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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유학의 문화 지형과 조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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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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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단 2021년도 국내학술대회

근대 유학의 문화 지형과 조선학

❙일시 : 2021년 9월 10일(금) 13:00-18:00

❙장소 : 전주대학교 대학본관 222호 및 Webex(회의 ID :182 01202220)

❙세부일정

사회 : 전종윤(전주대) 입장 12:30-13:00 회의실 입장

개회식 13:00-13:10 개회사 변주승(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단장)

발 표 및 토 론

1부 조선학의 부흥과 문화지형

발표 1 13:10-13:30 일제강점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과 조선학운동

• 발표자 : 장순순(전주대)

발표 2 13:30-13:50 1930년대 조선 위인의 소개와 조선학의 대중화

• 발표자 : 류시현(광주교육대학교)

발표 3 13:50-14:10 ‘위당 조선학’의 본심감통론이 지닌 시대적 의미

• 발표자 : 이대승(전주대)

토론 14:10-15:10 주제 1:조형열(동아대) 주제 2:변은진(전주대) 주제 3:양선진(경찰대)

중간휴식(15:10-15:30) 2부 ‘조선적인 것’의 탐색

발표 1 15:30-15:50 ‘조선유학’과 ‘조선유교’ 표현의 개념사

• 발표자 : 문경득(전주대)

발표 2 15:50-16:10 일제강점기 ‘조선적’ 기독교의 모색과 최태용

• 발표자 : 김정화(전주대)

발표 3 16:10-16:30 다카하시 도루와 조선적인 것의 탐색

• 발표자 : 황태묵(군산대)

토론 16:30-17:30 주제 1:김윤희(한남대) 주제 2:배귀득(일본 리쓰메이칸대) 주제 3:이경배(전주대)

윤리교육 17:30-18:00 연구자 윤리 교육

폐회식 18:00 폐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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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례 >

❙ 1부 조선학의 부흥과 문화지형

일제강점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과 조선학운동/장순순(전주대) ··· 3 1. 머리말

2. 일제강점 초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

3. 1930년대 실학자의 저작 출간과 조선학의 부흥 4. 맺음말

토론문 _조형열(동아대) / 21

1930년대 조선 위인의 소개와 조선학의 대중화/류시현(광주교대) ··· 23 1. 머리말

2. 조선명인전(1939)의 필자와 내용 3. 전시체제기의 조선 역사와 문화 소개 4. ‘대중’ 독자를 대상으로 ‘조선학’ 구성 5. 맺음말

토론문 _변은진(전주대) /37

‘위당 조선학’의 본심감통론이 지닌 시대적 의미/이대승(전주대) ··· 41 1. 들어가는 글

2. 실심·본심, 조선 유학 비판과 변론 3. 본심론을 통한 주체성 환기 4. 감통론에 바탕한 개방적 민족주의 5. 나오는 글

토론문 _양선진(경찰대)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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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조선적인 것’의 탐색

‘조선유학’과 ‘조선유교’ 표현의 개념사/문경득(전주대) ··· 63 1. 서론

2. ‘조선유교’와 ‘조선유학’의 형성과 분화 3. 식민지 근대의 침습과 항변

4. 결론

토론문 _김윤희(한남대) /85

일제강점기 ‘조선적’ 기독교의 모색과 최태용/김정화(전주대) ··· 87 1. 머리말

2. ‘조선적’ 기독교의 모색 3. 최태용과 ‘조선적’ 기독교 4. 맺음말

토론문 _배귀득(일본 리쓰메이칸대) /107

다카하시 도루와 조선적인 것의 탐색/황태묵(군산대) ··· 111 1. 서론

2. 다카하시 본 「춘향전」과 「흥부전」에 대한 개략적 검토 3. 다카하시 본에 나타난 개작 및 번안의 양상

4. 결론

토론문 _이경배(전주대)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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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과 조선학운동

장순순(전주대)

<목 차 >

1. 머리말

2. 일제강점 초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

3. 1930년대 실학자의 저작 출간과 조선학의 부흥 1) 1930년대 실학자의 저작 출간

2)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실학의 근대적 소환 4. 맺음말

1. 머리말

오늘날 한국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실학이라는 용어는 조선후기의 개혁적 사상 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던 과정에서 명명된 학술용어이다. 실학은 조선후기 18세기를 전후 하여 당시의 사회모순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나타난 한국유학의 새로운 학풍으로, “유교 경전 해석에서 朱子唯一主義를 거부하고, 先秦時代의 원시유학에 입각하여 제시된 王道 政治論的 개혁사상”을 말한다.1)

조선후기의 개혁적 사상으로서 실학을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은 개항기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국가적 위기 탈출의 방략을 마련하고 개항에 주체적으 로 대응하는 길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조선 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인물’에 대해 일정한 관 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申櫶이나 姜瑋 등은 조선 후기 개혁적 인물과 사상 의 존재를 인지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격랑을 헤쳐가는 구국의 방략으로 삼고 자 하였다.

이러한 실학에 대한 관심은 대한제국기에 좀 더 분명히 나타났다. 『皇城新聞』에서는 조 서선후기 대표적인 ‘經濟政治家’로 潛谷 金堉, 磻溪 柳馨遠, 星湖 李瀷, 茶山 丁若鏞, 燕 巖 朴趾源을 언급하고, 다산 정약용을 경제정치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소개하였 다.2) 그리고 조선 후기의 개혁적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국사교과서를 중심으로 하여 좀 더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이들을 經世家나 經濟家로 직접 지칭함으로써 그

1) 조광, 「실학의 발전」, 한국사 35, 국사편찬위원회, 266∼267쪽.

2) 황성신문 102년 5월 19일, 「廣文社新刊牧民心書」

(9)

개혁사상의 성격을 규정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개념화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이후로는 일부 지식인들 가운데서 儒 敎救新的 차원에서 ‘실지학문’을 保國의 방략으로 생각하였고, 조선 후기의 ‘경세가’나 ‘經 濟家’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국권회복의 길을 찾아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3) 이와 함께 실학자들의 저작들이 신활자[沿活字]라는 근대적 형태의 인쇄매체로 간행되기 시작 하였다. 廣文社, 博文社, 皇城新聞社, 廣學書館, 徽文館 등에서 박지원의 연암집(1900 년)이 간행되었고, 欽欽新書(1901년), 牧民心書(1902년), 大韓疆域考(원제, 我邦疆域 考)(1904년), 兒學編(1908년), 耳談讀纂(1908년) 등 정약용의 저서가 간행되었다.

본 글에서는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작이 다수 재간행 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였다.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과 1930년대에 이러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면서 ‘실학’이 對自的 존재(Sein für Sich)로서4) 역사 용어로 설명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경향 중의 하나로서 주요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먼저 일제강점 초기인 1910년대 조선에서 이뤄진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작 출판 붐을 살펴보고자 한다. 2장에서는 1930년대 간행된 실학자의 저작들을 살펴보고, 이 것들으 간행이 1930년대 전개된 조선학 및 조선학 운동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게 되는 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나아가 조선후기라는 봉건적 사회에서 유학이라는 지적 기 반 속에서 탄생한 저작들이 근대 지식인이었던 조선학운동 참여자에게는 어떻게 이해되 고, 소환되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2. 일제강점 초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

1910년대는 ‘붐’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작 출간이 줄을 이었다. 필사본으로 전해져 오던 실학자들의 저작 몇 가지가 근대적 출판 형태로 출간된 적은 있었으나5) 이 시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은 양적인 면이나 종류 면에서 이전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루어졌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서도 출간되었다.

