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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분석 07 주: 종교철학 I: 신존재 증명.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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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학적 분석

제 7 주: 종교철학 I: 신존재 증명

(2)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라는 말이 항상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신 (또는 신들)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다.

하지만 종교에는 다른 측면들도 있다. 즉 종교적인 것은 기도하는 것, 종교 단체의 일원이 되는 것, 영적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명상하는 것, 종교적 삶의 방식에 충실히 따르는 것, 종교적 이상에 몰입하는 것을 포함한다.

(3)

종교란 무엇인가? (계속)

하지만 철학자들은 신에 대한 믿음 이외에 종교의 다른 측면들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철학자들은 신앙인의 심리 상태나 성직자 단체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철학이 항상 그렇듯이, 철학자들은 믿음, 이 경우에는 종교적 믿음의 정당화에 초점을 맞춘다. 종교적 믿음은 어떤 논증에 의해 옹호되거나 반박될 수 있는가?

(주의: 이 수업에서는 신이나 신들에 대한 믿음의 정당화 문제만 검토할 것이므로, 윤리적 믿음들은 갖추었으나 신에 대해 어떤 믿음도 공언하지 않는 불교와 같은 종교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4)

종교란 무엇인가? (계속)

어떤 종류의 믿음이 신에 대한 믿음일까? 신을 믿는 사람은 행성과 항성과 은하계로 이루어진 물질적 우주, 다시 말하면 원자와 에너지와 물리 과학에 의해 관찰되거나 가정된 것들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어떤 힘 (또는 힘들)—이 있다 고주장한다. 이 힘은 우주를 창조하거나지속시키는 힘이며, 자연 법칙을 창조하고 자연 법칙을 뜻대로 중단시킬 수 있는 힘이다.

(5)

종교란 무엇인가? (계속)

I 그러한 최고의 힘이 오직 하나만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를 일신교 (monotheism) 라고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가 일신교이다.

I 그러한 다수의 힘 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를 다신교 (polytheism) 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제우스, 아폴로, 미네르바, 포세이돈 등—을 믿었다.

얼마나 많은 신들이 존재하건, 신에 대한 (또는 신들에 대한) 믿음은 정당한가? 아마 이 논의에서 가장 확실한 출발점은 신에 대한직접 경험을 내세우는 주장일 것이다. 만일 신을 경험한다면, 신은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의 대상으로 존재해야할 것처럼 보인다.

(6)

종교적 경험

A: 내가어떤 것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존재한다. 나는 신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그야말로 간단하다. 과연 정교한 신존재 증명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B: 경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신 존재 증명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앙인이 말하는 경험은 경험을 넘어선 어떤 것, 즉 신앙인의

마음속에만 존 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관적

경험에서 객관적 실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증명이 필요하며 적어도 증거라도필요하다.

(7)

종교적 경험 (계속)

A: 나는 내 자신안에 신이 있음(God’ s presence)을 느낀다. 이것은 내가 직접하는 경험이다. 이것의 나의 믿음에 대한 증거이다.

B: 당신의 주장에는 문제가있다. 사람들의 신에 대한 믿음들이 서로 모순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최근 조사에 따르면, 약 4, 000만 명의 미국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신을직접 경험한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알라를 직접 경험한다고 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데, 이것은 오로지 알라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이슬람교와 모순된다.

따라서, 그 믿음들이 둘다 옳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이 특정한 신의 믿음에 대한 충분한증거라고 볼 수 없다.

(8)

종교적 경험 (계속)

A: 어떤 본질적 진실이 모든 종교에 있다고 상정해 보자.

게다가모든 종교는 역사적 배경에 따라 그 진실을 달리 표현할 뿐이라고 상정해 보자. 그래서 그 진실을 어떤 사람들은 예수로, 어떤 사람들은 알라로

표현한다. 우리는 모든 종교에서 어떤 진실, 즉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갖는 것을 찾아낸 다음 그것을 믿을 수도 있다

B: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을 찬양하는 기독교와 불교가 고문과 인간 제물을 필요로 하는 아즈텍의 종교와 어떤 공통요소를 가지겠는가? 이 종교들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9)

종교적 경험 (계속)

A: 그렇다면 당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신적 존재 또는 신적 존재들을 믿는다는 사실을 그런 존재가 존재한다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가?

