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ISC의 역사성과 자기위치의 모색

아르헨티나는 헌법 상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나, 동시에 제2조에서 '연방정 부는 로마카톨릭의 종교적 지위를 유지한다(el Gobierno federal sostiene el culto católico apostólico romano)17)'고 명시한 카톨릭 국가로, 총 인구의 약 76%가 로 마카톨릭 신자로 추산된다18). ISC는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정부에 등록된 로마카 톨릭 교회 총 249개 중 유일한 단일 종족공동체(colectividad coreana, 한인 공동체) 로19), 이들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종교적・사회적 구조와 관계들로 설명된다.

ISC는 카톨릭 내 별도의 종족공동체로서 요구되는 제반 요건들을 갖추고 있는데, 우선 인구 면에서 현재 2만 천여 명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인 인구 중 약 13%에 해 당하는 2천 7백여 명의 재적인원을 보유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한국 천주교 전주교구 에서 2인의 사제가 파견되고 있으며, 한국의 여타 천주교 교구 및 인사들과의 교류를

17) 아르헨티나 상원, “아르헨티나 국가헌법(Constitución de La Nación Argentina),"

http://www.senado.gov.ar/Constitucion/capitulo1 (2015. 3. 15 접속)

18) 2014년 현재 아르헨티나 총 인구(2014년 추정 약 4천3백만 명)의 72-90%가 로마카톨릭 신자로 추산된다. 카톨릭 교회는 국가로부터 세금 감면, 학교 지원 우선권 등의 혜택을 받게 되는 반면, 여타 종교단체의 경우 종교청(Secretaría de Culto)에 종교가 아닌 시민단체로 등록하고 정기적으로 그들의 지위 유지(보전) 상황에 대하여 보고해야 하는 등 로마카톨릭은 사실상 아르헨티나에서 국교로서의 독 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미국 국무부, “2014 세계 종교 자유 보고서- 아르헨티나,”

http://www.state.gov/j/drl/rls/irf/religiousfreedom/index.htm#wrapperv (2016. 3. 19 접속) 19)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정부, “종교시설 주소(Direccí́ó́n General de Cultos),”

http://www.buenosaires.gob.ar/sites/gcaba/files/catolicos_apostolicos_romanos_1.pdf (2015. 2. 27 접속)

통해 관련 정보와 프로그램 교환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까스떼샤노에 능숙한 한인 2-3세들과 달리, ISC의 주축성원들인 이주 1-1.5세의 경우 현지어로의 의사소통에 어 려움이 크기 때문에 한국어와 한국식 카톨릭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공동체가 구성ㆍ 운영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한인들만의 카톨릭공동체가 별도로 존재하게 된 종교적 이유들이 설명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이민 붐이 일어나기 이전 1960년대 말에 태동한 ISC의 역사와 그간의 부침을 고려할 때, 한인 카톨릭의 존립은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사회적 맥락 에서 변화해 온 한인 디아스포라의 위치를 따라 과정적 차원으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ISC가 설립되고 지금의 안정적 지위를 점하기까지 거쳐 온 지난한 시간들은 단 순히 종교적 요소들로만은 설명될 수 없는, 그들이 흔히 민족성이라고 퉁쳐서 이야기 하는 자질과 역량으로부터 ‘문화적 차이’를 성원권의 경계 안으로 끌어오기 위한 내・

외부의 인정과 관계된 정치적 과정에 다름없었다.

[남동민 토마스, 60대, 주임사제, 2012년 부임, 미국・페루 사목 경력, 1975년 사제서품]

- 남동민: 여기도 그렇지만 어디서나 우리 한인성당(ISC)처럼 자기 나라 사람이나 같은 민족끼리 교회 세우고 하는 건 한국인들이 제일 특출나. 유대인들이야 유대교가 워낙 강하니까. 그리고 여기에서 일본이나 중국 성당은 들어보지도 못했어. 없는 걸로 알 고 있어. 남미 다른 나라 이민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 같고 문화가 비슷하니 따로 공동체나 성당을 만들 필요가 없지. 미국에서도 그래. 남미 출신들이 미국에 이민 와 서는 인해전술 같이 원체 많은 수가 현지 성당에 쫙 몰려오면 미국 신자들이 싫어서 성당을 떠나고, 그러다보면 결국 남미 사람들 성당이 되는 거야.

(중략)