3) 개항기 및 대한제국기의 조선 지식인들이 時弊를 矯捄하고 국가 방어를 논하던 과정에서 앞서 시대 의 개혁적 사상가의 존재에 주목하고 그 업적을 참고하고자 한 양상에 대해서는 조광, 「개항기 및 식 민지시대 실학연구의 특성」, 韓國實學硏究」 7, 2004, 14∽223쪽 참조

4) 조광, 위의 논문, 2004, 212쪽

5) 다음은 1900년대 공간된 실학서를 표로 정리한 것이다.

저서명 저자 편자 출판사 출판연도 비고

牧民心書(4책) 丁若鏞 張志淵 廣文社 1902 印刊본

牧民心書 正文(1책) 丁若鏞 金宇植 博文社 1904 연활자본

欽欽新書(4책) 丁若鏞 張志淵 廣文社 1901 연활자본

大韓疆域考(2책)

[我邦疆域考] 丁若鏞 張志淵 증보 皇城新聞社 1904 연활자본

兒學編 丁若鏞 廣學書館 1908 연활자본

耳談續纂 丁若鏞 徽文館 1908 연활자본

燕巖集 朴趾源 金澤榮 1900 연활자본

*김영호, 「茶山硏究序說」, 茶山學論叢, 다산연구원, 1987을 참조·보완하여 작성한 것이다.

(10)

먼저, 1910년대 실학자의 저작 출간의 중심에는 최남선이 1910년 서울에 설립한 朝鮮 光文會가 있다. 조선광문회는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조선인들의 정치적 집회 결사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성장배경 및 학습수련과정을 지닌 지식인들의 지적 네트워크였다. 그래서 金允植은 조선광문회를 ‘그 자체가 당시 한국 최고이자 최대의 지 적 센터이며 아카데미’였다고 평가했다.6)

최남선은 일본에 유학(1906.4∼1907.3)하면서 근대 학문의 세례를 받았으며, 일본의 출 판물을 통해 다양한 서구 학문을 습득하였다.7) 귀국 후 최남선은 1908년에 新文館을 설 립하고, 출판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이후 20여 년 동안 7종의 잡지와 신문을 발간할 정도로 왕성한 출판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그의 관심은 한말 대한제국의 ‘自强’을 책임질

‘주동력’인 청년층에게 그 자신이 수련받은 ‘근대 학문’을 소개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 의 근대적인 출판 활동은 ‘신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8)

1910년에는 玄采·朴殷植 등과 함께 朝鮮光文會를 조직하여 한국 고전을 발간하는 고전 간행사업과 字典 편찬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경제불황과 일제 의 무단통치로 출판 수지가 악화되면서 1915년에 고전간행사업은 중단되고, 이후 조선광 문회는 주로 사전편찬작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최남선이 체포되어 서 대문 감옥에 투옥되고, 사전편찬을 주도했던 金枓奉이 191년 4월 중국으로 명명하였으며, 李奎永이 1920년 1월 사망하면서 조선광문회는 해체되었다.

일찍이 개항 전후부터 조선에 관한 정보의 확보에 노력해왔던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점하면서 총독부 차원에서 조선의 慣制度調查事業과 고적조사사업을 추진하여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자료로 이용하였다, 한편, 1910년을 전후하여 재조일본인들이 조직한 朝 鮮古書刊行會와 朝鮮硏究會에서 이루어진 조사와 연구, 단행본의 간행, 고서의 수집·간행, 번역·출판하는 데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이들 단체에서 이루어진 조사·연구 및 고서의 간행은 “옛 조선에서 생성된 자료를 발견해, 그것을 새로운 우리 조선의 경영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9) 다시 말하면, 일제의 조선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한 정보 제공에 그 목 적이 있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식민사학 형성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이들 단 체는 표면적으로는 민간학술단체였지만 총독부 관리와 평의원 등이 참여하고, 총독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어용단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단체에서 진행된 고서간행사업은 통감부와 총독부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 다.10)

朝鮮古書刊行會는 조선총독부에 드나들며 일제의 조선통치를 합리화시키는 데 앞장선

6) 최남선과 조선광문회에 대해서는 오영섭, 「조선광문회 연구」, 韓國史學史學報 3, 2001; 류시현,  崔南善의 ‘近代’ 認識과 ‘朝鮮學’ 硏究,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5; 장병극, 「조선광문 회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를 참조

7) 류시현은 최남선에게 있어 2년 3개월간의 일본 유학 기간은 향후 그의 출판, 번역, ‘조선학’ 연구 활 동의 수련 과정이었다고 평가하였다(류시현, 崔南善의 ‘近代’ 認識과 ‘朝鮮學’ 硏究, 고려대학교 사 학과 박사학위논문, 2005, 19쪽).

8) 류시현, 위의 논문, 2005, 21∽22쪽

9) 大村友之丞, 「序文」, 角于先生實記, 조선연구회, 1911

10) 한말 통감부 시기와 병합 이후 재조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고서간행 단체는 조선고서간행회(1908년), 조선연구회(1910년), 自由討究社(1920년)가 있다. 이 단체들은 통감부나 총독부의 지원 아래 간행사 업을 추진했다. 일제강점을 전후한 시기의 일본인 단체의 조선문헌의 출판에 대해서는 최혜주, 「한말 일제하 재조일본인의 조선고서 간행사업」, 대동문화연구 66, 2009 참조

(11)

샤쿠오 순조[釋尾春芿]가11)1908년 설립한 출판사이다. 샤쿠오는 조선의 과거 역사를 모르 면서 현재나 미래는 논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조선통치에 임하는 관료들은 먼저 식민자 의 입장에서 여러 나라의 보호정치와 식민사의 실태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12) 주장한 인 물이다. 그는 1907년 잡지 『朝鮮』을 발행하였고, 1908년에는 조선잡지사 내에 朝鮮眞書 刊行部를 두고 현존하는 고서 가운데 간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총 28종 83책을 朝鮮 群書大系로 출판했다. 역사서로는 삼국사기, 동국통감을 비롯하여 해동역사, 동사 강목, 연려실기술, 팔역지[택리지], 지봉유설, 星湖僿說類選; 藿憂錄, 발해고,

雅言覺非 등 실학자들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연구회는 호소이 하지메[細井蹇]가 1908년에 창립하였으나 1911년 8월부터는 아오 야기 쓰나타로[靑柳綱太郞]가 운영한 단체이다.13) 조선연구회에서는 1911년부터 1918년 까지 56책의 한국 고전과 기타 역사·문화서를 일본어로 번역·출간했는데, 총서 古書珍書 刊行이라 하였다. 고서진서간행에는 연암외집[열하일기], 지봉유설, 발해고, 朝 鮮博物志[산림경제], 이순신전집, 경세유표, 목민심서가 포함되었다. 細井蹇는 이후 1920년에 일본 도쿄에 自由討究社를 설치하고 서울에 지부를 두었는데,14) 自由討究社가 간행한 총서 通俗朝鮮文庫에도 1922년에 정약용의 雅言覺非와 牧民心書가 포함되 어 있다.

조선고서간행회의 조선군서대계가 원본을 그대로 발행된 것이라면, 조선연구회의 고 서진서간행은 및 일본토구사는 조선의 고문헌을 원문과 일본어 번역을 함께 출판함으로 써 조선의 이미지를 ‘支那’의 속국이자 사대주의 국가, 문약한 모방 문명의 국가로 구성 하는 전략을 취하기도 하였다.15)

최남선은 조선광문회의 설립 동기에 대하여,

新文明의 基礎를 尊固히 하기 위하여 舊敎化의 地質을 심사하라 自家事를 自辦하라는 命令 이 四方으로서 注集함을 聞하매 自不能已하는 素性이 力量을 料할 餘地를 與치 아니하도다.

