별도 검역을 하는 것이었다. 입국 비자를 받는데도 뭔가 다른 것 같았다.

여하간 꿈에 부푼 우리들의 세계 여행은 각종 실시간 뉴스 등을 잘 접하지 못했던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루어졌기에, 그 이후 코로나19 사태는 여전히 딴 세상의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그간 코로나19 대유행의 자세한 정황을 접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미 우리가 여행하였거나 여행해야 할 거의 모든 아프리카, 유럽, 미 대륙 등의 국가에서 대규모 코로나 감염자와 확진자 사망자가 나오고, 국경 및 공항 봉쇄에 이어 록다운 기미가 보이는 게 아닌가!

Phase #3; 2020.3.23.~4.3

즉시 한국 외교부와 주 앙골라 대한민국 대사관(나미비아 영사 협력원)에 전화를 걸어 SOS를 청했다. 안내에 따라 캠프 차량 반납과 귀국 비행 편을 위해 즉시 남아공 국경 지역으로 이동하고, 여권에 출입국 직인을 받았으나, 한국인은 입국 금지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주 앙골라 대사관의 전화를 직접 남아공 입국 심사관에게 연결해주어도 남아공 대통령의 지시라며 소용이 없었다. 이에 다시 나미비아로 돌아가려니 당일 출국에 이은 재입국이라 얼마간의 출입국 심사 실랑이 끝에 겨우 나미비아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이어서 수도 빈트후크의 한 숙소에서 머물며 3월 28일 자 항공권을 예약하고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는 방법을 주 앙골라대사관 및 나미비아 영사 협력원께 부탁드리게 되었다. 김주훈 영사님과 곽금용 실무관님 주도로 나미비아에 있는 한국 여행객 9명을 위한 카카오톡 방이 즉시 개설되어, 국가별‧개인별 코로나 방역 조치 및 귀국 등의 정보를 시시각각으로 나누게 되어 큰 위안이 되었다.

록다운이 시행되기 전날 늦은 오후에 단체 카카오톡 방에 초대된 나미비아 UNICEF 한승관님께서는 초대되시자마자 저녁 무렵에 라면, 소고기, 고추장, 햇반 등의 부식품을 손수 차량으로 숙소 3곳을 돌며 나눠 주셨다. 더욱 감사하게도 현지 상사가 운전해오신 것은 물론, 인근 대형 슈퍼마켓에 픽업해주시어 약 2~3주간의 부식을 사 올 수 있게 해주셨다. 이튿날 오전에는 한승관님의 어머님(Lee)과 여동생분이 또 한 차례 쌀, 카레 가루, 김치, 고추장, 김 등의 부식을 공급해주셨다.

며칠 후인 3월 말경, 단체 카카오톡 방에 김주훈 영사님과 Lee 어머님 간에 전세기 이야기가 나왔다. 같은 숙소에서 묵고 있던 독일 청년 두 명도 자국 전세기로 귀국한다는 것이어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이에 김주훈 영사님께서 나미비아 외교부, 외교단, 항공사 등으로 문의 후 귀국 희망자와 일자 등을 조사하셔서 귀국에 대한 기대와 록다운 생활에 안심이 되었다. 하루 뒤에는 여권 사본 요청에 이어 며칠 후인 4월 2일에는 귀국 항공편 정보 ‘나미비아 여행객 귀국 지원(안)’이란 문서를 보고 어느 정도 귀국 실현에 대한 희망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출발 하루 전날인 4월 3일 새벽에 4월 4일에 출국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항공편 송금액과 대사관 국내 은행 미화 계좌 정보를 받고 급히 조치했다. 여전히 송금을 하라는 독일 대사관 등의 최종 승인이 없었기에 또 애타게 기다렸다. 4월 3일 저녁 무렵에서야 비로소 송금 등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들은 본격적으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 노력해준 모든 분들을 생각하면서…

독일 전세기로 나미비아 출국을,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한국행이 가능하도록 해주신 주 앙골라 대사관 김주훈 영사님, 도영구 서기관님, 주 프랑크푸르트 홍근택 영사님, EVA Borkner님, 주 프랑스 대사관 박수덕 공사님에게 감사드린다.

(15)

Phase #4; 2020.4.4.~4.6

4월 4일 새벽에 박예찬 나미비아 영사 협력원님과 그의 어머님, 그의 여동생분께서 공항까지 배웅, 출국 과정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펴주신 덕분에 무사히 독일 전세기로 뮌헨 공항에서 드골 공항을 거쳐 4월 6일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외안전여행 앱, 자가 진단 앱 및 자가 격리안전 보호 앱 등 스마트하고 조직적인 입국 검역, 자가 격리, 식음료 지원. 대한민국과 외교부 등은 위대했었다!

한 달여 지난 지금까지도 단체 카카오톡 방에 초대된 14분, 무려 몇백 개의 소통 문서와 페이지가 남아 있다. 정말 고맙고 감사했다.

