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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노인의 경제적 갈등과 조손 관계

Ⅵ. 생명의 연속과 가능성으로서의 노년 실존 - 한승원의 경우

1) 농촌 노인의 경제적 갈등과 조손 관계

한승원 노년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농어촌이다. 그의 소설에는 농어촌 지역 노 인들의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작가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농어촌 지역에서 평생을 보낸 인물들이다. 농 어촌 지역의 노인들은 홀로 독립가구를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젊은 자식 부부와 사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농촌 지역의 노인들은 핵 가족 가구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데, 그 이유는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농촌의 젊은이가 대규모로 도시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농촌 지역의 핵가구는 직계가족가 구가 보편적이었으나 지금은 노인 독립가구나 조손가구가 많다.

잠수 거미 에 연속으로 실려 있는 「수방청의 소」, 「저 길로 가면 율산이지라 우?」, 「그러나 다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는 김명윤 노인의 가족 이야기이다. 그 중에 「수방청의 소」, 「저 길로 가면 율산이지라우?」는 3인칭 서술로, 「그러나 다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1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다. 김명윤은 여든을 앞두고 있는 노인인데, 노모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인구의 고령화에 따라 노인이 노인을 부양하는 경우이다.

한승원 노년소설에는 삼대가 함께 살고 있는 가구 형태는 나타나지 않는다. 현

재의 노인들은 유년기 시절 삼대가 함께 사는 직계 가족의 형태를 경험하였으나 지금은 그러한 가족 형태는 드물다. 대가족을 경험한 노인들의 사고방식은 마음 씀이 자기 자신인 개인에 있기보다는 가족 구성원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은 가족 과의 관계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명윤의 경우 우선적 으로 가족 구성원 중 노모를 걱정하게 된다. 그는 아흔여덟 살 노모가 험한 일없 이 삶을 마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는 노모의 편안한 죽음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도 노인인 만큼 같은 처지로서의 염려이다.

그는 그 노모가 뒤집어쓴 두꺼운 세월의 너울과 깊고 굵은 무늬가 문득 미워지곤 했 다. 그것은, 그가 가슴이 답답하고 부정맥이 느껴지거나 감기 몸살로 말미암아 온몸이 천근만근일 때 노모의 질긴 생명력에 대하여 일어나는 가엾으면서도 가증스러운 염증 이었다. 저 노인이 나보다 더 오래 살면 어찌할까. 나 없어진 다음에는 누가 저 노인을 불쌍히 보고 보살펴 줄까. 내가 건강했을 때 돌아가셔야만 깨끗하고 귀한 송장이 될 터인데.(「수방청의 소」, 10-11쪽)

농촌에 살고 있는 부모들은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취직하 기를 바란다. 김명윤의 큰아들도 대기업에 취직하여 부모의 자랑이 되기도 하였 다. 큰아들은 경제 위기 시 직장을 잃고 가족은 파괴되기에 이른다. 「수방청의 소」, 「저 길로 가면 율산이지라우?」는 김명윤과 큰아들 사이의 경제적인 갈등이 주 내용을 이룬다. 김명윤은 자기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그는 가난 한 집에서 태어나서 남은 형제의 뒷바라지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시작한 인물이다. 그가 지금은 우사로 사용하고 있는 집도 그의 선친이 불모지를 개간한 땅에다 지은 건물이다. 그는 선친이 일구어놓은 땅을 떠나지 않고 후손들 을 돌보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직 당하고 폐인이 된 큰아들은 아 버지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나 거절을 당하고는 아버지가 기르고 있던 소를 훔쳐 팔아버린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잘 보소이, 잉? 내가 그 나쁜 새끼를 평생토록 감옥 속에다가 콱 처박어 놓을 것이여. 먼 말인지 알어? 잉?」

그는 울분을 내뿜고 나서 다시 이를 갈았다. 그의 가슴에서는 아들에 대한 적의가

들끓었다. 도둑맞은 것을 신고하면서, 그의 소를 도둑질해 간 자를 붙잡으려면 광주 금 남로 한복판의 증권사 객장들을 더듬으라고 말해 줄 참이었다. 그러면 그놈은 이날 한 낮 안에 당장 잡혀 들어갈 것이다. 혹시 경찰에서, 도둑이 그의 아들임을 감안하여 사 정을 둘지 모르므로 아예 거짓말을 해줄 참이었다. 내 소를 도둑질해 간 그 자식은 사 실에 있어서 내 진짜 아들이 아니오. 여편네가 데리고 온 가봉자일 뿐, 나하고는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놈인께 혹독하게 잡아넣어 주시오.

「그 새끼하고 나하고는 오늘 아침으로 해서 벌써 천륜이 끝나 뿌렀네.」

그는 선언하듯이 말하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의 뒤통수를 향해 노모가 말했다.

