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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일상성과 타자와의 관계

Ⅲ. 일상과 죽음에서의 본래성으로서의 노년 실존 - 최일남의 경우 72

2. 노년의 일상성과 타자와의 관계

노년의 시기에 활동과 계획은 축소된다. 노인들은 새로운 활동을 하기보다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기를 좋아한다. 세상에 영향력이 사라진 노인들은 과거의 직함이나 명예에 머물러 지내기를 좋아한다. 노년의 시기는 자신의 인생에서 잘 못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최일남의 「아주 느린 시간」에는 도시 도인들의 자기 자신 또는 타인과의 관계의 모습과 일상의 모습을 잘 형상 화하였다. 이 작품에서 권력층이나 서민들의 일상에서 본래적인 삶 또는 비본래 적 삶을 사는 노년의 모습을 분석하겠다.

1) 신 노년세대83)의 출현과 새로운 생활방식

83) “신 노년세대는 뉴 에이징이라 해서 시대적, 연령대적 특성을 배경으로 기존 노년세대에 비해 능 동적, 독립적 역할을 부여받은 세대이다, 또한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 증가 등으로 자 녀에 의지하기 보다는 독립된 생활을 즐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둘째 역연령 구분으로는 다양한 학 자의 견해가 있으나, 학문상으로 보통 베이비 부머(1955-1963년생) 또는 연소노인(1944-1954년

최일남의 소설에서는 은퇴한 도시 남성 노인을 서사의 중심에 두고 노년의 일 상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노년소설은 오늘날의 노인 세대가 이전과는 전 혀 다른 세대임을 보여준다. 「아주 느린 시간」은 도시 노인의 일상을 담은 몇 가 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서울의 위성도시인 당산을 배경으로 중 산층 노인들의 일상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신도시에 거주하는 노인의 라이프 스 타일은 기존의 노인에 대한 생활 방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건 그렇다 치자. 나이 들수록 도시의 획일적인 장치에 진저리치기 쉬운 노년들이 어째서 전래의 자연 회귀 취향을 마다하고 당산행 버스에 다투어 손을 들었을까? 의아 할 터인데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몸에 밴 도시화 체질을 먼저 들 수 있다. 공포에 가깝도록 몰아붙이는 정보화 진전이 지역간 거리나 차등을 무의미하게 만든 사정이 그 다음이다. 시골서 태어난 공통점이야 어떻든, 전원에의 유턴으로 생의 마지막 단계를 꺼나가기에는 후천적으로 길들여진 그들의 도시인 기질이 마침내 견고하다. 노약이 당 산에서 제법 잘 어울리는 까닭이 여기 있다.(최일남, 「아주 느린 시간」, 아주 느린 시 간 , 문학동네, 2002, 47쪽)

눈에 띄게 많은 노년층 또한 시골 당산을 어정거리던 예전의 노인네와 사뭇 다르다.

촘촘히 들어찬 건물더미들의 석회분 냄새를 하마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잘짜인 새내기 도시의 인상을 반영하듯 자못 신경을 쓴 매무시가 우선 단장하다. 어떻게 단정한고 하 니 한눈에 척 들어오는 유명 브랜드 차림으로 가지런하다. 아래위를 같은 색으로 쪽 갖추기보다는 서로 다른 콤비네이션으로 젊은 티를 풍기는 노신사가 적지 않다. 아니 거든 랄프로렌 와이셔츠를 받쳐입는달지 캘빈클라인 팬티로 몸의 펀더멘털 구조를 굳 히기 쉽다. 세리느 치마에 루이뷔통 핸드백을 든 여자 노인에 또한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입성의 어느 한 부분만이라도 세련되게 다듬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아주 느린 시간」, 43-44쪽)

신도시의 노인은 젊어서 고향을 떠나고 서울에서의 도회지 삶을 살다가 은퇴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도시 인근 전원주택에서 거 주하는 것만을 선호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경우가 드물다. 은퇴한 후에도

생)이 포함된다.”(정문미‧원영신, 「신 노년 세대에 대한 고찰」, 글로벌시니어건강증진개발 논문집 1(2), 2011, 49쪽) 이 논문에서는 신 노년세대가 기존 노년 세대와 사고와 생활 방식에 있어서 다 르다는 차이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노인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여 적응하는 것보다는 익숙한 환경에서 안정적으 로 지내려고 한다.84) 신 노년 세대는 한국 노인들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빠르게 바꾸고 있다. 그들은 기존 노년 세대에 비해 월등히 높은 교육수준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노후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회가 제공하 는 상품과 서비스를 무조건 수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욕구에 맞게 취사선택한다.

또한 신 노년 세대는 자신의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젊은이처럼 행동하고 싶어 하는 연소화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며, 가족보다는 자신을 더 중요 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85)

「아주 느린 시간」에서의 3인칭의 서술자는 신도시 당산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노년 세대의 일상의 모습을 그리겠다고 서술한다. 「아주 느린 시간」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상경하여 도시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인물들이다.

