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메타윤리학: 가치판단 언명의 의미
아래 문장들을 살펴보자: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
당연히 배상해라. 그래야 공정하다.
그런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
이 문장들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뇌물을 받은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할 때 이 문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문장들에 포함된 “좋다”(good)거나
“올바르다”(right) 거나 “공정하다”(just) 와 같은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물음들이 바로 메타윤리학(metaethics)의
주제이다.
(3)정서이론
어떤 철학자들은 (넓은 의미에서의) 윤리적 문장은—즉 “좋다”
“나쁘다” “의무” “올바르다” “잘못이다” 등의 가치판단 용어들을
포함하는문장은—명제를 표현하지 않는다고, 즉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비교를 위해서, “만세”나 “우~~”와 같은 감탄사를 생각해 보자.
그런표현들은, 어떤 사태를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와 느낌의
표현이라서,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윤리적 문장도
태도와 느낌의 표현이지 어떤 사태를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서,
참거짓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4)정서이론 (계속)
그런 입장을 정서이론(emotive theory)이라고 한다. 그 이론에
따르면, 윤리적 진리(moral truth)같은 것은 없다. 이것은, 윤리적
문장들은 세계의 상태를 서술하는 명제를 전혀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윤리적
문장들과 인지적 문장들이 동일한 문법 형식을 갖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 “약속을 어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는 (b) “약속을
어기는 것은 나쁘다”와 문법적 구조에 있어서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a)는 아주 쉽게 확증할 수 있는 경험적 진술인 반면, (b)는
어떤 명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어기는 행위에 대한
불찬성이나 반감을 나타낼뿐이다.
*여기서 “윤리적 문장”이란 말은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모든
문장들을 포함하는 넓은 뜻으로 쓰였다.
**여기서 “인지적 문장”이란 말은 세계의 사태를 서술하며
참거짓을 따질 수 있는 모든 문장들을 포함하는 뜻으로 쓰였다.
(5)문제점 1: 정보를 제공하는 윤리적(?) 문장들
하지만 가치판단적 용어를 포함하는 많은 문장들이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는 듯하다:
1. 선생님이 “6 × 8은 몇이야?”라고 물었을 때 그녀의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그건 68이예요” 이라고 대답하고
다시 선생님이 “그것은 잘못된 답이다”라고 정정해
준다고 하자. 이 문장의 “잘못된”이라는 말은 6 × 8의
값이 무엇이건 간에 68은 아니라는 사실적 정보를
전달한다. (다음 쪽에 계속)
(6)문제점 1: 정보를 제공하는 윤리적(?) 문장들 (계속)
(앞에 슬라이드에서 계속) 비슷하게, “저것은 좋은
스포츠카이다”라는 문장은 자동차에 관한 경험적
진술이다—이 진술이 주장하는 것은 이 자동차가
스포츠카를 판정하는데 사용되는 특징을 아주 많이
가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자동차는 강력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고, 날렵한 모양을 가졌다.
그런데 이런 사례들이 정서주의에 대한진정한 반례가 될까? 비록
“기부는 좋은 행위이다”와 바로 위의 예문에 공히 “좋은”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용어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오직 “좋은”이 가치판단적 의미로 쓰인 문장만이 진정한
윤리적 문장이다.* “잘못된”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문장이 진정한 윤리적 문장이려면 어떤 조건들을
만족해야 하는가?
(7)문제점 2: 수단에 대한 윤리적(?) 문장들
정서주의의 반례가 될지도 모르는 또다른 사례를 생각해 보자:
2. “좋다”라는 말은 수단이 목적을 달성할 것이라는
경험적 진술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는 부자가 되는 좋은 방법이다”라는 진술은,
과연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부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관한 사실적 진술이다.
앞 슬라이드에서와 비슷하게, 정서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위 예문에 포함된 “좋은”은 가치판단적 용법으로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정서주의의 진정한 반례가 아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수단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좋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문장은 윤리적 문장이 아니라 인지적
문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떤 문장이 정서주의의 반례가 되려면 어떤 조건들을 만족해야
하는가?
(8)문제점 2: 수단에 대한 윤리적(?) 문장들 (계속)
그러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을 언급하는 문장에 포함된 “좋은”이나
“나쁜” 같은 표현들은 어떨까? “주식투자는 부자가 되는 좋은
방법이다”가 인지적 문장으로 여겨져야한다는 것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부자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 좋다”는 문장에 대해서는
똑같이 말하기 어렵다. 어떤 철학자들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목적에 대한 수단을 언급하는 경우에만 “좋다”거나 그와 관련된
말들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이들에 의하면
I (a) “독살은 살인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는 인지적 문장이지만
“좋은”이 가치판단적 용법으로 쓰이지 않았으며,
I (b) “살인은 그 자체로 나쁘다”에서 “좋은”이 가치판단적
용법으로 쓰였지만 그 문장은 인지적 문장이 아니다 .