B: 제발 그런식으로 말하지 말고, 당신의 입장을

인식론적으로 명확히 밝혀야 한다. 당신은 신을 직접 경험하기 때문에 어떤 증거도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에 대한 경험은 신의 존재에 대한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 가 주장하듯이, 당신이 믿는 대상이 경험 자체를 넘어선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이며 당신의 주장은 어떤 기준에 의해 정당화되는가?

당신이 증거에 관해 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보자. 신에 대한 전통적인 논증들은 모두 종교적 신념에 대해 증거를 제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제 그 논의를 시작해 보자.

(10)

존재론적 논증

중세의 가톨릭 대주교 안셀무스(Saint Anselm, 1033–1109)에 따르면, 신은 그 이상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우리는 유니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유니콘을 생각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없을까? 안셀무스는, 이른바 존재론적 논증을 통해,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고논한다:

P1. 신의 개념은 가장 위대한 것의 개념이다*.

P2. 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 신 개념은 가장 위대한 것의 개념이 아닐 것이다.

C.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P1은 다음 정의와 동일시될 수 있다: 신=df.가장 위대한 것.

(11)

정의와 존재

이 논증에 대한 한 가지 명백한 응수는

어떤 것을 정의에 의해 존재하게 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유니콘을 앞이마에 튀어나온 하나의 뿔을 가진 말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므로 나는 유니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정의에서 유니콘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정의에서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나는 상상만으로 이 세계에 수많은 동물이 살게 할 수 있다.

안셀무스도 이것을 알고 있지만 신의 경우는 다르다고 한다.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유니콘의 위 정의로부터 모순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신의

정의로부터는,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순이 따라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12)

위대함의 개념

한 가지 불평은 “가장 위대하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명료하지 못하다. 힘의 위대함인가? 사랑의 위대함인가? 정의의 위대함인가? 그러나 그것은 존재론적 논증의 경우에 실제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요구되는 위대함의 개념은 다음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D) 만일 개념 C 를 만족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C 를 만족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와 비교할 때, C 는 덜 위대한 존재의 개념일 것이다.

위 조건으로부터 존재론적 논증의 P2가 따라나오므로 그것은 건전한 논증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이 가진 위대함의 개념은 과연 D를 만족하는가?)

(13)

고닐로의 비판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존재론적 논증이 무엇을 증명하는지 물을 수 있다. 만일 안셀무스의 신존재 논증이 건전하다면, 고닐로가 지적한 대로, 아래의 논증도 건전해야 하지 않을까?

P1’. 우리는 완전한 섬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P2’. 그런 섬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 그 개념은 완전한 섬의 개념이 아닐 것이다.

C’. 그러므로완전한 섬은 존재한다.

완전한 섬이라고 해서 꼭 존재한다는 결론은 안 나올 것이기에, 위 논증은 건전한 논증일 리가 없다. 하지만 고닐로의 이 논증이 불건전하다면,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도 불건전하지 않겠는가?

(14)

고닐로의 비판 (계속)

고닐로의 비판에 대해 안셀무스는 다음처럼 응수한다. 위대함의 개념은 D를 만족하기 때문에, 다음은 참된 주장들이 될 것이다:

Q.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와 비교할 때, 신의 개념은 덜 위대한 존재의 개념이 될 것이다.

Q’. 만일 완전한 섬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완전한 섬이 실제로 존재하는 경우와 비교할 때, 완전한 섬의 개념은 덜 위대한 존재의 개념이 될 것이다.

(15)

고닐로의 비판 (계속)

Q로부터존재론적 논증의 다음 전제가 도출된다(왜 그런가?):

P2. 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 신 개념은 가장 위대한 존재의 개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Q’로부터 고닐로의 논증의 대응하는 전제가 도출되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P2’. 그런 섬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 그 개념은 완전한 섬의 개념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왜 안셀무스의 논증은 건전하지만 고닐로의 논증은 불건전한지 설명할 수 있다.

(16)

칸트: 존재는 속성인가?

하지만 우리는 존재가 위대함이나 완전함의 본질적 속성인지 물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속성 A, B, C 를 가질 때 완전하다면, 그것이 속성 A, B, C 를 갖추고 그리고 존재할 경우 조금이라도 더 완전할까? 두 경우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동일한 어떤 것이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 칸트의 존재론적 논증에 대한 비판의 요점이다.

칸트는 존재는 속성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유니콘이 하나의 뿔을 가진 말이라고 말한 다음, 그런 동물이 실제로 존재한디는 말을 추가하면 당신은 유니콘의 속성 목록에 무언가를 추가한 것일까?