Phase #0; 처음으로 돌아가서…

진작에 대한민국을, 외교부의 훈령을 믿고 따랐어야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팬데믹으로 확산될 것을 예견한 듯한 외교부의 홈페이지와 해외안전여행 앱을 진작부터 활용했어야 했다. 해외여행 준비에서부터 여행 자제 권고와 여행 주의, 여행 금지 국가, 여행 경보 등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따랐어야 했다. 막상 서울의 반대편 약 1만 5천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 고립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도움의 손길을 대한민국 외교부에 요청했다. 다행스럽게도 앞에 열거한 의인분들을 만나 보름간의 고립에서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점을 두고두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모든 분들께 하시는 일마다 행운과 복이 깃들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2017년 나이지리아 라고스라는 도시로 가게 되면서, 낯선 아프리카 대륙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 주변의 걱정이 많았습니다. 위험하지는 않을까, 아이들이 아프면 병원 시설은 괜찮을까 등의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라고스 생활은 괜찮았습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생활은 평화로웠습니다. 하지만 2020년 3월 라고스에도 COVID-19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저희 가족의 라고스 집콕 생활이 시작되었고,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의 나날이었습니다.

라고스 분관에 감사드립니다. 라고스 공항 폐쇄가 공식화되고, 언제부턴가 라고스 분관에서 미국, 캐나다 등의 귀국편에 탑승의사가 있는지 물어보는 메일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한국편 전세기가 마련되면 그 편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반가운 메일, 한국행 임시 항공편 수요 조사 메일이 왔습니다.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은 메일, 카카오톡, 전화로 가능하다고 안내되어 있었고, 저는 카카오톡이 편한지라 카톡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분관 담당자는 항상 친절하고 신속하게 답해주셨고, 입국 시 미리 알아두어야 할 사항 등도 세심하게 챙겨주셨습니다. 당시 라고스는 통행금지 상황이라 출국 당일 공항까지의 이동도 걱정이었는데, 교통편도 준비해주셔서 위험 걱정 없이 이동할 수 있었고, 마스크와 손 세정제 등도 미리 준비하셔서 필요한지

감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김주희

나이지리아 라고스(귀국 국민)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16)

물어봐주시는 등 꼼꼼한 준비에 감동하였습니다. 라고스 공항 출국 시에도 총영사님께서 출국 수속 창구 근처 아주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계셔서 왠지 모르게 든든했답니다.

전세기를 마련해주신 모 기업에도 감사드립니다. 전세기 마련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그전에 전해 들었었습니다. 공항에 가보니, 탑승하지도 않으시는 그 기업 담당자께서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항공사 직원에게 미리 등록한 인원들이라며, 빨리 수속해주라고 이야기해주시고 출국하시는 분들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특별하고 귀하고 저희에게 꼭 필요한 경험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직원 가족들의 한국행 지원을 빨리 결정해주고 적극 지원해준 우리 남편 회사에도 감사드립니다.

입국자들 관련 지원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사태에 입국하게 되어 입국이 수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걱정을 잔뜩 안고 비행기에서 내렸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자가 격리자 안전 보호 어플 설치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거나 제출한 연락처에 연락이 닿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는다는 등 걱정될 만한 내용이 많았는데, 실제로 모든 서류 작성이나 검역 등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셨고, 평소보다 시간은 좀 오래 걸렸지만 큰 어려움 없이 입국 절차를 완료하였습니다. 특히, 자가 격리자 안전 보호 어플 설치와 연락처 확인을

제 평생 아마도 유일한 기억으로 남을

‘전세기 탑승기’는 여러분들이 노력해서 이뤄진 특별하고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육군’ 문구가 새겨진 옷을 입은 청년분들이 아주 친절하게 진행해주었던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군인 아저씨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언제나 파이팅하시길 바랍니다.

자가 격리 장소로 이동하여 자가 격리를 시작하였고, 다음 날 선별 진료소를 방문하여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소에 계신 분들도 역시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오전 문자메시지로 음성이라는 결과를 받고 일단 안심했습니다.

또 친절한 구청 담당자분께서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말에도 어린이날에도 전화 주시며, 카카오톡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정해진 위치를 지켜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셨을 때는 뿌듯함도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감사드립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중국과 우리나라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 라고스의 다른 나라 분들이 한국에 있는 제 가족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유럽, 미국 등으로 코로나가 확산되고, 아프리카 대륙에도 확진자가 발생한 즈음에는 다들 한국의 상황은 안정되어 가느냐며, 강제적인 봉쇄 없이 어떻게 코로나가 진정되었느냐며 경이로워했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알리고 한국행 전세기를 탄다고 답할 때, 엄청 뿌듯했습니다. 강제적인 통제 없이도 코로나를 잘 극복해나가고 있는 우리나라, 감사합니다.

자가 격리 종료 전 검사까지 완료하고 이제 자가 격리 마지막 날입니다.

