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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심론을 통한 주체성 환기

문서에서 근대 유학의 문화 지형과 조선학 (페이지 51-54)

‘위당 조선학’의 본심감통론이 지닌 시대적 의미

3. 본심론을 통한 주체성 환기

정인보는 당대 학자들 역시 조선 유학자들처럼 실심·본심 없이 자사념으로 허학을 행하 는 형태를 보인다고 비판한다. 이들에게 실심·본심을 환기시키기 위함이 양명학연론 저 술의 계기다. 정인보는 양명의 심학(心學)을 바탕으로 본심(本心)에 대한 논의를 상세히 진행한다.

정인보는 당대 지식인들은 화합과 단결을 말하지만 사실상 파벌 싸움은 더 격화되고, 학문 역시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만 힘을 얻으려 한다고 비판한다. 영국, 프랑 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의 학설만을 위대한 학문으로 여기고 수용하여 꼼꼼함과 똑똑함 이 발전되었지만 누구도 ‘실심’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렇듯 ‘실심의 시비분별’ 없이 단지

‘타인의 학설[他說]’에만 의지한다면 밖으로만 떠돌게 되어, 마음 속에는 “자사념(自私念) 이 쉽사리 들어서 있게” 되어 타인의 학설은 결국 “자사념에 대한 이용물”로 변하게 된 다.27) 학문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홀로 아는 곳’, 즉 실심에 따라야 하며, 한다. 자신만이 ‘홀로 아는 곳’이 허(虛)와 가(假)가 접근하지 못하는 곳으로서, 여기 에서 삼감이 곧 “실학의 핵심”이다.28)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진실한 마음[實心], “홀로 아는 곳”에 의해 학문을 행함은 자기 주체적인 마음으로 학문을 행함이다. 주체성 없이 타자에 의존하여 학문을 행하는 이들에게 내면의 ‘진실한 마음을 불러 깨우기[實心喚醒]’ 위함이 양명학연론 저술의 계

橋亨]의 朝鮮人과 조선연구, 한국문학연구 38,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10 참조

25) 구인모, 앞의 논문(2010), 107쪽. 참고로 朝鮮人の思想と性格 역서로는 조선총독부 지음, 김문학 옮김,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분석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 북타임, 2010 참조.

26) 문일평에게 보낸 서간문은 그러한 대응의 측면을 보여준다. “최근 일본 학자가 왕왕 자기가 조선사 가임네 하기를 좋아하여, 내외의 옛 역사를 증명하는데 한결같이 문헌에 의존한다고 과시하오. 이는 문헌에 의존하여 부회하면 이 땅의 백성이 가장 열등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알기 때문이오.” 정양완 옮김, 담원문록 중, 태학사, 2006, 139쪽.

27) 전집본 116쪽, 역해본 42쪽.

28) 전집본 158쪽, 역해본 222쪽.

기다.

정인보는 자신의 주체적 마음을 자율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양명의 심학을 논 한다. 다만 심학을 논하기 앞서 정인보는 양명의 ‘심학’이 근대 학술 용어로서 “마음을 대 상으로 삼아 고찰하는” 학문이 아님을 지적한다. 심학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 타고난 그 본모습, 즉 본밑 그대로 조금의 속임도 없이 살아가려는 공부”다. 여기서 ‘마음의 본밑’이 란 “어떤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있음을 보면 곧바로 옳지 않 다고 여기는 그 판단을 내리는 그곳”, 즉 ‘본심’으로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는 속일 수 없”는 곳이다.29)

양명의 심학은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 연구가 아닌, 우리의 본래적인 마음 즉 ‘본심’대로 살아가기 위함을 말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정인보가 말하는 본심은 바로 실심이다. 거짓이 없는 우리 자신의 진실한 마음[實心], 즉 마음의 밑바탕으로서 본심, 이 마음을 환기하고 자 하는 것이 양명학연론에서 강조하고자 한 핵심이다. ‘본심 환기’는 「역사적 고맹과 오인의 일대사」에서 ‘자기의 사리만을 도모하려는 일념’에 대한 처방법으로 제시했던 것으 로서, 이는 ‘실심 환성’과 동일하다.30) 정인보는 양명 심학을 통해 그 내용에 대해 더욱 상세히 논하고 있다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정인보는 양명의 심학을 논하면서 양명이 주장한 것은 ‘치양지(致良知)’설임을 지적한 다. ‘치양지’의 ‘치’는 ‘이룬다’는 뜻으로서 “한도를 다한 것”, ‘양지’는 “천생으로 가진 알 음” 즉 주체가 타고나면서 지닌 선천적인 앎이라는 뜻이다. 양지는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앎이지만, 사람들이 이를 저버리거나 가리고 심하면 분탕하 여 없어지도록 하기도 하기에 이 ‘앎’을 ‘앎’답게 이루어 놓자는 것이 양명의 ‘치양지’이 다.31) 여기서 정인보는 양명이 “양지는 곧 마음의 본체다”라고 한 것을 거론하며, ‘양지’

