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월 임시파 IRA의 런던 폭격으로 중단됐던 평화회담은 1997년 5월 토니 블레어 신노동당 정부의 출범으로 극적으로 재개되었 다. 블레어 총리는 취임 직후인 6월 첫 방문지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를
249) Jarman(주 22), p. 188.
250) 위의 책, p. 189.
선택해 방문한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과거 영국의 탄압과 19세기 대기근 시기 아일랜드 식량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150만 명이 넘는 사망자 가 발생하도록 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1997년 7월에 임시파 IRA는 다 시 휴전을 선언했다.251)
1972년부터 북아일랜드의 개신교 자치정부를 폐지하고 북아일랜드를 직접 통치해온 영국 정부는 1998년 4월 10일에 아일랜드 공화국 정부와 성 금요일 협정을 맺고 북아일랜드 내정에서 손을 떼는 절차를 밟기 시 작했다. ‘벨파스트 협정’으로도 불리는 성 금요일 협정은 북아일랜드 정 당들이 권력-분담 행정부를 설립하도록 한 합의다. 1972년 이전의 개신 교 연합당 지배 체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협정 조항에는 다수당의 단 독 통치를 막는 방안이 명시되었다.252) 이로써 북아일랜드에는 개신교 정당들과 가톨릭 정당들이 행정부를 같이 운영할 수 있는 체계가 처음으 로 도입되었다.
성 금요일 협정은 거주민들에 의해 최종 합의가 결정됐다는 점에서 이전의 협정과 다르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각각 국민투표를 통해 거주민 스스로가 협정 통과를 결정하도록 했다. 성 금요일 협정에 대한 찬반을 묻는 5월 22일 국민투표에 북아일랜드 국민 81%가 투표했 고 투표자의 71.1%가 협정에 찬성했다. 종파별로 보면 가톨릭 인구의 99%와 개신교 인구의 51%가 협정에 찬성했다. 한편, 아일랜드 공화국은 56%의 투표율과 94-96%의 찬성률을 보였다. 이로써 북아일랜드와 아일 랜드 공화국 각각 국민 합의가 완료됨에 따라 향후 언제든지 아일랜드섬 국민의 뜻으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은 통일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253)
251) Rolston(주 197), p. 6.
252) 북아일랜드 새 의회는 비례대표제에 따라 108명의 의원을 선출하고, 선거로 확보한
의석수에 비례하여 12명의 행정장관을 임명하기로 했다.
https://assets.publishing.service.gov.uk/government/uploads/system/uploads/attachme nt_data/file/136652/agreement.pdf, 2020.11.27.
253) Paul Dixon, “Tony Blair’s Honourable Deception: In Defence of the ‘Dirty’
Politics of the Northern Ireland Peace Process,” in Charles I Armstrong, David Herbert and Jan Erik Mustad, eds., The Legacy of the Good Friday Agreement.
(Cham: Palgrave Macmillan, 2018), p. 47.
성 금요일 협정은 북아일랜드를 30년 동안 전쟁터로 만들었던 트러 블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것을 뜻했기 때문에 북아일랜드 국민뿐만 아니 라 해외투자자들과 기업들이 북아일랜드 경기 안정과 관광 산업의 성장 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254) 북아일랜드는 트러블 이전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영국 정부의 경제 지원을 받고 있었고 트러블 30년 동 안 경제는 더 악화되었다.255) 반면 아일랜드 공화국은 1995년에 1인당 GDP가 처음으로 2만 달러를 넘은 이래로 1997년에 세계 순위 20위 (22,465달러)에 올라서며 15위(26,367달러)인 영국과 경제적 격차를 줄이 고 있었다.256) 협정 이후 북아일랜드의 초점은 아일랜드 공화국과의 통 일 가능성이 높아진 데 따라 종파 갈등을 줄이는 방안으로 향하게 되었 다.
성 금요일 협정 이후 북아일랜드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은 벽 화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커뮤니티와 지역 문화단체를 중심으로 군 국주의적 이미지가 등장하는 벽화의 교체나 새로운 벽화 제작에 대한 논 의가 이루어졌다. 벽화 출현과 마찬가지로 벽화 제거 역시 정치적 행위 였다. 벽화가 관광 산업 자원으로의 효용성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도시 재생 논의가 진행될수록,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벽화 제거나 교체에 대한 협의가 본격화되었다.
