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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 ‘조선학운동’의 성과/영향은 어떠했을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관련성 과를 집대성한 대중서의 출판에서 찾을 수 있다. 명인전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당연히 이 책이 당대 조선 역사와 문화 연구를 대표하거나 기준‧지표가 될 수 없으며, 당대에 미 친 영향력도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이 책은 한 필자의 일관된 논리로 구성된 것은 아니 29) 신석호, 「李俊慶」, 명인전 1, 254쪽.

30) 김상기, 「발해태조高王」, 명인전 1, 52~53쪽.

31) 김상기, 「정몽주」, 명인전 1, 142쪽.

32) 이병도, 「설총」, 명인전 1, 59쪽.

33) 이혼구, 「이익」, 명인전 3, 355쪽.

다. 그렇지만 20여 명의 여러 필자의 다양한 논지‧입장이 반영되어 있기에 당대 ‘조선학’

의 일반적인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하나의 준거로 활용하면 당대 조선 역사 와 문화 연구 현황에 관한 ‘풍부한’ 복원에 접근할 수 있다.

명인전은 ‘위인’ 소개를 중심으로 조선학 연구의 한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조선학운동’의 대중적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通史를 대상으로 조선 위인에 관한 균형적 이고, 체계적인 소개에 주력했다. ‘균형’이라는 고대사부터 조선시대까지 선정 인물의 숫 자가 비슷하며, ‘체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 전체를 아우르는 인물이 선정되었다 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학의 체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영역별‧시 대별 분량과 비중의 균형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조선명인전은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학술영역에서 타자인 일제와의 긴장 관계가 내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명인전은 해방 후 한국 역사와 문화 정리 사업의 토대가 되었다. 해방 직후 새 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한 연구 성과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강점기의 학술 활동과 성과가 해방 후에 재정리되었다. 예를 들면, 신채호가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 재했던 「조선사」가 1948년 종로서원에서 조선상고사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해방을 몇 년 앞둔 시기에 작성된 조선 위인에 관한 정리 내용은 해방 후 한국 역사와 문화를

‘대중’ 독자에게 전달하는 바탕이 되었다.

<참고문헌>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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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1930년대 조선 위인의 소개와 조선학의 대중화」에 대한 토론문

변은진(전주대)

1. 이 글은 1930년대 전반기에 문화운동·학술운동·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조선학운 동’이 이후 대중적 차원에서 어떻게 확산되었는지를, 조선명인전 1~3이라는 대중서적의 출판과 그 내용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역사적 현상으로서 ‘조선학운동’을 다룬 연 구는 제법 있는 편이지만, 대중 레벨에서 이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져 확산되었는지를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글의 시도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제기한 여러 의미있는 지점들이 논문을 통해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어서 많이 아쉬움이 남는데, 이는 향후 논문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보완되리라 기대한다.

2. 머리말에서 학술운동으로서 ‘조선학’의 성과가, 당대 지식인 20여 명이 참여하여 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정치·사회·문화·예술의 영역에서 100여 명의 인물을 소개한 명인 전을 ‘준거’로 하여 대중적 확산을 파악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물론 이 책이 “1930년대

‘조선학’의 성과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서론, 본론, 결 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논문이 ‘성공적’으로 완성되기 위 해서는, 오히려 명인전이 왜 준거가 될 만한 사례인지를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좀 더 폭넓게 살펴보고 분석하여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맺음말 의 내용은 거의 머리말에서 서술되어야 하는 내용이 아닌가 판단되는데, 이를 머리말과 본론에서 살려서 ‘준거’로서의 확신을 더해주는 형태로 서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다소 추상적 수준이라 하더라도 ‘조선학의 대중화’라는 제목에 맞는 내용으로 재정리되었으면 좋겠다.

3. 사전적 의미에서 영웅(hero, heroine), 위인(great man), 명인(master, expert)은 다 소 구분되는 개념임은 분명하다. 굳이 수적으로 생각해보면 ‘영웅〈위인〈명인’으로 명인이 가장 폭이 넓은 개념인 것 같기도 하다. 명인전에 등장하는 100여 명은 이 세 영역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인용된 강성연의 영웅에서 위인으로에서 언급했듯이 검열의 상황 에서 “개인의 수양과 도덕성을 통해 성공을 이룩한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새로운 개념의

‘영웅’ 즉 ‘위인’으로 주목되기 시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도 제기하고 있 듯이 무슨 기준으로 100여 명이 선정되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 글에서 는 이 점에 대해 명확히 정리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당연히 들어갈 것 같은데) 빠진 명인들’, 또 ‘(당연히 들어갈 것 같은데) 빠진 필자 들’에 좀 더 천착해보면 그 기준이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

