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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타자동차

문서에서 한국 기업의 생존 보고서 (페이지 147-173)

(1) 기업 개요

도요타자동차는 일본의 대표적인 다국적기업이며 2008년 현재 판 매대수 기준으로 세계 1위의 자동차회사이다. 뿐만 아니라 2008년 포천 글로벌 500 전체 5위에 오를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회 사로 자리 잡았다.

❙표 3-8. 도요타 현황

설립연도 1937년

본사 소재지 아이치현 도요타시

설립자 기치로 도요타(18941952년)

종업원 수 299,394명(2007년 기준)

지분관계 디아하쓰(51%, 1968년 취득)

히노(36%, 1966년 취득)

∙연 혁

- 1937: 도요타자동차공업 설립

- 1972: 누적 생산대수 1,000만 대 돌파

- 1978: 1

- 1984: 도요타와 GM의 미국 현지합작회사 NUMI 생산 개시 - 1987: 폭스바겐과 상용차 공동생산 합의

- 1989: 렉서스 LS400 및 ES250 출시

- 1999: 뉴욕 및 런던 증권거래소 주식 상장 - 2002: 북미지역 누적 생산대수 1,000만 대 돌파

- 2006: 북미 연구개발 거점 ‘북미 도요타 엔지니어링 & 매뉴팩 처링(TEMA)’ 설립

- 2007: 아시아지역 통괄회사(TMAP-EM) 설립

(2) 위기와 기회 중심으로 살펴본 역사

∙[기회 활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의 군용트럭 생산육성 정책의 기회를 포착

도요타는 1933년 12월 일본의 발명왕 도요타 사키치의 장남인 도 요타 기이치로에 의해 탄생했다. 풍전방직기의 자동차 부서에서 출 발한 도요타의 설립자 기이치로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고유 자동 차모델 개발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3년에 걸쳐 철을 비롯한 모든 소재와 부품산업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국산부품으로는 목표로 한 수준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내에 제강부를 설립하 고 공작기계도 자체 제작했으며 전장품도 내재화할 수밖에 없었다. 도요타는 그 후에도 외국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 기술을 육성하 는 방침을 일관하고 있다. 1935년 도요타 최초의 모델은 3,000cc 엔 진을 얹은 4도어 세단 ‘도요타 AA형’으로 포드와 GM를 모방한 구성 이었다. 하지만 설립 초기인 1936년부터 1946년 사이에 승용차 생산 은 1,757대에 불과했고 주로 트럭과 버스를 생산하는 데 주력했다.

세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도요타는 일본 군부를 위해 군용 트 럭을 생산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일본에서는 군부가 일찍부터 군용 트럭 생산체제 확립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이라고 인식하고 정부 차 원에서 육성한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자동차메이커도 전시 중에는 군수품 생산에 전면적으로 협력하였는데, 자동차 메이커 3사에서 19401945년 사이에 생산한 군용 차량은 10만5천 대였다. 미국 군 의 공중폭격으로 일본 내 생산설비의 약 20%가 파괴되었다. 다행히 연합군이 아이치현 도요타 공장 폭격을 감행하기 직전에 종전선언 이 이루어졌다.

∙[위기 대응]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을 딛고 노사 상생의 문화를 정착 도요타의 가장 큰 위기는 세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찾아왔 다. 1949년 미국 군정 당시 갑작스러운 금융 개혁으로 소비가 위축, 재고가 쌓여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도요타는 은행 융자를 받지 않 고선 살아남기 어려웠다. 은행 측은 1,500명 인원 감축을 해야 협조 융자를 해주겠다고 제시했다. 당시 일본에는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도요타 노조 역시 강경했다. 1950년 3월 도요타의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 사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감원을 단행했다.

도요타 노조는 이 같은 결정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벌였고, 파업은 75일간 계속되었다. 결국, 노조는 남아 있는 75%의 근로자의 고용안 정을 위해 도요타를 살리기로 하고 회사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경영 진에게도 이는 뼈아픈 경험이었고 결국 이 과정에서 사장 이하 도요 타의 모든 경영진과 당시 투쟁을 이끌었던 노조 간부들이 퇴직하는 홍역을 치렀다.

