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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선택과 사랑의 선택

Ⅱ. 개별자의 자기 회복으로서의 노년 실존 - 박완서의 경우

2) 선의 선택과 사랑의 선택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에서의 1인칭 서술자인 복희씨는 노년에 이르러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본래적인 자기 자신을 회복하려는 모 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19세에 시집와서 전실의 자식을 포함하여 오남매 모두 결 혼시키고 남편과 단 둘이 지내고 있다. 그녀는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어서 노후 걱정 없이 산다. 남편은 그녀보다 12살이나 많은데 중풍으로 거동을 잘 못하고 그녀의 병수발을 받고 있다.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 그녀는 남편과 단 둘이 있다 는 사실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아무도 없이 그와 나 단둘이 있다는 게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는 중풍에 걸려 오른 쪽 반신이 흐느적대고, 제 입안의 침도 잘 수습하지 못한다. 뭐라고 말을 하기는 하는 데 잘 알아들을 수 없이 버벌거린다. 나니까 대강 알아듣지 타인하고는 거의 의사소통 이 안 된다. (…) 반신이 무력해진 후에도 속에서 뻗치는 기운은 여전한 듯 말이 잘 안 돼 고함으로 변할 때는 유리창이 다 들들댄다. 원래 기운이 넘치는 장대한 남자가 늙 고 병들어 썩은 포대자루처럼 처져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측은하단 생각이 들기보다는 기괴한 환상에 시달린다. 저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거침없이 말할 때도 그의 생각은 주로 욕망에 관해서였다. 물욕, 식욕, 성욕이 남보다 강하고 그 걸 표현하는 데 망설임도 수치심도 없었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그런 욕망을 채울 길이 막혀버린 지금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은 무슨, 그의 속이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해도 불안하고, 텅 비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다 뭘 자꾸자꾸 쑤셔넣고 싶어하는 나는 더 불안하다. 내가 불안한 건 그가 아니라 나다.(박완서, 「친절한 복희씨」, 박완 서 단편소설 전집 7 , 문학동네, 2013, 224-225쪽)

그녀는 불안한데, 그 이유는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고 자신도 잘 모른다.

그녀가 단지 불안해하고 있다는 마음의 상태만이 제시되어 있다. 그녀가 불안해 하는 이유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남편이 무슨 생각 을 하는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알 고 보니 불안은 남편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나에 대한 불안이다. 결국 불안의 상 태는 남편에 의해 촉발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불안이 문제인 것이다. 그녀 가 불안해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호하다. 불안은 모호한 힘으로 그녀에 게 작동하고 있다. 불안은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개별자는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 타자와의 관계 맺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맺음이기도 하다. 불안은 개별자의 관계 맺음의 방식에 대한 징후를 보여준다.

불안의 모호성은 불안을 느끼는 개별자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즉 개별자는 어떤 확정되지 않고 부유하는 상태 속에 놓 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불확정적인 상황에서 개별자는 자기 자신에게 돌 아가 자기 자신과 마주서게 된다.62)

복희씨는 자기 자신을 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또한 귀한 존재이고자 노력하

62) 아르네 그뤤, 앞의 책, 48-49쪽.

는 인물이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란 인물이다. 그녀가 그 러한 인식과 의지를 갖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사건이 존재한다. 결혼 전 상경하여 올라와 가게에 취직하였을 때, 그녀는 그 집에서 기거 중인 한 대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 대학생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그 대학생과의 만남과 접속은 그 녀로 하여금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대학생의 인간적인 대우로 말미암아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응을 받게 된 것 이다.

그의 손길이 닿자 내 손등이 당장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길은 마치 몸을 돌보지 않고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린 누이동생의 거친 손등을 어루만지는 착한 오라비처럼 극진하고 순수했다. 그의 표정 또한 내가 보아온 어떤 남 자의 표정하고도 달랐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옷이나 음식 외에 표정에도 고급스러운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내 손이 가늘게 떨렸다. (…) 그렇게 목석같던 내 몸이 진저리 를 치면서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나라고 그때까지 왜 사랑을 꿈꿔보지 않았겠는가. 내 가 꿈꾼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거였다. 그러나 이건 몸의 문제였다 나는 내 몸이 한 그루의 박태기나무가 된 것 같았다. 봄날 느닷없이 딱딱한 가장귀에서 꽃자루도 없이 직접 진홍색 요요한 꽃을 뿜어내는 박태기나무, 헐벗은 우리 시골 마을에 있던 단 한 그루의 꽃나무였다 내 얼굴은 이미 박태기꽃 빛깔이 되어 있을 거였다. 나는 내 몸에 그런 황홀한 감각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이를 어쩌지. 그러나 박태기나무가 꽃 피 는 걸 누가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 대학생이 나를 염려해준다는 걸 알고부터 내 몸은 날로 귀해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신비체험이었다. 그후에도 밥상을 가지고 그 의 방애 드나들었지만 좀 나아진 손등을 보고 약을 잘 바르나보다고 안심하는 것 외엔 딴 얘기는 나누지 못했다, 내 몸이 자꾸만 귀해져서 천사처럼 날아오를 것 같은 황홀 감을 느낄 적도 있었지만 내 혼자 생각이었다.(「친절한 복희씨」, 239-240쪽)

