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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론화

Ⅲ. 일상과 죽음에서의 본래성으로서의 노년 실존 - 최일남의 경우 72

1) 죽음의 공론화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배제되고 은폐되어 있다. 사람들은 죽음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부정되고 회피된다. 「사진」노년의 1인칭 서 술자는 공기업 부설연구소 이사직을 끝내고 은퇴한 인물이다. 그와 친구가 지적 하는 것도 공동세계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금기시 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1인칭 서술자는 장례식장에서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드물며 어쩌다가 이야기

될 뿐이다.

장소조차 빌리기 어려울 걸세. 재수 없이 죽음을 가지고 따따부따하기냐면서 건물주 가 당장 밀어낼 게 뻔해. 부정탄다고 소금이나 뿌리지 않으면 다행일걸. 터부 중의 터 부야 그건.(최일남, 「사진」, 아주 느린 시간 , 문학동네, 2002, 123쪽)

아침마다 그렇게 신문 부음란을 공들여 보면서 그가 매번 느끼는 일이 몇 가지 있 다. 우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이승을 뜬 사람들의 익명성이다. 하나같이 고인의 이름이 없다. 돌아가신 이가 아무리 무명의 보통인이기로 너무한다고 여긴다. 정작 당사자의 이름은 세속적으로 출세한 아들이나 사위들의 ‘부친상’이라든가 ‘빙모상’이라는 표현에 묻혀 간곳없다. 아들의 지위가 시원치 않으면 고명한 사위가 상주를 타고 넘는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어쩐다는 격으로 잘난 자손들이 네다섯씩 줄줄이 등장하여 문상객을 부른다.(「사진」, 110-111쪽)

당사자의 생전 삶이나 죽음 자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뿐더러 누가 자진해서 라도 일러주지 않는다. 오직 체면이 시켜 발걸음을 하고, 유족과 눈도장을 찍기 위해 틈을 낸다고 볼 수 있다.(「사진」, 114쪽)

돌이킬 것도 없이 엔간히 찾아다녔다. 서울 장안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영안실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할 판이다. 이 병원은 어떻고 저 병원은 저떻고를 눈감고도 훤히 그릴 수 있다. 간간이 단독 주택이나 아파트 마당에 친 차일도 들추고 들어섰다. 아무 려나 갈수록 영안실 중심으로 장사를 지낸다. 병원이 싫어 자기 집에서 치르기를 원하 기도 하는데 그것만은 죽은 사람 소원대로 풀어주기 어렵다. 상주 쪽과 손님의 편의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사진」, 133쪽)

현대인들은 장례의 절차를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상조회사가 장례 과정 을 대신해서 처리한다. 따라서 유족은 장례과정에서 소외되기 마련이다. 지금의 장례 과정은 죽음과 죽은 자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생각하기보다는 사회적 지위 와 체면에 따라 참여하는 의례적 과정이 되기 쉽다. 장례 과정은 고인에 대한 추 모와 그 의미도 충분히 개진되지 못하고 고인과 죽음을 생각하는 계기도 제공하 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사회에서는 죽음이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과 마을 전체가 관여된 사건이 다. 예전에는 일반적으로 임종의 순간을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

데 맞이했다. 현대의 경우 대개 임종은 병원에서 몇몇 사람들에 둘러싸여 맞이하 게 되고 장례도 집에서 하지 않는다. 아파트의 주거환경도 집에서의 장례를 불가 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현대인들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죽음을 맞이 한다. 현대인들은 죽음을 사유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몽테뉴는 죽음과 친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 누구도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삶을 대가로 치르며 죽음으로 나아 가는 존재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좋은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과 대화 하고 성찰해야만 한다. 죽음의 사유를 통해 삶을 배우게 되고 삶을 열심히 살게 된다. ‘죽음 학습’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에 익숙해지며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다.91)

“아무리 죽을 때는 혼자라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아. 언제 죽음에 대비한 연습이 있 었어야지. 서양에는 그런 종류의 시설이 있다대. 들었나? 죽는 자와 산 자, 또는 죽음 을 앞둔 자들끼리 죽음을 테마로 실컷 떠들고 토론하는 곳이 있다 이거야.”

“들은 것 같애. 자기 사망 기사를 제 손으로 쓰게 하는 둥, 두려움을 잊고 죽음과 친 해지도록 꾸민 프로그램이 여러 가지라지 아마. 객관적으로 본 나의 업적,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거나 슬펐던 일, 제일 다정하게 지낸 친구와 주위 사람들, 남은 제한시간을 어떻게 유익하게 보낼까 등등에 대해.”(「사진」, 130쪽)

무엇보다도 자신의 나이가 지시하는 준비태세의 너무나 허술함에 이따금 절망하는 것이 문제다. 하다 보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찰리 브라운 같은 미국 만화의 꼬맹이도 때로는 칠십 노인이나 읊조릴 죽음을 입설에 올리거늘, 내가 이래서 되랴 마음이 급해 지는 것이다.(「사진」, 134쪽)

아침 화두로는 칙칙하다. 썩 어울리지 않거늘 민 선생 부부에게는 흔한 일이다. 헐거 운 말투는 어두운 중압감의 또다른 반사다. 하여 죽음을 한없이 가벼운 존재로 끌어내 려 계제만 닿으면 찧고 까분다. 옛날 계집아이들이 공기받기놀이를 하듯 띄워올려 경 망을 떤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진정코 도통한 경지에 들어 그러는 건지, 언젠가는 찾아올 사멸 에 적응하기 위해 연습용 가사(假死) 체험을 입에나마 미리미리 품고 살자는 건지 겨 냥이 안 선다. 경기가 바닥을 치면 상승하는 길밖에 없다는 이치를 막다른 나이에 빗 91) 고봉만, 「몽테뉴, 죽음으로 삶을 성찰하다」, 노년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 충북대학교 출판부,

2016, 172-173쪽.

대어 뒤집은 호기일까. 소극적이기보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죽음에 대처하여 어언간 친 해지자는 심보일 수도 있겠다.(「아주 느린 시간」, 54-55쪽)

「사진」과 「아주 느린 시간」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론화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사회적으로 죽음에 대해 충분히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비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어려서부 터 하는 것이 좋다. 죽음 이야기는 삶에 대한 교육이 되기 때문이다.92) 죽음 이 야기를 무겁게 할 필요는 없다. 「아주 느린 시간」의 민 선생 부부도 수시로 죽음 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일상에서의 죽음에 대한 대화는 죽음과 친숙해지는 효과 적인 방법이다. 죽음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간단하게 넘어 설 수 있게 한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금기시 된다는 것이다. 장례 과정은 죽음 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하기 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따라 참여하는 의례적 과정이 되기 쉽다. 「사진」에서는 좋은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과 대화하고 성 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 학습’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에 익숙해지 며 죽음을 대비하는 것이다. 「사진」과 「아주 느린 시간」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론 화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죽음을 대비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수시로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