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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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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업 개요

링컨, 머큐리, 재규어, 볼보, 마쓰다, 애스턴마틴 등 지명도 높은 7 개의 자동차브랜드를 갖고 있는 포드는 현재 200여 개 나라에서 자 동차를 판매하고 있는 글로벌 자동차메이커다. 창업자 헨리 포드의

“모든 사람이 쉽게 차를 살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경영철학으로 부 유층의 사치품으로 상징되던 자동차를 대중적인 생필품으로 자리 잡도록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철저한 소비자 중심의 철학은 지 금까지 이어져 오늘날의 포드가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세계 최 초로 흐름작업에 의한 자동차 대량생산시스템을 확립해 근대산업의 대량생산방식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자동차 역사상 커다란 족적을 남긴 업체이기도 하다.

❙표 3-4. 포드 현황

설립연도 1903년

본사 소재지 미시간주 디어본(Dearbon)

설립자 헨리 포드

종업원 수 245,000명(2007년 기준)

자본, 기술 제휴업체

제규어(영국, 100%) IVECO 포드 트럭(영국, 48%)

Aston Martin(영국, 75%) 마쯔다(일본, 33.4%) 福持六和(대만, 70%)

∙연 혁

- 1903: 포드사 설립 - 1908: 포드 모델 T 발표

- 1913: 최초의 대량 생산시스템 개발 - 1922: 링컨 인수

- 1936: 포드 재단 설립 - 1947: 헨리 포드 사망

- 1964: 포드 머스탱 발표

- 1970: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 회장 취임 - 1979: 마쓰다 주식 25% 인수

- 1980: 포드 에스코트(Escort) 발표 - 1990: 재규어 인수

- 2000: BMW로부터 랜드로버 인수

- 2002: 링컨 콘티넨털(Lincoln Continental) 생산 중단 - 2007: 전년도 127억 달러 손실 보고

럭셔리 스포츠카그룹 애스턴 마틴(Aston Martin) 매각

(2)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살펴본 역사

∙[기회 활용]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내다 본 포드의 혜안

미국 역사상 20세기 전반에서 가장 미국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많 은 사람들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과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꼽는 다.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는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인근 디 어본에서 아일랜드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디트로이트에 갔다가 증기자동차를 처음 보 게 된다.

포드는 16세 때 미시건 차량회사에 들어갔지만 일주일 만에 해고 된다. 아무도 고치지 못한 기계를 포드가 30분 만에 고친 것이 이유 였다. 그에게 자리를 빼앗길까봐 겁이 난 공장장이 쫓아냈던 것이 다. 그는 에디슨이 세운 전기회사에서 일하면서 전기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이때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포드는 1903년 6월 16일 디트로이트에서 자본금 10만 달러와 근

로자 12명으로 ‘포드자동차회사(Ford Motor Company)’를 설립한다. 이 당시 미국의 자동차회사는 500개가 넘었다.

포드의 사상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낯설면서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기업을 개인의 사유물이 아닌 ‘사회봉사기관’으로 생 각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임금과 저가격’으로 표현되는 그의 경 영이념(Fordism)이다.

창업자 포드의 선택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회사가 시장에서 살 아남기 위해선 많이 만들어서 싸게 파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 한다. 자동차의 대량생산시스템을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것 은 공장의 합리화와 이동조립법을 내용으로 하는 생산시스템이다. 전자는 제품의 표준화, 부품의 단순화, 작업의 전문화로 이루어진다. 1908년 10월 세계 최초의 대중차인 혁명적인 ‘T형 자동차(T-Model)’를 생산하면서 자동차 대중화시대와 함께 내구소비재의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의 시대를 열었다.

