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일상과 죽음에서의 본래성으로서의 노년 실존 - 최일남의 경우 72
2) 죽음에의 선구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 zum Tode)이다. 현존재의 “끝남은 현존재 의 끝에-와-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종말을 향한 존재인 것이다.”93) ‘죽음을 향하는 존재’는 죽음에 대해 일정한 태도를 갖는다. 현존재는 죽음에의 선구를 통해 본래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92) 최준식, 죽음학 개론 ,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3, 94쪽.
93) 마르틴 하이데거, 앞의 책, 329쪽.
현존재가 죽음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다. 우선 죽음에 대한 사유는 죽음을 앞 둔 당사자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진」에서의 1인칭 서술자는 부친의 죽음을 목격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거나 투병 중인 친구 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죽음을 깊이 사유하게 된다. 부친을 여읜 친구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죽음의 공포에 관한 것이다. 개별자는 죽음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
“아버님 역시 무서웠던 거야.”
“뭐가?”
“죽음이.”
“그으래? 앞뒤가 안 맞는데.”
“그런 분이 어째서 이승의 흔한 법도를 훌쩍 뛰어넘었느냐, 이런 의문인가.”
“음.”
“무서운 감정의 또다른 분식이야.”
“갈수록 헷갈리는군.”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도, 아무리 이 세상 인간사에 도통한 현인도, 이거다 하고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게 죽음 아닌가. 관념적으로야 무슨 말을 못 해. 너무 넘쳐 걱정일 지경이지. 그러나 정작 죽음과 맞닥뜨리면 까짓 지식이 무슨 소용인가. 눈곱만 큼도 도움이 안 돼. 자신이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나락처럼 캄캄한 것이 죽음이라고 했을 때, 천만년 전이나 오늘이나 저마다 최초이자 최후의 실험자로 떠밀릴밖에 없다 고 했을 때, 어느 누가 본능적인 공포에 휘말리지 않겠나. 과정이 아니라 죽음 자체에 대해서.”(「사진」, 120-121쪽)
요전에 만난 어떤 노인은 그러대. 자기는 매일밤 잠자리에 들 때마다 혼자 죽음 연 습을 한대. 이대로 가뭇없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말이야. 죽을 병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그랬어. 아침에 멀쩡한 모습을 거울로 대하고는 간밤에 무사했구나. 그렇다면 오늘은 열심히 살아야겠구나…….(「사진」, 123쪽)
개별자는 죽음의 공포를 회피할 수도 있으며 정면으로 응시할 수도 있다. 친구 는 아버지가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말한다. 화장 후 수장을 하라는 부친의 유언은 실상 죽음을 회피하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거울을 보면서 죽음을 응시하는 노인도 있다. 그 노인은 매일 죽음 연습을 통해 삶의 의 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각자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죽음 은 자기 자신에게는 아직 임박해 있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죽음은 나에게 해 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에게나 해당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세상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는 죽음은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일 어나지 않는 사건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94)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도 죽음을 응시할 필요가 있다. 췌장암 선고를 받 은 친구는 죽음 수용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암 환자의 치료 과정은 홀로 감당해 야만 하는 힘든 과정이다. 독한 약물의 사용과 부작용은 환자를 힘들게 한다. 힘 든 치료의 과정에만 매달리면 다른 생각들을 할 여유가 없어진다. 그러다가 갑자 기 상태가 나빠지면 의식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중환자실로 보내지게 되는 것 이다.
“내가 내 죽음을 허락하기로 했다네.”
“?”
허락 안하면 어쩔 것이여. 눙치고 싶었으나 그런 때는 제풀에 이야기를 끌어가도록 잠자코 있는 게 낫다고 여겼다.
(…)
“옳거니. 그런데 우리는 없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감당해야 한다구. 얼마나 외 롭고 힘들겠어. 최근의 내 체험에 의하면 그중에서도 가장 버거운 것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야. 즉 내 안에 있는 죽음과 육신의 치열한 전쟁이라구.
(…)
“알고 보면 헛짓이지. 병세가 악화되어 더 견디지 못할 형편이 되면 둘 다 한순간에 꼴깍 가는 거니까. 웃자고 해보는 소린데 거기까지 가는 기간이랄까 과도기적 프로세 스가 문제는 문제야. 물론 처음부터 백기를 들면 곤란해, 말이 이상하지만 죽도록 싸워 야지. 그러나 도저히 가망이 없으면 빨리 결단을 내릴수록 좋다고 생각하네.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잖아. 마냥 미적거리다가가는 주변 정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지저분 한 잔재들을 남은 사람들에게 떠맡길 염려가 많다구. 목숨이 붙어 있는 사이에 그거라 도 청소하겠다는 의지를 꼭 사치스럽게만 볼 수 있을까.” (「사진」, 130쪽)
친구의 죽음 수용은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과정이다. 정신이 온전하고 시
94) 박찬국, 앞의 책, 335-346쪽.
