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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

문서에서 한국 기업의 생존 보고서 (페이지 130-147)

(1) 기업 개요

1938년 설립된 폭스바겐그룹은 볼프스부르그(Wolfsburg)에 본사를 두고 있다. 유럽, 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지에 총 42개의 자동차 생 산 공장을 갖고 있으며 150여 개국에 자동차를 수출하고 있는 유럽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이다. 각 나라 공장에는 약 30만 명의 직원이 2만 대가 넘는 자동차를 매일 생산하여 전 세계에 보급하고 있다.

1950년대부터 적극적인 해외전략을 전개하여 매출이 50% 이상을 차 지할 정도로 해외 의존도가 큰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메르세 데스 벤츠, BMW와 함께 독일 자동차회사 빅3를 이루고 있다.

❙표 3-6. 폭스바겐 현황

설립연도 1938년

본사 소재지 볼프스부르크

설립자 독일자동차협회(German Auto Association)

종업원 수 230,000명(2007년 기준)

자본, 기술 제휴업체

아우디(독일, 99%)

슈코다(체코, 100%)

세아트(스페인, 100%)

벤트리(영국, 100%)

부카티(프랑스, 100%)

람보르기니(이탈리아, 100%)

∙연 혁

- 1934: 독일산업엽합회 RDA와 포르셰 박사가 국민차를 개발하 겠다는 계약 체결

- 1936: 프로토타입 ‘비틀’ 첫 도로 시험 주행 - 1939: 제2차 세계대전 발발

- 1944: 연합군 폭격으로 공장의 3분의 2 파괴

- 1945: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전후 ‘비틀’의 본격적인 생산 시작 - 1949: 비틀 미국으로 첫 수출

- 1951: Ferdinand Porsche 사망 - 1960: 주식 공개 및 민영화

- 1978: 비틀 생산 중단

- 1990: 체코의 자동차회사인 슈코다(Skoda) 인수 - 2004: 5세대 골프모델 출시

- 2005: 파사트(Passat)와 제타(Jetta)모델 리메이크

(2)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살펴본 역사

∙[기회 활용] 나치스 정권의 자동차 대중화 정책이 가져다 준 기회 폭스바겐의 탄생은 1930년대 나치스 정권의 자동차 대중화 정책 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인기를 모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이 아우토반 위를 달릴, 전 국민의 차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자동차 설계의 대가였던 포르쉐 박사를 불러 “어른 두 명과 어린이 세 명이 탈 수 있고, 정비 가 쉬우며 값이 1천 마르크 이하인 차”를 설계해 달라고 주문했다.

1938년 7월 3일 마침내 최초의 국민차 VW38이 선을 보였고 1938 년 9월 16일 국민차를 생산하기 위한 국영기업 폭스바겐이 설립되 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국민차 생산은 뒷전으로 밀 려나면서 마이카를 갖기 위한 대중들의 꿈은 깨져 버렸다. 전쟁 이 후 패전국이 된 독일 정부는 막대한 보상금으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 움을 타개하기 위해 폭스바겐 공장과 비틀을 팔려고 노력했지만 영 국, 프랑스, 미국 자동차 회사 모두 거절했다.

이렇게 되자 할 수 없이 1948년 공장운영권이 독일인의 손에 반 환되었고, 전쟁 중에 오펠에서 트럭공장을 지휘 감독하여 수완을 인 정받은 하인츠 노르트호프 박사가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쟁 전에 설계된 VW38을 면밀히 검토한 후 양산체제에 돌입하기로 결

정한다. VW38의 생산을 순조롭게 진행되어 1948년에는 4만6천 대, 1950년에는 9만여 대를 돌파했다. 이렇게 폭스바겐은 해마다 생산 대수를 늘리면서 독일 재건의 견인차 구실을 했고 1955년이 되자 주문이 밀려 차가 없어 못 팔 지경이 되었다.

∙[기회 활용]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을 넘어 해외진출에 이르기까지 1950년, 150대의 비틀을 시작으로 폭스바겐의 자동차는 미국 뉴 욕에서 판매가 이루어졌다. 다음 해에는 200대, 1953년에는 400대로 조금씩 증가하여 서부에서도 딜러가 개점하였다. 이 차는 미국의 상 식에서 보면 매우 독특한 디자인과 구조였다. 게다가 매우 튼튼하고 고장도 없어 손을 볼 필요도 별로 없었다. 입을 통해 평판이 퍼져 캘리포니아에서는 폭스바겐 비틀로 달리는 것이 패션이 되었다.

폭스바겐은 이 시기에 서비스체제와 부품 공급체제를 근본적으로 강화하였고 딜러망 확충에 전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소비자들에게 폭스바겐이 젊은 감각의 세련된 메이커라는 것을 부각시킨 광고 캠 페인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이 덕분에 1955년에는 2만 대 판매에 달했으며, 지식인은 지식계 급의 심볼로서 비틀을 소유하게 되었다. 동급의 미국 차와 비교해서 개성 있는 스타일과 고장이 적다는 점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고품 질로 스타일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중고차 가격도 높았다. 이러한 것이 평판을 더욱 높이게 되었고, 미국차보다도 고장이 적은 우수한 차라는 시장 내 평판이 정착하였다.

