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미술계는 트러블 시기 노동자 계층의 준군사조직들이 주 도한 벽화 문화를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고 벽화 제작에 동참하지 않았 다. 그러나 미술계가 벽화 제작에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벽화를
‘예술의 한 종류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 별개로 1977년부터 시작된 노동 당 정부의 벽화 프로젝트에 벨파스트의 미술대학이 직접 관여했다.
영국 노동당 정부는 1977년 ‘스프루스 업 벨파스트(Spruce Up Belfast)’라는 벽화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정부가 이 커뮤니티 벽화 프로젝트에 자금을 댄 동기는 가톨릭 시민권 운동 이후 10년 가까이 폭 력을 자주 직접 경험한 노동자 계층 거주민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벽화 프로젝트를 진행한 또 다른 배경 에는 북아일랜드 분쟁을 완화하기 위해 침체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판 단했던 노동당 정부의 국무장관 로이 메이슨(Roy Mason)의 의도가 있 었다. 1970년대 중반 영국 정부는 경제 위기 상황에 있었다.145) 1976년부 터 1979년까지 북아일랜드 국무장관을 맡았던 로이 메이슨은 해외기업 유치를 위해 먼저 벨파스트 도시 환경 개선을 시작했다. 그는 해상과 항
145) 김정희는 이 당시 영국이 “1971년 보수당 정부(1970-74) 시기에 이루어진 고정환율 제도의 붕괴 후 시작된 경제 쇠퇴”와 “1973년 유류가격 폭등과 그에 따른 세계 경기 의 후퇴, 1976년 12월에 시작된 영국의 IMF 체제와 함께 이를 가속화한 글로벌 경제 의 확대” 등의 복합적 이유로 경제 위기를 맞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정희, 『문명 화, 문화주의, 기업문화: 영국정부의 예술 정책』,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pp.
226-27.
공편으로 도착한 해외 투자자들에게 벨파스트에 대한 좋은 첫인상을 주 기 위해 1976년 ‘스프루스-업 작전(Operation Spruce-Up)’ 캠페인을 통 해 공항과 항만 주변 조경을 바꾸고 두 점의 벽화를 설치했다. 그 결과 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환경부는 다음 해 이 캠페인을 커뮤니티 벽화 프로젝트로 확대하여 벨파스트 도심에 있는 가톨릭과 개신교 분쟁지역에 적용하기로 결정했다.146)
‘스프루스 업 벨파스트’ 계획에 따라 1977년부터 1980년까지 4년간 영국군,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들, IRA 사이의 분쟁으로 황폐해진 가톨 릭과 개신교 노동자 계층 지역에 벽화 총 40여 점이 제작되었다. 북아일 랜드 환경부(Department of the Environment), 예술위원회(the Arts Council)와 벨파스트의 미술대학이 이 프로젝트를 주관했다. 영국 정부는 벨파스트 시의회(Belfast City Council)의 커뮤니티 서비스부(Community Services Department)를 통해 벽화 프로젝트의 자금을 조달했다. 회화와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주당 40파운드로 고용되었고, 벽화 한 점에 약 1,000파운드의 비용이 소요되었다.147)
벽화 선정과 제작 과정은 보통 커뮤니티 서비스부가 노동자 계층 커 뮤니티를 설득하여 벽화를 그릴 장소를 선정하고, 미술대학 학생들이 커 뮤니티 단체들과 협의하여 벽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한 후 예술위원 회가 기획안을 승인하는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다. 커뮤니티 서비스부는 벽화가 그려질 지역이 준군사조직들이 활동하는 곳이라는 이유로 미술대 학 학생들에게 정치적 내용을 그리지 말 것과 커뮤니티와의 협의 과정을 거쳐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고용된 학생들은 위원회의 지시 대로 지역단체들과 협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커뮤니티 를 벽화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다’라는 의미가 모호하다고 보았다. 주제 선 정부터 페인트 작업까지의 과정 중에서 어느 부분에 거주민들을 참여시 킬 것인가에 대해 커뮤니티 서비스부의 지침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
146) Rolston(주 67), p. 55.
147) Maria T. Simone-Charteris, “State intervention in re-imaging Northern Ireland’s political murals: Implications for tourism and the communities”, in Jonathan Skinner and Lee Jolliffe, eds., Murals and Tourism: Heritage, Politics and Identity, (New York: Routledge, 2017), p. 219.
었다. 미술대학 학생들은 지역 청소년들이 벽화의 한 부분을 그리도록 하는 정도로 타협했다. 빌 롤스톤은 벽화에 커뮤니티 정체성을 포함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협의가 필요하지만, 협의의 수준과 지역민들이 벽 화를 받아들이는 정도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보았 다. 그는 거주민들의 벽화에 대한 수용 여부는 벽화의 주제, 스타일, 커 뮤니티 참여자에 대한 신뢰 정도, 예술가들의 성격 등 복합적이고 수량 화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설명 했다.148)
스프루스 업 벨파스트 프로젝트로 완성된 벽화는 정글과 자연을 그 린 목가적 풍경, 커뮤니티 실존 인물들과 유명 만화 캐릭터 등 주로 세 가지 주제로 나뉜다. 세 주제 모두 동시대의 정치성이 배제되었다는 점 은 같지만, 완성된 벽화에 대한 거주민들의 반응과 벽화 수용 여부는 나 뉘었고 일부는 논란이 되었다.