위 주장은 얼마나 그럴 듯한가? 만일 이 주장이 맞다면, (a)도 (b)도
정서주의에 대한 반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9)문제점 3: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사실적 정보
3. 어떤 정서주의자는 “그는 좋은 사람이다”는 인지적
의미를 갖지만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친구들이 “그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는 그가 같이 지내기가 쉬우며 친구들을 즐겁게 하는
동료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고용주가 “그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는 그가 시간을 잘 지키고 일을
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여자 친구가 “그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는 그가 섹시하고 멋진 애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말하는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가?
왜 위의 정서주의자는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10)문제점 3: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사실적 정보 (계속)
아래 논변을 살펴보면, 왜 정서주의자가 그런 입장을 취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P1. 정서주의가 맞다면, (s) “그는 좋은 사람이다”는
윤리적 문장이면서 참거짓을 안 가지거나, 인지적
문장이면서 “좋은”이 비가치판단적 의미로 쓰였어야
한다.
P2. 만일 그의 친구들이 s를 말했다면, 그 문맥에서
“좋은”이 가질 수 있는 비가치판단적 의미는 같이
지내기 쉬우며 친구들을 즐겁한다는 것 밖에 없다.
P3. 만일 그의 고용주가 s를말했다면, 그 문맥에서
“좋은”이 가질 수 있는 비가치판단적 의미는 그가
시간을 잘 지키고, 일을 잘한다는 것 밖에 없다.
P4. 위 문맥들에서 s는 참거짓을 가진다.
C. 그러므로, 만일 정서주의가 맞다면, “좋은”은 문맥에
따라서 뜻이 달라져야 한다.
(11)문제점 3: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사실적 정보 (계속)
이 때문에 정서주의자는, “그는 좋은 사람이다”가 다양한 문맥에서
참거짓을 따질 수 있는 방식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한, “좋은”이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들을 지닌다는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서주의자는, “좋은,” “나쁜,”
“올바르다,” “잘못이다,” “공정하다” 등의 가치판단적 용어들이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비가치판단적 의미들을 지닌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음 논변을 생각해 보자:
P1’. 만일 정서주의가 맞다면, “좋은”은 문맥에 따라서
뜻이 달라져야 한다. (=앞 슬라이드의 C.)
P2’. “좋은”이 문맥에 따라서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C’. 따라서 정서주의는 틀렸다.
물론 정서주의자는 P1-P4 중 하나를 포기하거나 P2’를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제들은 상당히 그럴 듯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서주의를 의심한 이유를 가지게 된다.
(12)“좋다”의 기능적 정의
만일 “좋다”라는 말이 인지적 의미를 가진다면, 그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는 게 적합할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수행하는 기능
(function)을 기초로 하여 사람이나 사물을 좋다고 생각했다. 좋은
도선사는 배를 의도한 목적지까지 잘 안내하는 사람이다. 좋은
의사는 치료를 잘하는 사람이다. 이 사례들은 좋음에 대한 다음
정의를 제안하는 것으로 보인다:
(D1) 모든 x에 대해서, x가 좋다면 그리고 그래야만 x는
x 의 기능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수행한다.
(13)”좋다”의 기능적 정의: 인공물
(D1)은 특히 기계제품 등의 인공물에 잘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어떤 기계제품이 일정한 목적이나 기능을 잘 수행하면 다른
것보다 좋다거나 더 좋다고 말하고, 다른 것보다 나쁘다거나 더
나쁘다고 말한다. 좋은 알람시계는 시간이 잘 맞고, 제 시간에 알람
소리가 울리고, 야광 문자판 등을 가진 시계이다.
(D1)은 또한 우리를 위해 유용한 어떤 동물들에게도 잘 적용된다.
개는 반려견이 아니라 경비견으로 좋을 수도 있고 경비견이 아니라
반려견으로 좋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개를 비롯한 가축들은 우리가
무로부터 창조해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개량된 존재들이다.
(14)”좋다”의 기능적 정의: 자연물
하지만 이런 정의는 어떤 용도를 위해 창조되거나 개량된 경우가
아닌 순수한 자연물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저것은
좋은 아르마딜로이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아르마딜로는 어떤 목적에 적합한가? 아르마딜로는 기계처럼
인간이 어떤 목적에 맞게 만들지 않았다.그것은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지구상에 나타났을 뿐이다.