∙[위기 대응]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무리한 확장과 T형 포드 진부화 1922년에 고급차 메이커 링컨(Lincoln Motor)을 인수하였고, 1927년 에는 헨리 포드의 ‘철광석에서 자동차까지’라고 하는 발상에 근거해 철강생산설비를 구축한 미국 내 최대의 일관생산공장 Rouge공장을 건설했다. 해외사업 전개도 1910년경부터 T형 포드를 수출하기 시 작했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서 조립을 하고 1920년대에 들어 100% 자회사의 신설을 기본전략으로 1924년에 영국, 남아프리카, 1925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멕시코 등에 생산, 조립거점을 구축했 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도로사정이 좋아지고 차의 성능도 향상

도도 등장했다. 단일모델만 고집하던 포드는 T모델에 변화를 주었 지만 기본 설계는 그대로 지켰다.

이에 반해 GM은 1920년대 후반부터 자동차시장의 성장이 둔화될 것을 예상한 전략을 수립하였다. 풀 라인화와 매년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는 모델체인지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이미 차를 가지고 있는 소비자들이 새 차를 구입하도록 유도하고자 하였다. 이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포드가 2위로 추락하고 GM이 업계 선 도로 올라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25년 포드의 시장점유율은 50% 이하로 떨어졌고 26년에도 판매 는 계속 줄었다. 마침내 포드는 1927년 T형 포드의 후계모델을 내놓 지만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포드의 승용차 시장점유율은 1930 년대에는 20%대까지 저하, 1933년 포드는 GM은 물론 후발주자인 크 라이슬러에게도 뒤져 3위로 떨어졌다. 결국 19061926년 사이에 포 드사는 점유율 1위를 차지하였지만 1928년부터 뒤쳐지기 시작하여 1935년에는 크라이슬러에도 뒤짐으로써 3위까지 추락하였다.

∙[기회 활용] 자동차산업의 호황기의 기회 포착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자동차산업은 큰 기회를 맞았다. 다른 선진 공업국이 전쟁의 직접 피해를 받아 초토가 된 것에 비해 미국 본토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민간에 대 한 공급이 중단되었지만, 유럽의 부흥에 따른 수요로 미국 산업계가 호황기에 들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은 군수물자를 생산해 전후 헨리 포드 2세(1945 년 사장 취임)의 지휘하에 경영재건에 착수했다. 1945년 V8엔진 탑재 차의 양산 재개, 1955년 고급차 링컨의 생산재개 등에 의해 시장 요

구의 대형화, 고급화에 대응해 1950년대 이래 승용차 판매 2위의 자 리를 고수해 오고 있다.

1945년 경영권을 물려받은 헨리 포드2세는 생산과 경영의 합리화 를 추진했다. 미국은 전쟁 중에 중단되었던 자동차 생산을 전쟁 후 곧바로 재개하였고 1949년부터 생산이 본궤도에 올라 V8엔진 탑재 차의 양산이 재개되었다. 1949년 전후 첫 모델인 모델49를 내놓은 데 이어 55년에 발표한 스포츠카 선더버드가 크게 히트를 했다.

1955년에는 고급차 링컨의 생산재개 등에 의해 시장 요구의 대형 화, 고급화에 대응해 1950년대부터 크라이슬러를 제치고 2위 자리를 되찾아 이후 지금까지 2위를 유지해 오고 있다. 1950년대 경부터 비 자동차사업의 확대를 추진, 1955년 디어본 모터를 매수해 농업용 트 랙터부문을 확충, 1956년에는 현재의 포드 Aerospace Corp.(FAC)의 전신인 Aeroneutronic Systems Inc.를 설립, 우주항공, 방위 부문에 도 진출했다.

1960년대 중반은 미국 자동차산업 역사상 최대의 호황기였다. GM은 1965년 2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남겼는데 매출 대비 수익률 이 10%를 기록했다. 크라이슬러 역시 1963년에 최고 수익률을 기록 했고 향후 19년간 그 기록이 깨지지 않았다.

