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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폰 (Dup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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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업 개요

듀폰(DuPont)은 세계 4위(2007년 매출액 기준)의 종합화학회사로 지 금은 인조 대리석에서 방탄조끼 소재, 건축 단열재, 수영장 살균제, 제초제에 이르기까지 무려 1,800여 개의 제품을 생산한다.

듀폰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기록을 갖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 지 포천이 1955년 ‘500대 기업’을 선정하기 시작한 이래 듀폰은 한 번 도 빠진 적이 없다. 고유가와 미국 경제 침체로 세계 기업들이 잔뜩 움츠린 2008년 들어서도 1분기에 9%, 2분기엔 12% 성장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체 매출 294억 달러(약 32조 원)의 36%를 출시 된 지 5년 이하의 신제품에서 벌어들였다는 사실이다. 값으로 따져 보면 팔리는 제품 셋 중 하나는 연구소에서 갓 구워 낸 제품이라는 얘기다. 신제품이 도입되는 한편 오래된 제품은 생산을 중단한다. 그래서 지금의 듀폰은 더 이상 화약도 나일론과 같은 의류용 섬유도 생산하지 않는다. 듀폰은 200년이 넘은 회사다.

❙표 3-12. 듀 폰 현황

설립연도 1802년

본사 소재지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시

설립자 랑스인 에르테르 이레니 듀폰

종업원 수 60,000명(2005년 기준)

사업영역 농업, 영양, 전자, 통신, 안전과 보호, 생활용품과 건축, 수송 등의 산업분야에 솔루션 제공

∙연 혁

- 1802: E. I. 듀폰,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듀폰 설립 - 1903: 듀폰 중앙연구소 설립

- 1912: 셔먼법에 의하여 듀폰, 허큘리스, 아틀라스로 분할 - 1921: 미국 대기업 최초로 사업부제 조직을 채택

- 1933: 레밍톤사(Remington Arms Company, Inc) 인수

- 1935: 나일론 발명 - 1938: 테프론 발명

- 1959: 라이크라(Lycra) 탄성 섬유 발명 - 1981: 정유회사 콘티넨털오일(Conoco) 인수 - 1999: 과학기업(Science Company)으로 변신 선포

- 2004: 섬유사업 법인 인비스타(INVISTA)를 미국의 코흐(Koch)사 에 매각

(2)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살펴본 역사

∙[기회 활용] 미국 화약산업의 미래를 내다보다

듀폰(E.I. du Pont de Nemours and Company)은 1802년 프랑스 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간 랑스인 에르테르 이레니 듀폰에 의해 미국 델 라웨어주 윌밍턴에 설립되었다. 설립자 E.I 듀폰은 유럽에 비해 미 국의 화약산업이 뒤쳐져 있기 때문에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하 여 회사 설립을 결심했으며, 따라서 처음에는 화약제조업으로 시작 했다. E.I. 듀폰의 예상대로 화약산업을 통해 회사는 크게 성장하여 19세기 중반에는 미군의 최대 화약납품업자로 부상하였고, 미국 남 북전쟁 때는 북군의 화약 50% 이상을 공급했다.

∙[위기 대응] 매각 위기를 넘기고 나일론을 개발

1902년, 듀폰이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해에 4대 듀폰 사장이 후 사 없이 갑자기 사망했다. 계속 직계 아들에게만 사장직이 대물림되 면서 유지되어 온 회사이다 보니,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우왕좌왕

가에서 유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3명의 사촌 형제들에 의해 매각계획이 무산되고 오늘날의 듀폰의 전신이 마련되었고 3명이 제 2의 창업을 이루었다.

이들은 창업자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이듬해인 1903년, 당시로는 획기적 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중앙연구소의 특성상 초 기에는 별 성과를 내지 못하였지만, 1939년 나일론 개발로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위기 대응] 독점으로 인한 분리와 사업영역 다각화

듀폰은 1905년경에 미국 화약시장의 75%를 차지하며 막강한 지 배력을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폭발물의 56%를 생산하였고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6천만 달러 규모의 자산 을 보유하며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떠올랐다.