∙[기회 활용] 한국전쟁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 법정관리 20일 만에 한국전쟁이 반발했는데 이는 도요타에게 재 도약의 기회를 주었다. UN군 사령부는 625 전쟁 당시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 트럭을 조달하기로 결정하였다. 도요타자동차는 미군에 트럭을 납품하면서 회사가 큰 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55년 최초로 크라운이라는 고급승용차를 생산하였는데 첫 해에 는 한 달에 700대만 생산하였다. 1957년에 도요타는 아프리카에 크 라운 모델 수출하였는데 도로에서 1시간 이상 연속 주행할 수 없을 정도로 성능이 취약했다. 당시 일본에는 고속도로가 없고 제대로 된 테스트 코스도 없어서 출시 이전에 충분한 시험운행을 거치지 못한 결과였다.

이어 1958년에는 1만1,750대, 그리고 1964년에는 매월 5만 대를 생 산하는 등 생산능력을 꾸준히 향상시켜 나갔다. 이어 1957년에는 트 럭납품으로 생긴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코로나, 1961년 퍼블리카 를 차례로 선보이며 일본의 대표적인 자동차 생산업체로 자리 잡았다.

∙[위기 대응] 쉽지 않았던 글로벌 경영의 첫걸음

1959년에는 최초로 브라질에 해외공장을 설립하였다. 이때부터 도요타는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생산뿐만 아니 라 제품개발 및 디자인 등의 현지화 그리고 이를 현지공급자, 근로 자들과 신뢰관계 구축까지도 중요시하게 된다. 1958년에는 랜드크 루저와 도요펫으로 미국에 진출하였으나 현지언론으로부터 “미국의 혹독한 도로조건에 적합하지 않는 차”라는 혹평을 받고 참담한 실패 를 맛보았다.

최초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은 도요타는 1964년 코로나로 다시 한

번 미국시장에 도전하였다. 1965년에 6,400대 밖에 팔리지 않은 이 차 는 뛰어난 가격대비 성능으로 1968년에는 판매량이 7만1,000대를 기 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1971년까지 판매량이 매년 2배로 증 가하는 하였고 코로나는 도요타를 연간 판매 30만 대 기업으로 성장 시키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반면 1967년에 미국시장에 진출한 크라운 은 큰 성공을 거두는 데 실패했다. 1969년에 진출한 코롤라는 미국인 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형차 중 하나로 입지를 확보했다.

∙[기회 활용] 1970년대 오일쇼크를 기회로 활용하여 세계 자동차산업 의 판도를 바꾸다

한국전쟁에 이어 도요타에 다시 한 번 큰 호재를 가져다준 것은 1970년대 불어 닥친 석유파동이었다. 1973년 전 세계를 덮친 오일쇼 크로 자동차 휘발유값이 폭등하면서 미국시장에서 경제적인 소형차 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때마침 소형차를 대량생산하던 도요타 의 차량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 당시 미국에서 생산되는 자 동차들은 휘발유를 많이 소비하는 대형차가 주종으로 소형차는 찾 기 어려웠던 반면 도요타는 코롤라를 위시해 마일리지가 좋은 소형 자동차들을 값싸게 판매하고 있었다.

도요타는 1975년 미국시장에 27만8천 대를 팔아 폭스바겐을 앞지 르고 미국 내 수입차 판매 1위에 올랐는데, 그 중 반 이상이 코롤라였 다. 코롤라는 1983년 초 생산 1천만 대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포드 T형(1,500만 대), 폭스바겐 비틀(2천만 대)에 이은 세 번째 1천만 대 돌파모델이었다. 1984년 2월에 미국에 GM과 합작으로 NUMMI를 설 립한 이후 처 생산된 기종이 역시 코롤라였다. 1983년 들어 캠리를

