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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A와 UVF·UDA의 휴전 선언(1994)과 벽화의 대중화

1994년 무장단체들의 휴전 선언으로 북아일랜드 관광 산업이 재개되 던 시기, 북아일랜드 벽화는 대중적 매체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벽화를 매개체로 한 관광 상품의 개발이었다. 1968년 까지만 해도 한 해에 100만 명이 넘는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며 성장세에 있던 북아일랜드 관광 산업은 트러블 시기에 크게 위축되어, 1973년에 해외 관광객 수가 43만 명으로 급락했다. 이후 20년 넘게 고전하던 관광 산업은 휴전 첫해인 1994년 북아일랜드에 13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 문하면서 침체된 북아일랜드 경제를 활성화할 대책으로 주목받게 되었 다.225) 이 시기 대처 총리의 뒤를 이은 존 메이저 총리는 영국 헤리티지 의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여 1992년에 국가유산부(DNH, Department of National Heritage)를 신설하면서 국제 규모의 관광 산업을 장려하고 있 었다.226) 따라서 북아일랜드 벽화는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재조명될 수 있었다.

관광이 재개된 1990년대 중반, 시의회와 예술위원회 등의 공공부문 은 분쟁을 이용한 관광객 유치에 거리를 둔 반면 민간부문은 분쟁지역의 벽화들을 이용한 관광 상품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학살이나 잔혹 행위 가 일어난 피해지역을 관광객에게 소개하는 분쟁지역 벽화의 문화상품화 는 ‘누구의 관점을 전달하는가’에 대한 논란과 함께 장소 훼손 등 여러

225) 1923년 얼스터 관광개발협회(the Ulster Tourist Development Association) 설립 이 후 해안 리조트 개발 등으로 북아일랜드는 1959년 해외방문자 63만 명, 1968년 100만 명 이상을 기록 중이었다. Stephen W. Boyd, “Post-conflict tourism development in Northern Ireland: Moving beyond murals and dark sites associated with its past,”

in Rami K. Isaac, Erdinç Çakmak and Richard Butler, eds., Tourism and Hospitality in Conflict-Ridden Destinations, (London: Routledge, 2019), pp. 231-33.

226) 존 메이저 총리는 1992년 국가유산부(DNH, Department of National Heritage)를 신설하여 방송, 예술, 스포츠, 관광, 국가유적, 영화산업 및 밀레니엄 펀드를 위한 제 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김정희(주 145), p. 437.

측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었다.227)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역민이 운영하는 관광회사들은 분쟁의 상징성을 지닌 벽화를 관광에 이용했는 데, 대표적인 예로 ‘블랙 택시(black taxi)’를 들 수 있다.228) 1970년대부 터 분쟁지역의 대중교통 역할을 대신했던 블랙 택시의 이름을 딴 이 관 광 상품은 공화주의자와 로열리스트 정치범 출소자들이 벽화 앞에서 분 쟁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 지역인 폴 스 로드는 아일랜드 정체성을 지닌 대표적인 분쟁지역으로 소개되었고 인접한 개신교 지역인 샨킬 로드는 영국 정체성과 로열리즘 이념을 상징 하는 벽화로 홍보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벨파스트와 데리는 점차 벽화 도시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229)

2019년에 현장을 방문했던 본 연구자는 블랙 택시를 포함한 몇몇 벽 화 관광을 이용했지만, 벽화의 의미에 대한 제한된 정보를 얻었을 뿐이 며 벽화가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스티븐 보이드(Stephen Boyd)는 “관광 산업이 과거를 오늘날의 관광객에게 팔기 위해 너무 빨 리 포장하고 상품화하며 그것의 원래 기능과 진정성을 소화하기 쉬운 작 은 크기로 바꾸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230) 이것은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가 다른 자본주의 상품들이 생산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문화가 자본주의 산업 안에 편입되는 것을 보며, 문화는 더 이 상 현재에 대한 성찰적 이해를 위한 “저장소(repository)”가 아니라고 비 판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231) 실제로 문화 산업 안에

227) Boyd(주 225), p. 237.