지나치게 큰 시장 지배력을 갖게 되자 미국 정부는 1907년에 듀 폰을 독점기업으로 분류하고 반독점 규제를 가했다. 결국 미국 사법 부는 1912년에 셔먼 반독점법에 의거해 화약시장에서 듀폰의 독점 적 지위를 해소하기 위해 일부 사업의 분리를 명하였다. 이에 따라 헤라큘레스 화약회사(Hercules Powder Company)와 아틀라스 화약회사 (Atlas Powder Company)가 생겨났다. 분리 이후에도 듀폰은 제1차 세 계대전 당시 연합군 화약의 40%를 공급할 정도로 화약산업에서 지 배적인 지위를 누렸다.

20세기 초 듀폰은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여 다이너마이트와 무연화 약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새로운 제품 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미국 최초로 기업연구소를 설립하여,

셀룰로오스 화학 등을 연구하며 화약 및 폭발물 이외의 사업영역을 개척했다. 1923년에 듀폰의 과학자들은 방수 셀로판지를 개발하여 식품포장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1920년대에 듀폰은 자동차회사 GM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GM을 미국 제1의 자동차회사로 만들었다.

1928년에는 왈레스 케로더스(Wallace H. Carothers)가 이끄는 고분자 연구팀이 창설되어 1930년 세계 최초로 네오프렌 합성고무를 발명 했다. 이어서 1935년에는 듀폰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물질인 나일론을 개발했다. 나일론의 개발은 이후 직물산업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다. 몇 년 후 합성수지 루사이트와 세상에서 가장 미끄러운 물질인 테프 론도 발명된다.

∙[기회 활용]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적인 화학회사로 거듭나다 제2차 세계대전은 듀폰에게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돈벌이 기회였 다. 전쟁기간 동안 무려 4억5천만 톤의 군사용 폭발물을 생산 및 공급했으며 각종 폭발물, 총기와 로켓용 탄약, 및 화학무기의 개발 에도 관여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원자폭탄 개발을 위 한 미국의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세계 최초의 플루토늄 생 산시설을 설계 및 건설하였다. 또한 총 25개의 미국 정부 소유의 군수공장을 운영하여 폭발물, 메탄올, 암모니아, 네오프렌 고무를 주로 생산했다.

전후 듀폰의 연구개발이 잇따라 결실을 맺어서 1952년에는 마일 라(Mylar)플라스틱필름, 그리고 1959년에는 라이크라(Lycra)탄성섬유 가 탄생했다. 덕분에 듀폰은 합성화학산업을 주도하는 세계적인 화 학회사로 거듭났다. 1960년대에는 가볍고도 극도로 질긴 케블라

기여했다. 1969년 인류 최초로 달에 도착한 우주인은 25겹의 우주복 을 착용했는데 그 중 23겹이 듀폰 소재로 만들어졌다.

∙[위기 대응] 세계 석유화학산업의 공급과잉과 사업다각화 실패 지속적인 연구개발 성과 덕분에 성장세를 이어가던 듀폰은 1970 년대 화학섬유산업의 공급과잉으로 인한 침체 때문에 위기를 맞았 다. 당시 듀폰은 화학섬유 분야에서의 장기적인 성공 때문에 화학섬 유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고, 반면 다른 분야에서의 신제품 개발이 부진했다. 공급과잉에 이어 1970년 중반에 화학섬유에 대한 수요 급감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듀폰은 큰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 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으로 사업다각화를 모색하는 대신, 화학 섬유에 의존적인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기존 사업의 재정비에 주력했 다. 이 때문에 1980년대에 경기침체가 찾아왔을 때 어느 화학회사보 다도 큰 타격을 입었다.

∙[위기 대응] 성장 침체에 대한 홀리데이 회장의 개혁

나일론 등 기존 제품의 매출이 정체하면서, 2001년 듀폰의 매출은 전년 대비 35억 달러나 감소했다. 무려 13%나 매출이 줄어든 것이 다. 오래된 기업 특유의 굼뜬 속성은 변화에 저항했다.

