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가. 자기 우위적 응답

대상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대상과 물음과 응답의 형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물음과 응답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 라 관계 구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살펴 볼 대상 해석 구도의 양상 인 ‘자기 우위적 응답’은 텍스트의 물음에 학습자 스스로 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성찰적 사고가 ‘자기이해’에 목적을 둔 사고라 할 때, 비평적 에세이 쓰 기 과정에서 학습자가 대상 텍스트를 읽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은 필연적

이며 긍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자기’가 ‘대상’을 통해 이해 된 ‘자기’가 아닌 경우, 기존의 자신을 재인하는 것에 머물 가능성이 크며 성찰 적 사고가 일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다음의 비평적 에세이에서 이러한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한티재 하늘’의 배경인 동학운동 이후 때보다는 많이 발전했지만 ① 아직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은 존재한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산타 분장을 하고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봉사를 갔다. 그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들고 오 르막길을 올라갔는데 힘들고 추워서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선물을 받고 좋아하 는 아이들을 보니 보람 있고 뿌듯했다. (…) 그리고 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아 이의 할머니가 고맙다며 고구마와 옥수수같은 간식거리를 주셨는데, 대가를 바라 고 한 행동이 아니라 받기 죄송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보답하고 싶어 하시는 할 머니의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그 당시 나는 학업스트레스와 친구들로 인한 문제로 우울했고 무기력했다. 그런 데 그 아이들은 나보다 더 큰 슬픔을 가졌음에도 ② 전혀 슬픈 내색을 하지 않고 밝게 지냈으며 작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했다. 나도 그 일을 계기로 밝아지려고 노력했고 남을 돕는데서 나도 성장한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③ 최선을 다해서 살 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④ 소외된 계층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 돕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한티-F-3]

위 인용문을 보면 ①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 고, 이어서 표면적으로는 생략되어 있으나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 한 뒤 그에 대한 응답으로 ② ~ ④에서 ‘작은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하기’,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소외된 계층에 관심 갖고 서로 돕기’ 등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음 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위 인용문의 대상 텍스트인 『한티재 하늘』은 누군가가 소외된 계층을 돕는 문제가 아닌 근대전환기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장편 소 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소설 속 인물 대부분이 밥 먹듯 굶주리며, 소외와 차별의 일상을 살아가지만, 위 인용문의 학습자는 그 인물들을 자신이 봉사활동을 통해 도움을 주었던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과 가난하고 소외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병치시켜, 이들을 모두 어려움에 대한 도움을 받아야 할 시혜적인 대상으로 서만 의미화한다. 이것은 인물들이 ‘더 큰 슬픔’을 가졌다고 하지만, 실제 대상 텍 스트 속 인물들이 그러한 슬픔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는 데에 기인한다. 실제 대상 텍스트 속 인물들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서로 의지 하며 키워갔던 따뜻한 정(情)이나, 정의를 위한 투쟁, 사회의 제도적 억압 속에서도

모성애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한 것 등의 미시적 내용은, ④의 ‘소외된 계층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 돕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학습자 자신의 선언적 명제에 의해 모두 소거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②, ③의 응답 또한 대상 텍스트와의 대화적 과정 속에서 유도된 것이라기보다는 학습자의 자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찰적 사고가 반성적 사고와 질적인 차이를 지니는 것은, 나 자신에 함몰된 기 존의 자아(ego)에서 ‘대상’을 통해 기존에 모르고 있던 새로운 자기(self)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리쾨르가 텍스트를 읽는 것은 텍스트 안에서 우리의 ‘선입견’을 재발견하는 순환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23)한 것은 자기 이해란 언제나 텍스트의 세계에 귀 기울임으로써 인식된 새로운 자기이해여야 함을 알려준다. 그러나 위 학습자의 경우 대상 텍스트에 기반하지 않은 채로 오 히려 자신의 경험이나 판단만을 앞세워 텍스트의 내용을 재단함으로써 새로운 자기이해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특징적 요소 중심으로 대 상 텍스트를 인식할 경우, 자의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는 텍스트를 전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텍스트에 대한 핍진한 이해보 다는 자기 안에서 재구성하려는 의도가 앞서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 인용문을 살펴보자.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생각보다 많은 ‘헬렌’들이 있다. 요즘 뉴스만 봐도 미 혼모, 청소년 임신, 낙태 수술 소식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사실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지레 겁을 먹고 주변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위험 하게 말을 몰아 아기를 지우려고 한 여린 헬렌은 우리가 만든 것일 수도 있다.

