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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시민권 운동과 공화주의 벽화의 등장

북아일랜드 벽화 중 전설적인 <당신은 지금 자유로운 데리로 들어 가고 있다 You are now entering Free Derry>는 1969년 1월 데리의 보 그사이드 지역에 제작되었다(도 11). 이것은 제3차 가톨릭 시민권 운동 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보그사이드는 가톨릭 시민권 운동이 시작되자마 자 IRA가 ‘자치 구역’으로 선포하고 바리케이드를 쳤던 가톨릭 빈민 지 역이다.83) 이 슬로건은 국가 공권력 출입을 금하겠다는 하나의 경고문으 로 볼 수 있다. 처음에 손글씨로 쓰였던 이 슬로건은 같은 해 8월 제임 스 캘러헌(James Callaghan) 내무장관이 데리를 방문했을 때 두꺼운 인 쇄체로 다시 쓰였고 가톨릭 자치 구역에 개신교도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주장을 더 분명히 했다.

이러한 그라피티 형식의 첫 벽화는 이 당시 북아일랜드 사회의 가톨 릭 민심을 반영하는 하나의 역사적 기록물로 볼 수 있다. 국가의 비호 아래 오렌지 행진을 하고 윌리엄 3세의 도상을 그렸던 로열리스트들과 달리, 가톨릭 민족주의자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가톨릭 전통 행사를 하 지 못했고 벽화를 그리는 문화도 없었다. 따라서 공화주의자들이 공공 공간에 그라피티로 저항의식을 표출했던 것은 반체제적 시위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그라피티로 표현된 텍스트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가톨릭 교도들의 의사 표명으로 볼 수 있다. 이곳은 이후 ‘자유로운 데리 코너 (Free Derry Corner)’로 불리며 보그사이드의 중심부가 되었고 북아일랜 드 가톨릭 문화의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다. 자유로운 데리 코너는 현재 까지도 가톨릭 시민권 운동 기념 행진이 종결되는 장소로 초기의 슬로건 이 흰 배경에 굵은 활자체로 제작되어 있다(도 12).

실제로 북아일랜드에서 가톨릭교도들의 불만에서 촉발된 시민권 운 동은 예견된 것이었다. 1921년 6월의 첫 선거로 개신교 연합당 의회를 시작한 북아일랜드 스토먼트(Stormont) 의회는 1929년 비례대표제 폐지 를 시작으로 선거구를 개신교 정당에게 유리하게 조정하는 등 가톨릭 정

83) Helaine Silverman, ed. Contested Cultural Heritage: Religion, Nationalism, Erasure, and Exclusion in a Global World. (NY: Springer New York, 2010), p. 79.

당이 성장할 기회를 박탈했다.84) 52석의 하원 의석 중 40석을 개신교 연 합당(the Unionist Party)이 독식했던 스토먼트 의회는 경제적인 측면에 서도 개신교도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대표적 사례가 공공주택 배 분에 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티론 카운티의 던가논(Dungannon) 지역 은 가톨릭 인구가 60% 이상이었지만 지방 연합주의 협의회(the local Unionist Council)는 1945년부터 1968년까지 공공주택의 약 75%를 개신 교도에게 할당했다.85) 왕립 얼스터 경찰대(Royal Ulster Constabulary)인 RUC는 약 90%가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치안 정책에서도 가톨릭교도에 대한 차별이 극명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1919-1921) 중이었던 1920년 즈음 얼스터 지역에서 모집된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oyal Irish Constabulary) 소속의 B-특공대(B-Specials) 역시 전원이 개신교도로 구 성되어 1960년대까지도 편파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86)

차별적인 주택 배분은 특히 가톨릭 시민권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가톨릭교도들은 1968년 8월 24일 주택 배분율이 논란이 되었던 던가논에 서 가톨릭 시민권 운동으로 불리는 행진을 시작했다.87)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 행진은 10월에 데리에서 진행된 제2차 행진에서 개신교 로열리스트들과 충돌했다.88) 충돌 이후에도 이어진 1969년 1월 1

