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벽화의 제작 주체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나뉜다. 이들은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고 아일랜드 통일을 위해 투쟁하면서 벽화를 제작했다.
서론
연구의 목적과 배경
벽 화는 당시 공식 언론보다 더 역동적으로 북아일랜드를 둘러싼 정치적 갈. 이러한 인구 변 화는 북아일랜드 벽화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선행 연구
그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출현을 아일랜 드 무장 독립운동의 근간으로 해석하고 있다.16) 그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를 다섯 종류로 나누고 18세기 말부터 계보를 이어온 독립운동 단체들을 민족주의라는 큰 범주 안에서 이념적 차이에 따라 분류했다. 이러한 그 의 해석은 아일랜드 민족주의 내부의 상반되어 보이는 특성들이 어떻게 한 이념 안에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17) 크로닌에 따르 면 트러블 시기의 IRA는 아일랜드 통일을 위해 무력을 정당화했던 무력 공화주의자(physical-force nationalist)로 볼 수 있다.
논문의 구성
본 연구 에서 정치적 사건은 벽화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로 기술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개입한 벽화에 정치적 시각을 배제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아일랜드 자치법안 통과(1914) 및 아일랜드 분할
북아일랜드에서 벽화는 각 집단과 국 가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개 신교도가 30% 미만인 모나한, 도네갈과 카반은 아일랜드 자유국에 포함되었다.
아일랜드 북부 지역의 벽화의 등장
이들이 시작한 개신교 승리주의 문화 는 얼스터 뿐만 아니라 다른 세 지방의 개신교도들에게도 전파되었지만, 벽화는 다른 세 지방에서는 그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벽화 가 아일랜드 북부에서만 하나의 문화가 된 배경과 벽화가 얼스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얼스터 개신교 사회의 특징과 벽화의 등장
17세기 이후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지주와 귀족 출신이 지배하는 사 회가 되었다. 통일 아일랜드인 협회는 1791년 얼스터에서 장로교도들의 주도로 설립되었 다.
얼스터 개신교 로열리스트의 벽화 제작 목적과 선택된
로열리스트들은 ‘왕이 스스로 개신교 서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원칙을 엄숙동맹규약으로부터 만 들었다. 제프리 슬루카 (Jeffrey A. Sluka)는 개신교 승리주의를 기념하는 로열리스트 벽화가 시 작할 때부터 지배계층과 개신교 정부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얼스터의 개신교 문화로 정착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77).
북아일랜드 “트러블(1968-1998)”의 시작과 벽화
이러한 상황에서 1968년의 가톨릭 시민권 운동이 시작된 직후부터 북아일랜드에는 이 전과는 다른 성격의 벽화가 등장했다. 한편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유혈 분쟁을 막기 위해 더 강력한 치 안 정책을 도입하는 한편 침체된 경제를 살리려는 방편으로 벽화 제작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가톨릭 시민권 운동과 공화주의 벽화의 등장
보그사이드 전투의 영향으로 곧 주변 가톨릭 지역과 벨파스트에서도 폭력사태가 일어났다.91). 그러나 아일랜드 공화국 역시 북아일랜드에서 테러 활동 을 하는 IRA를 잡아들였기 때문에 IRA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 다.109) 따라서 트러블은 북아일랜드 가톨릭 시민권 운동으로 촉발됐지만,.
개신교 준군사조직들의 창설과 로열리스트 벽화 전통의
특히 UDA 지도부 는 연합진보당(VUPP, Vanguard Unionist Progressive Party)과 교류하 며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124) 이러한 배경의 UDA는 영국 정부에 의해. 그러나 얼스터의 붉 은 손은 벽화로 계속 제작되면서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을 상징하는 것 으로 의미가 변화되었다.130).