따라서 노인들의 나이는 60대 후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아주 느린 시간」에 등 장하는 서술자는 도시 노인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엿보기’하겠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공기가 좀 더 맑다는 곳에서 그들은 내내 속내가 편할까. 긴긴 비행을 끝낸 안도감으로 활강중인 사람이나 또다시 이륙을 꿈꾸는 이를 불문하고 어떻게 일상을 꾸 려나가는지 궁금하다. 겉으로 느긋하고 안으로 마음이 외져 제각기 힘겨워하는 건 아 닐까. 아무래도 그런 낌새가 농후하다. 꽉 찬 나이가 나이인 만큼 더는 나갈 곳이 없는 젊은 땅에서, 생의‘끝내기’를 놓고 은연중 서서히 고심하는 듯하다.

그래서 엿보기로 한다.(「아주 느린 시간」, 47-48쪽)

어느 하늘 아래, 어느 땅 위엔들 이와 비슷한 사연이 없을까. 많고 많을 터이다. 죽 음이라는 편향된 시각을 버리고 전향적인 보고서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처에 이렇게 노인들이 몰려오는 장관을 아무튼 눈 크게 뜨고 보라.

해가 진 당산에 쟁반 같은 달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해는 내일도 어김없 이 뜬다. 그러므로 내일 아침이면 또 어디론가 길을 나설 그들의 행각을 기대해도 좋

84) 노인 세대가 전원생활을 선호한다는 연구결과들이 있으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3년마다 실시 하는 노인생활실태조사 등의 지표에 근거하면 아파트 거주 비율이 점차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전 원생활 형태는 감소하는 추세이다. 이는 노인들이 전원생활을 꿈꾸기는 하지만, 실제로 농촌 지역 에서 농사를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친화적인 환경에서 채소 등을 재배하면서 살고 자 하는 욕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구혜경‧조희경, 「50세 이상 장년층 세대 유형 별 주거선호 연구-베이비부머의 미래 주택 요구를 중심으로」, 소비자학연구 제27권 제2호, 2016, 79-80쪽)

85) 정문미‧원영신, 앞의 논문, 51쪽.

다.(「아주 느린 시간」, 73쪽)

「아주 느린 시간」에 등장하는 홍 선생은 아내와 사별한 독거노인이다. 그는 우 리가 보통 갖게 되는 구태의연한 노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비록 혼자이면서도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사회활동 을 하며 자신의 개성을 표현한다. 그는 혼자서 외식도 하고 영화도 보며, 부부 동반 모임에 가서는 남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인물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여겨지 는 노인과는 다른 생활방식을 갖고 있다. 그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레스토 랑을 찾아가 음식을 즐기면서 사별한 아내와 대화를 나눈다.

내가 방금 주문한 게 뭔 줄 알아. 설마 피자를 시켰겠느냐구? 물론이지. 그딴 피자나 파스타 류를 먹자고 먼 길을 찾아 왔을까. 있기야 있되 여기 것은 본바닥 솜씨 그대로 이기 때문에 다른 데 것과 월등히 차이가 나지만, 내가 오늘 주문한 것은 치즈 퐁뒤야.

끓는 치즈 속에 빵조각이라든가 고기를 꼬챙이에 끼워 적셔 먹지, 스위스에서는 올리 브 기름에 익혀 먹기도 한다는데 내 입맛에는 치즈가 낫더라구. 별미야.

혼자 식사하는 모습이 쓸쓸해 뵌다구? 몸에 붙은 습관인데 어때. 나는 이게 편해.

(…)

자식 자랑과 함께 아내 자랑을 팔불출의 으뜸으로 치는 우리나라에도 그런 책이 없 는 건 아닌데 앞으로는 더 예사로워야 돼. 망부석(望夫石)은 있어도 망부석(望婦石)은 없는 이치야 이해 못할 것도 없지. 밖과 안으로 나뉜 부부 구실이 엄연한데다 농경시 대 이래로 정립된 가부장 개념이 드센 탓 아니겠어. 하지만 누구는 그러대. 아내를 위 해 울던 자신을 위해 울던, 이제는 남자가 울어도 과히 흉잡히지 않을 시대가 되었노 라고. 더구나 우리 세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래.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피바람 부는 전쟁의 복판에서 목숨이야 있고 없고 맨날 부대꼈지. 끼니가 온데간데없는 민생고의 파도를 겨우 타고 넘는가 하자 이번에는 또 인터넷 바다에 자칫 익사할 지경이네. 어 쩌겠어. 이 질풍노도. 다들 힘들어해. 남의 눈엔 사치스러워 보일 나라고 다를까.(「아주 느린 시간」, 70-71쪽)

홍 선생은 신 노년 세대 노인이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어려움을 토 로한다. 그의 과거는 한국 현대사의 험난한 시대를 고스란히 몸으로 체험한 세대 이다.86) 그는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산업화 시대를 거쳐 지금은 정보화 시대에 살

86) 1945년 이전 출생한 “노인 세대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태어났고 아동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창씨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