홀리데이 회장의 개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1998년 CEO에 오른 데 이어 이듬해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게 된 그가 2001년 개혁을 추 진하면서 내세운 슬로건은 ‘시장 주도의 과학(market-driven science)’이 었다. R&D(연구개발)는 항상 시장의 필요에 입각해야 하며, 연구소에 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그는 연구실에 앉아있던 과학자와 엔지니어에게 여권과 가방을

안긴 뒤 등을 떠밀며 고객을 만나고 시장을 둘러보도록 했다. 14만 명에 이르는 종업원을 6만 명으로 감축했다. 거꾸러지던 듀폰의 성 장 곡선은 이때부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회장에 취임한 후 병 충해와 가뭄에 견디는 종자(種子)나 바이오 연료가 듀폰의 새로운 성 장동력으로 부상했고, 듀폰은 화학기업에서 종합과학기업으로 변신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고유가 충격에 휘청거리고 있지만, 홀리데이 회장의 말은 의표를 찔렀다. “고유가는 많은 기회를 제공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위기와 기회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위기만 보지만, 우리는 위기와 기회를 같이 봅니다. 그리고 기회를 이용합니다”라고 역설했다.

“위기보다 기회를 더 많이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우리로서는 기회가 더 많다”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방탄조끼에 쓰는 물질로 개발한 케블라(Kevlar)는 기존 소재보다 훨씬 가벼우면 서도 강합니다. 이것을 타이어와 자동차 등에 사용하면 에너지 절약 시대에 유용하겠죠”라는 그의 말을 통해 듀폰의 미래가 어떻게 준비 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듀폰이 생산하는 제품은 시대에 따라 변했지만, 과학은 늘 성장의 밑천이었다. 듀폰에는 이공계 박사만 5,000여 명이 있고, 이들 중 상 당수는 미국 동부의 명문대 출신이다. 고위 경영진의 90%가 이공계 출신이다. 2007년 미국에서 출원한 특허건수가 2,000여 개이고, 획 득한 특허건수가 597개에 이른다. 2007년 2월 월스트리트저널 보도 에 따르면 과학적 능력, 연구 집중도, 혁신 주기 등에 있어서 듀폰은 화학업계의 최선두주자로 조사됐다.

있었던 듀폰 경영에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연구소는 개혁의 1 순위였다. 그는 듀폰의 상징과도 같았던 의류용 섬유부문을 매각했 고, 농업과 안전보호용 소재, 바이오연료 등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 했다. 또 탄소가스 배출을 줄이는 친환경 경영을 펴면서 공해기업의 오명을 벗고 지속가능한 성장의 기반을 닦았다.

1970년 여름, 듀폰에 인턴으로 입사해 현재까지 40여 년 동안 듀 폰에서 근무해 온 그는 2001년 911 테러와 IT 버블의 붕괴로 미국 경제가 경기침체에 빠지는 상황에서 듀폰 역시 마이너스 성장의 수 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경험했다. 이때 터득한 교훈은 바로 “패 닉에 빠지지 말라”였다. 그는 위기와 혼란이 올 때마다 직원들에게 이 말을 주문처럼 전하곤 했다. 위기 시에 발휘된 그의 리더십은 유 명한 일화로 남아 있는데,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가 발생했 을 때 홀리데이 회장은 바로 미시시피로 내려가 회의실에서 실종된 직원의 이름을 불러가며 피해상황을 직접 확인했다. 당시 행방불명 되었던 65명의 직원들은 이후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매출이 13% 급감한 2001년 위기상황에서도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바로 현장, 즉 시장(市場)이었다. 시장에 나간 그는 “바뀌지 않 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느꼈고, “시장으로 가자”는 말을 개 혁의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기회 활용] 바이오기술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업으로 전환

2002년 창립 200주년을 맞으며, 듀폰은 새로운 100년을 담당할 사 업모델로 생명공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업(Science Company)으 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종자, 농약 등 농화학부문은 물론 다른 사업 부문에서의 생명공학기술 접목을 일관성 있게 시도하고 있으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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