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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연역적 구조를 통한 구체적 재현

대상 적용의 과정에서 대상 텍스트가 제시한 ‘틀’을 벗어나지 않는 논리적 흐 름을 보이는 경우 연역적 구조에 의한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연역적이라 는 것은 어떠한 법칙과 이론으로부터 예측과 설명을 이끌어내는 추론의 방법이 라기보다, 이미 전제가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통합하는 데 있어서도 텍스트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속성을 함의 한다.

특히 비평적 에세이 쓰기 과정에서 연역적 구조로 대상을 적용하는 경우, 대 체로 예시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의 논증술에 따르 면, 예시란 ‘보다 큰 어떤 것’을 밝혀내기 위한 것으로서, ① 옳은(참인) 의견으 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② 피정의항보다 더 잘 알려진 것이어야 하고, ③ 피정의 항과는 어떤 [구조적] 공통점을 가져야 한다31)는 조건을 지닌 논증 방법의 하나 이다. 굳이 논증이 아니어도 구체적 사례를 들어 보이는 방식은 다양한 글쓰기 와 말하기에서 활용되는데, 비평적 에세이 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습자들이 대상 텍스트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의미 구조로서 예시32)를 활

31) 손윤락, 「플라톤의 논증술 : <정치가>편에서 논증의 세 가지 방법」, 『철학과 문화』 제19 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문화연구소, 2009, 46면.

32) 페렐만의 논증 이론에서는 ‘예시’와 ‘예증’을 구분하여, ‘예시’는 구체적인 현실 사례로부 터 현실 구조의 어떤 원리가 규칙의 존재를 가정하는 귀납적 논거 활용 방식으로, ‘예증’

은 보편 독자의 선결 동의를 얻은 것으로 전제되는 현실 사례로부터 설득 출발하는 연역 적 추론의 기술로 정의한다. 본고에서 의미하는 예시는 대상에서 제공하는 가치가 참임을 전제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으로 페렐만의 ‘예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나, 일반적 으로 예시란 일반적 원리나 법칙, 진술 등을 구체화하는 지적 작용을 의미하며, 본고는 이 러한 일반적 논의를 따르고자 한다. (장성민, 「경험적 논거를 활용한 설득적 글쓰기 교육 내용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2013, 42-51면 참조.)

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단, 이때의 예시는 단순한 수사 체계로서가 아니라 경 험을 일관된 맥락으로 형성하는 의미 연관의 사고 구조로서 기능한다.

특히 비평적 에세이 쓰기에서의 예시는 이러한 플라톤이 말한 예시의 기능에 부합하는데, 대상 텍스트에서 제시한 가치나 삶의 태도가 ‘참’임을 상정(①)하고, 자신의 실제 경험이 텍스트 경험과 동질적이라는 판단(③) 하에 이것을 구체화하 여 자신의 것으로 견인해 오기 위해 그것이 실현된 자신의 실제 경험(②)을 예로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라는 것은 보편적인 것을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특수한 경우33)이며, 구체적 상황에 맞게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낼 줄 모르는 보편적 인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34)는 가다머의 말을 상기할 때, 이러 한 예시의 의미 구조는 대상 이해에서 자기이해로 넘어오는 통로가 된다.

하지만 단순히 텍스트 경험을 실제 경험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경험과 실제 경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자기이해가 시작될 수 있다. 다음 비평적 에세이에서 이러한 노력 이 잘 드러난다.

“노 프라블럼!”은 인도여행 중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가히 장담 할 수 있다. (…) 이미 일어나기로 정해진 일인데 왜 걱정을 하면서 자신을 괴 롭히냐며 오히려 그 문제를 걱정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또 다른 사람 의 잘잘못을 따지며 화를 내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인정 하지만, 어째서 잘못을 따지려 들며 자기 자신까지 나쁜 감정으로 휘말리게 만 드냐는 것이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최근 친구와의 다툼이 생각났는데, 비록 그 친구의 잘못으로 화 를 냈지만 그로 인해 나를 나쁜 상황으로 몰아넣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면 상황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 물론 현실 을 수용한다는 ‘노 프라블럼’의 의미가 잘못 받아들여져 무조건 현실에 만족하 며 부당한 것마저 정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되 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이 ‘노 프라블럼’은 현실에 순응하 는 문제가 아닌, 각박한 사회에서 우리에게 현실을 더 행복하고 긍정적이게 살 아가게 도와주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이번년도 봄에 동남아로 여 행을 가 길거리 상점에서 물건을 흥정 해 원하는 값에 물건을 싸게 사 좋아하 는 내 모습이 생각나 한편으로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 우리나라는 조선시 대 최고의 악법 중 하나로 꼽히는 ‘서얼제도’가 존재하였다. (…) 물론 신분차

33) H. Gadamer, 앞의 책, 200면.

34) 위의 책, 201-202면.