간적 여유가 있을 때 신변 정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은 후 자신이 정리해야 할 것을 남들에게 떠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자가 자기 자신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배려의 방식이다. 자신이 잘 살아 왔는지 그동안 타인을 잘 배려했는지도 되짚어 보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한 다. 정신이 온전할 때 가족들과도 감정적으로 정리를 하고 이별을 해야 한다. 의 미 없는 연명 치료에 매달리다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 서는 안 된다. 삶에서의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95)
「사진」의 1인칭 서술자는 친구 부친의 죽음 이야기와 친구의 투병 과정의 이 야기를 듣고서는 자신도 죽음 준비를 한다. 그의 죽음 준비는 사진을 포함하여 그동안 모아온 각종 감사패 등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는 젊었을 때의 사진을 통 해 친구와의 우정을 떠올리기도 하고, 해외 근무 시의 향수를 떠올리기도 하며, 각종 기념패 들을 정리하면서 감정도 함께 정리한다. 그는 아내 몰래 이러한 모 든 것들을 처리한다.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언제 닥치게 될지는 불확실하다. 이러한 사실이 죽음을 끝없이 연기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죽지 만 나는 아직 안 죽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심장병 을 앓고 있던 그도 갑자기 쇼크를 일으키고 직접 병원 응급실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제 발로 들어와 입원했다는 겁니까.”
“그랬나 봐요.”
“웃기는 친굴세.”
“잘했지요. 집에서 고스란히 당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하마터면…… 어쩐지 내 꿈자 리가 사납더라니.”
“살겠다고 제법 기민하게 굴었네. 허허.”
알 만했다. 여자는 아내고 남자는 즈이 아버지를 화장한 친구다. 대화하는 두 남녀의 정체를 확인하자 그는 더욱 눈을 뜨기가 싫었다.
(…)
‘잘 논다. 요것들.’
그는 감은 눈에 힘을 주면서 꽤 오래 전에 경험했던 한 병실 풍경을 떠올렸다. 의식 을 회복하지 못한 채 누워 있는 선배의 병상 앞에서 이복동생이라는 자가 자꾸 뇌까렸 95) 최준식, 앞의 책, 49쪽.
다. 앞으로 일 주일밖에 못 산다고 의사가 진단했다고 말이다. 후사가 없는 선배는 재 산이 상당했는데, 그는 눈을 조용히 감고 있는 선배가 들을 것 다 들으면서도 이것들 이 어쩌는가 보자고 무의식을 가장하는 게 아닌가 싶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실상 선배는 그 뒤로 의식을 되찾아 얼마간을 더 살았다. 머지않아 사망하기는 했지만.
“가보세요.”
“아닙니다. 이 친구 깨어나거든 갈랍니다.”
흫. 그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눈을 뜰까 말까. 이대로 죽어줄까 말까. 쉬 결론을 내리 지 못했다.(「사진」, 139-140쪽)
‘그’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느낀다. ‘그’는 죽음의 가능 성에 노정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에의 선구’는 죽음의 가능성이 노정되도록 죽음 에 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의 질병은 죽음에의 선구에 대한 계기가 된다.
‘죽음에의 선구’는 죽음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죽음이 언제 어떠 한 방식으로 다가올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도 아니다. 죽음에의 선구는 죽 음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96) 그는 죽음을 맞이하던 선배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 지운다. 그는 죽음에의 선구를 통해 세상 사람의 말을 잡담으로 여기게 되며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97)
최일남의 「사진」의 1인칭 서술자는 현대의 죽음과 장례 문화에 대한 생각들을 밝히면서 자신의 관심 사항이 죽음임을 밝히면서 시작한다. 지식인인 서술자는 친구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자신도 죽음 준비를 한다. 이 작품은 죽음에 대한 담론에서 시작하여 죽음 이야기를 듣고 죽음 체험 을 한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서사구조 자체가 서술자의 죽음에 대한 관 념에서 시작하여 죽음 체험이라는 죽음 준비 과정을 보여준다.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노년은 죽음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 시기이
96) 박찬국, 앞의 책, 344쪽.
97)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 재에게 ‘그들’-자신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보이며 현존재를, 배려하는 심려에 일차적으로 의존 하지 않은 채,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 ‘그들’의 환
97)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 재에게 ‘그들’-자신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보이며 현존재를, 배려하는 심려에 일차적으로 의존 하지 않은 채,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 ‘그들’의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