칸트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당신은 그 목록에 어떤 속성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속성을 가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17)

칸트: 존재는 속성인가? (계속)

그러나 X 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X 가 일정한 속성을 가진다고 말하는것과 다른 주장이다. 완전한 원은 원주상의 모든 점이 원의 중점과 같은 거리에 있다는 속성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도형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완전한 원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로 인해 이미 그려진 원에 어떤 속성이 추가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대상의 위대한지 (혹은 완전한지) 여부는 X 의 속성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만일 칸트가 맞다면 신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신의 개념이 보다 위대한 존재의 개념이 되거나 덜 위대한 존재의 개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신=df.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정의와

“신=df.가장 위대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정의는 동치이며, 따라서 전자보다 후자에 의해서 더 위대한 존재가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18)

우주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공통적 구조를 지닌다:

P1. 우주에는 φ가 존재/발생/작용한다.

P2. φ이 존재/발생/작용한다면 그것은 원인을 가지거나 설명되어야 한다.

P3. φ의 존재/발생/작용의 원인이 되거나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ψ뿐이다.

P4. 신=df.ψ.

C.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19)

우주론적 논증 1: 운동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 1225–1274) 와 새뮤얼 클라크 (Samuel Clarke. 1675 - 1729)는 우주론적 논증의 주된 옹호자에 속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아퀴나스의 다섯 논증들 가운데 첫번째는 대략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P1. 우주만물은 운동한다.

P2. 우주만물이 운동한다면 그것들의 운동을 불러일으킨 것이 있다.

P3. 우주만물의 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동의운동자(unmoves mover) 뿐이다.

P4. 신=df.부동의 운동자.

C.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이 논증은 “사물의 자연 상태”가 정지 상태임을 가정하는데, 운동 역시 정지 상태와 마찬가지로 “자연 상태”라는 뉴턴 경의 견해는 오늘날 토마스의 첫 번째 논증, 특히 P2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20)

우주론적 논증 2: 원인

하지만 우주론적 논증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형태는 아마도 아퀴나스의 두 번째 논증인 원인 논증(causal argument)일 것이다:

P1. 우주에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P2. 우주에 사건들이 발생한다면 그 사건들은 모두 원인이 있다.

P3. 모든 사건들이 원인을 가진다면 우주 전체 역시 원인을 가져야 한다.

P4. 신=df.우주 전체의 원인.

C.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여기서 P3는 의심스럽다. 엄밀히 말하면 원인을 가지는 것은 사건이나 과정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주는 사건이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 과정, 그리고 사물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우주가 원인을 가져야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21)

우주론적 논증 2: 반론 1: 우주는 사건/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이 비판에 의해원인논증이 완전히 무력화되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주가 사건이나 과정이 아니라고 해도, 우주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계열을 일어나게 한 제일 원인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즉 앞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비판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P1. 우주에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P2. 우주에 사건들이 발생한다면 그 사건들은 모두 원인이 있다.

P3’. 모든 사건들이 원인을 가진다면 우주의 사건들의 원 인-결과 계열 전체도 원인을 가질 것이다.

P4’. 신=df.우주의 사건들의 원인-결과 계열 전체의 원인.

C.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22)

우주론적 논증 2: 반론 2: 신은 왜 예외인가?

그럼에도, 원인 논증에는 한 가지 매우 기초적인 문제점이 있다.

다음 물음을 생각해 보자: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진다면, 신 역시 원인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

하지만 이 대답은 불만족스럽다. 만일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는 원리에 대해서 예외를 허용할 것이라면, 왜—예를 들어, 빅뱅과 같은—최초의 사건을 예외로 인정하지 않는가?

Q. 보다 일관성있는 방식으로 원인 논증을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

(23)

목적론적 논증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모든 논증 가운데 가장 폭넓은 호소력을 지닌 논증은 목적론적 논증(teleological argument) 또는 설계 논증(argument from design) 이다. 이 논증은 다음 형태를 띤다:

P1. 우주에는질서가 있다.

P2. 오직 지적 설계자가 존재해서 그가 우주를 창조했어야만 우주에 질서가 있을 수 있다.

P3. 신=df. 지적 설계자.

C.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24)

목적론적 논증 (계속)

위 논증은 타당한데, 건전하기도 한가? P1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무생물과 비교할 때 살아있는 세포들은 고도의 질서를 갖춘 존재로 보이며, 또 세포들에 비해서 다세포 생물들은 더더욱 세련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한다.