소소하게 더 감사할 일들이 많았지만, 여기까지 하고 저는 이제 내일 외출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같이 오지 못해 속상하지만 우리를 먼저 보내준 사랑하는 우리 남편 감사합니다. 힘든 여정이었고 격리 생활도 답답할 텐데 투덜대지도 않는 우리 아이들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가족이 보호받는다는 느낌으로 지금 여기 있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감사한 마음을 듬뿍 담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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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호기심이 많아 언젠가는 다른 나라에서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2년 전 조금 주춤했던 용기를 더해 13살, 16살 두 아이들과 함께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로 삶의 터전을 옮겼답니다.

새로운 곳에서의 두려움과 낯설음을 느끼기도 전 퇴색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매력에 빠져 지낸 시간들이 많았어요. 낙후된 나라에서 피부에 와닿는 불편한 몇 가지와 적당히 차단된 삶은 아이들의 교육 환경에도 득이 된다고 생각하며 나름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던 올해 초, 세상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뉴스는 온통 코로나19와의 전쟁이었고 2월 중순경 세상의 시선이 한국으로 따갑게 치닫던 순간이 와버렸어요. 그 시기 급하게 딸아이와 한국 일정이 있어 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섬나라인 마다가스카르는 청정 지역이라 한국행을 감행하는 저에게 “지금 한국 가면 큰일 난다. 절대 가지 마라”라며 가까운 지인들은 걱정을 하였습니다. 정확히 일주일 후에 다시 마다가스카르로 돌아올 일정이어서 2월 23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일주일 후면 아들이 혼자 있는 마다가스카르로 돌아가는 것에 전혀 의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일주일이란 짧은 시간 동안 하늘길이 막히고 한국이 마치 코로나19 전염병의 시초인 양 세계 많은 나라에서 입국을 차단시켰습니다. 살면서

전세기 타고 한국으로

김희아

마다가스카르(귀국 국민 부모)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대한민국 내 나라가 위험하다고 피부로 느꼈던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연일 뉴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세상의 따가운 시선 속에 있던 우리나라였지만 또 한 번의 저력을 보여주듯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뉴스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때쯤 마다가스카르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어요.

마다가스카르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전세기를 띄운다는 얘기였습니다. 각국에 흩어져 있던 많은 교민들과 유학생들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한국으로 서둘러 들어오고 싶어도 하늘길이 닫혀 있으니 전세기를 요청하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계속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전세기를 띄우면 아들이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었어요. 전세기 요청이 많아 빨라야 두 달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었는데 세상에나, 일주일 후 3월 31일 전세기가 뜬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프리카 최초 전세기였고 마다가스카르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국가 두 곳도 전세기 운행 허가를 요청했지만 마다가스카르 정부에서 거부했다는 소식을 후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다가스카르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전세기 요청 후 이틀 만에 승인이 되었고 빠르게 비행기를 탈 수 있었어요.

아이들이 해외에 살아보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편안하고 좋은 곳인지 알겠다며 평소 노래를 불렀는데 이날만큼 가슴 벅찬 순간이 또 있었을까 싶어요.

어린 아들이 4월 1일 환한 미소를 머금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 없는 한 달 동안 훌쩍 자라 있었고 그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지금도 울컥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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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세기에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교민들까지 함께 출국할 수 있었으니 자부심이 가슴에 가득했습니다.

평소, 헌신과 진심을 다해 한국 교민의 일에 앞장서서 일하시고 주재국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쌓으며 항상 최선을 다하는 마다가스카르 대한민국 대사관 임상우 대사님 외 대사관 가족분들이 계셔서 이런 기적을 가져온 것 같아요. 교민의 한 사람으로 너무나 자랑스럽고 가슴 따뜻한 소식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노고와 노력이 있었을까요.

마다가스카르를 떠나오던 3월 31일 공항에는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전세기에 탑승할 교민을 위해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도시락까지 준비하는 세심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맛있게 먹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한국 교민을 위해 헌신해주신 마음이 우리 부모의 심정으로 혼신을 다하신 모습이 아닐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아들은 4월 1일 환한 미소를 머금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 없는 한 달 동안 훌쩍 자라 있었고, 인천공항에서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14일 자가 격리에 들어갔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독한 바이러스가 어려운 상황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지만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듯 감사함으로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마다가스카르 교민들은 여전히 코로나19와의 전쟁으로 두 달 이상 셧다운되어 멈춰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족 분들을 두고 온 심정만큼 안타깝고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하루빨리 세상이 코로나19로부터 벗어나 오래전 평화로웠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서로에서 의지가 되어 노력하는 마다가스카르 대한민국 대사관과 교민 여러분,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국민들께 한국 정부와 함께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닿길 희망합니다.