往者를 繼하며 來緣을 開할 基點으로 朝鮮光文會를 設立하였도다. 歷史的·言語的·道德的 三方 面을 自主的·近代的·科學的으로 硏究 說明하려는 本旨언마는16)

라고 하여, 신문명의 도래 속에서 조선의 역사와 언어와 도덕을 자주적·근대적·과학적으 로 연구하고 설명하고자 한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조선광문회 규칙」 제1장 제1조에서는

“本會는 선 舊來의 문헌·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者를 수집 편찬 刊行하여 貴重한 文書 를 保存 傳布함으로 목적함”이라고 하여 활동 방향을 밝히고 있다. 최남선이 신문관에서 잡지와 국내외 소설의 간행을 통해 독자층을 계몽하고자 하였다면, 조선광문회에서는 한 11) 釋尾春芿에 대해서는 최혜주, 「식민지 시기 재조일본인의 출판활동과 조선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

구 95, 2018; 박영미, 「일본의 조선고전총서 간행에 대한 시론」, 漢文學論集 37, 2013 참조 12) 「朝鮮硏究の聲」, 朝鮮 4-1, 1909, 8∽9쪽

13) 細井蹇와 조선연구회, 그리고 自由討究社에 관한 연구로는 윤소영, 「호소이 하지메(細井蹇)의 조선 인식과 ‘제국의 꿈’」, 한국근현대사연구 45, 2008; 최혜주, 「일제강점기 조선연구회의 활동과 조선 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2, 2005; 서신혜, 「일제시대 일본인의 고서간행과 호소이 하지메의 활 동」, 온지논총 12, 2007 등이 있다.

14) 박영미, 위의 논문 2013; 최혜주, 위의 논문, 2018 참조.

15) 김선희, 「근대전환기 다산 저술의 출판과 승인: 경세유표를 중심으로」, 東方學志 180, 2017, 80쪽.

16) 최남선, 「十年」, 靑春 14, 1918.6, 8쪽.

(12)

국 고전의 발간과 사전을 편찬하는 등 근대보다는 ‘전통’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조선광 문회를 통한 최남선의 고전간행사업은 일본인 학자들의 조선 연구에 대한 ‘정신적 영역’에 서 대응의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정치적 민족국가의 좌절 속에서 민족의 자아를 확인하는 방법은 과거에서 연원한 ‘고유한 문화’를 발견하는 것이었다.17) 즉, 조선의 역 사, 언어, 도덕(정신)에 관련된 고전을 자주적이고, 근대적이며, 과학적인 기준으로 선별하 여 발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최남선의 조선광문회에서의 활동은 그가 1922년부터 본격적으로 천명할 조선학 연구의 前史라고 할 수 있다.18)

조선광문회의 고전 발간 사업의 주요 실무자는 張志淵·柳瑾·李寅承·金敎獻 등이었다. 문 헌들은 朝鮮叢書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는데, 조선광문회에서 발행을 계획했거나 간행 한 도서는 190여 종에 달했다. 그 가운데 간행된 것은 고전이 24종 46책, 기타서 및 간행 연도도 미상이 11종 13책으로 도합 35종 59책이다.19) 이 가운데 정약용의 『雅言覺非』, 이수광의 『지봉유설』, 이익의 『성호사설』,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저서가 다수 포함되었다. 35종 59책의 저서 가운데 실학자의 저작은 <표 1>을 통해서 확 인할 수 있듯이 21종[新文館 출간 1종 포함]에 달한다. 당시 ‘실학’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1910년대 조선광문회에서 16명에 달하는 실학자의 21종의 저작이 출간 된 것은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 속에서 조선 후기 사상계의 개혁적 인물’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불어 조선광문회의 고문이 실학사상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신구학 절충론을 주장하던는 황성신문계열의 개신유학자들이었다는 점도 주목된 다.20) 이런 의미에서 1910년대 조선광문회를 중심으로 이뤄진 조선후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은 1930년대 조선학 연구와 조선학운동의 자양분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표 1> 일제강점 초기 간행 조선후기 실학자의 저작 목록

17) 이지원, 日帝下 民族文化 認識의 展開와 民族文化運動:民族主義 系列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2004, 107∽108쪽

18) 류시현, 위의 논문, 2005, 34쪽

19) 「朝鮮光文會刊行書目槪略」, 告白; 오영섭, 위의 논문, 115∽116쪽. 한편 조선광문회의 고전 문헌 간행 도서의 수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광 문회」에서는 “修史·理言·立學의 3대 기치 아래 180여 종의 고전간행을 계획했으나 20종밖에 간행하 지 못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장병극은 발간 배포된 조선총서는 23종 47책이며, 이는 간행 예정 목록의 13%에 해당한다고 하였다(장병극, 「조선광문회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143쪽).

20) 조선광문회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특징은 첫째, 광문회에서 고전간행과 사전편찬을 주도했던 인사들 은 대부분 대종교 신자였다는 점, 둘째, 주시경학파의 핵심인사들이었다는 점, 셋째, 조선광문회의 고 문으로 실학사상을 계승한 바탕 위에서 신구학 절충론을 주장하던는 황성신문계열의 개신유학자들이 었다는 점이다(오영섭, 위의 논문, 2001, 107∽108쪽).

번호 저서 저(편)자 조선광문회

(1910)

조선고서간행회 (1908)

조선연구회

(1910) 비고 1 海東繹史 5책

海東繹史 續 韓致奫 1912,

1913 1911 X

2 東史綱目 安鼎福 X 1911 X

3

燃藜室記述 8책 燃藜室記述

別集 3책

李肯翊 1912-1915

1912-1914 1913 X

(13)

*출전: 朝鮮光文會刊行書目槪略; 朝鮮光文會第一期刊行旣定書; 오영섭, 「조선광문회 연구」,

한국사학사학보 3, 2001; 박영미, 「일본의 조선고전총서 간행에 대한 시론 –조선연구회의 고서진 서 간행을 중심으로-」, 漢文學論集 37, 2013; 최혜주, 「한말 일제하 재조일본인의 조선고서 간행 사업」, 大東文化硏究 66, 2009;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대백과사전

3. 1930년대 실학자의 저작 출판과 조선학의 부흥

1) 1930년대 실학자의 저작 출간

1910년대 활발했던 실학자의 저작 출간 양상은 1920년대에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가 가 1929년 문광서림에서 성호사설유선을 출간하면서 재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1930년 대에는 <표 2>에서와 같이 총 6종이 출간되었는데, 1910년대에 비해 저작의 종류는 줄었 으나 내용상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1930년대 국내에서 발간된 조선후기 실학자의 저작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번호 저서 저(편)자 조선광문회

(1910)

조선고서간행회 (1908)

조선연구회

(1910) 비고

4 擇里志 李重煥 1911 八域志

1910 X

5 道里表 申景濬 ? 1912 X X

6 山經表 申景濬 1913 X X

7 磻溪隨錄 柳馨遠 X X X

8 與猶堂集 丁若鏞 X X X

9 林園十六志 徐有榘 X X X

10 熱河日記 朴趾源 1911 X

燕巖外集 (熱河日記)

1915

11 湛軒日記 洪大容 X X

12 芝峯類說 李睟光 X 1915 1916

13 星湖僿說 李瀷 X 星湖僿說類選;

