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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인의 신체경험과 긍정적 태도

Ⅱ. 개별자의 자기 회복으로서의 노년 실존 - 박완서의 경우

2) 여성노인의 신체경험과 긍정적 태도

신체는 인식의 대상이면서도 인식하는 작용을 한다. 노년의 신체는 감각 기관 을 통해 인지된다. 박완서의 「저물녘의 황홀」은 노년의 인지와 노인 소외의 심리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중년의 시기 에 쓴 것으로 이후의 노년소설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주목해서 살펴보아야할 작품이다. 이 소설의 1인칭 서술자는 서른이 다된 셋째 딸마저 미국에 시집보내 고 혼자서 지내는 인물이다. 서술자는 냄새의 출처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이 노인 이 되었음을 인지한다.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대문에서 현관문까지의 예닐곱 발짝거리는 그래도 괜찮지 만 현관문을 열 생각을 하면 무서웠다.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백 년 묵은 먼지 가 피어오르듯이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냄새 때문이었다. 뼛속까지 시리게 음습한 그 곰팡내는 책이나 벽지가 썩는 듯도 했고 묵은 쌀이나 마른 반찬이 변질하는 듯도 했 다. 그러나 양지바르고 구석구석 정돈이 잘된 집 안을 몽땅 한바탕 뒤엎어도 그런 것 들을 찾아낼 순 없었다. 집 안과 차단된 지하실까지 샅샅이 뒤져도 하다못해 말라비틀 어진 생쥐 시체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온종일 헛된 수고 끝에 기진해서 잠시 쉬는 사 이에 깨달음처럼 문득 그 냄새가 무엇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냄새

였다. 내가 떨구고 간 나의 체취가 빈집에 괴어서 온종일 썩어가는 음습한 냄새였다.

젊음에 의해 희석되거나 중화될 길이 막힌 채 괴어 썩어가는 늙은이 냄새는 맡을 때마 다 새롭게 섬뜩하고 고약했다. 어쩌면 안방에서 나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른 다는 터무니없는 생각까지 들고부터 그 냄새는 고약할 뿐만이 아니라 무서웠다.(박완 서, 「저물녘의 황홀」,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4 , 문학동네, 2013, 334쪽)

기분은 현존재의 존재 상황을 개시한다. 화자에게 감각된 ‘곰팡내 나는 냄새’는 자신이 노인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화자의 언급처럼, 그것은 무슨 깨달음처럼 갑 작스럽게 현존재의 존재 상황을 개시해주는 것이다. 후각은 오감 중에서 가장 본 능적인 감각이다. 후각은 호흡과 관련 있고, 생명과 직결되어 있으며, 또한 냄새 의 자극에 직접 노출되어 있어 의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현실과 밀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노년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 섬뜩함과 무서움을 느낀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 녀는 친숙한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세계가 낯설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퇴락해 몰입해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 돌연 자기 자신이 세계에 내던져져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혼자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녀의 가족들은 모 두 해외에 있으며 자신만이 홀로 남아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녀는 또한 자신 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녀는 타자의 죽음이 아닌 자신의 죽음을 미리 달 려가면서 ‘썩어가고 있는 시체’를 상상한다. 섬뜩함과 두려움은 노년으로서의 현 존재의 피투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현존재가 각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이며 죽음으로 나아가는 존재임을 개시한다.

노년이 되었음은 신체 기능상으로도 지각된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이전과 다 르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된다. 노화는 신체적으로 새로운 생리적 균형을 찾아가 는 과정이다. 노화는 건강과 질병의 중간 상태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한 측면 에서 보면 노인은 정상적이면서도 비정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노인은 외부 환경 에 대해 예전과 같은 적응과 방어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노인은 젊었을 때에 는 결함으로 여겨졌을 신체적 상태도 노인이 되어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노인이 병이 생기지 않았는데도 아프다고 말할 때, 그들은 이런 비정상 적인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은 자신의 신체를 아직도 젊은이의 관 점에서 바라보면서, 쉽게 피로를 느끼고 몸이 불편하며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눈

이 어두워지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이다.55) 여성 화자는 자신이 겪는 몸 체험 현상을 의사에게 자세히 털어 놓는다.

“자각증상이요?”