만일 모든 자연물들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면, 그것들은 “좋다”의
기능적 정의에 대한 반례가 되지 않는다. 아르마딜로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며 또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15)기능적 정의의 문제점
하지만, 적어도 어떤 존재자들은 기능과 상관없이 좋거나 나쁘다고
말해야할 것 같다.
1. 우리들 자신은 목적을 수행하는 인공물이 아니지만, 우리는
“갑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흔히 말하고는 한다.
2. 어떤 수단이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불러일으키거나 그렇게 하는데 실패하는 목적들은 그럴
가치가 있어야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이나 목적의
좋음은 기능적으로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좋다”의 기능적 정의에 대한 반례가 존재할 것 같다.
(16)비윤리적 용어에 의한 정의?
따라서, 가치판단적 용어를 위한 정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거나 개량된 것이 아닌 자연물이나 자연적 상태에도
적용가능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 정의 안에 다른 가치판단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예를 들어 “좋은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는 일부
도덕철학자들처럼 “올바른 행위는 좋음을 최대화 하는
행위이다”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문제는 가치판단적 용어를 가치판단에 무관한 용어들만으로
정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가치판단적 용어를 정의할 때 그 정의
안에 다른 어떤 가치판단적 용어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17)“좋아함”에 의거한 “좋다”의 정의
1. “좋다”에 대한 이른바 정서적 정의는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D2) 모든 x에 대하여, x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내가 x를 좋아한다(like).
“좋아한다”는 비가치판단적 개념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반례에
부딪힐 것 같다. 이 정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대상이 좋다고
(good) 생각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좋아하지(like)는 않거나,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좋아했던 경우가 한번도
없었을까? “좋은 아이”는 당신이 좋아하는 대로 행동하는
아이일까?
(18)“찬성”에 의거한“좋다”의 정의
2. 또다른 정의를 생각해 보자:
(D3) 모든 x에 대하여, x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내가 x에 찬성한다(approval).
청렴함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그것을 좋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그것을 좋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그것에 찬성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D2)에 따르면, 어떤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은 정서
이론처럼 그것에 대한 찬성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찬성의 감정을진술하는 것이다. 이것은 “x가 좋다”는 표현이
x 가 일정한 내재적 성질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이가 x 에
대해 찬성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비가치판단적 의미를 띤다는 것을 말한다.
(19)“찬성”에 의거한“좋다”의 정의 (계속)
하지만 (D3) 를 채택할 경우 결국 심각한 결과에 이르고 만다. (D3)
에 따르면
I 어떤 것이 좋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에 찬성한다는 것을
내
성(內省)을 통해 진심으로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I 내가 찬성하는 것과 당신이 찬성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내성을 통해 발견하게 되면—나에게는 미적분이 재미있지만,
당신에게는 미적분이 재미없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처럼—문제의 대상이나 성질 x가 나에게는 좋고 당신에게는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x가 과연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당신과 나
사이에 논란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20)“바램”에 의거한 “좋다”의 정의
3. 다음 정의들을 생각해 보자:
(D4) 모든 x에 대하여, x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내가 x를 바란다(desire).
(D5) 모든 x에 대하여, x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누군가가 x를 바란다(desire).
(D6) 모든 x에 대하여, x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x가 바람직하다(desirable).
(D4)는 (D3)와 비슷한 문제—x가 좋은지 나쁜지를 내가 x를
바라는지 안 바라는지 단지 내성에 의해서 알 수 있게 된다는
문제—에 부딪힌다. (D5) 역시 반례, 즉 x가 좋지만 아무도 x를
바라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문제에 부딪힌다. (D6)는 반례에
부딪힐 것 같지 않지만, “바람직하다”라는 말은 윤리적 용어이다.
(21)“신이 기뻐함”에 의거한“좋다”의 정의
4. “좋다”에 대한 또 하나 유망한 정의가 남아 있다:
(D7) 모든 x에 대하여, x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신이x에 대해 기뻐한다.
왜 갑수는 좋은 사람인가? 왜냐하면 신이 갑수에 대해 기뻐하기
때문이다. 왜 요세미티 폭포는 좋은가? 왜냐하면 신이 (아마도
그가 그것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 폭포에 대해서 기뻐하기
때문이다. 왜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좋은 행위인가? 왜냐하면 신이
그런 행위를 기뻐하기 때문이다.
