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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 지식인 김구경의 재중 문화적 교류와 그 학술적 성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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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민지 조선 지식인 김구경의 재중 문화적 교류와 그 학술적 성과에 대하여*

1)

김 철*·김교령**

❙국문초록❙

식민지 지식인 김구경은

1928

년 말 조선을 떠나 광복을 맞기까지 이국땅 중국

(

베이징

,

봉천 등

)

에서

16

년 이란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적지 않은 학문적 성과들을 이루었는바 그러한 성과들은 오늘 다시 보아도 의 미가 작지 않다

.

전체적으로 볼 때 북경시절 김구경의 교류는 루쉰

,

저우쭤런

,

후스

,

워이젠궁

,

류반눙 등 문인들을 상대로 한 문화적 교류가 중심이었다면 봉천시절의 교류는 진위푸과 일본학자들 간의 학술적 교류가 중심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우선 베이징 시절 김구경은 중국의 현대지식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 고 나름의 새로운 문화의식으로 불교학을 중심으로 한 동양학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

특히 후스와 진위푸 등 중 국 최고의 학자

,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학술사상과 방법을 수용하는 한편 보다 객관적이고 폭넓은 동아 시아 학술 연구 시각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학술 시각은 그의 동양학 연구에 소중한 바탕이 되었 던 것이다

.

이는 김구경이 중국현대지식인들과의 사상

,

문화적 교류에서 획득한 가장 값진 성과이기도 하다

.

따라서 김구경은 중

·

일 현대문인들과의 긴밀한 교류와 협력 속에서 돈황

(

敦煌

)

석실자료교감 및 간행과 같은 중요한 업적들을 이루게 된다

.

다음

,

봉천 시절에 이룩한 업적들도 의미가 크다

.

김구경은 중국의 학자들 못지않게 풍부한 지식과 다양하 고 폭넓은 학술적 시각으로 만주역사와 언어 민속

,

몽골어연구 등에서 적지 않은 성과들을 이루어냈는바 이러 한 업적들은 개인적인 업적의 의미를 넘어서 한

·

·

3

국의 동양학연구에 대한 기여가 된다

.

이 과정에 김 구경은 동아시아

3

국의 학자

,

문인들이 동양학연구에서 상호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교량적 역할을 담당 했었는바 이는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세계와 통할 수 있는 동양학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추구와 관련 이 있다고 본다

.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던 김구경의 문화의식과 학술이념은 마 땅히 학계의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

[

주제어

]

김구경

,

사상교류

,

동양학

,

동아시아시각

,

학술성과

* 본 논문은 중국국가사회과학기금프로젝트 “20세기중한(조)현대문학관계편년사연구(20世紀中韓/朝現代文學關系編年史研究)”

(項目號:18BZW116)의 단계적 성과물이다.

** 제1저자, 중국 산동대학교 동북아대학 교수 / jz2013@sdu.edu.cn

*** 공동저자, 중국 산동대학교 박사과정, 하얼빈공업대학교(위해) 언어문학대학 한국어학과 조교수 / jiaolingjin@126.com

(2)

❘목 차❘

.

들어가는 말

.

중국의 학자

,

문인들과의 교류와 협력

.

김구경의 동양학 연구에서 이룩한 성취

.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근현대 한

·

중 지식인들 간의 지적인 문화교류는 비록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식민지

,

또는 반식민지

(

半殖 民地

)

라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 맥을 이어왔다

.

특히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이 일본을 통한 서 구 문명의 수용을 유일한 대안으로 삼던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은 중국의 문화

,

또는 문학에 지 대한 관심을 갖고 현대 중국의 지식인들과 적극적이고 심도 있는 교류를 시도함으로써 자국의 문화문학발전은 물론 양국 문화문학의 공동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

이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 은 자국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전통적 동양학을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탐구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각과 시야를 확보하게 되었는바

,

그 중심에 조선의 학자 김구경

(

金九經

, 1899~1950?)

이 있었다

.

1) 김구경은

1899

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

2) 원명은 김구경이고 김명상

(

金明床

)

이라는 다른 이름을 쓰기도 했 으며

,

자는

퇴여

(

退如

)’

이다

. 1920

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1

년에 일본으로 유학가서 교토

(

京 都

)

진종대곡파 대곡대학

(

眞宗大谷派大谷大學

)

예과에 입학하여 지나문학을 공부했다

.

3)

1923

년에는 재교토 고학생회

(

苦學生會

)

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했었는데 배일사상을 전파한 혐의로 일본경찰들로부터 요시찰인물로 지목되기도 했었다

.

4)

1927

년 봄에 유학을 마친 김구경은 귀국하여 서울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사서관

(

司書官

)

에 임직한다

.

같은 해

9

월에 사직하고 개성

(

開城

)

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들어갔지 만

1928

6

월까지 근무하다가 사직하고 그해 연말에 중국 베이징대학에 오게 된다

.