藿憂錄, 1915 X

14 東國地理志 韓百謙 X X X

15 渤海考 柳得恭 X 1911 1911

16 五洲衍文長箋

散稿 李圭景 X X X

17 雅言覺非 丁若鏞 1912 1911 自由討究社,

1922

18 山林經濟 洪萬選 X X 朝鮮博物志

1914

19 李忠武公全書 柳得恭 編 1918 X 李舜臣全集

1916 新文館

20 經世遺表 丁若鏞 1915 X 1911

21 牧民心書 X X X 1911 自由討究社,

1922

22 大韓疆域考 丁若鏞/

張志淵 편 X X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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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1930년 전후 출간 조선후기 실학자의 저작 목록

서명 저자 편자 교열자 권책 간행년도 출판사 비고

星湖僿說類選 李瀷 安鼎福 鄭寅普 4권 3책 1929 文光書林 연활자본

燕巖集 朴趾源 朴榮喆 17권 6책 1932 발행처

불명 연활자본

阮堂先生全集 金正喜 金益煥 金益煥

洪命熹 10권 5책 1934

永生堂 金益煥 序 鄭寅普 序

연활자본

與猶堂全書 丁若鏞 金誠鎭 鄭寅普

安在鴻

154권 76책

1934

∽1938 新朝鮮社 연활자본 鄭寅普 序

湛軒書 洪大容 洪英善 洪命熹 14권 7책 1939 新朝鮮社

鄭寅普 序

연활자본 鄭寅普 序

旅庵全書 申景濬 申宰休 鄭寅普

金春東 17권 7책 1939

∽1940 新朝鮮社 연활자본

성호사설유선은 방대한 양이었던 성호사설을 이익의 제자 안정복이 10권 10책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조선고서간행회에서 조선군서대계의 하나로 1915년에 성호사설유선

이 상·하 2책으로 출간하였는데, 1929년 정인보가 다시 교열하여 선장본(5책)과 양장본 (상·하 2책)으로 문광서림에서 출간한 것이다. 저자의 自序, 卞榮晩의 서문과 정인보의 서 문이 더 붙여졌으며, 부록으로 藿憂錄이 추가되었다. 정인보 서문에서 조선후기의 학풍 을 ‘依獨求實之學’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면서,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계통을 제시하였다.21) 그리고 성호사설유선의 校刊 후기에서는 이익을 ‘史學으로 근거를 삼아 내외를 안 眞學者’로 평가하였으며, 자신의 과제를 고서 수집으로 정하고, 霞谷 鄭齊斗·石 泉 申綽·順菴 安鼎福·岱淵 李勉伯의 저술 출간을 차후의 과제로 삼았다.22) 이 과제는 1931년에 있었던 「朝鮮古典解題」23)로 수행되는데, 정재두·신작·이면백의 저서가 반영되었 다.

1932년에 간행된 연암집은 박영철24)이 연암 후손가에 전해오던 家藏本 17권 6책을 정리하여 서울에서 연활자로 간행한 것이다.25) 구한말의 역사학자이자 유학자인 김택영이 중국에서 신활자로 간행하여 국내에서 유통된 重編朴燕巖先生文集을 보완한 것으로, 박 21) 鄭寅普, 星湖僿說類選, 「序」, 1929

22) 「星湖僿說을 校刊하면서」, 澹園鄭寅普全集 2, 107∼108쪽 23) 1931년 17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24) 朴榮喆(1879∽1939)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일본군의 고위 장교, 전역 이후에는 강원도 지사, 함경북도 지사 등을 지냈고, 관직 은토 이후에는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의 침략정책에 호응하고 앞장 선 친일파로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문화애호가이자 수장가였다(김상엽, 「고박영철씨기증서화류전관목록을 통해 본 多山 朴榮喆(1879∽1939)의 수장활 동」, 문화재 44, 2011).

25)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박지원의 작품이 활자로 간행된 것은 1900년 金澤榮(1850~1927)에 의해서였 다. 김택영은 박지원의 저작 중에서 선별한 시 33수와 문 117수를 유형별로 배열하여 연암집 6권 2책을 全史字로 간행한 바 있다. 이어 이듬해인 1901년에는 열하일기 24권 중에서 일부 내용을 뽑 고, 연암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 11수를 정선하여 燕巖續集 3권 1책을 전사자로 간행하였다. 김 택영은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국내에서는 출판하기 어려웠던 문집과 사서들을 간행하여 국내에 보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1916년 국내에서 간행한 연암집과 연암속집을 합편 하여 重編朴燕巖先生文集 6권 3책을 신활자로 간행하였다. 김택영의 연암집 편찬에 대해서는 정 재철, 「김택영의 연암집 편찬과 그 의미」, 韓國漢文學硏究 63, 20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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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철본 연암집에는 9종의 小集을 비롯하여 열하일기와 과농소초에 수록되어 있는 321편의 작품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어 燕巖全集의 성격을 띠고 있다.26)

완당선생전집은 김정희의 현손인 金益煥이 편집하여 1934년에 永生堂에서 간행한27) 추사 김정희의 문집이다. 1868년(고종 5)에 문인 南秉吉 등이 편집 간행한 阮堂集, 阮 堂尺牘 및 覃揅齋詩集 등을 합본한 것으로. 김익환과 홍명희가 교열에 참여하여, 서문 은 김익한과 정인보가 작성하였다.

新朝鮮社는 신간회 해소와 곧이어 발생한 조선일보 발행권 분쟁을 겪으면서 조선일 보에서 퇴사한 직원들이 안재홍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설립한 회사로, 잡지 新朝鮮

(1934년 9월호부터 1936년 1월 14호까지)을 인쇄·발행한 곳이다. 신조선사에서는 잡지 발 행 외에도 식민지 공론장에서 전개된 조선학의 학술적인 성과를 수용하여 흩어져 있던 조선후기 실학자의 저작 수집하고 출판하였다.28) 주요 저작은 정약용의 與猶堂全書

(1934년∽1938) 홍대용의 湛軒書(1939), 신경준의 旅庵全書(1940)였다.

1910년대 조선광문회가 당시 식민 권력 및 재조일본인 연구자들의 조선관련 학술활동 을 염두에 두고 ‘정신적 대응’ 차원에서 조선에 관하여 전방위적인 분야의 문헌들을 수집·

간행하였다고 한다면, 1930년대에는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 제국대학과 식민 지 미디어 아카데미 사이의 복합적인 관련 속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던 ‘조선학’이라는 당대의 학술을 염두에 두고 조선후기 실학자의 저작들을 간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9) 신조선사가 여암전서를 간행하면서 작성한 「申旅庵先生全書刊行取旨書」에서 성호 이익 - 여암 신경준-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실학자의 계보를 언급하면서 ‘조선 학’을 언급한 것은 조선후기 개혁사상인 실학을 계보화하여 조선학의 범주에서 인식해보 26) 정재철, 위의 논문, 2016, 140∽142쪽

27) 송수영, 「추사 김정희 연구자료의 고찰과 제언」, 서예학연구 19, 2011, 272쪽 28) 1930년대 신조선사에 간행한 고문헌을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서명 저자 편자 교열자 권책 간행연도 출판사 비고

與猶堂全書 丁若鏞 金誠鎭 鄭寅普

安在鴻 154권 76책 1934-1938 新朝鮮社 연활자본

阮堂先生全集 金正喜 金翊煥 金益煥

洪命熹 2권 1책 1934 永生堂 연활자본

鄭寅普 序

錦史詩鈔 具翰書 具乙會 1권 1책 1937 新朝鮮社 연활자본

愚潭先生文集 丁時翰 14권 7책 1937 新朝鮮社 목판본

湛軒書 洪大容 洪英善 洪命熹 14권 7책 1939 新朝鮮社 연활자본

鄭寅普 序

旅庵全書 申景濬 申宰休 鄭寅普

金春東 17권 7책 1939-1940 新朝鮮社 연활자본

* 위 표는 장문석, 「식민지 출판과 양반-1930년대 신조선사의 고문헌 출판 활동과 전통 지식의 식민지 공공성」, 民族文化史研究 55, 2014, 35쪽 ‘「표 1」 신조선사 간행 고문헌의 서지 정보’를 참조·보완 하여 작성한 것임.

