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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용과 ‘조선적’ 기독교

문서에서 근대 유학의 문화 지형과 조선학 (페이지 101-116)

일제강점기 ‘조선적’ 기독교의 모색과 최태용

3. 최태용과 ‘조선적’ 기독교

최태용은 1897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태어났다. 1913년 관비생으로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으며 관리가 되고자 했으나, 농림학교 재학 중이던 1915년 기독교를 접하게 되고 이듬해 소명체험을 겪으며 복음 전도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1918년 연희전문학교 신학 과에 입학였으나 1년 정도 다니다, 연희전문학교 농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 무렵 우치무라 간조의 책을 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최태용은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세 차례의 일본 유학을 통해 우치무라 의 무교회주의와 기독교 역사와 철학 등을 배웠으며, 그를 통해 당시 조선 교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방법으로서 ‘영적 기독교’46)를 구체화시켰다. 또 천래지성과 영과 진리

라는 잡지를 발행해, 문서전도 활동을 이어나가며 자신의 기독교 사상과 주장을 펴나갔 다.

1) 기독교 철학 수용과 영적 기독교

최태용의 첫 번째 유학 당시, 그는 우치무라에게 무교회주의를 배워 교회와 신앙의 관 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으며, 우치무라에게 신앙은 독립적 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움 으로써 선교사가 전해준 기독교가 아닌 조선인의 독자적인 신학과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47)

44) 김인서저작전집 1, 295~296; 전인수, 위의 논문, 189쪽.

45) 김인서저작전집 2, 328~329, 230~231쪽.

“조선인이 성의(誠意)껏 예수를 믿으면 서양 종교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참 조선 종교요, 동양심(東洋心)으로써 진실로 성경을 연구하면 거기에는 자연동양토색의 신학이 나오는 것이다. 먼저 복음을 믿으라! 성의 신앙을 거짓없이 고백하면 이것이 조선적 기독교다. 먼저 성경을 읽으라! 동양심 에 각한 바를 동양형식으로 발표하면 이것이 동양적 기독교다.”

46) 영적 기독교론은 1929년 영과 진리 7월호(7호)부터 1931년 7월호(33호)까지 총 20호의 분량으로 연재되었다. 영적 기독교론을 크게 3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편에서는 기독교 진리인 ‘영(하나님)’을 살펴보고 ‘영’과 ‘진리(하나님의 언표)’의 원칙을 수립하였으며, 2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의 존재 로써 영의 거듭남을 살펴보았으며, 3편에서는 구원을 신앙으로 확립하고 신앙 경험의 과정과 신앙생 활을 안내하였다.

47) “신앙의 독립성” 영과 진리 14(1930.02.26.), 최태용전집 2, 254쪽.

1923년 귀국한 최태용은 신생명에 조선 교회를 비판하고 신앙 부흥이 필요하다는 내 용의 글을 여러 차례 기고하였으며, 1925년부터 천래지성을 발행하여 조선 교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나갔다. 그는 기독교가 신앙과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을 문제로 인 식하고, 조선 교회가 부패한 이유가 교회와 신앙이 동일한 것으로 오해한 결과라고 말하 며, 조선 교회가 신앙의 결핍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48) 그는 조선 교회의 죽은 신앙을 해 결할 방법으로 ‘생명 신앙’을 주장하며, 신앙 부흥(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49)

최태용은 ‘영(靈)’과 ‘육(肉)’의 관계로 이를 설명했다. 그는 절대 영인 하나님과 영인 하 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간의 존재인 육으로서 영과 육의 속성을 정리했다. 육인 인간 은 자신의 노력으로는 영의 자리를 회복하지 못하며, 절대 영인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서 만 새 생명을 얻은 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육인 인간이 육을 부정하며 위로부터 오는 영을 좇아 사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했다.50)

신앙혁명을 주장하며 조선 교회의 개혁을 외쳤으나 교회에 외면당하자, 최태용은 1927 년 천래지성을 폐간했다. 그 후 1929년 1월 다시 영과 진리의 발행하기 시작하며, 영 과 진리로서 기독교를 규명하고 하였다. 그는 이 무렵 두 번째 유학길에 올랐고, 최태용은 두번째 유학에서 명치 신학교에 입학하여 과거와 현재의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면서 영적 기독교를 심화해 나갔다.51) 일본 유학 중에도 영과 진리를 발행하며 ‘영적 기독교’의 주 장을 펴나갔다.

영적 기독교론은 1929년 영과 진리 7월호(7호)부터 1931년 7월호(33호)까지 총 20호 의 분량으로 연재되었다. 영적 기독교론을 크게 3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편에서는 기 독교 진리인 ‘영(하나님)’을 살펴보고 ‘영’과 ‘진리(하나님의 언표)’의 원칙을 설명했다. 영 인 하나님은 진리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만, 불변하는 영과 달리 진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므로 진리는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고 말했 다.52)

2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의 존재로서 영의 거듭남을 살펴보았다. 영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육으로 이 땅에 와서 육을 부정하고 영으로 산 존재인지 를 설명한다. 이로써 예수그리스도는 육인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구원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53)

3편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설명하고, 신앙 경험의 과정과 신앙생활을 안내한다.