84) 북아일랜드의 스토먼트(Stormont) 의회는 북아일랜드 영토 내의 문제에 한해 법률을 제정할 수 있었다. 북아일랜드 의회 입법부는 왕실, 하원(52석), 상원(26석)으로 구성 되었다. 1921년 선거에서 가톨릭 민족당(6석)과 공화당(6석)은 개신교 의회의 합법성 을 인정하지 않았고 의석을 거부했다. 스토먼트 의회 외에도 북아일랜드는 런던 웨스 트민스터 하원 12석으로 북아일랜드 유권자를 대표했는데, 개신교 연합당이 항상 최 소 8석을 차지했다. Wallace(주 21), p. 31, p. 43 and p. 77.

85) Paul Arthur and Keith Jeffery, Northern Ireland since 1968, (USA: Blackwell Publishers Ltd, 1988, Second edition 1996), p. 5.

86) RIC는 그 역할에 따라 A, B, C로 나누어 모집되었다. 상근 경찰 A-특공대, 무급으 로 주 1회 야간 순찰 근무를 서는 B-특공대와 비상시에만 근무하는 C-특공대를 편 성하여 지원자를 받았다. B-특공대의 지원자가 가장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Miller(주 1), p. 127.

87) 이미 1967년 1월에 조직된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NICRA, the Northern Ireland Civil Rights Association)는 지방 선거에서의 보편적 선거권, 주택의 의무점수제, 특 수권력법와 B-특공대 폐지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민권 협회 활동은 일 년 후 가톨릭 시민권 운동이 시작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Cronin(주 17), p. 188.

88) 북아일랜드 시민권운동은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을 위한 1964년의 시민권법(the Civil Rights Act), 1965년의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1968년의 4주택법(Four Housing Act)으로 이어진 시위에 영향을 받았다.

일 제3차 행진은 민중의 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로 알려진 퀸즈 대학(Queen’s University, Belfast)의 좌파 단체가 참여하면서 규모가 커 졌다.89) 션 크로닌은 북아일랜드 개신교도 중에서 가톨릭교도가 받는 차 별을 인지하거나 인정하는 이들이 적었기 때문에 가톨릭 시민권 운동이 실패했다고 보았다.90)

가톨릭 시민권 운동은 1969년 8월 12일 데리의 ‘보그사이드 전투 (the Battle of the Bogside)’에서부터 유혈 분쟁으로 전환되었다. 이 유 혈사태는 개신교 연례행진 중 하나인 ‘수습소년단(Apprentice Boys)’의 행진에서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거주 지역인 보그사이드를 통과할 때 가 톨릭교도가 행진 참가자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 수습소년단은 1689년 개신교도가 모여 살던 데리 성이 가톨릭 자코바이트 군대의 공격 을 받자 데리 성문을 닫아 ‘데리 포위(Siege of Derry)’의 시작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단체의 이름을 지칭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봉 외에 총기 사 용이 금지되었던 B-특공대가 규정을 어기고 가톨릭교도에게 발포하면서 북아일랜드 경찰대가 진압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후에 이 사건은 보그사이드 전투로 불리게 된다. 보그사이드 전투의 영향으로 곧 주변 가톨릭 지역과 벨파스트에서도 폭력사태가 일어났다.91)

스토먼트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게 영국군 파병을 긴급히 요청 했고, 영국군이 8월 14일 현장에 진입하고 나서야 시민소요가 진압되었 다. 개신교 공격으로부터 가톨릭 지역을 보호하고 두 지역 사이를 분리 하는 임무를 맡은 영국군은 벨파스트(Belfast) 서부의 개신교 지역인 샨 킬 로드(Shankill Road)와 가톨릭 지역인 폴스 로드(Falls Road) 사이에 평화선을 구축하고 그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평화의 벽(Peace Wall)’을 만들었다.92) 1969년에 세워진 평화의 벽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Kennedy-Pipe(주 76), p. 44.