한인들은 어딜 가나 우리끼리 모이고 같이 김치도 만들어 먹고, 그렇게 대부분 따로 뭔가를 만들려는 경향이 강하지. 남미가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 다른 민족들은 우리처럼 아예 성당과 공동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현지 성당에서 자기 언어로 끼 리끼리 특별미사를 진행하는 정도지, 따로 공동체를 만드는 경우는 많지 않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단일 종족공동체로서 ISC의 특수성은 종교적 요인 외에 한인 들의 강한 종족성과 응집력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 곳에서 현재 한인들의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낸 원동력으로 회자되는 종족적 특성은 ISC의 인정 과정에서도 핵심동력으로 거론된다. 여기에서 한인들의 종족성은 사회경제적 성취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세속적 힘(power)이지만, 또한 카톨릭공동체의 성장을 주도하는 종교적이고 신성한 힘으로도 전환된다. 종족성과 같이 신앙 이외의 자질이 종교적 장 내에 차별 과 배제의 경계를 구성할 때, 소외된 집단의 대응은 차별받지 않을 동등한 성원권과 차이에 대한 인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문화적 시민권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고 차이 에 기반한 공동체와 공간을 확보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문화적ㆍ사 회적 차이에 기반한 연대와 실천은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보장하기 위함이라는 종교적 대의로써 해석된다. 이는 ISC가 아르헨티나의 독자적인 한인 카톨릭공동체로 자리잡 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와 한국의 교계 사이에서 전개해온 인정투쟁 속에 그 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ISC가 전개해 온 그간의 노력은 현지 사회에서 인종적․계층 적으로 차별화된 한인들이 종교를 통해 온전한 성원권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는 동시에 종교와 종족, 한인사회 및 원주민사회와 같이 ISC를 둘러싼 이중의 경계들 이 생산되고 보다 선명하게 내면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68년 경, 백구촌 인근의 한인 10여 가구가 모여 미사를 보면서 이루어진 초기 공동체의 태동은 이민 이전부터 카톨릭이었던 이들을 중심으로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 된 다분히 종교적인 회합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후 한인 사제 파견요청과 이를 통한 신앙의 심화를 도모하면서부터 카톨릭이라는 종교 안에서 오히려 한인들의 종족 적 경계가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우리, 한국인 사제 한 분 모십시다. 도무지 미사 때 말을 못 알아들으니 자꾸 분심(分 心)이 생겨 이거 안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어디 쉬운 노릇입니까? 언감생심이지요.”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맙시다. 지금 빠라과이 케이스로 아르헨티나에 재입국하는 교민들이 많으니 앞으로 성당 교우들도 분명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신부님을 모시게 되면 그때는 교무금을 거둬야잖습니까? 그러면 신부님 성무비(생활비)는 해결될 테고, 그러니 한 번 우리 밀어부쳐 봅시다.”

(중략)

고국방문을 하는 교우나 교민이 있으면(그 당시의 고국 방문은 대단히 어려운 여행이었 다) 그런 인편을 통해 꼭꼭 탄원서를 보냈으나 한국주교협의로부터 아르헨티나 교우들 에게 실망스런 소식이 전해왔다.

[아르헨티나 한인 본당 30년사, p.66 ]

한인 카톨릭 모임에서 별도 공동체 설립과 사제 파견을 요청하게 된 단초는 원주민

교회의 까스떼샤노 미사에서 부딪치는 언어 장벽으로 인해 ‘분심(分心)’이 생겨 신앙 의 심화에 장애가 된다는 종교적 사유에서였다. 하지만 당시 사제 파견에 회의적이었 던 한국 교계를 설득하는 절차부터 종교적 열망만으로 한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제 파견절차는 모국과의 직접 접촉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주 교청을 통해 한국주교협의회에 애로사항을 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 서 신자들은 문화적 차이로부터 겪는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인정받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우선 현지 교계와 우호적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이주민 정착을 지 원해 온 카톨릭이민문화연구센터20)가 양국의 사제파견 절차 및 항공과 숙박 등 부대 비용을 지원하여 사제파견이 성사되었고 ISC의 모태가 형성된다.

당시 신자 규모나 재정적 자구책이 부재하였던 한인들이 현지 교계에 어필할 수 있 었던 데는 이민자들의 나라이자 카톨릭 국가로서 아르헨티나의 특수성, 이를 배경으 로 디아스포라의 위치를 둘러싼 국가와 종교 사이의 긴밀한 정치적 공모관계가 작용 하였다.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에는 유럽과 인근 국가로부터 국가체계와 법적 테두리 에서 수용되지 않는 불법 이민자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왔다. 국가는 제도적으로 이들의 불법성을 용인하지 않지만, 노동시장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종 교계를 통해 인도적 차원에서의 이주민 지원은 활발히 이루어져왔다. 따라서 아르헨 티나 카톨릭 사회 내의 차별화된 집단으로서 ISC에 대한 성원권의 인정과 지원 또한 이같은 사회와 종교계의 상호 공조구도의 측면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 교계가 한인들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존중으로 ‘카톨릭’이면서

‘한인’이라는 보편적이고도 차별화된 성원권을 인정함으로써 결국 한인 카톨릭은 원주 민 성원들과 분리된 단일 종족종교공동체로 분화되어 갔다. 1970년 한국 천주교협의 회로부터 주임사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정식 파견되자 한인들은 기존에 미사를 보 아왔던 원주민 교회의 부속 경당을 빌려 별도의 미사와 공동체 활동을 운영해가게 된 다. 같은 해에 사목위원회가 구성되면서 ISC의 태동은 본격화되는데, 이후 여러 원주 민 교회에서 차별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인 카톨릭공동체의 독 립과 본당 설립이 구체화된다. 한인들이 그간 원주민들과의 사이에서 겪어온 갈등은

20) 카톨릭이민문화센터의 주임신부였던 리노(Lino) 신부는 한인성당 교우뿐만 아니라, 교민들이 정착 하거나 영주허가를 받도록 지원해옴으로써, 1985년 재아 한인 2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정부로부터 감사 패를 받는다. 동 연구센터는 이민자들의 영주권 확보와 정착을 지원하는 기관이다(ISC 2001: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