(22)유튀프론 문제
5. 하지만 플라톤의 대회편 유티프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좋다”가
과연 “신들이 기뻐한다”와 의미가 같은가에 대해 고찰했다.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은논변을 펼친다:
P1. 방금당신은 올바른 행위 x를 실행에 옮겼으며, 신이
당신의 행위 x를 기뻐한다.
P2. x 는 신이 기뻐했기 때문에 올바른 행위였거나, x 는
신이 기뻐함과 상관없이 올바른 행위였다.
P3. 어떤 행위든 단지 어떤 강력한 존재가 기뻐하기
때문에 올바른 행위가 될 수는 없다.
P4. 어떤 행위가 신이 기뻐함과 상관없이 올바르다면,
“좋다”와 “신들이 기뻐한다”는 의미가 다르다.
C. 그러므로, “좋다”와 “신들이 기뻐한다”는 의미가
다르다.
즉 (D7)은 틀린 정의다.
(23)“좋다”의 정의불가능성
19세기 철학자 헨리 시즈윅(Henry Sidgwick)은 그의 고전적 저작인
윤리학의 방법에서 수학적 용어를 수학과 무관한 용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완전한 윤리적 용어를 윤리와 무관한 용어로
정의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해야 한다”나 “올바르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수준의
근본적으로 윤리적 관념을 나타내는 여타 용어들을
윤리적 용어들을 전혀 쓰지 않고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에 대히여 나는 이런 용어가 공통으로
갖는 관념이 너무나 기초적이어서 어떠한 형식적 정의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 . . (다음
슬라이드에 계속)
(24)“좋다”의 정의불가능성 (계속)
(앞 슬라이드에서 계속) 이미 우리가 검토한 [윤리적]
관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단순한 관념으로
분석될 수 없다. 그 관념은 일상적 사고에서 그와 연관된
다른 개념들, 특히 그와 혼동하기 쉬운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가능한 한 정확히 확인해 봄으로써 더 선명해질
수 있을 뿐이다.
시즈윅은 대략 아래와 같은 논변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P1과
P2는 얼마나 그럴 듯한가?
P1. 만일 어떤 용어가 표현하는 관념이 충분히
기초적이라면 그 용어에 대한 정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P2. 윤리적 용어들이 표현하는 개념은 충분히
기초적이다.
C. 윤리적 용어들에 대한 정의는 불가능하다.
(25)열린 물음 기법
영국 철학자 무어 (G. E. Moore)는 이른바 “열린 물음 기법” (open
question technique)을 이용하고는 했다. 당신이 어떤 대상 x에
대해서 x가 P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자. 그렇지만 어쨌든
당신은 다음 물음을 모순없이 물을 수 있다:
P가 과연 좋은가?
예를 들어 내가 x라는 사람이 정직하다는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럼에도 나는
하지만 정직한 것이 과연 좋은가?
라고 모순없이 물을 수 있다. 어떤 비가치판단적 속성 P에
대해서도 P를 가지는 것이 과연 좋은지를 항상 물을 수 있다.
(26)열린 물음 기법 (계속)
하지만 만일 당신이 Q라는 속성에 대해서
모든 x에 대해서 x가 Q하다면 그리고 그래야만 x는 P
하다
라고 정의했다면
하지만 P한 것이 과연 Q한가?
라는 물음은 닫힌 물음, 즉 답이 “그렇다”로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실없는 물음이 되어야한다.
(27)열린 물음 기법 (계속)
따라서, 어떤 비가치판단적 속성 P에 대해서도 P를 가지는 것이
과연 좋은지 모순없이 물을 수 있다면,
모든 x에 대해서 x가 좋다면 그리고 그래야만 x는 P하다
라는 정의는 올바른 정의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윤리적 용어를 비가치판단적 용어들을 통해 정의하려 한다면, 그는
무어가 말한 자연주의적 오류 (naturalistic fallacy)를 범하는
것이다.
Q1. 당신은 무어의 논변을 정확하게 형식화할 수 있는가?
Q2. 비가치판단적 용어의 정의가능성에 대해서도 무어의
논변과 유사한 논변을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왜
가치판단적 용어만 정의불가능한가?
(28)요약
I “좋다,” “올바르다,” “공정하다”등의 용어들을 가치판단적
용어라고 한다. 이런 용어들이 포함된 문장들을 윤리적
문장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I 가치판단적 용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윤리적 문장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은 이른바 메타윤리학의
주제이다.
I 이른바 정서주의에 의하면, 윤리적 문장들은 세계의 상태를
서술하며 참가짓을 가지는 명제를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
문장의 의미는 “만세”나 “우~~”와 같은 감탄문의 그것에
가깝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윤리적 진리같은 것은 없다.