저는 이번 국내 송환으로 모로코에서 한국에 입국한 교환학생입니다. 2019년 여름부터 모로코에서 생활하면서 불편함은 없었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불안함과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가 모로코 내로 유입된 이후 아시아계 여성에게는 유독 차별과 따가운 눈빛이 많았습니다. 택시를 태워주지 않는 기사분도 계셨고, 중학교 아이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길을 걷기도 했으며, 심지어 시장에서 저에게 물건을 팔면 코로나가 걸리는 게 아니냐며 조롱하는 할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괜한 자책감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모 로 코 에 코 로 나 환 자 가 점 점 증가함에 따라 항공편이 제일 먼저 통제되었습니다. 취소된 항공편은 환불받지도 못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던 대학교가 있는 지역은 작고 금방 이동 통제가 되었기 때문에 코로나 감염에 대한 우려가 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동의 제약이 있다 보니 식재료를 사러

기적의 귀환

안시온

모로코(귀국 국민)

코로나가 모로코 내로 유입된 이후 아시아계 여성에게 유독 차별과 따가운 눈빛이 많았습니다.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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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 수 없고, 교내 식당도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에 교내 매점에서 살 수 있는 빵 같은 제한된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숙사 내에서 혼자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지내던 중 모로코 대사관 측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사설 항공사와 논의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예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기다렸습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큰 항공기를 타기에는 비용이 너무 비쌌고, 논의하던 항공편이 연이어 취소되어 한국으로 갈 수 있는 항공편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국민을 송환하는 조건으로 모로코 정부가 한국에서 코로나 진단 키트를 가져갈 것이라는 뉴스를 보게 되었고 대사관 측에서도 국내 송환을 위한 항공편에 대해 조심스레 공지해주셨습니다. 항공편의 확정 이후 대사관 측에서는 바쁘게 통행증 발급을 도와주셨고 학생인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2일에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국가가 관여한 항공편이다 보니 가격적인 측면에서도 부담을 덜 수 있었고, 그 비용이 모로코의 코로나 치료를 위해 기부된다는 말에 왠지 뜻깊은 일에 동참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당일 공항에서부터 대사관분들이 잘 챙겨주시고 발권 이후 간식도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처음으로 모로코에서 한국으로 가는 직항 항공편을 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 국내 송환의 기회가 정말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공편은 역시 한 좌석씩 떨어져 앉았고 기내식이 제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공지에도 불구하고 기내식과 음료는 좌석에 넉넉히 놓여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외교부와 항공사 측의 배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입국 후 자가 격리를 마치고 모로코 대학의 학기를 온라인 수업으로 잘 마쳤습니다. 귀한 기회로 한국에 무사히 귀국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도와주신 주 모로코 대사관 측에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모로코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북아프리카에 있지만 중동의 문화와 유럽의 문화가 섞여 있고, 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꼭 한 번은 방문하고 싶어하는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오랫동안 한국과 외교 관계가 있으며, 최근에는 많은 한국 기업이 진출하기 위하여 활발한 경제 교류가 양국 간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가 전 유럽까지 퍼져 결국에는 모로코에도 3월 2일에 첫 케이스가 생겼습니다. 모로코 정부는 단계적으로 국가를 봉쇄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3월 18일에는 이동 제한이라는 최고의 대응책을 발표하면서 여행 중이었던 사람들과 출장을 나왔던 분들은 물론이고, 교민들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외에 코이카 월드 프렌즈 봉사단원 그리고 한국분과 결혼을 한 모로코분들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모로코는 대부분 의사들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의료 기술을 도입하여 의료 환경이 사하라 이남의 국가와는 다르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확진자가 재외국민 가운데 발생하였을 때 필요한 검사와 치료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인회, 이곳 대사관 그리고 저는 한마음이 되어 COVID-19의 위협으로부터

모로코에서

COVID-19 의료 지원 경험기

박세업

모로코(북아프리카 글로벌케어 본부장)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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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에 있는 한국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의논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외국인에게 의료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 이곳의 제도하에서 한국 의사인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제한적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로 결정을 하여 COVID-19 대책 마련을 위한 단체 카카오톡 방을 열고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기로 하였습니다. 질병과 관련된 위기관리(Risk management)가 저의 역할이었기에 이곳의 의료적 상황을 고려하고 보건 전문가로서의 전문성을 살려 국제사회의 가이드라인에 준하는 대응 프로토콜을 만들어 재외국민들과 소통을 시작하였습니다.

필요한 약품과 마스크와 손 세정제를 준비하도록 교민들에게 부탁을 하였고, 사회적 거리 두기에 대한 강조를 하여 개인위생을 스스로 잘 지킬 수 있도록 보건 정보를 전달하였습니다. 대사관은 지속적인 행정과 외교 지원을 하였고 한인회는 각 지역의 흩어져 있는 재외국민들과의 비상 연락망을 통해 소통을 유지하였습니다.

민관이 협력하여 COVID-19에 대응하는 가운데 카사블랑카에서 한국까지 가는 직항 특별기가 운행하게 되었습니다. 특별기를 통해 고립된 한국인들을

공항에서 글로벌 케어 모로코 지부의 의료적 지원

한국으로 이송을 하게 되었고 돌아올 때는 한국의 진단 키트를 비롯한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에 필요한 의료 물품을 싣고 올 수 있었습니다. 각 도시에 흩어져 있는 여행객, 교민, 출장 나오신 분들을 카사블랑카 국제공항으로 오게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대사관과 한인회의 부단한 노력으로 4월 3일 105명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저를 포함한 글로벌 케어 모로코 지부의 의료적 지원도 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습니다. 대사관의 도움을 받은 가운데, 글로벌 케어가 보유하고 있었던 의료 장비를 활용해 탑승자의 발열 체크와 문진표를 만들어 의료 지원을 하였습니다. 저희 의료진들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한국에서 COVID-19 의료 지원을 하였던 경험이 있는 의료인에 자문을 구하고, 직접 인천공항에 있는 선별 진료소에 연락을 해서 출입국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의료 지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COVID- 19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속한 진단임을 강조하고, 탑승자분들이 적극적으로 본인들의 건강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내도록 협조를 요청하였습니다.