별을 너무 당연시 받아들인다면 신분제가 고착되어버리는 문제가 생길 수 있 을 것이다. 부당한 현실까지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는 ‘노 프라블럼’의 역기능 과 삶을 여유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순기능. ‘노 프라블럼’은 이러한 양 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현재 자신의 상황과 시대의 변화에 알맞게 받아들인 다면, 우리는 ‘노 프라블럼’으로 차루와 같이 항상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F-1]

위 학습자는 ‘노 프라블럼’이라는 문장과 그것을 사용하는 인도인들의 사고방 식에서 ‘뒤통수를 맞은’ 듯 한 깨달음을 얻고, 일면 낯설기까지 한 이러한 사고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삶과의 접점을 찾아나간다. 이를 위해, 친구에게 화를 냈던 경험, 물건 값을 둔 상인과의 실랑이를 통해 결국 스스로 불쾌해졌던 경험을 예로 들어, ‘노 프라블럼’의 사고방식이 인도인에게뿐만 아니 라 자신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단순한 선언적 명제로서가 아니 라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재현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텍스트 경험을 구체화하려는 시도가 무조건적인 것은 아 니라는 점이다. ‘노 프라블럼이 인도인에게도 좋고, 텍스트의 필자도 좋다고 하 였으니 나에게도 좋겠지’가 아니라, 노 프라블럼의 사고방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는 있으나, 그것이 어느 상황에서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부분 에서 이러한 노력의 단서를 파악할 수 있다. 학습자는 대상 텍스트가 얘기하는 삶의 태도에 동의하면서도, 인도인의 삶의 맥락을 실제 삶의 맥락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차이를 인식하여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노 프라 블럼의 사고방식이 ‘현실에 순응하는 문제가 아닌 …… 행복하고 긍정적이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원동력’이라고 하는 부분이나, 조선시대 서얼제도를 통해

‘부당한 현실까지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는 역기능과 삶을 여유롭고 더 행복하 게 만들어주는 순기능’의 양면성을 지적하는 부분을 통해 증명된다. 부당한 현실 에까지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으나, 삶을 긍정적인 관점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서 노 프라블럼이 지닌 의미를 나름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텍스트의 내 용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노 프라블럼’의 사고방식이 가능태(可能態)에서 현실태(現實態)로 옮겨지는 순간의 간극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구성된 의미로, 판단을 통해 자기화하는 과정이 동반 되었다는 점에서 성찰적 사고와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Ⅲ. 1. 1)에서 살펴봤던 [내영-F-3] 인용문의 경우, 대상 텍스트의 의

미를 예시의 구조로 자신의 경험에 적용하고 있으나, 그것이 요소 중심의 표면 적 인식에서 비롯되어 그러한 소재적 공통점의 차원에 머물 뿐, 인디언과 자신 의 삶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비평적 에세이 쓰기를 통해 ‘공존’이라는 상승된 의미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자신의 경험에 적용할 뿐, 자기화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이외에도, 예시를 통해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대상 텍스트의 문제의식을 심화 한 학습자도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경우, 대상 텍스트 물음의 미시적인 부분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잘 못 사는 나라들을 보면 예전엔 그들의 잘못(?)으로 저렇게 됐다고 생 각을 했었다. 그런데 잘 보니 잘 사는 나라들이 걸어놓은 제약(?) 같은 것 때문 에 더 발전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고 (…) 부자 나라들은 본인들은 이미 발전했 으니까 아직 발전 안 한 나라들한테 자신들 기준으로 제약하고 그러던데 안타 깝다. [그들-F-2-반응]

사람은 모두 똑같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누구는 잘 살고 누구 는 못산다. 다 같은 인간인데 말이다. 이쯤 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럼 빌게이츠도 똑같은 사람인데 왜 우리랑 사는 게 다르냐.” 물론 빌게이츠 는 열심히 일해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됐으니 부자가 되는 건 당연한 지도 모른 다. (…) 그렇다면 같은 분야에서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면 보수가 같을 것이다.

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과연 현실에서도 그럴까.

나는 어렸을 적에 훌륭하신 부모님 덕분에 여러 나라를 가봤다. 여러 나라를 가보면서 느낀 것은 딱 보기에도 어떤 나라는 부유해 보이고 어떤 나라는 가난 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부유한 나라에도 가난한 나라에도 똑같이 과일장수가 있 고 버스 운전수가 있다. 하는 일은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왜 누구는 더 부유 하고 누구는 더 가난한 것일까. (…) 딱히 부유한 나라 과일장수가 백설 공주에 게 독사과를 팔 정도로 대단한 장사능력이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설사 그런 능 력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삶이 차이 난다고 하기엔 차이가 너무 커보였다.

(…) 우리는 흔히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능력이 없거나 게을러 서 열심히 일을 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 사실 그들은 베짱이 보다 개미에 더 가깝다. (…) 자유경쟁이 좋은 것은 모두가 같은 출발점에서 출 발할 때의 얘기지 먼저 출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유리한 게 물 보듯 뻔 한일인데 굳이 자유경쟁을 왜 한단 말인가. (…)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평등하게 대하라는 건 아니다. 훌륭한 성과를 올린사 람은 마땅한 보상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책에서 나온 예시로 모두에게 균등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