신자는 영인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구체적으로 임하는 진리를 경험함으로써 늘 새로운 생 명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54)

48) “현대교회의 근본적 결함은 무엇이냐” 생명 신앙(1933.11.01.), 최태용전집 4, 74쪽,

49) “신앙혁명” 천래지성 8(1926.01.10.), 최태용전집 1, 234쪽, ; “신앙혁명” 영과 진리 21(

1930.09.30.), 최태용전집 2.

50) “영과 육”천래지성 16(1926.09.21.), 최태용전집 1권, 410~413쪽.

51) “주필의 기사” 영과 진리 9(1929.09.20.), 최태용전집 2, 171쪽.

52) “영의 사람에게서의 顯現(현현)에 대하여” 영과 진리 1(1929.02.06.), 최태용전집 2, 22쪽 ; “영 적 기독교(2)>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와 기독교의 신 해석” 영과 진리 8(1929.08.20.), 최태용전집

2, 138-141쪽.

53) “영적 기독교(11)>예수그리스도(4)” 영과 진리 18(1930.07.12.), 최태용전집 2, 327-331쪽; “영 적 기독교(13)>예수그리스도(6)” 영과 진리 23(1930.11.30.), 최태용전집 2, 414-415쪽; “영적 기 독교(14)>예수그리스도(7)”영과 진리 24(1930.12.31.), 최태용전집 2, 429-430쪽.

54) “영적 기독교(16)>신앙과 신앙 생활(2)” 영과 진리 26(1931.02.28.), 최태용전집 2, 470-471쪽;

최태용은 영적 기독교를 가리켜 “한 동양인인 “내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누가 나를 가르친 것도 아니요” 독립하여 그리스도를 경험한 기독교의 제창(提唱)”이라고 말한 다.55) 영적기독교에서 주장되는 진리의 속성으로 인해 최태용의 독자적인 신학체계인 영 적 기독교론은 ‘조선적’ 신학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진리의 현재성으로 인해 서구로서 이 해된 서구 기독교와 같이 조선으로서 이해된 조선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 긴다. 즉, 조선의 당면한 현실에 맞게 언표된 진리로서 구현된 ‘조선적’ 기독교가 성립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최태용이 일본에서 공부를 통해 기독교 주장의 깊이를 더해가며 영과 진리를 통해 주 장을 펴나가고 있을 때, 국내에서 여기에 호응하며 최태용의 주장을 선포하고 다닌 인물 이 백남용(白南鏞)이다. 백남용은 강원도, 함경도, 경상도 등지를 다니며, 최태용의 영적 기독교 주장을 설교했다. 그가 이끄는 집회는 언제나 성황이었고 많은 사람이 영적 기독 교 주장에 동감하며 돌아가 자기 교회에서 이 설교를 다시 전하여 최태용의 주장이 조선 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최태용이 때때로 귀국해 집회를 직접 이끌기도 했지 만, 최태용의 부재시 국내 집회는 백남용에 의해 주도되었다.

최태용이 영적 기독교를 심화하며 자신의 기독교 주장을 구체화하였지만, 기성 교회는 여전히 최태용과 그의 지지자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두번째 유학 중 기독교 역사와 기독교 철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던 최태용은 성서비평을 대폭 수용해 기 독교가 성경과 신앙을 동일하게 보는 오류를 지적했다.56) 조선 교회는 최태용이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에 대해 영적 기독교의 ‘화육(化肉)’ 주장과57)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지목하며 이를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최태용과 장로교회 분쟁의 불씨가 된 것이 백남용이 경남 김해에서 이끈 집회였다. 1931년 9월 21일 백남용은 경남 부산시찰구 전도사들의 초청을 받아 김해를 방문했고, 김해 대지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는데,58) 1932년 1월 제30회 경남 노회에서 는 소속 전도사들이 당회의 허락 없이 백남용을 초빙해 집회를 연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 며 그 경위를 조사해 노회에 보고할 것을 명했다. 이듬해 제31회 경남노회 정치총회에서 부산시찰회의 백남용 집회 관련 보고가 있었는데, 당시 노회장이었던 주기철(朱基徹)은

“교회법을 따라 치리하되 시간을 두고 지도, 감독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경남 노회는 약 6개월간 해당 시찰회를 통해 관련 전도사들과 교회를 설득했다. 그러나 해당 교회들은 노 회의 치리에 복종하지 않자, 7월 임시노회에서 최태용계 추종세력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 노회에서 최태용을 추종하던 전도사들과 장로들은 ‘이단’과 ‘상회명령 불복’의 죄목으 로 출교, 면직, 무기책벌 등의 처분을 받았다.59)

“영적 기독교(19)>신앙과 신앙 생활(5)” 영과 진리 31(1931.08.04.), 최태용전집 2, 544쪽.

55) “영적 기독교(1)”(영과 진리 7(1929.07.10.)최태용전집 2, 125쪽.