(…) 양천구에서 사는 한 여고생은 남자친구와 여러 번의 성관계를 갖다가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되었다. (…) 결국 그녀는 혼자가 되었고 성 인이 된 지금까지 편견 때문에 직업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아직도 생활고에 시달린다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정부나 단체 등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들의 이러한 편견, 무관심, 부정적인 시선들이 우리 주변에 ‘헬렌’

들을 만들고 있다고 본다. (…) 그리고 그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서 그들이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있게 힘을 보태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 다. (…)

‘헬렌’은 우리의 누나, 동생, 친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당장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다고 무관심했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이러한 태도를 반성하고 개선해야만 앞으로 우리 사회의 ‘헬렌’들도 23) 고정희, 앞의 책, 153면.

어떻게 살아야 텍스트 하는가?

미혼모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학습자

일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존중 받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이름-M-1]

위 인용문을 쓴 학습자는 말을 몰아 아이를 지우려고 했던 헬렌의 상황이 얼 마나 절박한 것이었는지, 자신 주변의 한 여고생의 상황을 토대로 해석해간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 속 헬렌의 문제는 비단 텍스트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 며 우리의 문제임을 제시하고, 우리 사회의 수많은 미혼모들의 문제로 확대하여 그러한 헬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개인 차원과 국가 차원의 방안들을 자신 이 살고 있는 실제 맥락 안에서 구체적으로 제안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매끄럽 게 해석의 과정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이러한 해석이 성찰적 사고로 이어졌다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실질적으로는 학습자가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자기를 발 견했다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학습자가 대상 텍스트를 ‘미혼모’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인식한 것에 기 인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응답으로서 ‘미혼모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은, 텍스트 속 인물들의 응답도 아니고, 서술자의 응 답도 아니다. 대상 텍스트에서 헬렌이라는 인물이 타인의 도움을 통해 삶의 의 미를 찾았거나, 혹은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 려 헬렌은 타인의 도움 없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이에 대한 책임 을 스스로 감내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러한 학습자와 대상 텍스트의 대화적 관계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 다.

헬렌은 미혼모이기도 하지만, 여성이기도 하고, 학생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 고, 한 인간이기도 하다. 결국 대상 텍스트가 ‘인간이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때, 학습자는 그러한 텍스트의 응답에 귀 기울 이지 않고, 헬렌이 여성으로서, 학생으로서, 인간으로서 겪는 수많은 문제 상황 들을 ‘미혼모’라는 문제 뒤로 숨겨버린다. 또한 텍스트에 제시된 헬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선택했던 결정들이나, 헬렌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 그러한 선택과 반응이 한 인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구체적 해석과 그것에 자신을 비춰보는 과정은 생략한 채, 오로지 텍스트의 문제를 ‘미 혼모’의 문제로만 환원하고, ‘미혼모’에 대한 자신의 기존의 인식을 자신의 내부 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텍스트의 물음 에 ‘미혼모를 도와야 한다’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게 된 것이다. 학습자는 자기 나름대로 텍스트 속 헬렌의 정서를 재구성하고자 했지만, 텍스트의 응답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로 재구성한 정서는 타자의 정서가 아니라 타자의 것이라고 착 각하는 자신의 정서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 경우는 엄밀한 의미에서 ‘낯선 것’을 통한 자기의 확장이 일어났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24) 따라서 텍스트의 물음과 응답을 훼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경험은 단순히 텍스트를 잘 해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학습자 자신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한편, 텍스트가 아닌 학습자가 텍스트의 물음에 응답하되 그것이 온전한 학습 자의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속한 담론 공동체의 영향을 받은 것인 경우도 있다.

양정실(2006)에서는 이를 해당 공동체의 상식과 고정 관념, 현실 인식이 배어 있는, 보통의 경우에는 성찰할 필요가 없는 상식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문화적 일상어’라고 말한 바 있다.25) 다음의 비평적 에세이를 살펴보자.

우리가 살면서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나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내용이 책 처음 부분에 나온다.

‘선과 악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가. (중략) 내가 경험으로 증언할 수 있는 확실한 진실은 이 세상에는 100퍼센트의 악도 없고, 100퍼센트의 선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51퍼센트의 선과 49퍼센트의 악으로 겨우 선이 편에 서 거나 때로는 그 비율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는 평범한 사 람들일 뿐이다.’(P.69)

24) 위의 책, 280-281면.

25) 양정실(2006), 앞의 글, 100-10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