특별기가 운행되고, 도착한 분들로부터 한국 방역에 대한 칭찬을 들으면서 우리는 정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로코에서 돌아간 한국분들 가운데 아직까지 한 명의 확진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높은 시민 의식과 그동안 대사관, 한인회 그리고 글로벌케어 모로코 지부의 협력으로 말미암은 당연한 결과라고 믿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교훈이면서 인생의 좌우명인 ‘나는 조국과 인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를 생각하면서 자발적인 고립을 선택하고 계속 결핵 보건 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모로코에 아직 남아 있는 재외국민들과 결핵 환자를 포함한 소외되고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팬데믹이 끝날 때까지 의료적 지원을 하는 것이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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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밖으로 나가본 지 두 달이 넘었다. 2월 5일 카사블랑카에 도착한 후 외출이라곤 집 앞의 사무용품 가게 방문과 세 번의 레스토랑 식사가 전부였다.

밖으로 나가면 동네 아이들은 나를 ‘코로나’라고 불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난 1995년부터 밀라노에 거주하며 활동 중인 주얼리 디자이너다. 2003년부터 매년 두 번 카사블랑카의 주얼리 브랜드 아주엘로스의 디자인 컬렉션을 위해 3주간 출장을 떠난다. 2월에 출장을 떠날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에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없었다. 하지만 귀국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이탈리아에는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사장님은 걱정이 되셨는지 진정될 때까지 2주만 더 머물다 가라고 하셨고, 당시만 해도 모로코는 청정지역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고 모로코에도 확진자가 생겼다. 결국 모로코 정부는 공항과 항구를 폐쇄하는 록다운 조치를 취했다.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장님의 운전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봐서 문 앞에 놓아주었고 사무실이 같은 건물에 있어 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격리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한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로코 엑소더스

김성희

모로코(귀국 국민)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그러던 4월 초 어느 날, 모로코에서 한국행 특별기가 뜬다는 기사가 한국 뉴스에 보도되었다. 즉시 모로코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 연락했지만 하루 전에 신청이 마감되었다는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진작 대사관에 문의를 했었다면 비행기를 탈 수 있었을 텐데… 속이 상했다. 대사관 직원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 연락처를 달라 했고, 임시로 개설된 한인 채팅방에 초대해주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 한국행 두 번째 특별기가 뜰 예정이니 탑승을 원하는 사람은 당일 안에 신청서를 작성하라는 대사관 공지가 채팅방에 떴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신청서를 작성하고 필요한 정보와 여권 사본을 이메일로 보냈다.

대사관 직원들은 신청인 파악을 위해 떠날 사람들만 모아 채팅방을 따로 만들고 인원수 파악을 위해 실명과 거주지역 이름으로 바꾸게 했다. 떠나는 날까지 매일 밤 10시가 넘도록 문자가 오갔고, 대사관 인장이 찍힌 이동 허가서까지 완벽히

카사블랑카의 모하메드 5세 공항은 경찰과 직원, 환경미화원들만 근무했기 때문에 텅 비어 있었고, 출발 안내 전광판에는 단 한 개의 비행 정보만 떠 있었다.

GRAND SEOUL, 우리가 탈 비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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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 보내줬다. 진행 상황을 지켜본 아주엘로스 사장님은 “한국이 최고다, 네 나라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만 살자고 도망가는 것 같아 미안했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모로코 정부가 한국에서 마스크와 진단 키트 등 물자를 실어오기 위해 준비한 특별기였다. 모로코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이 이 비행기에 국민을 태워 보낼 수 있도록 허가를 얻어낸 것이었다.

4월 13일, 항공 운항이 중지된 카사블랑카의 모하메드 5세 공항은 경찰과 직원, 환경미화원들만 근무했기 때문에 텅 비어 있었고, 출발 안내 전광판에는 단 한 개의 비행 정보만 떠 있었다. GRAND SEOUL, 우리가 탈 비행기였다.

초현실적이었다. 40명도 되지 않는 한국인들은 발열 체크와 유의 사항을 안내받은 후 평소와 다름없는 세관 검사, 여권 검사를 받고 게이트로 향했다. 대사관 직원분들은 게이트까지 에스코트하며 우리가 탑승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비행기의 내부는 최대한 물자를 실어 오기 위해 모든 좌석이 비닐로 덮여 있었고 우리는 한 줄에 두 명, 양쪽 창가 자리로 배치되었다. 승무원 서비스는 없었지만 코셔(유대인들도 먹을 수 있는 음식) 도시락 두 개와 1.5리터 생수, 그리고 간식과 탄산음료가 지급되었다.