228) 1970년대 트러블 시기 대중버스는 종종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어 바리케이드로 쓰였 다. 이때 블랙택시가 자주 중단되는 대중교통에 대한 대안으로 도입되었다. 폴스 지역 의 가톨릭 커뮤니티는 낡은 런던 택시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버스보다 저렴한 가격으 로 정해진 노선에 따라 여러 명을 태우고 하차시키는 블랙택시를 운행했다. 샨킬과 쇼어 등의 개신교 지역에서도 곧 블랙택시가 대중교통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Bruce (주 119), pp. 190-91.

229) Skinner and Jolliffe(주 7), p. 15.

230) Stephen W. Boyd, “Heritage as the USP for Tourism in Northern Ireland:

Attraction Mix, Effective Storytelling and Selling of a Dark Past,” in Glenn Hooper ed., Heritage and Tourism in Britain and Ireland,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6), p. 247 and p. 258.

231) Theodor W. Adorno, and J.M. Bernstein, The Culture Industry: Selected Essays on Mass Culture,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J.M. Bernstein, 2001, p. 9.

서 북아일랜드 벽화는 긴 역사적 맥락이 간소화되고 그것이 지닌 비판적 기능이 축소되어 대중에게 제공되고 있다. 민간 사업체가 진행하는 북아 일랜드 벽화 관광은 비극적 역사를 충분한 사회적 논의 과정 없이 이용 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북아일 랜드 벽화의 문화상품화가 분쟁의 역사를 단순화하여 보여주는 것은 사 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분쟁의 기억을 일반 여행객들에게 알릴 창구를 다양화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벽화가 가장 많이 그려져 있던 벨파스트 서부 디비스 스트리트 (Divis Street)는 2003년부터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국내외 인물들을 기 념하는 국제 장벽(International Wall)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도 67).232) 공 화주의 벽화가들은 이미 1980년대 말부터 벽화를 통해 가톨릭 아일랜드 인과 유사한 경험을 지닌 민족 단체들과 국제적 연대감을 형성해 오고 있었다. 국제 장벽에는 1798년의 공화주의 봉기를 주도했던 울프 톤, 19 세기 미국의 노예제 반대 운동가였던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팔레스타인 가자(Gaza) 분쟁 등 시대와 국가를 넘나들며 반- 제국주의 투쟁, 혁명과 분쟁을 주제로 한 벽화가 총 망라되어 있다. 벽화 에 그려진 인물이나 사건은 기념일이나 연관된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부 분적으로 재제작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도판 67]의 왼편에는 2011년 단식 투쟁 30주년 기념에 맞춰 단식투쟁 시위자와 담요시위자가 그려졌고, 오 른편에는 2013년에 남아프리가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의 95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벽화가 추가되어 있다. 이렇게 한 벽화 속에 시간적·공간적으로 이질적인 사건이나 인물들을 함께 묘사함으로써 시간 이 갈수록 북아일랜드 벽화는 “시간의 공간화”와 “공간의 혼성성”이 일 어나는 장소이자 미셀 푸코(

Michel Foucault)가 말하는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의 모습을 대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233) 아일랜드의

232) 디비스 스트리트는 벨파스트 서부의 개신교 지역과 가톨릭 지역을 연결하는 여러 거리 중 하나다. “디비스 스트리트의 국제 장벽(International Wall on Divis Street)”

은 앤드류스 밀가루(Andrews Flour) 공장의 남쪽 경계에 위치해 노섬벌랜드 스트리 트(Northumberland Street)부터 베벌리 스트리트(Beverley Street)로 이어지는 긴 벽 이다.

233) 김정희, 「복원된 청계천과 그 후 - 계몽주의적 프로젝트의 포스트모던적 실현」,

역사, 북아일랜드 트러블과 세계 분쟁을 벽화의 한 화면에 담는 것은 각 각의 사건이 지닌 의미가 반-제국주의나 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묶여 간 략히 소비된다는 측면에서 벽화의 문화상품화의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 을 것이다.