1977년 여름에 완성된 7점의 벽화 중 하나인 스프링힐(Springhill) 지역 벽화에는 정글을 배경으로 한 야생동물들이 묘사되었다(도 27). 벽 화에는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원시인의 모습을 한 남성이 한 손에 단도를 들고 숲속을 뛰어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주변에는 꽃과 정체를 정 확히 확인할 수 없는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벽화가 완성되자 원시인의 모습을 본 스프링힐 거주민들은 예술가들이 그 지역민들을 야만인으로 모욕했다고 생각해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 벽화를 그린 브렌 단 엘리스(
Brendan Ellis)
는 독일 표현주의에서 영감을 얻어 벽화를 그 렸으며 지역민들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아인스워스 애비뉴 (Ainsworth Avenue) 주민센터 외부에 그려진 추상적 풍경화는 완성 직 후 거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원인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는데, 추상적인 스타일에서 비롯된 거부감이거나 벽화 제작에 참여한 학생들과 커뮤니티 단체 사이의 문제로 추측되었다.149)반면, 다섯 명의 지역 아이들의 실제 모습을 재현한 우드베일
148) Rolston(주 67), pp. 55-58.
149) 위의 책, pp. 58-59.
(Woodvale) 벽화는 거주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언론 보도를 통 해 벽화 프로젝트가 홍보되기도 했다(도 28). 벽의 반 이상을 채운 아이 들의 모습은 일률적이지 않고 실질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벽화에는 아이 들의 찡그린 얼굴이나 입을 벌려 소리치는 장면이 포착되어 그려져 있 다. 이 벽화는 현지인들의 참여 때문이 아니라 현지 아이들을 묘사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고 평가되었다.150)
첫해 프로젝트 결과에 대해 벨파스트 시의회의 커뮤니티 서비스부는 커뮤니티 벽화가 환경 개선에 효과가 있다고 평가했고, 미술대학 학생들 은 재정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커뮤니티 단체들 은 벽화가 커뮤니티 결속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벽화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다.
1978년 여름에 커뮤니티 벽화 프로젝트가 재개됐을 때 시의회 위원회는 같은 과정을 거쳐 18점의 벽화가 완성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151)
1977년에 제작된 벽화들 가운데 현지 아이들을 묘사한 벽화의 반응 이 좋았던 것처럼, 1978년 벽화에서도 벤치에 앉아있는 커뮤니티 거주민 들을 그린 세인트 제임스(St James) 지역 벽화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 다. 지역 축구선수나 권투 글러브를 낀 현지 아이들을 그린 벽화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도 29). 이 벽화에는 지역 권투 대회에 참가하기 위 해 모인 네 명의 청소년들이 그려져 있다. 선수복을 갖춰 입고 권투 글 로브를 낀 네 명의 아이들 뒤로 코치로 보이는 남성이 보인다. 이처럼 벽화의 주제로 지역 출신을 주인공으로 그리자는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할랜드 앤 울프 조선소 용접공을 그린 아인스워스 벽화는 지역민 들이 외면했고 곧 훼손되었다(도 30). 이 벽화는 조선소 내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5개의 작업대 중 네 곳은 비어있고 한 용접공이 작업복을 입고 용접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작업복을 입지 않은 세 명의 남성 이 그 뒤에 서 있다. 이 벽화가 파괴된 이유는 그 당시 심각했던 실업 문제에 대한 지역민들의 항의 표시라고 해석되었다. 1978년에는 조선소 에서 용접공을 하던 개신교 노동자 계층 대부분이 실직한 상태였다. 이
150) 앞의 책, p. 59.
151) 앞의 책, pp. 59-60.
사례는 현지인을 그린 벽화가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152)
같은 방식으로 1979년과 1980년 여름에 각각 7점의 새로운 벽화가 제작되었는데, 이는 1979년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한 이후 커뮤니 티 벽화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축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벽 화 주제는 이전과 달리 주로 스파이더맨과 백설 공주와 같은 동화나 만 화 속 한 장면이 선택되었다(도 31). 이 벽화에는 스파이더맨이 거미줄 을 펼치며 한 건물에서 다음 건물로 넘어가는 장면을 하늘 위에서 바라 보는 역동적인 구도로 그려져 있다. 처음 2년 동안 벽화 제작에 참여한 지역민들은 주로 청소년층이었다. 롤스톤은 벽화 프로젝트에 고용된 학 생들이 청소년들에게 미술 수업을 하고 미술대회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 을 병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벽화 주제에 동화나 아이들이 선호하는 이 야기가 많아진 배경으로 설명했다.153) 이처럼 벽화 프로젝트 첫해인 1977년의 벽화부터 1980년의 벽화까지 확실히 일관되게 정치적인 주제 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커뮤니티 실존 인물들조차 더는 그려지지 않았다. 그 자리를 동화나 만화 캐릭터 같은 비현실적인 주제가 차지했는데, 이는 논란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한 주제 선택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제프리 슬루카(Jeffrey A. Sluka)는 스프루스 업 벨파스트 프로젝트 가 1981년 그라피티에서 탈피한 공화주의 벽화의 출현에 영향을 주었다 고 보았다. 개신교 지역과 달리 가톨릭 지역은 벽화 그리기 전통이 없었 지만, 가톨릭 노동자 계층은 벽화가 시 정부의 계획에 따라 그려지는 것 을 목격했고 이런 형태의 예술에 대한 공동체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54) 그러나 빌 롤스톤은 슬루카의 견해에 대해, 벽화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벨파스트 이외 지역에서도 1981년부터 벽화가 제 작되었다는 점을 들어 정부가 지원한 벽화 프로젝트와 공화주의 벽화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고 반박했다. 1977년부터 4년간 공공기관 주도로
152) 앞의 책, pp. 60-62.
153) 앞의 책, p. 65.
154) Sluka(주 77), p.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