노동당 정부 주도의 벽화 프로젝트(1977-1980)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커뮤니티 를 벽화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다’라는 의미가 모호하다고 보았다. 이 벽화는 조선소 내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단식투쟁 이후 정치적 격변기의 벽화
여전히 북아일랜드 실생활에서 대다수 중산층은 벽화 를 좋아하지 않았고 노동자 계층 내부에서도 벽화에 대한 논란이 존재했 지만, 이때부터 북아일랜드 벽화는 북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중요 문화 상 품으로 포장하기 적합하도록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이때부터 북아일랜드에 진정한 평화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277). 무엇보 다 1980년대부터 개신교 패배주의 문화와 가톨릭 저항 문화가 벽화로 경 쟁적으로 그려진 데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벽 화를 후원했다는 점에서 벽화는 북아일랜드만의 독특한 문화가 되었다.
단식투쟁(198과 저항의 표명으로서의 벽화
대중적 주제의 등장과 벽화의 대중화
이러한 북아일랜드 내부의 정치 변화는 북아일랜드 벽화가 변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1998년의 성 금요일 협정은 북아일랜드 분쟁 종식을 공식 화하면서 벽화가 본격적으로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IRA와 UVF·UDA의 휴전 선언(1994)과 벽화의 대중화
벽화 에 그려진 인물이나 사건은 기념일이나 연관된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부 분적으로 재제작되고 있다. 벽화의 상단부에는 아일랜드어가 적혀 있다.
성 금요일 협정(1998)과 그에 대한 입장 표명으로서의
실제로 1998년 5월의 국민투표로 성 금요일 협정이 통과된 이후에도 북아일랜드 권력-분담 행정부 설립은 정당 사이의 갈등으로 타협점을 쉽게 찾지 못한 데다가 협정에 반대하는 일부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들 의 시위로 미뤄지고 있었다. 조나단 맥코믹(Jonathan McCormick)은 이 당시 로열리스트 벽화가 개신교 노동자 계층 지역을 점유하고 커뮤니티를 통 제하고 있다는 힘의 상징이었다고 보았다.267) 이처럼 2000년대 초까지 제작된 로열리스트의 군국주의적 벽화 대부분은 개신교 거주민들의 의도 와 관계없이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들의 세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그려진 것이 많았다.
벽화 주제의 확장: 실존 인물을 이용한 서사
이처럼 여러 단체의 후원으로 제 작된 벽화는 1985년의 앵글로-아이리시 협정 이후로 많이 그려진 준군 사적 벽화들이 예전의 오렌지회를 상징하는 이미지나 스포츠·문화 아이 콘으로 대체되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269) 그러나 이러한 지역단체 의 벽화 후원은 로열리스트 벽화의 군국주의적 요소가 얼스터 개신교 역 사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여전히 벽화에서 종파적 요소를 제거하 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교회가 무너질 때까지 아일랜드에 평화가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라는 크롬웰의 글 을 적어놓았다.273) 이 벽화는 북아일랜드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들을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겠다는 성 금요일 협정 취지와 다르게 가톨릭과 개 신교 사이의 민족 및 종파적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부 주도의 벽화 제작과 활용(2004- )
또한, 북아일랜드 미술계는 이때부 터 새로운 자치정부의 벽화 프로젝트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번 장에서 북아일랜드 벽화 교체 프로젝트의.
정부 주도의 벽화 교체 프로젝트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은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벽화 프로젝트에서 여전히 개신교도들에게 더 유리한 기준을 적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9년 이전까지 북아일랜드에서 벽화는 철저히 개신교도들을 위한 문화였다고 볼 수 있다.
문화유산으로의 벽화와 활용
벽화 교체 프로젝트의 성과와 한계
리-이미징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포함한 정부의 벽화 교체 프로젝트. 아일랜드어 특구로 지정된 게일터흐트 지구에는 리-이미징 커뮤니 티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이중언어, 즉 아일랜드어와 영어로 장식된 벽화가 제작되었다.
브렉시트와 북아일랜드 벽화
대신 공화주의 벽화는 그동안 개신교 중심의 북아일랜드 사회에서 제대로 교 육되지 않았던 가톨릭 민족 문화를 다룬 공공미술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북아일랜드에서 로열리스트 벽화는 개신교의 정통성 구축이라 는 처음 그려질 당시의 목적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이제 그러한 벽화를 제작하고 재생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이러한 개신교도들의 정치적 의도는 북아일랜드 건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편 1998년 북아일랜드 분쟁 종식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실질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