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개별자의 자기 회복으로서의 노년 실존 - 박완서의 경우
1) 운명과 책임
현존재는 탄생과 죽음 사이 즉 생의 연관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현존재의 펼쳐짐의 동성을 현존재의 생기라고 한다. 현존재의 생기가 현존재의 역사성을 형성한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박완서가 사망하기 한 해 전에 발표한 작품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70대 후반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에서 서술되는 중요한 사건들은 작가 연보와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이 소설은 기 억이 없는 현존재의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의 현존재의 역사성을 서술하고 있다.
이 소설은 화자와 화자 자신의 주변의 이야기가 주 내용이고 대화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1인칭 서술자는 주로 기억의 서술을 통해 자신의 지나간 삶을 엮어내고 해석한다.
현존재의 탄생은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만은 아닌 것이다. 현존재는 현존재의 존재에 있어서 항상 탄생이 수반되는 식으로 실존한다. 이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흐릿한 사진과 주변 사 람들의 전언으로 엮어나간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라고 단언 하면서 시작하였으나 아버지에게 재롱을 피우던 장면을 좋아한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서술은 주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상
상적으로 다시 기억된 예가 될 것이다.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주위 사람 들의 이야기와 합리적인 추론 등으로 퍼즐을 맞추듯이 엮어진다. 그녀는 기억, 전언, 추론 등으로 유년 시절을 복원한다.
고모가 시집간 후에는 작은 엄마가 나를 업고 다니길 좋아했다. 숙모는 시집온 지 십 년이 지난 후에 첫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그전에는 나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지 않았 나 싶다. 숙모가 마루 끝에서 ‘어부바’ 하고 등을 들이대면 나는 업히기 싫다고 마루 구석까지 도망치던 생각이 어렴풋이 나는 걸 보면 꽤 클 때까지 숙모에게 업혀다녔던 것 같다. 숙모가 나중에 술회하기로는 이웃에 마실을 가고 싶어도 맨몸으로 가기가 멋 쩍어서 나를 달고 가려고 꼬셔도 내가 막무가내 그렇게 비싸게 굴었다는 것이었다. 숙 모를 애먹인 얘기가 또하나 있는데, 그때도 나는 숙모 등에 업혀 있었다고 한다. 곧잘 업혀 있던 아이가 별안간 하늘을 가리키며 무섭다고 몹시 울었다고 한다. 아이가 가리 키는 쪽 하늘을 보니 마침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날의 노을이 좀 유별나게 낭 자하긴 했어도 울 정도로 무섭진 않았다고 한다. 천둥번개라면 모를까, 하늘이 어떻게 아이를 무섭게 할 수 있겠는가. (…) 온갖 곡예를 다 부리면서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사 이에 노을은 사위고 아이는 잠든 것으로 그 이야기는 끝난다.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렇 게 나에게는 영원히 결론 없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 아이에게 그렇게 크게 겁을 준 것 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후 나이를 많이 먹은 오늘날에도 유난히 곱고 낭자한 저녁 노을을 볼 때면 내 의식이 기억 이전의 슬픔이나 무섬증에 가닿을 듯한 안타까움에 헛 되이 긴긴 시간의 심연 속으로 자맥질할 때가 있다.(「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7 , 문학동네, 2013, 339-340쪽)
현존재의 마음씀이 과거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유년 시 절의 사건은 ‘최초’라는 단어로 의미화 된다. “나의 최초의 자의식이었다”라든지
“내가 최초로 감지한 세련의 예감이 아니었을까”는 모두 자신의 존재의 인지에 대한 의미화이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현존재는 지금의 ‘나’에게 해명이 안 되는
‘나’의 징후의 기원을 과거에서 추론한다. 그녀는 자신도 잘 모르는 과거의 ‘나’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해에 다가가는 것이다.
