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공동체운동의 역사와 모습
1) 공동체운동의 모색과 형성
외부로부터 강제되어 발을 들여놓고, 세계체제에 종속되는 길을 밟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오랜 농경사회의 기반인 농촌 마을공동체의 급속한 해체를 야기하 였다. 지난 세기 초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제국주의 식민시대와 미군정기, 한 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체제의 시대를 지나며 우리는 삶의 기반이 붕괴되고 그 터전이 황폐화하는 과정을 보아왔다. 농촌 마을의 공동생산 기반과 공동체적 삶의 틀은 식민시대와 전쟁을 거치며 깨어졌고, 그나마 조선후기 이후 격변기를 거치면 서도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자연발생적 공동체의 원형이라 할 두레도 1960년대 이 후 근대화와 새마을운동 깃발 아래 농촌이 근대화의 제물이 되고, 농업이 산업화 (농약, 화학비료, 농기계 도입 등) 하면서 아예 자취를 감추게되었다.27)
한국전쟁 이후 4․19 혁명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1980년대까지 우리 사회 는 반공을 앞세운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 감시체제 아래 정부 주도적이고 종속적 인, 성장만을 우선시하는 압축적인 경제개발이 이루어졌다. 1960~70년대 본격적으 로 시행되고 자리잡은 한국식 근대화 과정은 대외 종속적인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성장만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경제개발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방식이 구조화하여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개발은 ‘반 공병영사회’로 까지 표현되는 정치적 억압체제와 저곡가-저임금으로 이어지는 농
26) 공동체운동의 시대별 흐름과 유형 특성을 정리한 김성균(2002b)을 참조하여 새로운 관 점으로 보완하고 재구성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생명운동을 중심으로 공동체운동의 흐 름에 대해서는 윤형근(2002) 참조.
27) 강요된 근대화에 따른 자연발생적 농촌 공동체의 해체과정에 대해서는 안승준(1995), 천규석(2005) 등 참조. 천규석(1998)은 사라진 두레를 시대적 요구에 맞게 되살려 도시 와 농촌의 공생적 도농두레운동을 제창하고 있다.
업의 희생과 분배구조의 악화에 근거한 ‘불균형성장’에 힘입은 것이다.
전후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비롯한 경제 원조에 기댄 정 책은 반공의 강화와 정부 주도로 재벌을 키워 정경유착으로 이어지고, 농촌마을에 시멘트와 철근을 공급하며 1970년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증산의 이름으로 농업을 산업화하며 마을공동체를 해체하고 이후 토건국가 방식의 경제성장에 매달리게 하 는 질곡의 뿌리가 된다. 오랜 군사독재체제는 강렬한 민주화의 열망과 민중운동에 의해 1987년 6월 항쟁으로 막을 내린다. 이상 이 시기 정치제도와 시민사회 등 사 회적 배경 요인을 살펴보았다.
공동체운동에 있어서는 전후시기에 가난한 이들이 종교 모임과 농장 등에 모여 빈곤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구적 공동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 공동체 모임에서 고아들을 돌보면서 형성된 ‘동광원’(1948년)과 정신․육체적 질환자들의 치유 공동체인 ‘귀일원’(1965년)이 만들어졌다. 사회적 농장 공동체인 ‘씨농 장’(1957년), ‘한삶회’(1976년) 등과 ‘신앙촌’(1957년), ‘예수원’(1965년) 등 종교 공동 체가 시작되었다. 홍성에는 ‘위대한 평민’을 기르기 위해 작은학교, 기독교정신, 농 업을 중시하고 공동체의 삶을 바탕으로 한 ‘풀무학교’(1958년)가 문을 열었다.
산업화와 함께 급속하게 이루어진 도시화28)와 불균형성장 전략의 그늘로 이농 이 급증하고 도시빈민이 양산되었다.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한 이농자들은 개천가 와 산자락에 달동네를 형성하였다. 1970년대 들어 서울시는 도심의 불량주거지 정 비에 나섰고, 청계천 주변에서 수도권 외곽으로 밀려난 이들은 교회나 사회활동가 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은 가난한 사람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하게되고 이것이 근대 28) 우리나라의 도시화율 변화 추이는 지난 반세기 동안 근대화 과정의 속도를 말해준다.