난 이번처럼 한국의 국력을 실감한 적이 없다. 비자 없이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땐 마치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었고 밀라노 엑스포의 한국관을 방문할 때나 K-pop이 외국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도 이처럼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 있어 감사하고, 이렇게 고국에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준 대사관 직원들과 외교부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2020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로 한국의 상황이 심각해졌던 때에도 제가 있던 수단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곧 아시아, 유럽, 미주를 넘어 아프리카에도 도착했습니다.

더운 곳에서는 바이러스 전파가 안 될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4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확진자는 매일 큰 폭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으로의 일시 귀국 결정 이후에도 어려움은 지속되었습니다. 수단 내 거주하는 우리나라 교민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전세기 신청은 고려하기 쉽지 않았으며, 타국 재외공관들과의 공동 전세기 운항 또한 여러 차례 추진하였으나, 경유 및 기착지 등이 상이하여 의견 조율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주재국 정부가 항공, 육로, 해상 등의 전 국경을 강력 봉쇄하기 시작하면서 비행 편을 마련한다 해도 운항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꼼짝없이 타지에서 코로나 사태를 버텨내야 한다는 좌절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사관의 판단은 달랐던 듯합니다. 앞서 시도했던 두 번의 귀국행이 모두 무산되었으나 포기하지 않았으며, 귀국을 희망했던 교민들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방법을 지속해서 찾고 있었습니다. 또한, 교민 그룹 채팅방을 통해 귀국 정보를 지속적으로 공유해주었습니다. 자세한

모래 폭풍을 뚫고 삼세번의 귀국길

박병준

수단(KOICA 영프로페셔널)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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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와 경로, 예상 금액 등을 실시간으로 안내받음으로써 귀국 준비를 용이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주재국 정부에서 공항 봉쇄를 선언한 사태를 감안, 전세기 이용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의의 사태를 방지하고자 우리 외교관들이 직접 차량과 함께 교민들을 공항 탑승구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이는 단순 업무를 넘어 평소의 대사관과 교민들의 긍정적 유대감이 투영된 결과물이라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주 수단 대한민국 대사관과 일본 대사관의 공동 협력을 통해 민항기로 에티오피아까지, 에티오피아에서 한국까지 전원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세기에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교민들도 함께 탑승할 수 있도록 우리 대사관이 도움을 줌으로써 지구 반대편에서 이루어진 협력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기를 마치며 결코 쉽지 않았던 귀국길을 마련해주었던 외교관 및 관계자분들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며 아직까지도 현장에 남아 코로나 대응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대한민국 대사관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하루속히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어 감사의 말을 직접 전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주 수단 대한민국 대사관 협력을 통해 민항기로 에티오피아까지, 에티오피아에서 한국까지 귀국 교민 전원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세기에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교민들도 함께 탑승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서 거주 중인 김이화입니다. 저는 이번 수기를 통해 저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경험, 그것도 제가 살아온 한국이 아닌 낯선 타지에서 ‘온 가족’이 코로나로 인해 겪어야 했던 경험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앞서 가족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껴주시지 않았던 주 아랍에미리트 대한민국 대사관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떠올려 봐도 너무 아찔하고 조마조마했던 순간에, 대사관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시무시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저는 3년 전 짧았던 아부다비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가, 아부다비의 여유로움과 아랍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리워서 2020년 2월 아부다비로 가족들과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및 전파 위험성에 대해 대대적인 보도를 하고 있었지만, 언론에서는 우수한 의료 시설을 갖추고 있는 아랍에미리트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고 하였기에 코로나 감염과 같은 일은 저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러한 안일한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4월 3일 남편은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회사에 확진자가 있어 호텔에서 자가 격리를 시작해야 한다고

온 가족

코로나 바이러스 극복기

김이화

아랍에미리트(재외국민)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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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습니다. 남편도 전혀 증상이 없었고 함께 생활하는 저와 만 4세의 아이 그리고 60세의 시어머님도 어떤 증상도 없으셨기 때문에 감염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남편 회사에서 확진자가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나고 남편과 저는 회사에 제출할 목적으로 드라이브스루 검사소에 예약하여 검사를 받으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저와 남편이 모두 ‘양성’이니 각자 방에서 격리를 시작하고, 다음 날 보건 당국에서 의사를 보내 조치를 해줄 테니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코로나 양성이라니요!

처음에는 억울하고 화가 났고, 방에서 격리되어 있으면서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데 겁이 나고 무섭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와 어머님이 걱정되었습니다. 둘은 고위험군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무서웠고, 그다음에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만 음성일 경우 아무런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아이는 누가 돌봐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정말 생각만으로도 끔찍했고 두려웠습니다.

격리 이틀째, 주재국에서 보내준다고 하는 의사 선생님은 오시지 않았고, 모든 코로나 상황을 총괄하는 코로나 콜센터는 연락이 잘 닿지 않았습니다. 저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격리 중인 남편을 대신하여 아이를 챙기느라 인지도 못 하고 있었는데 지난 일주일 동안 미열이 있어서 해열제를 먹은 기억이 났습니다.