무엇보다 벽화 제거에 대한 커뮤니티들의 관심은 거주민들의 실제 삶에서도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두 커뮤니티의 접경 지역에 사는 가톨릭 노동자 계층은 1990년대 들어서도 자신들을 향해 총을 겨누는 벽화들이 점점 증가하는 상황에 대해 위화감 을 느꼈을 것이다. 개신교 노동자 계층 내부에서도 앞서 설명한 바와 같
254) 신혜수, 북아일랜드, 길고도 멀었던 대립과 갈등」, 『역사비평』, 제43호(1998), 역 사비평사, pp. 378-79.
255) 북아일랜드는 주력 산업인 린넨과 조선업이 양차 세계대전 이후 쇠퇴하면서 큰 경 제 불황을 맞았고 1960년대 들어와 영국 재무부로부터 연간 4,500만 파운드의 원조를 받아야 했다. Foster(주 26), p. 584.
256) 아일랜드 공화국은 2001년 1인당 GDP에서 처음 영국을 앞지른 이후 2017년에 7만 달러를 넘었고 2019년에 IMF가 측정한 1인당 GDP 세계 순위에서 5위(77,742달러)를 차지했다. https://www.imf.org/external/datamapper/NGDPDPC@WEO/AZE 2020.12.26.
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벽을 장악하고 있는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들 의 군국주의적 벽화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이 지역 신문을 통해 꾸준히 드 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커뮤니티 내에서 이루어졌던 벽화 제거에 대한 논의가 정치적 벽화 제작의 중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특히 이 시기의 공화주의 벽화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는 장소로 여전히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성 금요일 협정 전후 가톨릭 지역의 새로운 공화주의 벽화 제작은 주로 커뮤니티 단체들의 후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화주의자들은 1994 년의 휴전 선언 이후처럼 벽화 주제를 아일랜드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로 넓혀가는 한편 벽화를 통한 정치·사회적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 은 동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보며 벽화를 통해 사회 불합리에 대한 고발 을 계속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공화주의 벽화의 비판 대상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종파적 폭력을 일으키는 로열리스트 준군사 조직과 이들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영국 정부 및 새로운 북아일랜드 자 치정부였다.257) 성 금요일 협정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종파적 괴롭힘으 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지만, 실제로는 협정에 반대 하는 준군사조직들이 여전히 종파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새로운 북 아일랜드 자치정부는 이를 제대로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1998년에 제작된 포르타다운(Portadown)의 한 공화주의 벽화는 오 렌지 행진의 피해자인 가톨릭 거주민들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도 78).
이 벽화는 “협정: 종파적 괴롭힘에서 벗어나도록 하는가?(The Agreement: Free From Sectarian Harassment?)”라는 슬로건 위로 검은 실루엣의 세 무용수에게 화염병을 던지려는 듯이 서 있는 거대한 오렌지 맨이 그려져 있다. 가톨릭 무용수들 뒤로 보이는 드럼크리 교회 (Drumcree church)와 오렌지 행렬은 이들이 가톨릭 지역을 관통하여 행 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 금요일 협정이 통과된 후에도 개신교 승리 주의의 상징인 오렌지 행진으로 인해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공화주의자들 은 모든 전통이 존중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했다.258) 오렌
257) Rolston(주 197), p. 7.
258) Eamonn O’Kane and Paul Dixon, “The Northern Irish Peace Process: Political
지 행진이 지닌 개신교 영토 선포의 의미를 고려해 볼 때 이 소요사태는 이 행진이 개신교의 전통이라는 이유로 가톨릭 지역을 침범하여 벌어진 영토싸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98년 5월의 국민투표로 성 금요일 협정이 통과된 이후에도 북아일랜드 권력-분담 행정부 설립은 정당 사이의 갈등으로 타협점을 쉽게 찾지 못한 데다가 협정에 반대하는 일부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들 의 시위로 미뤄지고 있었다. 성 금요일 협정 전부터 북아일랜드의 가장 큰 논쟁 주제는 IRA의 무기 해체 시기, 정치범 석방 시기와 오렌지 행 진 경로 변경 문제였다. 특히 드럼크리 오렌지 행진에 대한 논쟁은 1995 년부터 1998년까지 북아일랜드 전역에 시민 소요를 초래했다.