I 세계의 상태를 서술하며 참거짓을 가지는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을 흔히 인지적 문장이라고 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정서주의는 어떤 윤리적 문장도 인지적 문장이 아니라는
이론이 된다.
(29)요약 (계속)
I 하지만 가치판단적 용어를 포함하는 많은 문장들이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는 듯하다. 만일 어떤 문장 φ가 가치판단적 용어
ψ를 포함하지만 참거짓을 가지는 명제를 표현한다면 φ는
정서주의의 반례가 될 것이다.
I 정서주의자들은 보통 다음과 같이 재반론한다: ψ는 통상
가치판단적 의미로 쓰이지만 φ의 문맥에서는 사실을 서술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때 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윤리적 문장이
아니며, 따라서 정서주의—어떤 윤리적 문장도 인지적 문장이
아니라는 입장—의 진정한 반례가 아니다.
I 특히, “좋다”라는 표현이 “ξ라는 목적을 위해서 좋다”는
뜻으로 문장 φ속에서 쓰였다면 φ는 윤리적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30)요약 (계속)
I 그러나 이런 재반론 전략으로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I 어떤 대상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좋다는 문장의 경우
“좋다”라는 표현이 비가치판단적이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I
“좋다”를 포함하는 문장은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사실적
정보를 표현하고 있어서 “좋다”가 정확히 어떤 비가치판단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말하기 힘들다.
I 이런 문제들 때문에, 결국 윤리적 문장들도 인지적
문장들이며, “좋다”는 세계의 상태를 기술하는 의미(인지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힘들어진다.
I 그렇다면 “좋다”의 (인지적) 의미는 정확히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31)요약 (계속)
I “좋다”의 기능적 정의에 따르면: (D1) 모든 x에 대해서, x가
좋다면 그리고 그래야만 x는 x의 기능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수행한다.
I 인공물이나 가축과 같이 우리를 위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사물들에는 (D1)이 잘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I 하지만 어떤 사물들은 그 기능과 상관없이 좋거나 나쁘다고
말해야 할 것같다. 예를 들어:
I 우리들 자신즉 인간은 인공물이나 가축이 아니지만, 누군가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흔히 말하고는 하며,
I 일반적으로 수단이 그 목적을 잘 실현하기 때문에 좋다고
말해진다면, 그 목적은 그 자체로 성취할 가치가 있으므로
좋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32)요약 (계속)
I 아래 정의들을 살펴보자:
I
(D2) 모든 x 에 대해서, x 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내가 x를 좋아한다(like).
I
(D3) 모든 x 에 대해서, x 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내가 x에 찬성한다(approve).
I 위 정의들은 두 가지 문제점들을 가진다.
1. 좋아하거나 찬성하는 것은 내성(introspection)에 의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도 매우 쉽게 알 수 있다는
반직관적 결과가 나온다.
2. 위 정의들에는 풍부한 반례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33)요약 (계속)
I “바란다”라는 용어를 가지고 “좋다”를 정의하려고 하는
시도가 종종 있다:
I
(D4) 모든 x 에 대해서, x 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내가 x를 바란다(desire).
I
(D5) 모든 x 에 대해서, x 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누군가가 x를 바란다(desire).
I
(D6) 모든 x 에 대해서, x 가 좋다(good)면 그리고 그래야만 x 가
바람직하다(desirable).
I 하지만 (D4)와 (D5)는 (D2)나 (D3)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반례들에 부딪힐 것이다.
I (D6)는 반례로부터 자유로울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바람직하다”가 이미 가치판단적 용어이기 때문에 가치판단적
개념을 비가치판단적 개념으로 환원시켜 주지는 못한다.
(34)요약 (계속)
I 이처럼 가치판단적 용어들을 비가치판단적 용어들로
정의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대부분 실패한다는 사실을
놓고볼 때,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I 시즈윅은 가치판단적 개념들이 너무 기초적이기 때문에
비가치판단적 개념들로 정의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I 무어는 이른바 열린 물음 기법을 통해서 가치판단적 개념이
비가치판단적 개념들로 정의될 수 없다고 논한다. Q를
정의하려는 가치판단적 개념, P가 그 정의에 사용하려는
비가치판단적 개념이라고 하자. x가 P하다고 가정하자. 이때
“x는 P한가?”라는 물음은 열린 물음이며, 실없는 물음이
아니다. 따러서 P와 Q의 개념들은 동일하지 않다.
I 하지만, 이와 유사한 논법을 통해 어떤 비순환적인 정의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불합리한 결론이 도출될 것이라는 우려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