< 한국과 세계의 도시화율 추이 비교 >
(단위 ; %)
구분 연도 1950 1960 1970 1990 2000
세계전체 29.2 34.2 37.1 42.6 46.6
선진국 53.8 60.5 66.6 72.5 74.4
개발도상국 17.0 22.2 25.4 33.6 39.3
한 국 18.3 33.8 49.8 79.6 86.9
자료 ; 정원식, 2001, ‘도시화’, 행정학 전자사전(www.epadic.com), 한국행정학회
화 과정에서 도시 및 주변 지역에서 나타난 공동체운동의 형성 모습이었다. 성남
‘주민교회공동체’(1973년), 정주형 계획공동체 형태의 화성 ‘두레마을’(1975년), 지역 사회 센터를 중심으로 매개된 시흥 ‘복음자리’(1977년) 마을 등이 형성되었다. 1966 년에는 일본의 야마기시즘이 소개되어 첫 ‘특별강습연찬회’가 수원에서 열리고 협 업농장 실험 과정을 거쳐 화성에 실현지 ‘산안마을’(1984년)이 자리를 잡았다. 농업 의 산업화에 대응하는 생명의 농업을 위해 ‘정농회’(1976년)가 창립하였다.
한편, 근대화와 독재정권의 억압 속에서 공동체가 해체되는 농촌 지역에서도 공동체적인 협동의 삶을 위한 모색이 이루어진다. 이후 한살림운동의 모태가 된 원주캠프29)의 협동운동이 시작된 것도 1970년대이다. 원주캠프가 1972년 남한강 유역 대홍수를 계기로 착수한 강원도 지역의 농촌개발운동은 생산협동, 신용협동, 기계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이용협동, 나아가 생활물자를 공동 구입하는 소비협동 등의 협동운동, 협업운동 등을 함으로써 지금의 생활공동체 운동의 효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운동들은 농업정책, 경제정책, 급격한 사회변화 등으로 농민이 농촌 을 떠나게 되고 농촌의 공동체 삶과 공동체문화가 붕괴되면서 대부분 와해된다.
그러나 생명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 이후, 도시공동체와 연대하는 농촌 생산공동 체의 거점이 되었다(윤형근, 2002). ‘밝음신협’(1971년), ‘원주한살림’(1985년) 등은 지금도 원주 지역의 협동운동에 근거지가 되고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기존 농촌지역 자연발생적 공동체가 근대화 과정에서 대부분 해체되었다. 성장중심 발전전략이 일면 전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역할 하였 으나 생활세계를 황폐화하고 인간적 삶을 가치를 훼손하였으며, 급격한 사회변동 과 억압 체제 아래 전통 공동체를 대신할 새로운 결속원리를 마련하기 위한 시간 적․정신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고, 이를 대체할 사회적 기제가 없이 가족중심의
29)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불렸던 원주에서 장일순과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모 인 운동가들의 그룹을 사람들은 원주캠프라고 표현하였다. 당시 시도된 다양한 협동운 동 가운데 특히 신용협동조합운동은 생활 현장의 서민과 농민들이 고리채의 악순환에 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경제공동체운동이자 경제민주화운동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다. 고인이 된 장일순은 원주캠프의 사상적 지주로 원주캠프 활동이 생명운동으로 방향 을 잡아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원주를 ‘생명운동의 고향’
으로 부르고 있다.
이기주의를 강화하고 학연, 지연을 매개로 ‘의사근대적(quasi-modern)’ 공동체라는 왜곡된 형태를 낳았다(김호기, 1998). 그리고 해방국면과 4․19의 짧은 기간을 제 외하면 그 기간이 두 세대를 넘게 지속되며 생존을 위한 기회주의적, 수동적, 보수 적 습속, 국가중심․중앙중심․전문가 중심에 의존하는 태도를 남기고, 주체적으로 시대를 열어갈 도전과 창의의 기운을 북돋우지 못해 한 세대를 지난 지금까지 대 안적 운동에 부정적 요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