신조선사에서 발간한 고문헌 가운데 조선후기 실학서적이 아닌 것은 두 종류이다. 금사시초와  우담선생문집이다. 우담선생문집은 고문헌이긴 하지만 영주에서 인출한 목판본으로 다른 출판물과 형태서지적 특징이 확연히 구별된다. 발행소만 신조선사로 썼을 뿐, 신조선사의 출판활동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錦史詩鈔는 신조선사에 도움을 주었던 具乙會의 작고한 선친의 문집 이었다(장문석, 위의 논문, 2014, 359쪽).

29) 1910년 12월 조선광문회고백에 실린 조선광문회간행서목개략에 따르면 전체 간행 예정 도서는 192종으로, 역사류 29종, 지리 및 지도류 30종, 문학류 15종, 어문류 13종, 기행류 10종, 휘찬류 10 종, 전기류 9종, 소설류 3종 등이었다(장병극, 「조선광문회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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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 한 것라고 할 수 있다.30)

1930년대 실학자의 저작간행은 정인보, 安在鴻, 洪命熹, 金春東이 주도하였다. 정인보 는 여유당전서와 여암전서의 교열에 참여했고, 안재홍은 여유당전서의 교열에 정인 보와 함께 참여하였다. 홍명희는 홍대용의 담헌서를 교열하였으며, 김춘동은 정인보와 함께 여암전서의 교열에 참여하였다. 정인보는 담헌서의 간행도 함께 추진하고 편집 에 관여하였다.31) 또 1929년 문광서림에서 간행한 성호사설유선에도 관여하였고, 1934 년 김정희의 5세손인 김익환이 편집하고 홍명희가 교열하여 영생당에서 출판한 완당선생 전집의 간행에도 관여하였다.32) 박영철이 편찬한 연암집을 제외한 1930년대 간행된 실 학자의 저작 출간에 모두 관여하였다는 점에서 1930년대 실학자의 저서 출간은 정인보가 주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대 간행된 대표적인 실학자의 저서는 신조선사의 여유당전서이다. 여유당전서

는 그동안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정약용의 저술들을 그의 외현손 金誠鎭이 처음으로 집대 성하여 완간한 것으로33) 1936년 ‘茶山逝世百周年紀念’ 사업의 일환으로 1934년 10월부터 간행에 착수하여 1938년에 완간되었다. 당시까지 정약용의 유고는 전질이 간행되지 못한 상태로 .34) 그러나 위와 같은 것들은 개별적으로 출간된 것으로 정약용의 저서가 전집 형 태로 묶여서 출간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38년 여유당전서의 완간을 알리는 동 아일보의 기사에서는 당시 조선인 사회에서 여유당전서의 완간을 얼마나 크게 받아들 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 귀중한 모든 문헌이 세상에 많이 선포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거금 5 년 전에 경성부 내 가회정(嘉會町) 208번지에 있는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여유당전서(與猶堂 全書)-즉 정다산선생 전집(丁茶山先生 全集) 간행에 착수하야 이래 5년간 모든 고난을 무릅쓰 고 총질수 400부의 76책(冊)이 완간되어 금 27일에 최종권의 배본을 마치었다 한다. 이것은 정다산 선생의 위대한 저서를 세상에 재현시킨 문화적 의의가 크거니와 76책을 약 3만 5천원 의 거대한 경비를 들여서 5개년 계획으로 완성하였다는 것은 조선 출판계(出版界)에 한 신기원 을 지을 것이다.

이제 그동안 간행 경위를 대략 소개하면 신조선사의 권태휘(權泰輝)씨가 간행 총책임자가 되

30) [부록] 「신여암선생전서간행취지서」; 장문석, 위의 논문, 2014, 360쪽 재인용

31) 담헌서의 서문[湛軒書序]은 정인보가 쓴 것이다. 정인보가 쓴 담헌서 서문에 “담헌서는 홍대용 덕보 선생이 지은 것이다. 예전에 15책으로 나눈 것을 지금 책을 약간 합쳐서 7책으로 하고, 篇名과 類次의 순서는 모두 목록과 같이 하였다”고 되어 있다.

32) 성호사설유선에도 완당선생전집에도 정인보의 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33) 여유당전서는 1934년부터 1938년까지 간행되었다. 간행 초기인 1934∽1935년에는 제1집(시문집) 의 첫권, 제5집(정법집)의 경세유표 및 목민심서, 제6집(지리집)의 대동수경, 제2집(경집)의 대 학강의,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등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1935년 이후에는 대체로 제2집(경집, 1936.1∽), 제5집(정법집, 1936.8∽), 제6집(지리집, 1937.8∽), 제3집(예집, 1938.3∽), 제4집(악집, 1938.7∽), 제7집(의학집, 1938.9∽) 순으로 간행되었다. 1938년 10월 25일 제1집 제12책(제24∽25 권)인 아언각비를 76회로 발간함으로써 총 7집 154권 76책 분량의 여유당전서가 완간된다(장문 석, 위의 논문, 2014, 363∽364쪽).

34) 물론 정약용의 저작 가운데 일부는 조선 후기부터 개인과 지방관청에 의해 필사되거나 목판으로 인 출되어 유통되었고, 개항기를 전후해서도 기정진, 강위, 신관호 등과 같은 전통적 인물들에 의해서 정 리·편찬된 바가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기는 물론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도 정약용의 저작들은 광문사, 황성신문사, 조선광문회 등을 통해서, 그리고 식민지 권력인 조선총독부 및 재조일본인 학술단체에 의해서도 정리되거나 간행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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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선생의 외현손인 김성진(金誠鎭)씨가 편찬자(編纂者)가 되어 교열(校閱)에는 후학으로 정인 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양씨가 맡고 소화 9년[1934년] 9월 15일부터 착수하야, 윤치호(尹致 昊)·공성학(孔聖學)·김사정(金思定) 씨 등 제씨의 사회적 원조를 얻고, 또 고 장길상(張吉相) 씨 의 원고 제공을 받아서 일반의 구독 예약 밑에서 계속 간행하야야 왔다 한다.

그리고 동 신조선사에서는 이 여유당전집이 끝난 후계 사업으로 양눌재(梁訥齋)·신여암(申 旅庵)·홍담헌(洪湛軒) 전서의 간행을 세우고 벌써 인쇄에 착수하야 고문헌 발간의 거룩한 사업 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한다.

신조선사는 이전까지 집대성된 바 없는 거질의 여유당전서 전체를 연활자로 간행하는 기획 을 수립하고 35,000원의 거대한 경비를 들여 5년간에 걸쳐 간행을 실행에 옮긴 것으로 ’조선 출판계의 금자탑‘이었고, ’조선 출판계의 한 신기원‘을 짓는 일이었다.35)

여유당전서의 출간은 당시 조선인 사회에서는 ‘조선출판계의 금자탑’, ‘조선 출판계의 한 신기원’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어지는 실학자의 저작 출간의 시발점이 되었다. 신조선사 는 여유당전서의 출간에 이어 후계 사업으로 訥齋 梁誠之, 여암 신경준, 담헌 홍대용의 전서 사업을 계획하여, 이듬해인 1939년부터 1940년까지 홍대용의 담헌서와 신경준의

여암전서를 발간하였다.