89) 민중의 민주주의 일원들은 트로츠키 추종자(Trotskyite)로서 공산주의자였다.

90) 제3차 시민권 행진은 이안 페이즐리(Ian Paisley) 목사 추종자들과 경찰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았다. 1969년 4월 비-종파적 개혁정책을 추진했던 테렌스 오닐 총리의 사임 후 총리가 된 제임스 치체스터 클라크(Names Chichester Clark)는 ‘1인 1표’ 선거권 원칙을 발표하며 가톨릭 시민권 시위자와 개신교 단체 사이의 갈등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Cronin(주 17, pp. 188-90.

91) Kennedy-Pipe(주 76), p. 49.

국내외 관광객들의 방문 장소가 되었고 평화를 염원하는 방문객들의 손 글씨가 벽을 채우고 있다(도 13). 그러나 1969년의 평화의 벽은 충돌이 가장 심했던 접점 지역에 높은 담을 쌓은 것 외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고 소요사태는 계속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보그사이드 전투의 문제 점을 규명한 영국 정부의 각종 보고서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반감을 더 키웠으며 종파 간의 폭력사태를 막는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했 다.93)

1969년 1월의 3차 가톨릭 시민권 행진에 참여했던 퀸즈 대학의 민중 의 민주주의는 당해 8월에 이 상황을 표현하는 7장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는 기록이 있다(도 14). 도판 왼편의 “바리케이드를 치고든 아니든 투쟁 은 계속된다(The struggle continues with and without barricades)”라고 쓴 포스터는 1969년의 벨파스트 유혈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국군이 바리케이드를 해체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도판 오른편의 “스토먼트를 때려 부숴라(Smash Stormont)”라는 슬로건은 개신교 연합당이 지배하는 북아일랜드 스토먼트 의회를 끝내라는 주장을 표현했다.94) 이 포스터들 은 1968년 여름에 런던에서 시작된 포스터 워크샵(Poster Workshop) 일 원들을 1969년 8월에 벨파스트로 불러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95) 그러나

92) Silverman(주 83), p. 75.

93) 1969년에 북아일랜드의 치안 상황을 조사했던 헌트 위원회(the Hunt Committee)는 구식으로 운영된 RUC와 B-특공대 모두 거의 개신교도로만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신 뢰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후속 조사를 맡았던 카메론 위원회(Cameron Committee)는

‘대규모 폭동’을 통제할 인력이 없었던 RUC가 경찰봉 외에 물대포, 최루탄 및 총기 발사로 사상자를 키웠다고 결론지었다. 스카먼 조사위원회(Scarman Tribunal)는 북아 일랜드 경찰대가 가톨릭 시민들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상황에서 IRA와 같은 선동 조직이 주도한 도시게릴라전으로 인해 벨파스트 ‘폭동’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Kennedy-Pipe(주 76), pp. 80-81;

https://alphahistory.com/northernireland/cameron-report-unrest-northern-ireland-196 9/, 2020.5.18; https://cain.ulster.ac.uk/hmso/scarman.htm, 2020.6.10.

94) 1921년 6월의 첫 선거로 시작된 스토먼트 의회(1931년 완공된 국회의사당 부지 이름 을 따서 1931년 이후 의회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는 1972년 3월 폐지될 때까지 북아 일랜드를 지배한 개신교 연합당 정권이었다. 스토먼트 의회 폐지 후 북아일랜드의 가

톨릭교도에 대한 차별 정책은 단계별로 수정되었다.

https://cain.ulster.ac.uk/images/posters/nationalist/index.html 2020.12.20.

95)포스터 워크샵 모임은 1968년 5월 파리의 에꼴드보자르(Ecole des Baux Arts)를 점 령했던 맑시스트와 예술대생의 아틀리에 포퓰라(the Atelier Populaire)에서 영감을 받 았다고 알려져 있다. http://www.posterworkshop.co.uk/aboutus.html 2020.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