확진 판정을 받기 전날은 자고 일어났는데 근육통과 오한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죄는 통증도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코로나임을 알려주는 신호들이 있었는데 안일하게 대처했던 저 자신의 무지함에 화가 났고 무서웠습니다.

늦은 밤이 되어서도 주재국 보건 당국에 조치를 받지 못했기에 절박한 심정으로 영사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영사과에서는 주재국 보건 당국과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여 구급차가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한국

의사와 친분이 있으신 외교관님께서는 주재국 내 한국 의사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도와주셔서 제가 병원으로 가기 전까지 3일 정도 원격으로 저와 가족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상담해주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상태가 많이 나빠지기 직전에 집에서도 전문적인 의료 조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급차는 제가 확진 판정을 받고 4일이 지난 후에 도착했고, 병원으로 이송되어 운 좋게 입원했지만, 확진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주재국 병원의 형편은 좋지 않았습니다. 바쁜 의료진들과의 면담은 하루 한 번 전화로 이루어졌고, 면담시간도 짧아서 제 상태에 대한 짧은 문진 이외에 정작 저에게 더 중요했던 아이와 시어머님에 대한 조언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남은 가족들은 대사관에서 가족처럼 챙겨줄 테니 본인 회복에 매진하라고 하셨던 외교관님과 한국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제가 코로나로 인해

남은 가족들은 대사관에서 가족처럼 챙겨 줄 테니 본인 회복에 매진하라고 하셨던 외교관님

영사과의 도움으로 상태가 많이 나빠지기 직전에 집에서도 전문적인 의료 조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이송된 후에는 남은 가족들을 대사관에서 챙겨주어 큰 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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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확진자의 가족이라 대면을 꺼릴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가족들의 출국을 위해 바이러스 검사에서부터 공항 출국 절차까지 도와주시는 의로움을 보여주신 외교관님께도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해서 건강 상태를 챙겨주시고, 영사과에서 도와주실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 또는 그 이상으로 힘써주신 덕분에 운 좋게 치료도 받을 수 있었고 아이와 시어머님께서도 안전하게 한국으로 귀국하여 지내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부딪혀보니 저도 모르게 억지도 부리게 되고 얼굴도 한번 뵙지 못했던 영사님께 ‘저와 제 어린아이를 좀 살려달라’며 창피하게 울기도 했는데, 이런 황당한 교민의 울음에 공감해주시고 위로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습니다.

코로나를 겪어보니 코로나는 몸도 매우 아픈 병이지만, 마음과 생각도 한순간에 무너지게 하는 무서운 병이었던 같습니다. 가족들의 안전을 지켜주시고 힘들었던 마음마저 이겨낼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코로나에서 안전할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이 주위의 소중한 가족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모두에게 안전한 시간이 올 때까지 코로나 예방과 확산 방지를 위해 함께 노력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로 인한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잘 견뎌주고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주는 아들 고맙고, 사랑해!

2019년 12월 28일, KOICA 인턴에 합격하여 알제리에 도착했다. 도착한 지 2주도 안 되어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와중, 한국에 COVID-19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편으로는 가족들을 걱정하면서도 ‘설마 아프리카 대륙에까지 COVID-19가 상륙하겠어’라는 생각으로 가족들과 나는 알제리에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2월 25일, 알제리에도 첫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확진자가 수도와 멀리 떨어진 지방의 이탈리아인이라기에 조금은 안심했다.

그러나 3월에 수도인 알제에서 멀지 않은 블리다주(州)에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3월 12일, 알제리에 COVID-19로 인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부터는 일상생활이 쉽지 않았다. 외출을 최소화했고, 마트에서 식료품을 대용량으로 구매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 알제리 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사망자 발생 당일에는 전국의 학교 및 교육기관 휴교령을 내렸고, 3월 17일에는 알제리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국경 봉쇄 및 모스크 폐쇄 등의 명령을 내렸다. 조치는 점차 강화되었다. 식당, 상점 등의 운영 및 모든 대중교통의 운행까지 중단되었다.

확진자가 계속 증가세를 보이자, 알제리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알제리 국경 봉쇄 이후 귀국 항공편 탑승까지

박준희

알제리(KOICA 영프로페셔널)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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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진자가 많이 발생한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한 블리다주는 전면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으며, 내가 거주하는 수도 알제주(州)는 19시부터 익일 7시까지 통행이 금지되었다. 이때부터 재택근무를 하며 집 안에서 격리된 생활을 시작하였다. COVID-19 확산 초기와는 달리 창문 너머 마스크를 쓴 현지인들의 모습이 보이자 정말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집에만 있기를 며칠째, 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한 줄기도 없었는데 주말 밤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당장 2~3일 후에 떠나는 미국 전세기를 탈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희망에 부풀어 짐을 싸고, 집을 청소하면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자국민을 우선으로 탑승시키는 비행기가 만석이 되자 외국인에게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비행기가 떠났다는 소식만 듣게 되었다. 그렇게 짐을 다시 풀던 4월 초, 이번에는 영국 전세기에 자리가 생길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메일과 전화번호, 여권 사본까지 제출하자 이젠

창문 너머 마스크를 쓴 현지인들의 모습!!