담헌서는 홍대용의 문집을 편찬한 것으로, ‘南陽洪大容德保 著 五代孫 編 後學 洪命 熹 校’라는 권수제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홍대용의 5세손인 洪永善의 편집, 벽초 洪 命熹의 교열을 거쳐서 1939년에 신조선사에서 간행되었다. 정인보도 담헌서의 편집과 간행에 참여했는데, 湛軒書序」에서 정인보는 홍대용의 학술사상에 대해 “지금 선생의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籌解需用이 있고, 林下經綸이 있는데, 혹은 幾何와 算數 에 정통하고, 혹은 정치와 법률에 공을 들인 것으로 모두 학생들을 돕는 학문이다. 또  醫山問答이 있는데, 이는 오로지 근본과 말단을 찾아 밝히고 남과 나를 분석해 놓은 것 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라고 언급하며, 홍대용을 걸출한 선비로 평하였 다.36)

신경준의 여암전서는 1939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7회에 걸쳐 간행되었다. 신경 준이 남긴 글은 후손들에 의해서 1910년에 이미 旅菴遺稿라는 이름으로 묶인 바 있었 지만, 일부였다. 신조선사의 여암전서는 이미 여암유고 간행에 참여했던 5세손 申宰 休가 편찬하고, 정인보와 김춘동의 교열로 간행되었다. 정인보가 직접 후손들을 방문하여 집안에 내려오는 원고를 발견하고, 그 원고를 참고하여 문집 원고를 교정하였다. 따라서 신조선사가 간행한 여암전서에는 여유당전서, 담헌서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활자화 되지 못했던 다수의 저작들이 포함되어 간행되었다.37)

1930년대 실학자의 저작 출간의 특징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특징은 개항기∽광무연간, 1910년대의 실학자의 저작들이 발췌본으로, 개별적으로 간행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시기 에는 전집 형태로 公刊되었다는 점이다. 유형원, 안정복, 유득공, 이긍익, 이중환, 신경준, 정약용, 홍만선, 이수광, 이익, 박지원, 한치윤, 서유구, 이규경 등 다양한 인물의 저작들 35) 동아일보, 1938년 10월 28일, 「丁茶山全書 ; 朝鮮出版界의 金字塔 四百部 七十六卷을 完刊」

36) 홍대용, 湛軒書, 「湛軒書序」

“今先生之書 其最要者 有曰籌解需用 有曰林下經綸 或精幾何算數 或劬心政法 皆佐民之學 而又有曰醫山問答 則專以覈本剽 而析人己在當時所僅見者 嗚呼 豈非豪傑之士哉”

37) 장문석, 위의 논문, 2014, 368∽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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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별적으로 출간된 것과 다르게 1930년대는 성호 이익, 완당 김정희, 연암 박지원, 다 산 정약용, 담헌 홍대용, 여암 신경준으로 한정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1930년대 들어와 조선후기 실학자의 저작이 전집의 형태로 정리되고 간행된 것 은 “나라 잃고 일제에 억압당한 형편에 장래에 있을 독립의 사상적 기초 작업의 일환으 로 였고, 다음은 일제의 동화정책 내지 우리 문화 말살 정책의 반동으로, 스러져가는 고유 문화를 지탱하려는 필사의 노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38)이라는 김춘동의 발언처럼 일제의 內鮮融和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정책과 1920년 중반부터 체계화된 일제의 관학 아 카데미즘의 성과에 대항하는 정신적 대응이지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1930년대 조선학운동의 전개와 실학의 근대적 소환

여기에서는 조선후기라는 봉건적 사회에서 유학을 지적 기반으로 하여 탄생한 저작들이 이 시기에 조선학운동 참여자들에 의해 어떻게 소환되었는지를 정약용을 중심으로 살펴보 고자 한다.

1930년대 전반기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인식의 중요성이 광범하게 유포되고 조 선연구의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었다. 조선의 지성계에는 식민지적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조선학운동이라고 불리는 문화운동을 전개되었다. ‘조선학’이란 용어는 1920년대 초반에 최남선이 맨 처음 제안하였고39), 1920년대 말에 조선후기 실학자에 대한 저술을 해제하 면서 조선학의 개념을 정리한 바 있었다.40) 당시 학계의 일부에서 조선학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조선학이라는 용어는 당시 민족주의 진영에 속하는 인사들 사이에서 널리 수용되어 갔다.

특히 좌우합작을 통해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려던 신간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식민지 조선에서 비타협적인 민족운동이 전혀 불가능하게 되자 신간회의 해체에 반대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동이 모색되었다. 이들은 일부 사회주의 결열에 속하는 인사들과 연대하여 합법적인 문화운동으로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였다.41) 조선학운동은 기본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사 상적·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일제 관학의 식민사관 및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42) 극복하기 위해 전개된 문화운동이자 학술운동이다. 또한 조선학운동은 한국 역사의 문화 자산과 성 과를 부정하고 文明開化論, 西化論 등으로 상징되는 서양 근대 사상과 문화를 무비판적으

38) 김춘동,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盞散稿)에 취하여-노두생애(老蠹生涯)」(민족문화연구 1, 1964), 운정산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7, 425∽426쪽; 장문석, 위의 논문, 2014, 353쪽 재 인용

39) 동아일보 1934년 9월 11일, 「朝鮮硏究의 機運에 際하야 (一) 朝鮮學은 어떠케 規定할가 白南雲氏 와의 一問一答[肖 : 白南雲((T記者)」

40) 鄭寅普, 「朝鮮古典解題(13) 李椒園 忠翊의 椒園遺藁」, 東亞日報, 1931년 3월 30일 41) 조광, 위의 논문, 2004, 235쪽

42) 1919년 3·1운동을 경험한 일제는 1920년대 중반부터 내선융화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일련 의 조치를 단행했다. 1925년 총독 직속하에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함으로써 관 주도의 식민주의 역사 학을 확산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왜곡한

『조선사』를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전 37권으로 완간하였다. 또한 靑丘學會, 경성제국대학 등과 연 계하여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왜곡된 연구를 진행하였다. 청국학회와 경성제국대학의 조선사연구 활동에 대해서는 조범성, 「1930년대 靑丘學會의 설립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7, 2021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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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수입하여 이를 추종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하면서, 실증과 고증을 기반으로 한국 역사 와 문화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탐구하고, 민족을 단위로 하는 독자적인 한국 근대 국민 국 가 수립의 지향과 역사를 실학을 통해 입증하려 했다.43)

조선학은 1934년 9월 ‘茶山逝世99年記念事業’을 계기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조선학’의 개념과 연구방향에 대한 모색은 기념사업 이전부터 이미 제기되었지만,44) 이것 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본격화된 것은 1934년 9월에 개최된 ‘다산 서세 99주년 기념사업’부터였다. 당시 논쟁은 동아일보 기자였던 申南徹의 주도로 ‘茶 山逝世99年記念講演會’의 연사였던 백남운과 안재홍, 그리고 震檀學會 찬조회원이었던 현 상윤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루어졌다. 논쟁은 크게 조선학의 개념과 방법론에 대한 목표 설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45)