56) 전인수, 「최태용의 조선적기독교 연구」 한국기독교와 역사 39(2013) 75~76쪽. 재인용.

57) 최태용은 화육(化肉)이란 말을 사용했으나, 최태용을 비판하는 이를 ‘순육론’이라고 명칭했다. ‘순육 론’이 기성 교단에서 이단시 된 것은 영과 진리 23(1930.11.30.) “영적 기독교(13)”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육이 되어 나셔다 그리하여 그는 벌써 하나님이 되지 못하고, 육인 인간이다”말한 부분으로 예수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닌 ‘순육’으로 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8) “조선 교회에 관용을 바람” 영과 진리 43(1932.07.31.), 최태용전집 3, 200-201쪽.

59) 이만열, 「주기철 목사의 신앙」, 한국기독교와 역사 9(1998), 282-301쪽.

장로교 총회가 아닌 노회 차원의 이단 치리였으나, 그간 문서 전도를 통해 복음 전도를 이어오던 최태용과 그의 지지자들이 받은 영향은 매우 컸다. 노회의 처분이 정확히 내려 지기 전인 1932년, 조사명령이 내려졌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최태용과 그의 지지자들이 집 회를 할 공간을 빌리는 일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태용은 조선교계의 반응에 비참함을 느끼며, “자신에게 기성 교회를 파괴할 의도가 없고, 교회의 부흥을 신앙의 부흥으로만 알며, 신앙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 긴밀하고 생명적인 것으로 하자는 주장을 할 뿐”이라고 변론하며, 관대한 이해를 호소했지만,60) 조 선 교회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었다.

1933년 5월 최태용은 두번째 유학을 마무리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선 교 회에 신학이 없음을 지목하며, 선교사들이 전해준 정통주의 신학은 화석화되어 버렸고, 한 편으로는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영계에 빠져있는 조선 교회의 상태를 돌아보며, 생명적 신앙이 되기 위해 건전한 신학이 필요함을 느끼고, 신학숙(神學塾)을 열고자 계획하였다.

우리 신학숙은 한 파, 한 계통의 전통을 계승함이 없이 온전히 독립한 새 출발로, 학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인식,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조선인의 영혼이 기독교를 소화, 주장하는 조 선산 신학의 출현, 완성의 기대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대는 짧은 세월로 만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나의 일대로는 소기의 성과를 보기 어려울 듯도 합니다. … 조선 신학의 산출 을 사명으로 한 조선 신학숙은 나의 생애를 지나 넘어가서 그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61)

신학숙은 경성부 종로의 부활사 강당에서 열리며, 영어, 독일어, 희랍어 히브리어 등의 언어과목과 자연과학, 철학, 역사신학, 계통신학, 성서신학, 성경학과 석의(釋義) 과목을 개설하고자 하였고, 중등학교 졸업자 이상을 대상으로 선발하고자 했다.62) 그러나 곧 인 력과 자금의 문제로 장소를 옮겨 최태용의 경성 자택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옮겼다가63) 결 국 신학숙의 경영을 포기하였다. 그는 대신 부활사 강당의 강연회를 시작하였는데, 부활사 강연회 역시 참석 인원이 적은 이유로 10회만에 시내 집회를 중지하고 진리사로 이전하였 으나,64) 1933년 연말 금마집회와 순회 집회 기간과 맞물리며 진리사의 복음집회도 일회 로 종료되었다.65)

1934년 3월 최태용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시기 영과 진리에 실린 최태용의 저작들을 보면, 영과 진리의 관계에 재정립,66) 슐라이마허67), 리츨68), 칼 바르트와 브루 너69) 신학 등 기독교 철학의 정리 중에 있었다. 즉 세번째 유학은 두번째 유학때 마무리

60) “조선 교회에 관용을 바람” 영과 진리 43(1932.07.31.), 최태용전집 3, 399쪽.

61) “나는 神學塾(신학숙)을 엽니다” 영과 진리 52(1933.07.01.), 최태용전집 3, 356-357쪽.

62) “광고” 영과 진리 52(1933.07.01.), 최태용전집 3, 258쪽.

63) “광고” 영과 진리 54(1933.08.22.), 최태용전집 3, 382-383쪽.

64) “시내 집회를 중지하면서” 영과 진리 59(1933.12.04.), 최태용전집 3, 474-475쪽.

65) “기독자 생애의 표어(11월 18일 복음집회를 진리사에 옮기고 이를 말하다)” 영과 진리

60(1933.12.29.), 최태용전집 3, 486-488쪽.

66) “영과 진리” 영과 진리 62(1934.02.17.), 최태용전집 3, 513-522쪽.

67)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 사상” 영과 진리 63(1934.03.26.), 최태용전집 3, 531-538쪽.

68) “리츨 신학(상)” 영과 진리 64(1934.05.06.), 최태용전집 3, 547-554쪽; “리츨 신학(하)” 영과 진리 66(1934.07.09.), 최태용전집 4, 36-44쪽.

69) “변증법 신학의 근상” 영과 진리 68(1934.09.10.), 최태용전집 4,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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