P2도 그럴 듯하다. 흙이 제 스스로 결합하여 벽돌이 되지 못하고, 벽돌이 제 스스로 결합하여집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무기물 입자들이 제 스스로 결합하여 살아 있는 세포를 만들 수 없고, 세 포들이제 스스로 결합하여 복잡한 생물들을 만들 수 없다. 이 결과들은 오직 재료에 그런 질서를 부여하는 설계자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25)

반론 1: “질서”라는 낱말의 불명료성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목적론적 논증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그 논증에서는 “질서”(“order”)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이와 관련해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반론은 “질서”라는 말이 명료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질서있게 보이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관찰자에게는 질서있게 보이는 그림이 다른 사람에게는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다. 이는 P1(“우주에는 질서가 있다”)이 과연 참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26)

반론 2: “질서”라는 낱말의 공허성

둘째 반론은 “질서”라는 말이 너무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P1이 공허한 주장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들이건, 아무리 엉망진창인 방식으로 존재해도, 나름의 질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방바닥에 여러 개의 공깃돌을 던져 보라. 그것들은 이런 질서 아니면 저런 질서를 가지고 배열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창조주가 없이 사물들이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결국 어떤질서를 가지고 존재하게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기에는 너무 세련된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반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사물들이 완벽한 질서를 가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도와 기도는 서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해마다 새해 떡을 먹다 질식사하는 일본인들이 나오게 만들었다. ( 만일 창조주가 정말 있다면 그는 로맨스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 게다. 요도와 생식기를 합쳐놓은 것을 보라.)

(27)

반론 3: 생물학적 질서의 진화론적 설명

세째 반론은, 설혹 우주에 질서가 성립한다고 해도, 그런 질서는 설계자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도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반론은 P1보다는 P2를 공략한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질서 사례가 되는 생물체의 경우에도 그런 설명이 가능할까? 생물체의 존재를 설계자 가설에 의존하지 않고 설명하려는 생물 진화 이론들은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있었다. 예를 들어 아낙시만드로스(611–547 B.C.)는 생물체가 원래 바다에서 생겨서 육상 생물로 진화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까지 상세한 경험적 관찰에 의거한 포괄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다윈은 생물체가 가장 단순한 아메바에서 가장 복잡한 영장류로 생존 경쟁과 적자생존을 통하여 점차 진화했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다윈의 선구적 연구와 그 이후 많은 생물학자의 노력으로 인해 생물체의 진화 가설은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승인될 만큼 충분히 확증되었다.

(28)

재반론: 신성진화론

앞의 반론에 대하여 두 가지 대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모든 생물학적 질서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2. 모든 생물학적 질서는 오랜 진화과정의 결과물이지만, 그런 과정마저도 신의 창조의 수단일 뿐이다.

대답 1이 더 흔한 반응이지만, 사실 현재까지 대부분의 생물학적 현상들에 대해 진화론은 매우 성공적인 설명을 제시해왔기 때문에, 대답 1은 매우 의심스러운 전략일 것이다. 반면 대답 2는

과학자들의 의견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생물학적 질서가 (진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결국 신의 창조활동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이런 이론을 신성진화론(Divine

Evolution Theory)이라고 한다.

(29)

재반론: 신성진화론 (계속)

하지만 자비로운 설계자에 대한 믿음과 진화과정에 대한 믿음을 조화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진화의 과정은

끝없이 계속되는 투쟁과 고통과 죽음의 장

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체는 굶주림이나 추위나 질병 또는 다른 동물들에게 잡아먹힘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다. 만일 신이 자비롭다면, 왜 하필이면 그렇게 잔인한 과정을 통해서 뭇 생명들을 창조하여야 할까?

(30)

요약

I 종교에는 여러 측면들이 있다: 신에 대한 믿음; 기도;

종교단체에 대한 소속감; 영적 문제에 대한 숙고와명상;

계율에 대한 순종; 이상에 대한 몰입 등.

I 하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들에게 종교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신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I 종교마다 신의 수는 다르다. 고대 희랍인들은 여러 신들을 믿었으며, 유대교도들, 무슬림들, 개신교도들은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31)

요약 (계속)

I 그렇다면 이런 신(들)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I 어떤 종교에서건, 많은 이들이 신을 직접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그 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히 신뢰할만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무슬림들도, 개신교도들도, 신을 직접 경험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두 종교를 믿는 이들이 모두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I 어떤 이들은 모든 종교에 진리가 있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종교인들이 모두 맞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들 간에 존재하는 교리와 믿음의 차이를 놓고 볼 때, 그런 주장은 지탱될 수 없다.

