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1908년부터 한 세기에 걸쳐 아일랜드 북부에 제작되어 온 벽화를 고찰해 보았다. 본 연구는 동시대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의견 표 명을 위해 제작되었던 벽화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벽화의 사회적 역할과 변화 과정을 분석해 보았다.
본 논문은 북아일랜드 벽화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연구로, 북아일 랜드 벽화 이미지의 기원과 누가 왜 어떤 의미로 벽화를 그렸는지에 대 해 정치·경제·사회적 층위를 고려하여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본 연구는 로열리스트 벽화와 공화주의 벽화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 영국의 아일랜드 침략과 이주의 역사를 살 펴보고 그 역사와 연결된 벽화들의 정치적 의미를 고찰해 보았다. 또한, 벽화 주제와 형식의 변화 요인과 그 방향을 비교하고 한 세기 동안의 흐 름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2021년은 앵글로-아이리시 조약이 체결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앵글로-아이리시 조약은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의 6개 카운티가 영국에 통합되어 1922년에 북아일랜드가 건립되도록 결정한 영국과 아일랜드 사 이의 합의였다. 또한, 영국은 2016년의 국민투표로 결정된 브렉시트에 따 라 2020년 12월 31일까지의 이행기를 마치고 2021년 1월 1일부터 EU를 완전히 떠났다. 북아일랜드가 EU와 육지 경계가 되는 영국 영토라는 점 에서 국경문제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브렉시트 실행을 늦추는 하나 의 요인이었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한 현재, 영국뿐 아니라 서구사회는 앞으로 아일랜드 통일 가능성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큰 관심을 둘 것으로 보인다. 1998년의 성 금요일 협정에 따라 아일랜드 통일은 북아일랜드 거주민들과 아일랜드 공화국 거주민들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북아일랜드가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 공화국의 일부가 될 경우, 그동안 영국 국적 아래서 거주민들의 삶에 묻혀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던 북아일랜드 벽화의 제작 배경과 의미가 재조명될 수 있을 것이 다.
북아일랜드 벽화들의 도상적 의미를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눠 살 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08년에 등장한 로열리스트 벽화와 1969년에 시작된 공화주의 벽화 양편 모두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일 관되게 개신교도들이 가톨릭교도들을 억압해 왔다는 사실을 표명하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1908년에 로열리스트 벽화가 처음 제작된 이유는 아일 랜드 자치법안이 재상정되기에 앞서 윌리엄 3세의 정통성을 계승한 얼스 터 개신교도들에게 얼스터 영토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 이었다. 이것은 가톨릭교도들이 얼스터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을 못 하 게 하기 위한 오렌지회의 전략이기도 했다. 이러한 개신교도들의 정치적 의도는 북아일랜드 건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로열리스트 벽화는 아일 랜드 북부 얼스터의 6개 카운티에 남겨진 가톨릭교도들을 북아일랜드 개 신교 정부의 일당 지배 체제에서 소외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69년 이전에 가톨릭교도들이 그린 벽화가 거의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가톨릭 차별 정책이 벽화와 같은 전시물에도 적용됐기 때문이다. 1969년 이전까지 북아일랜드에서 벽화는 철저히 개신교도들을 위한 문화였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1981년 IRA 수감자들의 단식투쟁 이후 로열리스트와 공화 주의자 양편 모두 벽화를 통해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제도적 차별과 탄압 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도들이 공공 공간에 벽화를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1981년부터 급증한 공화 주의 벽화는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탄압에 대한 증언이었다. 또한, 공화주의 벽화는 공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을 정 도로 분노한 가톨릭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행보의 결과였다. 반면 1985 년의 앵글로-아이리시 협정으로 인해 로열리스트 준군사조직들이 윌리 엄 3세 도상 대신에 가톨릭교도들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을 그렸다는 사 실은 과거 17세기부터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해 왔던 개 신교 로열리스트들의 사고방식이 20세기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편 1998년 북아일랜드 분쟁 종식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실질적인