1961년에는 수입차의 절반인 17만5천 대의 판매기록을 달성하였 으며 미국시장 전체 판매대수의 3%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구나 때

비틀은 미국 수입차 중 1위를 달리게 되었으며, 이러한 추세는 1970 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위기 대응] 단일차종체제에서 풀라인업체제로의 전환

폭스바겐은 비틀이 높은 판매실적에도 불구하고 1973년에 이르러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비틀을 제외한 Type 3과 Type 4 모델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고 K70는 크게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주력 기종인 비틀 조차도 유럽과 북미시장에서 인기를 잃기 시작했 다. 이는 새로운 모델에 대한 소비자들의 갈망과 1970년대 중반 공 랭식 엔진 자동차에 대한 수요 감소가 때문이었다. 폭스바겐은 비틀 의 생산을 언젠가는 중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명성을 대 체할 모델을 내놓기가 조심스러웠다.

폭스바겐은 다름 아닌 1964년에 다임러‐벤츠에서 인수한 Auto Union(아우디)로부터 생존 해법을 찾아냈다. 폭스바겐이 비틀을 이을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했던 전륜구동 수랭 식 엔진 차량 기술을 아우디가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륜구동 방식은 차량의 성능개선, 중량감소, 내부공간 확장을 동 시에 가능하게 했다. 아우디 폴로, 골프, 파사트로 대표되는 폭스바 겐의 신 기종들은 전부 아우디 기술에 기반한 것이다. ‘폴로’의 경우

‘아우디 50’에 상표만 바꿔 달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고 1973년 출 시된 파사트도 역시 ‘아우디 80’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폭스바겐의 운명을 결정지은 차는 1974년 출시된 골프다. 골프는 비틀과는 달리 수랭식 엔진을 차 앞부분에 달고 있는 전륜 구동 방 식이었으며 해치백 구조를 채택했다. 골프는 출시 이후 큰 인기에 힘입어 골프는 폭스바겐의 주력기종으로 자리잡았다.

골프 1세대의 특징은 견고한 공정, 연비 극대화, 그리고 고성능의 엔진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1970년대 중반 당시 자동차 수요자의 요 구에 부합하여 골프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다. 1974년 골프 1세대는 출시 2개월 만에 똑 같은 기간 내 비틀의 판매기록을 깼고 31개월 후에는 생산 100만 대를 돌파했다. 첫 번째 골프 시리즈의 1979년에 는 독일 자동차시장에서 9.8% 이라는 최고의 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9년간 성공적으로 판매되었다. 이로써 1970년대에는 골프를 필두로 파사트, 골프, 폴로 등의 중소형 기종과 아우디의 중대형 기종이 추 가되어 풀라인체제가 구축되었다.

∙[위기 대응] 비틀 진부화와 재정 위기 대응 실패

골프는 유럽에서 크게 성공했지만 1980년대 초 미국시장에 진출 하여 판매부진을 겪었고 거기다 중남미사업도 부진하여 큰 적자를 보았다. 북미시장에서 래빗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골프모델이 일 본과 미국 자동차와의 성능 및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골프의 미국 판매는 1980년에는 29만 3,595대를, 1984년에는 17만7,709대를 기록하였다.

골프 2세대의 출시는 미국시장에서 일시적인 회복을 가져다주었 다. 1983년에 출시된 골프 2세대 역시 1983년부터 1991년까지 10%

이상의 점유율을 유지하여 성공을 이어나갔다. 골프 2세대의 출시 로 인해 1984년에 22위를 기록했던 J.D. Power의 만족도조사에서 다음해에 8위로 급상승하였다. 같은 해 골프 판매는 20만 대를 돌 파하였다.

이렇듯 폭스바겐의 외형적인 성장은 1980년에도 계속되었다. 하

고비용 저효율 메이커이기도 했다.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지지 못한 채 1980년대를 통해 계속 점유율 확보 위주의 경영전략을 폈다. 그 결과 매출은 증가하지만 적자는 오히려 늘어나는 악순환이 몇 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이 때문에 1988년에는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에서 일본차에 대비한 경쟁력 열세로 인해 미국의 현지공장을 철수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한편 폭스바겐은 중국 자동차시장의 성장을 내다보고 1985년 중 국 현지에 상하이자동차와의 합작법인을 설립하였다. Early Mover Advantage 덕분에 폭스바겐은 중국 자동차시장 점유율 절반 이상을 유지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경쟁이 심화되어 시장지배력이 떨 어졌으나 아직까지도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고 중국에서 대표적인 합작회사로 자리 잡았다.

∙[위기 대응] 1990년대 기록적인 손실과 사상 최악의 경영위기 타개 노력 폭스바겐은 골프 3세대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경쟁력 약화가 장기 화되며 1990년대 초에 사상 최악의 경영난에 봉착하게 된다. 위기의 외부적인 원인은 동서독 통일비용의 과다한 지출로 인한 독일경제 의 급락이었다. 내부적으로는 낮은 수익성과 일본경쟁사들과 비교 해 저조한 노동생산성으로 인한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었다. 이런 구 조적 취약성은 폭스바겐의 경영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마침내 1993년에는 10억9,400만 마르크의 기록적인 손실을 기록하게 되고 대표기종 골프도 판매가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당시의 심각성은 일 부 자동차 전문지에서 제기된 폭스바겐의 미국시장 철수설이 잘 말 해준다.

위기 극복을 위해 1993년 취임한 피에히(Ferdinand Piech)회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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