나는 먼저 왼손을 왼쪽 젖가슴 밑에다 대면서 말했다, 여기 심장이 있다는 걸 느낀 다네. 아주 자주 그게 힘겹게 헐떡이고 있다는 걸 느낀다네. 전엔 그걸 느낀 적이 없었 는데. 그걸 느낀다는 건 거기가 아픈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네. 또 명치에 손을 대고 말했다. 여기 위가 있다는 것도 느낀다네. 조금만 시장해도 쓰리고 조금만 뭘 먹어도 가쁘고, 여기 위가 있다는 걸 시시때때로 느껴야 한다는 건 지딱지딱 아픈 것보다 더 괴롭다네.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이 속에 허파가 있다는 걸 느낀다네.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환기가 제대로 안 되는 좁아터진 방처럼 답답하거든. 또 배를 어루만지면 서 말했다. 이 속에 창자가 있다는 걸 느낀다네. 아무리 배가 고플 대도 그 속은 가득 괴어 있는 것처럼 더부룩하고 답답하다네. 그 뿐인 줄 아나. 다리팔의 뼈마디 하나하나 를 다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네. 마디마디가 쑤시거나 아픈 건 아니지만 녹슨 것처럼 뻑뻑한 데가 있는가 하면 죄어줘야 할 것처럼 헐렁한 데도 있어서 그 여러 마디들이 제각기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네. 신경 얘기가 났으니 말인데……

“어머니, 잠깐이요. 종합진찰을 받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정밀하게요. 좀 괴로우 시더라도 참으실 수 있겠죠?”

주박사가 사무적으로 데면데면하게 내 말의 중동을 끊었다. 그는 내 말을 전혀 알아 들은 것 같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귀담아 들으려 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긴 귀담 아들어봤댔자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는 한창 나이였다. 나도 젊은 나이 와 한창 나이를 겪었듯이 오장육부와 뼈마디의 기능이 왕성하고 서로 조화로울 때는 아무도 그것들을 각각 느낄 수 없다. 다만 그것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완벽하게 화합 해서 만들어내는 쾌적한 힘, 싱싱한 의욕, 빛나는 욕망, 아름다운 꿈, 진진한 살맛을 느 낄 수 있을 뿐이다. 주박사가 바로 그런 나이라는 데 나는 질투와 실망을 느꼈다.(「저 물녘의 황홀」, 351-353쪽)

의사에게 노화는 질병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의사는 환자의 증상 호소를 부 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의사가 병을 진단하는 데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객 관성이 담보되는 과학적인 검사인 것이다. 노인은 몸의 기능상의 이상과 불편함 을 호소한다. 노인은 자신의 몸 안에 장기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고 그것 자체가 장애와 불쾌함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관심을 몸 내부로 향하

55)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 홍상희· 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396쪽.

게 한다. 몸에 모든 주의와 집중이 모아진다. 이제 몸은 자신의 존재이기도 하지 만 자신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몸이 쾌적하다고 느낄 때는 장기가 있음을 지각 하지 못할 때이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 자신의 몸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들의 관 심은 내부로 향하지 않고 밖으로 향한다. 몸의 장기를 인지한다는 것은 불쾌의 감정을 유발한다. 이때 의식은 몸의 내부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외부로 향 하는 운동은 축소된다. 몸을 의식한다는 것은 세계의 축소를 의미한다. 여성 화 자는 꾀병 환자로 진단받는다.

지금은 섣불리 꾀병도 앓을 수 없는 세상이라니 어쩔거나, 화초 할머니의 꾀병을 아 무도 못 말렸듯이 나의 고독을 누가 말릴 것인가. 나도 내 몫의 고독을 극치까지 몰고 가보리라. 아랫목에 누워서 송장내를 풍기며 썩어가는 또하나의 나를 무서워하지 말고 직시하고 껴안으리라. 그 늙은이를 따뜻하게 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멀스멀 발 밑을 기던 땅거미가 비로드처럼 도타워졌다. 어느새 주택가의 그만그만한 창에 모조리 불이 켜져 우리집만 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어서 가서 우리집 식탁에도 불을 밝혀야 겠다. 그리고 그 늙은이를 위해 오랜만에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야겠다.(「저물녘의 황홀

」, 362쪽)

여성 화자는 노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자아가 썩어가 고 있다고 상상한다. 반면에 그녀는 ‘아름다운 암’으로 피고 싶다거나 벚꽃의 낙 화를 보며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죽는 날까지 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기 도 한다. 그녀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으로 노년의 누추함과 두려움에 대해 대비 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꾀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한다. 그러한 방법은 일종의 퇴행이다. ‘썩어가는 나’에 대한 과도한 상상력이나 꾀병을 통해 자신을 알리려고 하는 것은 노년에 대한 다급함보다는 아직은 노년을 대비하는 여유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꾀병을 부렸던 할머니의 삶을 떠올리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그녀의 노년 준비는 한편으로는 두려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는 안도의 위안이 필요한 것이다.

이 소설은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진술에서 시작하여 ‘우리 집 식탁에 불을 밝

이 소설은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진술에서 시작하여 ‘우리 집 식탁에 불을 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