「한 번 잃어뿐 것은 잃어뿐 것인디야잉, 새끼까지 병신 맨들면 안된대이, 잉? 장차에 느그 아부지, 어무니는 물론이고, 느그들 둘기제사에 물 떠놓을 새끼 아니냐? 소는 또 키우면 되는 것이제만은잉, 팔자 한번 병신 된 자식 고쳐 놓기는 참말로 에럽대이? 이 대 삼대가 지나도 못 고쳐 놓는 법이여. 알겄냐? 잉?」

(…)

「나는 죽어 자빠져도 그 새끼한테 물 한 방울 안 얻어묵을 것이오. 그 새끼 멱살을 잡어끌고 지옥을 떠돌아 댕길 것인디, 내가 제삿밥 한 그릇 얻어 처 묵을라고 그 멀고 먼 저승에서 여기까장 미쳤다고 오겄소? 어림 반푼어치도 없소.」(「저 길로 가면 율산 이지라우?」, 63-64쪽)

김명윤이 큰아들의 행위에 대한 감정과 노모의 손자에 대한 판단은 다르다. 노 모는 손자의 잘잘못을 떠나 손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손자가 아무 리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손자는 김씨 가문의 자손인 것이다. 백세를 앞두고 이 승과 저승을 오고가며 조상을 대하는 노모에게 손자는 연속하여 이어지는 생명 인 것이다. 생명은 이번 생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긴 흐름이기 때문에 이승 의 일들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반면에 김명윤의 자식에 대한 감정은 적의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더 이상 자식을 자랑스러워하거나 자식에게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식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경찰서에 자식 을 신고하러 갔다가 포기하고 되돌아 나온다. 그는 손자의 뒷바라지와 미래를 생 각하며 새롭게 도사견을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아들의 배반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그는 손자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미래를 설 계한다. 김명윤의 생의 의미도 노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명윤은 생명의 연속 이라는 관점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한승원 노년소설에는 조부모와 손자녀로 구성된 가족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1997년 경제 위기로 인한 실업자의 양산과 소득의 감소로 가족 해체 가 촉진된 점과 관련이 있다. 소득이 감소하고 생활고가 가중되면서 편부모 가정 도 해체되어 조부모의 보호를 받는 조부모-손자녀 가족이 증가하게 되었기 때문 이다. 부모의 이혼이나, 신체 및 정신질환, 알코올 중독 등도 조부모의 보호를 받 는 조부모-손자녀 가족 증가의 요인이다. 「감 따는 날의 연통」, 「버들댁」은 조모 와 손자녀 이대로 구성된 가족의 이야기이다. 「감 따는 날의 연통」에서는 초등학 교 육학년의 손자를 키우는 들머리 할머니가 등장한다. 이 소설의 1인칭 서술자 는 작가이면서 동네 할머니의 관찰자이면서 손자 키우기의 어려움에 동감하는 인물이다. 손자를 양육하게 된 이유는 자식이 사업에 실패하고 친구들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다. 어린 손자가 친구에게 두들겨 맞고 경찰로 이송되어 가는 아버지 를 바라본다.

누가 말을 해주었는지 들머리 외딴집의 아이가 달려왔다. 그들은 아이를 상관하지 않고 그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의 입술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아이가 영진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울부짖었다.

「울 아버지 용서해 주시오.」

영진이 흘긋 아이의 얼굴을 보더니 공격을 멈추었다. 아이는 발길질을 하는 장수의 다리를 붙잡았다. 장수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이 새끼 너는 멋이냐?」 하고 주먹을 번쩍 치켜들어 치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는 그 주먹을 피하려 하지 않고 장수 의 무릎을 붙잡은 채 머리를 자기 가슴에 묻었다. 장수는 아이를 떼어 내고 공격을 계 속하려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하아, 하고 분을 참았다.

「이 새끼, 느그 새끼로 봐서 이 자리에서는 이쯤 해둔다이.」

그때 할머니가 사력을 다해 어기적어기적 걸어와서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얼싸안고 몸부림쳤다. 오래지 않아 경찰 백차가 달려왔고 그와 빚쟁이들이 그 차를 타고 사라졌 다.

가겟집 남자가 산모퉁이 저쪽으로 사라지는 백차 꽁무니의 빨간불을 바라보다가 나 에게 말했다.

「저 자식 아주 철저하게 운이 없는 놈이오. 저놈이 양식장을 했다 하면은 태풍이 불 어 뿔고 적조가 일어나 뿌러라우. 또 괴기를 조깐 잘 키워 놨다 하면은 비브리오다 멋 이다 해갖고 괴기가 똥금이 되어 뿔고. 그리고 차 운전을 했다 하면은 사람을 치어 뿔

고 돈 물어 주고…… 선조들 멧등을 잘못 써서 그러는지 어쩌는지…… 이 근동에서 양 식장 해갖고 저놈같이 속속들이 망한 놈은 없을 것이구먼이라우. 혼자만 망했으면은 얼마나 좋게라우. 빚 보증 서준 친구들 신세까지 죄다 망쳐 놨소. 저놈이 이런 연줄 저

고 돈 물어 주고…… 선조들 멧등을 잘못 써서 그러는지 어쩌는지…… 이 근동에서 양 식장 해갖고 저놈같이 속속들이 망한 놈은 없을 것이구먼이라우. 혼자만 망했으면은 얼마나 좋게라우. 빚 보증 서준 친구들 신세까지 죄다 망쳐 놨소. 저놈이 이런 연줄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