가 바로 ‘본심’임을 지적한다.32)

양명학 공부법의 핵심인 ‘치양지’는 본심인 ‘양지’를 회복하여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이 는 결국 본심을 불러일으켜 그대로 행하는 것으로서 ‘본심 환기’와 동일한 의미다. 양명학 은 자신의 본심을 불러일으켜 그대로 행하는 공부로서, 바로 ‘자기 마음[自心]’으로부터 비롯하기에 직접적이고 간이하다.33) 자신의 본심은 순일하게 참되어 거짓이 없기 때문에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 정인보는 이를 “일진무가(一眞無假)”로 표현하면서, 이를

“양명학의 근본[本]”이라고 본다.34)

29) 전집본 123~125쪽. 역해본 84쪽, 88~89쪽.

30) 정인보는 양명학연론에서 실심이 본심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실심’과 ‘본 심’이 양명학연론에서 사용되는 맥락을 볼 때, 두 용어는 진실한 본래의 마음을 지칭하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때문에 한정길, 김윤경, 김세정 등 정인보의 양명학을 다룬 선행연구 역시 모두 실 심을 본심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실심’은 주로 허학과 가학을 행하는 마음에 대비되는 진실한 마음 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며, ‘본심’은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마음(본밑마음), 즉 마음의 본체 를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된다는 차이가 있다.

31) 더불어 정인보는 양명학이 간단하고 쉬우며 단순 명쾌하여, “양지의 한 점 곧은 피[一點直血]”로써 그의 소멸하여 없어지게 된 “마음의 혼[心魂]”을 불러 회복하자는 것임을 지적한다. 전집본 116~117 쪽, 역해본 57~58쪽.

32) 정인보는 “남 모르고 나 홀로 아는 이 한 곳”이 의리와 이익, 선과 악이 나뉘는 경계로서 “여기서 소스라쳐 警發함이 있으면 곧 眞生活이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전집본 125쪽, 역해본 90쪽.

33) 정인보는 당시 지식인들이 자기 내면의 주체적인 본래 마음, ‘자기 마음[自心]’에서 벗어나 언어문자 를 종합하거나 지식을 분석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비판한다. 전집본 131~132쪽. 역해본 118~119쪽.

34) 전집본 132쪽. 역해본 119쪽.

양명학에서 ‘양지’는 “사람이 환경‧교육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도덕 의식과 도덕 감정”으로 “주체가 본래 가진 내재적 특징”이다. 또한 “사람에게 내재 된 도덕 판단의 능력이자 도덕 판단의 체계”로서 윤리학의 ‘양심’에 해당한다.35) 정인보에 따르면 ‘양지’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있음을 보면 곧 바로 옳지 않다고 여기는 그 판단을 내리는 그곳”으로서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 기는 속일 수 없는” 본심이다. 양지로서 본심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체의 시비선악 을 판단하는 도덕 주체를 지칭하고, ‘실심 환성’, ‘본심 환기’, ‘치양지’는 자신 내면에 선 천적으로 지닌 도덕 주체인 본심을 불러일으켜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36)

더불어 정인보가 양명학의 근본이라고 한 ‘일진무가’는 나 홀로 아는 마음자리에서 거짓 없이 진실한 본래 마음으로 행함을 지칭한다. ‘일진무가’에는 주체성 없이 남의 의견에 끌 려가는 것뿐 아니라, 외부의 사물을 바라는 욕망으로 내면의 주체인 실심, 본심을 따르지 않는 것 역시 포함된다.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사적인 마음을 본래 마음으로 인정하 지 않는 것은 전통 유학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정인보가 제시하는 공부란 실심 이자 본심인 “도덕 주체를 확립하는 공부”라고 할 수 있다.37)

정인보는 이처럼 양명학의 논의를 빌어 우리 내면의 도덕 주체인 양지인 본심을 불러일 으킬 것을 주장한다.38) 여기서 지적할 점은 그의 본심론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 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본심 환기는 조선인에게만 적용되는 사안이 아니다. 본심 환기의 주된 비판 대상은 자사념으로 실심과 본심을 잃어버린 이들이며, 일제강점기에 한정하자 면 자기 주체성을 잃고 서구학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이들이다. 나아가 그의 본심론은 조선인은 주체성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대응의 논리를 지닌다. 정인보 당대에 조선의 무 주체성을 논한 대표적 지식인으로는 이광수(李光洙, 1892~1950)를 들 수 있다.