포드사 역시 64년 등장한 머스탱이 미국 젊은이들로부터 폭발적 인 인기를 얻으면서 포드는 예전의 영광을 되찾게 되었다. 스포츠카 바람을 몰고 온 머스탱은 2년 만에 100만 대가 넘게 팔리는 돌풍을 일으켰다. 선더버드와 머스탱 같이 스포티한 차는 포드가 모터 스포 츠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포드는 유럽의 F1(200회 우승)과 르 망(1966∼1969년 우승)등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GT90, 인디고 등의

이익을 달성했다. 하지만 1960년대의 고성장은 1970년대의 불황으 로 인해 시장이 줄어들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위기 대응] 1970∼1980년대 미국 자동차산업의 위기와 구조조정 1973년의 제1차 석유위기로 인해 휘발유 가격이 상승하고 미국시 장에서 자동차 수요가 소형차 위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승용차 부분에서 가격경쟁력과 품질에서 앞선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은 자 동차 왕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수출을 확대하였다. 이렇게 제1차 석 유위기로 일본 소형차의 미국에의 수출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미국 내 일본차의 이미지가 높아져 갔다.

결국 1980년대에는 미국과 일본 간 국제경쟁력의 역전 현상이 일 어났다. 미국은 일본 자동차산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1980년 세계 2 위 자동차 생산국으로 전락한 후 1982년에는 일본과의 생산 점유율 격차가 10.2%까지 확대되었다. 더욱이 1980년대 중반 이후 GM과 크라이슬러 등이 구조조정을 통해 비효율적인 공장을 폐쇄함에 따 라 일본과의 격차가 다시 확대되었다. 포드도 이 시기 큰 시련을 겪 었다. 1980년부터 1982년 사이의 판매가 1970년대 말 절반 수준으 로 떨어졌고 시장점유율도 16%대로 떨어졌다.

미국 자동차산업이 전반적인 위기에 빠져있던 1980년에 헨리 포 드2세가 퇴진하고 콜드웰이 새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포드는 새로운 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콜드웰 회장은 머스탱 이후 히트작이 없어 수십억 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는 회사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과감 한 군살빼기와 체질개선을 시도했다. 그는 대폭적인 감량경영을 실 시하여 사무직과 생산직을 대상으로 인원을 합리화하고 생산설비를 집약화하였다. 우선, 미국 및 해외 공장을 점검하여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15개 공장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철저한 인원 재조정을 실시 하여 5년 동안 20%에 가까운 9만 명을 정리하는 한편 생산성 향상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런 조직개편에 의해 등장한 차가 토러스와 세이블이다. 앞바퀴굴 림에 유선형 보디, 넉넉한 실내를 갖춘 토러스는 경제적인 차를 요구 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아 단숨에 베스트셀러카에 올랐다. 토러스와 세이블의 성공으로 포드는 1986년 순이익 부문에서 GM을 앞질렀다.

∙[위기 대응] 오늘날 포드가 직면한 위기와 대응 실패: 로고까지 저당 잡힌 최악의 위기

2007년 4월 포드자동차의 본거지인 미국 디트로이트 디어본에 포 드(Ford) 성씨를 가진 50여 명의 친족이 모여들었다. 포드차 지분 40%(의결권 있는 주식 기준)를 가진 대주주 자격으로 최악의 위기에 봉 착한 포드차의 미래를 의논하기 위한 자리였다. 특히 뉴욕 월가의 인수・합병 전문회사인 퍼렐라 와인버그 파트너스의 대표가 초청돼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부 포드가(家)주주들은 값이 나갈 때 차라리 보유 지분을 다 팔 아버리자는 제안을 했다. 창업자 헨리 포드의 증손이자 회장을 맡고 있는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이하 빌 포드) 등 가문의 좌장들은 펄쩍 뛰었다. 포드 일가로선 회사 문을 닫자는 얘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104년간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했던 포드차가 얼마나 큰 역경에 처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세 차례에 걸쳐 포드차의 몰락 과정과 회생 가능성을 심층 분석하는 기사를 실었다. 영국 언론의 시각을 통해 포드차의 몰락에서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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