정인보로 시작된 조선학 논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에 그 지적 배경에 따라 그 연구의 지향과 방법에는 이견이 존재하였지만, 공통적으로 ’조선학‘의 근거를 ’실 학‘에서 찾았다.46) 1930년대 조선 지식인들은 일제의 침탈이 더욱 첨예화되고 비타협적인 민족운동이 전혀 불가능하게 된 위기의 상황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방안을 조선의 전통 안에서 찾고자 했고, 그 가능성이 조선 후기의 개혁적 사상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풍을 ‘實學’이라고 부르면서 반계 유형원-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으 로 이어지는 계보를 설정했다. 그리고 실학의 집대성자로 정약용에 주목하고, 정약용의 문 집인 與猶堂全書의 간행을 기획하면서 정약용의 학문을 새롭게 조명하였다.47) 당시 동 아일보에서는 여유당전서의 간행사업이 시작되자 정약용을 ‘조선의 석학이라기보다는 동양의 대석학’으로 명명하며, 수 백 책에 이르는 그의 책을 뒷사람들이 이어받지 못하여 곳간 속에서만 썩히게 되었다고 언급하면서 신조선사에서 완간할 계획에 착수했음을 보도 했다.48) 이런 점에서 1934년부터 진행된 ‘茶山逝世百周紀念’ 사업은 실학 연구의 또 다른 분기점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49) 다산 정약용을 중심으로 하여 실학 및 실학자들을 언급

43)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조선학운동」(http://contents.history.go.kr)

44) ‘다산서거99주년기념사업’ 이전 ‘조선학’의 개념과 관련된 글로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태준, 「조선 학의 국학적 연구와 사회학적 연구」(전2회), 조선일보 1933년 5월 1일, 2일; 홍순혁, 讀史慢論-朝 鮮學에 관한 歐文著書의 日本에 미친 영향」, 조선일보, 1934년 2월 1∽4일 등이 있다.

45) 이 기념행사는 신조선사가 주간한 다산 정약용 전집인 여유당전서의 간행과 관련되어 개최되었는 데, 1934년 9월 8일 시내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현상윤 등이 연사로 참여 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 강연회에서 정인보는 ‘茶山先生과 朝鮮學’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조선 학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조선학’이라는 용어를 제안하였다. 이후 동아일보에서 백남운, 안재홍, 현 상윤, 申南徹 간에 지상논쟁이 전개되었다(동아일보 1934년 9월 11일, 「朝鮮硏究의 機運에 際하야 (一) 朝鮮學은 어떠케 規定할가 白南雲氏와의 一問一答[肖 : 白南雲((T記者)」」; 동아일보 9월 12일,

「朝鮮硏究의 機運에 際하야 (二) 世界文化에 朝鮮色을 짜너차 安在鴻氏와의 一問一答(T記者)」; 동 아일보 9월 13일, 「朝鮮硏究의 機運에 際하야 (三) 朝鮮學이란 「名辭」에 反對 玄相允氏와의 一問一 答[肖 : 玄相允](T記者)」).

46) 임형택, 「국학의 성립과 실학에 대한 인식」,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비평사, 2000, 38쪽 47) 김선희, 「조선학에 비친 다산」, 다산과 현대 10, 2017, 114쪽

48) 東亞日報 1934년 8월 일, 「茶山著書出版: 朝鮮의 最大文庫」

49) 조광은 “조선학운동의 진행과정에서 정약용에 대한 성과를 통해서 조선후기 개혁사상의 특성에 관한 천착이 진행되었고, 그 개념이 좀 더 분명히 제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실학’이란 용어가 전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조선학운동에 참여하던 인사들에 의해서도 일부 사용되어, 그 용어 보급의 폭이 넓어져 갔다. 또한 조선후기 개혁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사상의 계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를 하나의 학파로 인식하는 경향이 굳어졌다”고 평가하였다(조광, 위의논문, 200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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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들이 1935년부터 신문지상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50)

여유당전서 간행사업을 주도한 인물은 연희전문 교수 정인보와 신간회운동에 적극적 으로 참여하고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안재홍이었다. 정약용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발 굴 작업은 정인보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정인보는 정약용을 조선역사에서 ‘유일한 政法家’

로 규정하고, 1934년 9월 총 6회에 걸쳐서 정약용 연구의 서론을 작성했다.51) 이글에서 정인보는 정약용 사상의 형성 배경을 논하고, 정약용을 이익의 실용적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로 평하고, 李檗, 李家煥의 영향으로 ‘東西의 學’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낡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자[新我舊邦]’에 宗旨를 두고 조선사회의 혁신책을 제시하기 위해 현 실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고 서술하였다.

안재홍은 정약용을 ‘경세가’로 지칭하면서 그의 사상이 ‘변법자강으로 낡은 나라를 새 롭게 하고[變法自疆 新我舊邦]’하며,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윤택하게 하여 나라를 보호하 고 백성을 구하며[經世澤民 護國救民]’하고, 백성과 나라의 일을 바로잡고 도와서 진작시 키는 것[匡扶振作 民國之事]‘에 목적이 있다고 하고,52) 정약용을 조선 건설의 총 계획자‘,

’지금도 후배가 依據할 조선의 태양‘으로 평가하였다.53) 또한 정약용을 ‘북경을 매개지로 삼는 서양 학문과 학풍 수입의 선구자의 하나요, 그 집대성의 위업을 이룬’54) 인물로 평 가하였다. 그리고 정약용의 사상이 ‘국가적인 사회민주주의의 명백한 사상체계’55)를 떠올 리게 한다고 하면서 유학자 정약용을 ‘근세 법리학자, 사법 정책론자, 정치학자’56), ‘근대 국민주의의 선구자’로 규정하였다.

사회주의자이자 국문학자였던 김태준은 “신구 사회의 전환기에 항상 남보다 빠르게 구 사회의 모순을 적발하고 거기에 대한 개조책을 말하고, 때로는 신사회의 건설책까지 상상 하려는 시대적 선구가 있으니, 이를 조선사에서 논한다면 李朝 말기의 소위 實事求是의 학파”57)라고 하며 조선 후기에 전시대의 학풍과 구분되는 개혁 사상이 존재했으며, 정약 용을 실사구시 학파의 중요한 인물이라고 보고 지봉 이수광-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순 암 안정복- 여암 신경준으로 이어지는 現實學派의 마지막 집대성자로 보았다.58) 또한 정 약용을 양반출신이면서도 양반을 미워했고, 구제도의 모든 잔재물을 증오한 ‘시대의 반항 아’로 규정하며 민본주의적 견해를 바탕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고 상공업을 발전시키며 시민 사회로 향하는 새로운 시대의 건설을 도모한 개혁가로 묘사하였다.59)

문일평 또한 정약용을 ‘오백년간 조선학계의 자랑이자 빛’이라고 높이며, 정약용의 위대 한 점은 조선의 기존 학술을 혁명하는 동시에 서구의 새로운 학문을 포괄하여 조선의 부

50) 신문지상에서 실학에 관계된 글들은 1935년에 집중적으로 등장하였으며, 인물로는 거의 예외없이 정 약용에 집중되었다. 일제강점기 신문에 실린 실학의 글에 대해서는 박흥식, 「일제강점기 신문을 통해 본 실학연구 동향」, 동북아 문화연구 14, 2008 참조.