매년 7월 12일 드럼크리 개신교 교회에서 출발해 가톨릭 거주지인 가르바기 로드(Garvaghy Road)를 통과하는 포르타다운의 오렌지 행진은 1995년 7월 가톨릭 거주민들이 행진을 막으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영국 정부는 1996년에 내렸던 오렌지 행진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번복 하여 행진을 허용했고 1997년에도 개신교도들의 ‘폭동’을 막겠다는 명분 으로 행진을 허용했다. 그러나 성 금요일 협정이 통과된 직후인 1998년 여름, 새로 조직된 독립 퍼레이드 위원회(the Independent Parades Commission)는 포르타다운의 오렌지 행진을 금지하기로 했다. IPC 결정 에 분노한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들은 시위를 벌였고 7월 12일에 가톨릭 교도 집에 화염병을 던져 3명의 아이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259) 드럼 크리 교회가 촉발한 상황을 묘사한 위의 공화주의 벽화는 개신교도들의 특권의식이 초래한 폭력행위에 대한 비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도들 의 가톨릭 영토 침해를 예전처럼 당하고 있지 않겠다는 선언의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렌지 행진은 북아일랜드 경기 침체가 가
Issues and Controversies,” in Charles I Armstrong, David Herbert and Jan Erik Mustad, eds., The Legacy of the Good Friday Agreement, (Cham: Palgrave Macmillan, 2018), p. 27.
259) 1998년 여름 IPC가 행진 금지 결정을 내린 이후 몇 년 동안 로열리스트 준군사조 직들은 치안부대와 대립을 이어나갔고, 오렌지 행진 경로 변경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Neil Jarman, “A bitter Peace: Flag Protests, the Politics of No and Culture Wars,” in Charles I Armstrong, David Herbert and Jan Erik Mustad, eds., The Legacy of the Good Friday Agreement. (Cham: Palgrave Macmillan, 2018), p. 126.
속화되던 1960년대 중반 이후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 중이던 시기에 오렌지 행진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는 사실은 개신교 커뮤니티가 북아일랜드 영토에 대한 정통성을 재구축하기 위해 결속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98년 가톨릭 민족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준 IPC의 결정과 정부의 태도는 개신교 커뮤니티를 다시 고립시키는 결정 이었고 폭력사태가 계속되는 배경이 되었다.
개신교도들의 폭력사태로 미뤄지던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1999년 11월, UUP의 데이비드 트림블(David Trimble)과 신페인의 게리 아담스 의 합의로 설립될 수 있었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2001년에 개신교도 가 90% 정도였던 RUC를 폐지하고 새로운 경찰대인 PSNI(the Police Service of Northern Ireland)를 설립하여 가톨릭교도가 30% 이상이 될 수 있도록 했다.260)
그러나 2001년에 벨파스트 북부 아도인 지역에 그려진 공화주의 벽 화는 가톨릭 정당이 참여한 자치정부가 설립된 후에도 가톨릭교도에 대 한 종파적 괴롭힘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도 79). 성십자 (Holy Cross) 가톨릭 학교 근처에 그려진 이 벽화에는 검은색 실루엣의 어른 한 명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컴컴한 거리를 걷고 있는 장면이 묘 사되어 있다. 그 위에는 “모든 이는 종파적 괴롭힘을 받지 않고 살 권리 가 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두 아이가 입고 있는 붉은색 상의는 성 십자 가톨릭 학교의 교복이다. 아도인 개신교 지역 로열리스트들은 2001 년부터 2년 동안 개신교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성십자 가톨릭 학교 학생 들의 통학로를 막고 학생과 학부모에게 폭력을 가했다. 이 벽화는 성십 자 가톨릭 학교 사건을 1957년에 있었던 미국 아칸소주(Arkansas)의 흑 인 고교생에 대한 인종차별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다.261) 로열리스트 시
260) https://cain.ulster.ac.uk/issues/police/patten/patten2001.pdf, 2020.10.16.
261) 이 벽화의 배경인 "리틀 록 나인(Little Rock Nine)"은 아칸소주의 리틀 록 중앙 고 등학교에 입학한 9명의 흑인 학생들에게 행해진 인종차별에 관한 사건이다. 1954년 미 대법원이 학교의 인종 분리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후, 1957년 아홉 명의 흑인 학생들이 처음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아칸소 주지사와 인종차별주의 단체들은 주방위군을 동원해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막았다. 당시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는 연방 육군 101 공수사단을 투입하여 흑인 학생들의 등하교를 돕도록 했다. 그러나 이 9명은 매일 백인 학생들로부터 괴롭힘과 야유, 위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