유혈사태가 거의 사라진 2000년대 중반 이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는 개 신교도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화합을 주제로 벽화 교체 프로젝트를 시작 했다. 그러나 개신교 우월주의적 관점은 정부에 의해 제작된 벽화에서도 여전히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소속되어 있는 한 얼스터 역사의 일부라는 이름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1980년대 공화주의 벽화는 북아일랜드 내부의 종파 간 분쟁과 별개로, 북아일랜드에서 활동한 IRA와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 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일랜드 자유국(1922-1949) 을 거쳐 1949년에 영국에서 완전히 독립한 아일랜드 공화국은 아일랜드 독립전쟁(1919-1921) 승리의 주역인 IRA에 우호적일 수 없었다. 1921년 아일랜드 분할에 반대했던 조약반대파 IRA는 아일랜드 내전(1922-1923) 이후 숙청을 당했고, 1950년대 북아일랜드에서 재개된 IRA의 무장활동 역시 아일랜드 공화국의 견제를 받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1969년부터 공 화주의 벽화를 그린 임시파 IRA 역시 아일랜드 공화국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영국의 강력한 치안 정책 아래 폭력조직이라는 이미지가 더욱 부 각되었다. 이것은 북아일랜드 가톨릭 민족주의자들이 트러블 초기인 1970년대에 IRA를 지지하거나 IRA 활동에 동참하는 것을 막았던 요인 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981년 IRA 수감자들의 단식투쟁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지원 이 없는 상황에서 IRA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 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공화주의 벽화에는 아일랜드의 통일을 염원하는 IRA 시위자들의 초상화가 그려졌고 그들의 글이 적혔다. 이 과정에서 공화주의 벽화는 북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이 결속하고 아일랜드 공화국 이 트러블의 종식을 위해 영국과 적극적으로 협의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가톨릭 아일랜드인들 사이의 갈등도 포함하고 있 는 공화주의 벽화는 단순히 영국 정부와 개신교 연합주의자들의 탄압에 대한 저항 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분열된 가톨릭 아일랜드 민족의 화합에 대한 희망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로열리스트 벽화는 한 세기 이상 계속되어 온 얼스터 개신교
도들과 영국 정부와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본적 으로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은 ‘영국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영국시민 권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이들이지만, 영국 정치계와 개신교 연합주의자들 의 관계는 이해관계에 따라 항상 전복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특히 아 일랜드 자치법안 상정 문제는 19세기 말부터 개신교 연합주의자들이 영 국 정부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1973 년의 서닝데일 협정에 반대했던 로열리스트들의 총파업이나 1985년의 앵 글로-아이리시 협정 이후 연합주의자들의 강경 대응 역시 동일한 역사 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85년 즈음 등장한 군국주의적 도상은 연 합주의자들 내부에 존재했던 반동 문화의 발현으로 볼 수 있고 영국 정 부와 얼스터 개신교도 사이의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본 논문은 북아일랜드 벽화가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결 구 도로만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경제적 층위 안에서 벽화의 의미를 세분해서 봐야 한다는 점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개신교 노동자 계층과 가톨릭 노동자 계층이 시작한 북아일랜드 벽 화는 현재 북아일랜드에서 하나의 대중적 문화로 소개되고 있다. 무엇보 다 1980년대부터 개신교 패배주의 문화와 가톨릭 저항 문화가 벽화로 경 쟁적으로 그려진 데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벽 화를 후원했다는 점에서 벽화는 북아일랜드만의 독특한 문화가 되었다.
또한, 정부뿐 아니라 거리 미술 축제나 문화단체들이 새로운 벽화 제작 에 계속 참여하면서 벽화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북아일랜드 벽화는 분쟁을 소재로 한 문화상품화라는 측면에서 비판의 시각도 있지 만, 북아일랜드 분쟁을 해외에 알리는 하나의 창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관광 상품화로 이용되는 지역과 몇몇 노동자 계층 지역을 제 외하고 벽화는 재개발이나 지역 재생 과정에서 제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 통일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서 로열리 즘 이념과 공화주의 이념 논쟁이 과거 분쟁의 유산이 된 현재, 몇몇 벽 화 교체 프로젝트들의 결과물과 새로운 벽화 동향은 2000년대 초까지의
벽화와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벽화의 지속 가치 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아일랜드 벽화는 아일랜드 통일이 이루어지는 가까운 미래에 통일로 인해 파생되는 새로운 문제를 다루며 또 다른 변화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벽화를 트러블의 유산으로 여기며 기념관에 보존하고, 벽 화를 대체할 새로운 비판 문화를 생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20세기 북아일랜드 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민심이 표현된 북아일랜 드 벽화는 역사적으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주로 영국과 북미에서 진행된 북아일랜드 벽화에 관한 연 구는 미술 관련 분야보다 사회학이나 정치학, 인류학 등의 분야에서 이 루어졌고, 벽화연구가 가톨릭 민족주의보다 개신교 연합주의 측면에 치 우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남쪽의 아일랜드 국가와 분리되어 영국 국가의 일부로 한 세기를 보낸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본 연구자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이 통일되 는 가까운 미래에, 현재까지 북아일랜드에서 진행되어 온 벽화에 관한 연구가 재조명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향후 북아일랜드 벽화연구는 아 일랜드 국가 아래서 이전에 다루어지지 않은 측면들이나 주장들을 논의 할 기회가 더 풍부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