∙[위기 대응] 일본차 수입규제와 렉서스의 등장

제1차 석유파동을 기회로 미국시장에서 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도 요타는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일본차 수입규제의 벽에 부닥친다.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메이커들은 이에 맞서 1981년부터 자율규제를 통해 미국시장을 공략하게 된다. 또한 1988년부터는 많 은 차종의 생산공장을 일본에서 미국 현지생산으로 바꾸면서 일본 차에 부과된 연간 판매 쿼터제한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또한 이 시기에 도요타는 미국 내 악화된 일본차에 대한 여론을 피해가는 동시에 크레시다와 크라운 등으로 고전하고 있는 고급차시 장을 공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983년, 회장 도요타 에이 지의 결단으로 1,400명의 엔지니어와 2,300명의 기술자, 60명의 디자 이너 등으로 구성된 최고성능의 세단을 개발하기 위한 F1프로젝트가 발족하였다. 이들은 연구 끝에 1985년 1천여 개의 시제 엔진과 450 여 대의 시험용 차량을 만들었다. 1986년에는 미국과 독일에서 도로 주행이 진행되었고 1987년에 8번의 최고경영진 프레젠테이션 끝에 최종 디자인이 결정되었다. 이어 1988년 미국시장용 디비전 렉서스 를 설립되었다. 1989년에 마침내 렉서스 브랜드로 배기량 3,969cc, 최대출력 294hp의 8기통 엔진을 탑재한 ‘LS400’이 탄생하였다.

LS400은 판매점이 공식적으로 개점하기도 전에 이미 여러 대가 팔 려났고 발매 즉시 히트를 쳤다. 출시와 더불어 인기를 누린 렉서스 는 카앤라이프, 제이디파워, 모터트렌드 등이 행한 각종 조사에서 벤 츠, BMW, 아우디의 최고급차들보다 품질과 신뢰성에서 더 높은 점 수를 받았다. 특히 “영혼을 울릴 뿐, 다른 진동은 없다”는 광고 멘트 처럼 고속에서도 여전한 안락함과 정숙성에서 호평을 얻었다. 이처 럼 품질이 뛰어난 LS400의 가격이 벤츠나 BMW의 중간사이즈 모델

수준인 3만5천 달러였으므로 렉서스의 인기는 당연한 것이었다.

∙[위기 대응] 일본의 장기경제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1990년대 초 거품이 붕괴된 이후 장기침체에 빠져있는 일본경제 는 과거에 탄탄한 내수를 바탕으로 해외진출에 나서 서구 자동차업 계에 두려운 존재로 부상한 도요타의 경영환경을 180도 뒤집어 놓 았다. 일본의 내수 부진이 해외부문까지 포함한 도요타 경영실적 전 체를 깎아내리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리고 도요타의 전체 자동차 매 출 가운데 국내 매출 비중이 1990년 52%에서 1998년에는 38%까지 떨어졌는데 이는 도요타의 세계화 경영전략을 감안하더라도 내수부 진의 타격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최근의 엔화강세 추세 는 해외 가격경쟁력을 약화시켜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위기 극복의 방안으로 도요타는 우선, 사장이 나서서 사내에 위기 의식을 고취시키고 비상 경영체제를 가동하였다. 그 후 부품 공용화 를 통해 신차 개발기간을 18개월 단축하고 제조 원가도 절감했다. 나아가 ‘마른수건 짜내기’ 식의 절약경영을 통해 비용을 최소화하였 다. 그 결과 1992년 이후 대폭 감소하여 1994년에 13억 달러 이하로 떨어졌던 순이익이 1995년에는 27억 달러로 회복되는 등 실적이 본 격적으로 호전되었다.

도요타는 1999년에 계열관계였던 경자동차업체 다이하쓰공업과 트럭업체 히노자동차공업에 대한 출자비율을 50% 이상 늘려 자회사 화했다. 다이하쓰와 히노를 끌어들이면서 경차부터 대형트럭까지 모두 갖춘 종합 자동차그룹으로 재도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요타 는 2005년 경영비전에서 50년간 사용해 온 회사명 ‘도요타 모터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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