앞서 일제 관학을 대표하는 다카하시는 고착성, 종속성, 비독립성, 정체성 등을 지닌 조 선 유학은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서 망국의 이념으로 여기고, 유학을 통해 열등한 조선인 을 논증하고자 했음을 살폈다. 다카하시의 시각은 이광수에게 수용되어 내면화되었다.39)

이광수는 조선 유학을 망국의 근본 원인으로서 버려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서구 근대 문명과 이들을 모방한 일본을 본받아야 할 보편으로 여겼다. 그는 문명이 부재한 조선인 이 서구 선진국 혹은 일본처럼 되기 위한 출발점으로 신문명화된 조선인을 정립하고자 했 다. 그는 일본의 문화통치 시기에 근대 주체로서의 개인을 발견했다. 그는 ‘나는 내다’라 는 주체적 자의식을 자각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근대성을 형성하는 뿌리로서, 이 러한 자각이 없으면 문명과 진보를 이룰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조선 유학으로 말미암 아 조선인의 정신은 천년 이상 정지된 상태라고 여겼다.40)

35) 陳來 지음, 전병욱 옮김, 양명철학, 예문서원, 2004, 288~230쪽.

36) 본심에 따라 결연히 행하는 것을 정인보는 「역사적 고맹과 오인의 일대사」에서 ‘자립(自立)’이라 표 현하기도 했다. 정인보 저, 담원 정인보전집 2, 연세대학교 출판사, 1983, 283쪽.

37) 김윤경, 「薝園 鄭寅普의 주체적 實心論」, 유교사상문화연구 48, 한국유교학회, 2012, 84쪽.

38) 정인보는 이처럼 양명의 심학을 중시하면서도, 양명학이 개인 스스로가 자기 마음에서 참된 시비를 스스로 분별하여 빈껍데기와 가식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편임을 지적한다. 전집본 239쪽, 역해본, 572쪽.

39) 이하 이광수에 대한 내용은 박정심의 「이광수의 근대 주체의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한국철학논집

 45, 한국철학사연구회, 2015, 「식민기 부정적 주체의식의 유학인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 동양철 학연구 83, 동양철학연구회, 2015, 두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40) 박정심, 앞의 논문(한국철학논집 45, 2015), 129~133쪽.

이광수에 따르면, 조선은 경제적, 도덕적, 정신적 파산상태에 있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정신적 파산으로 조선 유학은 파산의 근본 원인이었다. 따라서 주체적 자각과 행위는 유 학의 무정신적인 상태와 구습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기실 조선 유학은 이미 개 항기 때부터 시대정신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적 성찰이 제기되었다. 하지 만 이는 자기 비하와 부정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반면 이광수는 주체적 자기의식을 갖 지 못했던 유학자들 때문에 조선이 정신적 능력을 상실했다고 여겼다. 조선 유학은 공상 과 공론으로서 정신의 기능을 소모시키고 마비시킨 망국의 이념으로서 결코 민족의 자산 이 될 수 없었다. 사대주의와 소중화 의식은 조선 유학의 무정신성과 무주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민족은 타자에 동화되어 주체성을 상실한 파산한 주체이기에 ‘조 선인은 죽었다’고 선언했다.41)

조선 유학은 이광수에게 버려야 할 전근대적 유산에 지나지 않았다. 민족 재생의 길은 민족 개조를 통한 문명화로 공상과 공론이었던 유학과 단절을 통해 가능하며, 조선인의 주체적 자각과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본을 통해 유입된 신문명을 통해서라고 주장 했다.42)

이광수는 서구 선진국과 그들을 모방한 일본을 수용해야 할 문명으로 여기고 그 속에서 근대 주체로서 개인을 발견하고 추구했다. 하지만 박정심의 지적처럼, 그가 추구한 조선인 은 “서구 혹은 일본에 동화된 주체였다는 점에서 비주체적 주체”이다. 이처럼 “타자화된 정체성은 비주체적 정체성을 생성하고 비주체적 정체성을 자신의 삶에 대한 바른 판단과 대응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참된 주체의식이라고 할 수 없다”43)

정인보의 본심론은 서구 선진국의 논의만을 중시하며 이를 수용하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이지만, 동시에 이광수처럼 주체적 자기의식으로서 주체성을 잃고 무비판적으로 서구 문명과 일본의 식민담론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서구의 사유가 아닌 유학 자체의 사유를 통해 도덕 주체를 논한 정인보의 본심론은 조선 유학과 조선인 의 무주체성에 대한 대응 논리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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