그녀의 자기 인식의 변화는 몸에서 시작되었다. 그녀의 몸은 신체적 접속에서 촉발되어 새로운 몸으로 변용된다. 그녀는 꽃피는 나무의 몸으로 변한다. 그녀의 의식은 몸에 대한 의식이 된다. 그녀의 몸에 대한 의식은 무의식과 신체를 관통 하며 지속성을 갖는다. 꽃피는 나무의 몸에 대한 감응은 순간적인 감정의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고귀한 몸에 대한 의식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갖게 한다. 그녀는 고귀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 자 신을 개발하며 교양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자식들도 품위와 교양 있는 인물로 교

육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시집 식구에 의해 ‘착한 여자’로 호명된다. 그녀도 자기 자신을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착한 여자”(225쪽)로 규정한다. ‘착한 여자’는 신혼 초기 하 나의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녀의 결혼과 가정생활을 규 정짓는 용어가 되었다. ‘착한 여자’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다. 그녀는 전처의 자식도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차별 없이 동등하게 교육시키고 양육한다. 그녀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도 잘 관리하고 친정 식구들도 잘 뒷받침하 는 생활력 있는 인물이다. ‘착한 여자’의 규정성은 남편이 중풍에 걸려서도 그대 로 유지된다. 그녀는 뒷일을 보지 못하는 남편을 위하여 병수발을 한다.

그가 그걸 즐기지만 않았어도 그가 죽는 날까지든, 내 수족이 성한 날까지든, 마냥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이는 내가 해주는 뒷물을 처음에는 약간 미안해하는 듯하더니 차츰 즐기기 시작한다는 게 느껴졌다. 발음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 그가 내지른 소리는 아유 시원해, 아아 시원타, 정도였을 것이다. 너무 시원해서 그랬 던가. 차츰 발음하기를 포기하고 신음 같은 흥얼거림으로 변했다. 나는 그 흥얼거림에 서 성적인 낌새를 챘다. 나의 짐작은 틀림이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보던 변을 두 번 씩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아랫도리에서 단호하게 내 손길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했다.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세상에 그런 편리한 장치가 있다는 걸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했을걸. 용용 죽겠지 놀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 나 그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떡하든지 엉터리로 씻거나 안 씻어서 내 손이 가게 만들었다. 주름이 많은 아랫도리를 깨끗이 씻기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시간이 걸 리고 손길도 섬세해야 한다. 그동안 내가 참아내야 하는 것은 기분이 좋아 흥얼거리는 그의 교성만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될 수 있는 대로 숨도 안 쉰다. 구린내를 안 맡고 싶은 것보다는 내 안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잔인한 충동이 겁나기 때문이다.(「친절한 복희씨」, 234-235쪽)

그녀는 ‘착한 여자’로서의 행위가 자신에게 편안함을 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러한 규정은 외부에서 부여된 것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행위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외적인 행위는 내적인 자기 자신과 함께 가기 마련이다. 그런 데 ‘착한 여자’는 그녀에게 편안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자유’스럽게도 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세워 관철시키는 인물은 아

니다. 그녀는 남편과의 성 관계에서도 자신의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편은 그녀를 성적 만족을 위한 대상으로만 여긴다. 그녀는 성에 있어서 남편의 도구적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녀도 남편이 더 많은 돈을 벌어오게 하려는 의 도를 가지고 성적 학대를 참아낸다. 그와 남편과의 관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니다. 그녀는 남편과의 성 관계에서도 자신의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편은 그녀를 성적 만족을 위한 대상으로만 여긴다. 그녀는 성에 있어서 남편의 도구적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녀도 남편이 더 많은 돈을 벌어오게 하려는 의 도를 가지고 성적 학대를 참아낸다. 그와 남편과의 관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