코로나19 확산 초기와는 달리 창문 너머 마스크를 쓴 현지인들의 모습이 보이자 정말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진짜 떠나겠구나, 실감이 나서 매일 영국 대사관 홈페이지를 확인하며 출국일이 정해졌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결국 영국 전세기도 일주일가량 소식이 없다가 자국민들만으로 만석이 되어 외국인인 우리에게까지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약 2~3주를 짐을 싸둔 상태로 대기하다 좌절하는 일이 반복되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사라져 짐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대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는 날짜도, 시간도 구체적이었다. 4월 18일, 에어프랑스 특별편을 타고 알제리를 떠나 다음 날 9시 파리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것이라고 했다.

4월 18일, 사무소 차량을 타고 알제 공항에 도착하자 한국인 약 60명 가량이 모여 있었고, 우리는 대한민국 대사관과 알제리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공항에 입장하게 되었다. 공항 내부는 적막했고, 사람들은 차분하게 마스크와 장갑 등을 착용하고 체크인을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대사관에서 마스크, 손 소독제와 간식까지 챙겨주었고, 대사님은 떠나는 우리 국민을 한 명씩 찾아 격려 인사를 해주었다. COVID-19로 귀국까지 많은 제약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국민들의 안전을 챙기는 대사관 직원분들의 모습을 보며 안심이 되었고, 매우 감사했다.

알제리 출발 후 파리 공항에서의 30시간 노숙, 그리고 또 한국까지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는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험지에서 고생해주신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에 무사히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이번 전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체감하게 된 소중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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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알제리도 덮치면서 국제 항공편이 돌연 끊겨버렸다. 이에 발이 묶인 우리 국민의 출국 지원을 위해 대사관은 파리행 특별 항공편을 찾는 데 성공했다.

나는 항공사 현지 지부장과 협의하면서, 코로나 시국에 반(反)아시아 정서가 팽배해 한국인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어차피 공항은 문이 닫혀 있고, 특별 편 항공권을 소지한 사람들만 공항에 올 텐데 무슨 이목을 끌겠다고 무리지어 다니지 말라니?’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하는 차원이라고 생각했으나,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출국 당일 현장에 도착해보니 입구부터 모두를 아연실색케 했다. 공항 국경 경찰과 협의한 대로 우리 국민들이 먼저 입장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었는데, 무너진 둑 사이로 세차게 흐르는 물처럼 인파가 마구잡이로 몰려든 것이다. 모든 항공편이 중단되었으니 공항에 사람이 없을 거란 내 기대가 틀렸다.

입구 주변엔 예약했으나 환불받지 않은 티켓을 갖고 지금 당장 태워달라고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에서처럼 꼬리 칸에 타려는 사람들이 수백 명 있는 것과도 같았다. 항공사 지부장의 우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아수라장이라는 말이 따로 필요 없었다.

모든 국제 항공편이 중단된 이례적인 상황에서 우리 국민들이 단체로 공항에 입장하려면 사전에 협조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들어가는 인원 명단, 타야

재외국민 귀국 지원 현장 스케치

김지훈

알제리(주 알제리대사관 2등서기관 겸 영사) 아프리카, 중동에서

만든 희망 이야기

할 편명, 현장에 지원 나갈 우리 직원들 이름까지 써서 요청받은 대로 공항 경찰에 알렸다. 막상 도착해보니 현장 일선의 경찰 요원, 공항 직원들은 숙지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때마다 “오늘 특별 편으로 나가야 할 우리 국민들이 몇 명 있는데 길을 내주겠냐”, “물을 들여보낼 수 있겠냐”, “내가 이리로 통과해도 되겠냐” 등 매번 물어봐야 했다. 이렇게 현장에서 일일이 해결할 거면 사전에 협조를 요청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현장 대응을 통해 오히려 유연성이 발휘되기도 했다.

탑승 전 대기시간이 길어진 우리 국민들을 위해 대사관에서 CIQ(세관 검사, 출입국관리, 검역) 내 물을 나눠줘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더니, 공항 당국은 문제없게 해줬다. 물을 우리 국민들에게 나누어드리는데 CIQ 진입을 위해 에스코트까지 붙여주기도 했다. 시스템과 제도보다는 현장 직원들의 순간적 판단에 일이 처리되고 있던 것이다. 사전에 협조를 구한 것은 의례적으로 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은 건 없던 것 같다. 현장에 답이 있었다. 데스크에서 시나리오를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에 쌓은 현장 경험으로 다음 비슷한 상황을 마주해야 할 때를 대비해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되지도 않는 아랍어 몇 마디 읊어주니, 마스크에 가려진 입으로 씩 웃던 공항 경찰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공항에서 실시한 귀국 지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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