휴전 이후 새로운 변화 중 하나는 벽화가 없던 새로운 지역에 벽화 가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노동자 계층 지역 안에서만 볼 수 있도 록 그려졌던 벽화들이 관광 도시라는 타이틀에 맞춰 종파 중립 지역이나 도심 등으로 확장되었다. 닐 자만은 노동자 계층의 내부 결속력을 키우 고 영국 정부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려지던 벽화가 이때 부터 더 넓은 사회를 대상으로 제작되었다고 보았다.234) 이러한 변화는 벽화가들이 이전과 다른 목적으로 벽화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벽화의 문화상품화는 경제적 이익 추 구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었지만, 벽화 자체는 정치적 발언을 지속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북아일랜드 분쟁을 세계에 알리 는 창구가 될 수 있었다.

1994년 이후 특히 공화주의 벽화가들은 영국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벽화 주제와 형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그 결과의 하 나로 전쟁장면 대신 과거 아일랜드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기념하면서 아일랜드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벽화들이 제작되었다. 무엇보다 새 롭게 제작된 공화주의 벽화는 전반적으로 공화주의만의 양식을 만들어 벽화에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아일랜드의 전통적 매듭 장식(knotwork)으 로 벽화의 외곽을 둘러서 거대한 액자 효과를 준 점이 그러하다. 매듭의 형태는 앞서 설명한 중세 아일랜드의『켈스의 서』(도 62)의 복잡한 도 안부터 단순한 사슬 형태까지 벽화마다 다르게 적용되었다. 다만 모든 매듭 장식은 그 라인 장식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짙은 배경색에 흰색을 사용해 대비를 주거나 화려한 칼라로 채색되었다. 이러한 액자 효과의 테두리는 공화주의 벽화를 로열리스트 벽화와 구분하는 고유의 양식으로 점점 많은 수의 공화주의 벽화에서 발견되었다.

『현대미술학논문집』, 제12집(2008), pp. 185-87.

234) Wallace(주 21), pp. 183-84.

공화주의 벽화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형식적 변화를 시도한 것 외에 도 아일랜드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벽화 주제로 선택 했다. 19세기 유명 아일랜드 화가 페트릭 J. 하버티(Patrick J. Haverty, 1794-1864)의 1844년 작 <리머릭 파이퍼 The Limerick Piper>를 옮겨 그린 벽화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도 68). 하버티의 원작에는 맹 인 거리 악사였던 파드라이그 오브라이언(Pádraig Ó Briain)이 아일랜드 자연을 배경으로 어린 딸을 옆에 두고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장면이 묘사 되어 있다. 이 작품은 화가가 오브라이언의 훌륭한 연주실력과 고상한 용모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렸다는 사실로 유명해졌고, 가난하지만 기품 있는 거리 음악가는 아일랜드인들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235) 1980년대 말 제라드 켈리가 무력을 사용하는 공화주의 이념 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고대 아일랜드 신화를 이용했던 것과 달리, 1990년대 중반부터 벽화가들은 가톨릭 민족주의자들에게 문화적 자부심 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실존 인물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5년 여름 동안에는 대기근 150주년을 맞아 대기근을 주제로 한 벽 화가 서벨파스트 커뮤니티 축제인 포베일(Feile an Phobail)의 후원을 받 아 가톨릭 거주지역에 여러 점 제작되었다. 이 중에서 뉴 로지(New Lodge)에 지금까지 보존된 한 벽화에는 평온한 아일랜드 대자연을 배경 으로 굶주린 세 명의 여성과 한 아이가 말라버린 농지를 뒤지고 있는 장 면이 묘사되어 있다(도 69). 이 벽화는 대기근으로 굶주린 아일랜드 농 민들을 구호하지 않은 영국 정부와 지주계급에 대한 비난을 포함하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로즈나린 애비뉴(Rosnareen Avenue)에 그려진 같은 주제의 벽화에는 “감자 수확이 실패하고 대기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 채 영국 병력이 식량을 배로 수송하는 것을 지켜보았다”라 는 문구가 적혀 있다(도 70).236) 이 벽화의 중앙에는 평야 위에 뼈만 앙 상하게 남은 세 모녀가 앞쪽으로 펼쳐진 들판에 숨져 있는 사람들을 바

235)

https://www.ouririshheritage.org/content/knowyour5k/the-limerick-piper-padraig-obr iain-born-in-labasheeda-co-clare-1773, 2020.10.8.

236) Rolston(주 222), p.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