I 따라서, 보다 이성적인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옹호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32)

요약 (계속)

I 안셀무스의 신존재 논증에 의하면: P1. 신의 개념은 가장 위대한 것의 개념이다. P2.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의 개념은 가장 위대한 것의 개념이 아닐 것이다. C.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I 여기서 P1은 신에 대한 다음 정의와 실질적으로 같은 주장이다: 신=df.가장 위대한 것.

I 하지만 순전히 정의로부터 무엇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을 듯하다.

I 그러나, 안셀무스는 φ의 정의로부터 φ의 비존재가 모순을 함축한다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렇게 정의된 φ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33)

요약 (계속)

I 고닐로의 비판은, 안셀무스의 신존재논증이 건전한다면, 그 자신의 완전한 섬 존재논증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섬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고닐로의 논증은 불건전하며,

안셀무스의 논증도 그렇다. 하지만, 두 논증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기 있기 때문에, 유비논증은 성립하지 않는다.

I 칸트에 의하면, “신=df. 가장 위대한 것”에 비해 “ 신=df. 가장 위대한 존재하는 것”이 더 위대한 존재에 대한 정의인 것은 아니다. 그 두 정의는 사실 동치이기 때문이다.

(34)

요약 (계속)

I 아퀴나스의 첫번째 우주론적 논증(운동논증)에 의하면: P1.

우주만물은 운동한다. P2. 우주만물이 운동하면 그 운동을 불러일으킨 것이 있다. P3. 우주만물의 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부동의 운동자 뿐이다. P4. 신=df.부동의 운동자. C.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I 하지만, 뉴튼의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운동도 정지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따라서, P2가 말하는 바와 달리,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꼭 외부의 힘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I 아퀴나스의 두번째 우주론적 논증(원인논증)에 의하면: P1.

우주에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P2. 우주에 사건들이 발생한다면 그 사건들에는 원인이 있다. P3. 우주의 모든 사건들이 원인을 가진다면, 우주 자체도 원인을 가진다 . P3.

신=df.우주의 원인. C.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35)

요약 (계속)

I 하지만, 우주는 사건이나 과정이 아니다. 오직 사건이나 과정만이 원인을 가지기 때문에, P3는 의심스럽다.

I 이 비판을 피하기 위해, 원인논증을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 있다: P1. 우주에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P2. 우주에 사건들이 발생한다면 그 사건들에는 원인이 있다. P3. 우주의 모든 사건들이 원인을 가진다면, 우주의 사건들의 원인-결과 계열 전체도 원인을 가진다 . P3. 신=df.우주의 사건들의 원인-결과 계열 전체의 원인. C.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I 하지만, 모든 것이 원인을 가진다면, 신 그 자체도 원인을 가져야하지 않겠는가? 결국 수정된 원인논증도 비일관적인 것 아닌가?

(36)

요약 (계속)

I 목적론적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P1. 우주에는 질서가 있다. P2. 오직 지적 설계자가 존재해서 그가 우주를

창조해냈을 때에만 우주에는 질서가 있을 수 있다. P3. 신=df.

지적 설계자. C. 신이 존재한다.

I 이 논변에 제기될 수 있는 첫째 반론은 “질서”라는 말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질서로 보이는 것은 또다른 이에게는 난장판일 수 있다. 이것은 P1이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하기어렵게 만든다.

I 둘째 반론은 창조주가 있든 없든 일정한 정도의 질서는 생겨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한 팩의 카드에서 임의대로 몇 장의 카드를 빼다 보면 원페어 정도는 흔히 나온다. 이것은 P2 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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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계속)

I 즉 여기서 딜렘마는, “질서”라는 말을 엄격한 기준으로 쓰면 우주에 정말 질서가 있는지 불분명해지고, 느슨하게 쓰면 꼭 설계자가 있어야만 질서가 출현할 수 있는지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쪽이건, 목적론적 논증이 건전한지 명확하지 않게 된다.

I 세째 반론은, 지적설계자가 없이도 질서, 특히 생물학적 질서의 출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명은 진화론적 설명이다.

I 유신론자는 1. 진화론적으로 모든 생물학적 질서를 설명할 수 없다고 반박하거나, 2. 진화과정 역시 지적설계자의

창조과정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답 1은 과학적으로 그럴 듯하지 못하고, 대답 2는 왜 자비로운 신이 잔인한 적자생존의 과정을 거쳐서 뭇 생명을 창조해야만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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