현존재의 유년기 시절의 회상은 농촌에서의 체험과 도시에서의 적응 과정이 주 내용을 이룬다. 그녀의 유년 시절에는 주목할 만한 특별한 사건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서울로 이사하기 전의 고향에 대한 경험은 자신에게 많은 애정을 주었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도시에서의 체험은 학교와 학업의 적응
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주로 객관적인 사실과 서술 로 이루어진다. 그녀의 경험은 특별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사건들로 자신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작가에게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 유년기 시절은 학 업 성적이 향상되는 것과 서울에서 집을 마련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유년 기 시절은 성장과 더불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가는 자신의 모습이 주로 서술 된다.
현존재는 자신의 유년기 경험을 문화적인 맥락 속에 서술하고 있다. 그녀에게 고향에 대한 기억은 도시 생활과의 대비에서 이해된다. 그녀는 도시/농촌 또는 새로운 것/옛날 것이라는 해석의 틀을 가지고 많은 부분 서술한다. 출타 후 집으 로 돌아오는 할아버지는 외부 세계를 소녀에게 전달한다. 과거의 인습을 가진 할 아버지는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는 어머니와 대립된다. 도시로 온 그녀가 방학 을 기다리는 장면은 이러한 대립이 잘 드러나 있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여름 겨울 두 차례의 긴 방학에 돌아갈 수 있는 고향집이 있 다는 것처럼 도시와 학교에서의 소외감과 열등감을 위로받을 수 있는 큰 힘은 없었다.
방학을 앞두고 시작되는 더위 추위가 다 반가웠다. 시골집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 거렸다. 그 가슴 울렁거림은 나만의 것이다. 아무도 이 기분을 모르리라는 건 촌뜨기의 유일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서울 아이들이 이 긴긴 여름과 겨울을 석탄가루 분분한 불 모지에서 보낼 생각을 하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똘방똘방 잘난 서울 아이들을 불 쌍하게 여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만 해도 보통으로 사는 일반 시민들에게 바캉스니 여름휴가니 하는 개념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방학은 아이들에게 학교를 안 가는 날들일 뿐이고 부모에게는 아이들이 거치적대는 동안일 뿐이었다. 엄마는 귀향을 앞두고 내 새 옷을 장만했다. 서울서 딸이 시골뜨기티 나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엔 신 경을 안 쓰는 엄마가 시골 가서는 딸이 서울 사람처럼 보이길 바랐다. 엄마의 소박한 금의환향의 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골집에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사랑에서 나 를 학수고대하는. 나는 할아버지 품에 왈칵 안기면서 내가 돌아올 고향이 있어서 서울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처럼 할아버지도 서울 손녀를 기다리는 낙으로 앉은뱅이의 나날을 견딜 수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내가 할아버지 두루마기 자락에서 대처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할아버지도 내 단발머리 정수리에 당신 코를 파묻고 도시의 냄새 를 맡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고향집을 지키던 숙부한테서도 아이가 생겨 내가 언 니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귀향해서 맛볼 수 있는 새로운 기쁨이었다.(「석양을 등 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354-355쪽)
그녀는 인생의 전환기적 사건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그녀는 문단에 등단함으로 써 작가로 변신하게 된다. 운명(Schicksal)은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이다. 그녀는
‘증언의 욕구’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그녀는 전쟁에서 목격하였던 가 족의 비극에 대해서 증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운명은 현존재가 스 스로 자기 자신을 인수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운명의 자각을 통해 자기 의 본래적 존재 가능성을 선택한다. 그녀는 자신의 초기 소설을 가족사의 반복이 아니라 반전 소설로 읽히기를 소망한다고 서술한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 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훗날 나타난 통계숫자만 봐도 그렇다.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 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 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 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 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내 자식이 딴 애들보다 덜 똘방똘방하고 어리숙해 보일수록 사무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석양을 등에 지고
훗날 나타난 통계숫자만 봐도 그렇다.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 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 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 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 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내 자식이 딴 애들보다 덜 똘방똘방하고 어리숙해 보일수록 사무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석양을 등에 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