51) 鄭寅普, 「唯一한 政法家 丁茶山先生 敍論」, 東亞日報 1934년 9월 10일∽15일 52) 安在鴻, 「丁茶山先生의 學과 生涯」, 新朝鮮, 新朝鮮社, 1934년 10월, 26쪽

53) 朝鮮日報, 1935년 7월 16일, 「우리문화(文化)의 대하류(大河流) 현대(現代)에 빗나는 위업(偉業)」

54) 안재홍, 민세 안재홍전집 6권, 2005, 358쪽 55) 신조선 1934년 8월

56) 신조선, 1934년 10월

57) 김태준, 김태준문학사론선집, 현대실학사, 1997, 319∽349쪽

58) 조선일보. 1935년 7월 16일 「문화건설상(文化建設上)으로 본 정다산 선생(丁茶山先生)의 업적(業 績) 上」

59) 김태준, 앞의 책, 1997, 347∽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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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꾀하려 한 점에 있으며, 그가 당시 벌써 光學·力學·천문학, 종두술까지 연구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하였다.60)

이렇듯 민족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노선에 관계없이 조선학운동에 참여한 사람 대부분 은 정약용을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를 평가하면서 그가 언급한 각종 개혁론들을 서양 의 사상가들과 직접 대비시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의 시도는 압도적으로 밀려오 는 서양의 사조를 기준으로 하여 조선의 전통문화나 사유방식에 ‘서양적’ 요소나 ‘근대적’

요소가 실재하였음을 논증하는 방식으로61) 이루어졌다.

백남운은 정약용이 봉건사상과 근세적 자유사상의 과도기적 존재라고 평가하면서도 정 약용을 ‘조선의 근세적 자유주의의 선구자’로62) 평가하고, 그의 사상이 “봉건적 쇄국주의 의 계급적 차별에 대한 반항의식의 표현인 동시에 인류애와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동경에 서 나온 것”63)이라고 규정하였다. 문일평도 정약용의 “농업정책과 화폐정책은 아담 스미 스 이후로 점차 발달한 서구의 정통 경제학파와 유사하고 군사력과 방위 체제, 해운과 무 역정책은 근대 자본주의적 국민주의와 유사하며, 사회 구호제도와 기근과 가난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려는 포부는 근대 선진국의 사회정책과 마찬가지이며, 정약용의 시와 산문 에 나타난 無産 백성에 대한 동정과 토지제도와 평등한 세금에 관한 논의는 분명한 현대 의 경제적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같다. 그는 만민평등과 귀한 자와 천한 자에 대한 균등 한 박애로써 견고한 경제와 정치의 토대 위에서 확실한 新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점은 매 우 위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사회주의 사상가 최익한은 정약용의 정치철학이 프랑스 계몽학자들의 사상과 유사하다 고 평가하였다. 그는 정약용이 구상한 이상 국가가 루소의 사회계약설을 연상키며, 정약용 의 이론이 원시공동체적 사회가 해체되고 민주주의적 합의가 붕괴된 뒤 지배 계급의 폭력 적 독재 정치가 출현하게 된 배경을 다룬 인간불평등 기원론과도 통한다고 보았다.64) 더 나아가 최익한은 原牧이 통치 계급의 발생과 성립과정을 인민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 라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보고, 정약용이 왕권신수설을 반대하고 민주제 도를 원칙적으로 시인65)라고 평가하였다.

안재홍 역시 原牧에 주목하여 정약용의 사상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원시 사회에 강자와 노예가 출현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과 유사하다고 평가하 였다.66) 이를 통해서 정약용은 근세 자유주의를 연 인물로, 자본주의적 근세 국민주의의 선구자로, 계급 타파와 만민평등의 주창자로 국가 사회민주주의의 사상체계를 선취한 인 물로 평가되었다.67)

정약용의 사회개혁론 가운데 조선학운동 참여자들이 가장 주목한 것은 토지개혁론이었 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田論에서 토지의 편중과 농민에 대한 과도한 수탈을 극복하 기 위한 토지개혁안으로 閭田制를 제안하였다. 김태준은 정약용 사상의 핵심이 토지론에 60) 조선일보 1934년 9월 10일, 「정다산(丁茶山)의위적(偉績)」

61) 조광, 위위 논문, 2004, 240쪽

62) 東亞日報 1935년 7월 16일, 「丁茶山의 思想」

63) 백남운, 백남운전집 4권, 이론과 실천사, 1991, 119쪽 64)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서해문집, 2011, 415쪽 65) 최익한, 위의 책, 2011, 411쪽

66) 안재홍, 위의 책, 2005, 437쪽 67) 안재홍, 위의 책, 2005, 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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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그 핵심적 주장이 토지 공유였다고 언급하였고, 사회주의 경제학자 백남운도 정약 용을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碩學인 동시에 先覺者로 평가하며, 정약용의 閭田制가 ‘공동 경작, 공동장부, 공동저장, 배분장부 등 노동전수권 이론의 기초가 확립된 것은 朝鮮近世 經濟思想史 상의 주요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평가하였다.68) 안재홍도 여전제에 대해 ’근세 토지국유론에서 출발한 일부 사상과 공통되며 왕실과 국가를 단위로 한 점에서만 근세 사 회주의 사상과 다르다고 평가하였다.69)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정약용이 제안한 토지개혁론으로서 여전제는 30가구 정도를 단 위로 하는 ‘閭’라는 행정 조직을 만들고, 그 안에 있는 토지를 공동경작하는 방식으로 중 국 고대의 정전제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의 부정이나 철폐를 의미하 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봉건적 신분질서와 통치체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속에서 시행되 는 일종의 토지국유제 개혁안이었다. 따라서 여전제를 통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근대 성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조선학 운동 참여자들은 여전제를 근대적 토지개혁론으로 이해하려 하였고, 王道政治의 이상을 담고 있는 정약용의 유학적 개혁론 을 본래의 맥락이 아닌 근대적 사회개혁론의 관점에서 평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약용은 자신이 성장했던 조선후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옮겨져 1930년대 식 민지 조선의 학술장에 이식이 되었던 것이다.70) 이러한 이식 과정에서 정약용과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개혁사상은 그들 자신이 본래 의도하지 않았던 근대성을 부여받게 되었던 것 이다.

4. 맺음말

이상을 통해서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조선후기 실학자의 저작 출간 실태를 살펴보고, 나 아가 1930년대 조선학운동 전개 속에서 실학자들의 사상이 어떻게 근대적으로 해석되었 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1910년 ‘국망’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재조일본인이 조직한 조선고서간행회와 조선연 구회를 중심으로 한국 고문헌의 수집·조사 및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朝鮮群書大 系, 朝鮮珍書刊行이라는 叢書로 간행되었다. 총서 안에는 해동역사, 동사강목, 연 려실기술, 택리지, 지봉유설, 성호사설, 발해고, 아언각비[이상 조선군서대계

], 열하일기, 지봉유설, 발해고, 산림경제, 이순신전집, 경세유표, 목민심서

[이상 朝鮮珍書刊行]가 포함되었다. 조선고서간행회와 조선연구회의 한국 고문헌에 대한 조사·연구 및 간행은 일제의 조선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한 정보 제공에 그 목적이 있었으 며, 이들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식민사학 형성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더욱이 조선연구회의

고서진서간행은 조선의 고문헌을 원문과 일본어 번역을 함께 출판함으로써 조선의 이미 지를 ‘支那’의 속국이자 사대주의 국가, 문약한 모방 문명의 국가로 구성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었다.

최남선이 현채·박은식 등과 함께 설립한 조선광문회에서의 고전 발간 사업은 일본인 학

68) 東亞日報 1935년 7월 16일, 「丁茶山의 思想」

69) 신조선, 1935년 8월

70) 김선희, 「조선학에 비친 다산」, 다산과 현대 10, 2017, 11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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