4. 사실상 명인전은 여러 필자가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대중에게 소개한다는 관점에서

쓰여진 글들이다. 요즘도 그러하듯이, 기획 단계에서 선정기준을 마련하고 실제로 선정하 고 그 다음 가장 적합한 필자를 섭외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기존에 해당 인물, 적어도 해당 분야에 관한 글을 썼던 필자들에게 원고 의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 명인전이 엄격한 객관적 기준에 의해서만 집필되는 ‘사전식’ 글쓰기는 아니다. 그래서 예 컨대 고유섭이 안견에 대한 글을 일본어 사전(국사사전, 1938)에 싣고 전기류에 속하는

명인전(1939)에 싣는 것은 다른 글쓰기와 다른 내용 및 강조점(적극적 평가)으로 서술되 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고유섭은 각각의 원고 의뢰를 왜 모두 수락했고, 강조점을 두고 서술한 글에 대해 대중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 일 것이다. 이런 류의 책에서 중요한 점은 출판의 기획 의도와 실제로 얼마나 많이 읽혀 서 어떤 방향으로 영향력이 행사되었을까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좀 다 른 각도에서의 사료 조사와 분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5. 이 글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 가운데 주목되는 점은 ‘전시체제기’, 즉 일제가 ‘대동 아공영권’을 꿈꾸며 한반도와 만주를 넘어 중국대륙, 나아가 아시아태평양 연안으로까지 침략전쟁을 확대해가는 속에서(물론 책의 출판 시기는 이러한 상황으로까지 전개되기 전 이지만 읽히는 시기는 그러함), ‘제국’의 한 지역인 조선에서의 대중서 출간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즉 문화 교류의 지역적 단위라는 제한된 사고 속에서, “서열 에서 밀린 ‘주체’는 2등 이하라는 담론의 자장 안에 속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심지어 지배 권력의 ‘용인’ 아래 ‘토착성, 향토성’의 논의가 가능”해지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시 간과 공간에 한정한 민족 단위의 사고에 제한”을 받는 것을 어떻게 돌파하려 했고 극복해 갔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물론 필자에 따라 각기 다르리라 생각되는데, 위에서 언급한

‘제한’이라는 점을 돌파해보려는 필자 간의 의지나 서술의 행간을 비교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예컨대 단순화시켜보면 명인전에서는 삼국통일에 대한 해석과 서술에서 김부 식 류의 인식과 유득공 류의 인식(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인식)이 모두 보이는데 이를 어떻 게 해석할 것인가, 이순신은 ‘영웅에서 명인’ 정도로 ‘추락’한 것인가, 김정호에 대한 입장 의 차이나 실학을 포함한 ‘조선 유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의 정도의 차이 등등.

6. 전시체제기의 대중, 특히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성향을 지닌 청년·학생층의 경우 ‘영웅’

에 대한 갈망 욕구가 매우 컸다. 이들은 과거 조선이 식민지화되고 독립운동이 실패한 것 을 조선민족의 단결과 자각의 부족(사대주의와 당파성), 다른 나라처럼 전체 민족을 지도 해갈 만한 위대한 영웅이 출현하지 않은 점 등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안중근이나 윤봉 길, 김일성 등을 영웅이라 칭송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 오사카에서 고학을 하던 고학생 黃山熙烈(22세)은 일기장에 「조선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수기를 썼는데, “위인이라 칭송받 고 있는 우리 조상은 저 세상에서 비장한 難地를 딛고 넘어 이제야 그 주의를 다 하려고 할 무렵에 사상 관계로 패배했다. 그 후 우리 동포는 어버이를 잃은 고아의 몸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非常한 이 자들에게서 압박에 압박을 거듭받고 있다.”라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또 교토의 대학생 송몽규와 윤동주는 “조선 고유의 문화를 연구하여 조선문화 를 유지 향상시키는 것이 ‘민족적 文化人’의 사명”이라고 했다. 히틀러가 보여준 ‘독일민 족의 대단결’을 강조하면서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하는 경우도 많았고, 인도의 간디를

숭상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 청년학생은 거의 다 한말부터 번역 또는 번안하여 소개되 던 세계 각국의 여러 위인전과 아울러 새로 출판된 명인전을 읽은 독자들이라 확신한 다. 이들의 사고방식과 어법에는 일본이 동아신질서를 구축하려 하면서 야마토민족의 우 수성을 강조했던 논리의 편린도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선학운동’의 영향도 발견되곤 한다. 명인전의 대중적 영향력, 「1930년대 조선 위인의 소개와 ‘조선학’의 대중화」를 이 러한 맥락과 연결시켜 파악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서에서 근대 유학의 문화 지형과 조선학 (페이지 3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