5) 베이징대학에서 김구

1)김구경은 현대 조선의 선학 연구자이며 조선 서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서 일명 김명상(金明常)이라 불리기도 했다. 자호 는 담설행자(擔雪行者), 퇴여(退如), 대서당(待曙堂) 등이 있다. 1940년 창씨개명을 하고 ‘新馬晉’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었 다. 김구경의 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중국의 일부 연구자들은 자료 중의 ‘鷄林 金九經’에 대해 ‘鷄林’이 김구경 의 ‘호’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이는 ‘호’가 아니라 ‘조선’이란 나라나 어떤 특정된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鷄林’은 옛날 조 선 신라의 명칭이기도 하다. 또 어떤 기록에는 ‘高麗 金九經’이라고도 나와 있는데 이것도 같은 경우라고 본다. ‘高麗’와 ‘鷄林’ 은 모두 ‘조선’을 뜻하는 말일 뿐 호는 아니다.

2)김구경의 출생지에 대해서 한·중 양국학계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김구경의 출생지를 일반적으로 경주(慶州) 로 보고 있으나 중국의 일부 학자(리친푸[李勤璞])들은 김구경이 朝鮮의 漢城(京城府) 孝子町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 다. 출생 연대도 다르다. 한국에서는 1889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1900년 2월로 보고 있다. 앞으로 좀 더 고증해서 정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일단 김구경의 모국인 한국의 견해에 따르기로 했다. 한국에도 아직 까지 김구경의 출생과 가계(家系), 또는 청소년 시절의 성장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리친푸는 1940년에 출간된 󰡔만 주신사록(滿洲紳士錄)󰡕 第2版(大連出版, 民國廿九年)에 실린 新馬晉(창씨 개명한 후의 이름임)의 이력서를 참고로 했다. 李 勤璞, 󰡔脫解, 喇嘛, 金九經: 中韓文化三考󰡕, 瀋陽: 遼寧教育出版社, 2016, 155~156쪽.

3) 李鎔範, 󰡔김태준의 사상자원과 학술실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119쪽.

4)李勤璞, 󰡔脫解, 喇嘛, 金九經: 中韓文化三考󰡕, 瀋陽: 遼寧教育出版社, 2016, 157~159쪽. 일본 경찰부서에서 발송한 두 건의 서류 ‘特別高等警察課文書’(大正15年, 즉 昭和元年, 1926년) 참고.

(3)

경은 도서관의 일반 사무원으로부터 베이징대학 중국문학과

(

中國文學系

)

강사 등 경력을 쌓게 된다

.

베이징 체류 기간 김구경은 루쉰

(

鲁迅

)

를 비롯하여 베이징대학의 후스

(

胡適

),

저우쭤런

(

周作人

)

등 중국 현대 명인들 과 광범위한 교류를 진행함으로써 상호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 협력과 학문 연구의 길을 모색하였 다

.

특히 중국의 신문화 운동을 주도한 학술 대가 후스와의 만남과 지적 교류는 그의 선종학

(

禪宗學

)

연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

6) 따라서 김구경이 후스의 신뢰와 지지 하에 돈황 석실

(

敦煌石室

)

불교 자료에 대한 교정과 주석 달기

,

자료 고증과 정리 출판 등에서 이룬 학문적 성과는 양국 불교학 연구 및 교류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로 꼽히며 현재까지 한

·

중 불교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

1932

년 봄 선양

(

瀋陽

)

으로 이주한 후

,

김구경은 진위푸

(

金毓黻

)

등 당지 학자

,

문인들과 교류

,

협력하면서 고대 한

·

중 관계사 연구

,

만주어와 기타 소수민족 언어 관련 연구 등에 정진했으며 많은 의미 있는 일들을 해냈다

.

이 시기 김구경은 만주국의 공직자로서 도서관 직원

,

대학교 교수

,

세관 직원7) 등을 두루 지내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

일개 식민지 치하 조선 지식인으로서

16

년 간 이국땅인 중국에서 꾸준히 동양학의 연구에 정진하여 높은 학술적 성과를 이룩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경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 져 중국에서는 물론 고국인 한국에서조차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

8) 그 주된 원인은 김구경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날로 가혹해지던 시기 식민지 조선을 떠나 중국에 이주하여 베이징과 만주국

(

중국의 동북

3

,

필자 주

)

에서만 오랫동안 생활했고 관련된 자료들이 대부분 중국에 소장 되어 있다 보니 한국 측 연구자들이 잘 파악할 수 없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

더욱이 일본이 지배했던 만주국 에서 장기간 공직자로 있다가 한국에 들어갔던 까닭에 신변 안전을 우려해 만주 시절 신상 관리를 철저히 했 던 것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

최근에 와서야

1940

년에 창씨개명을 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은 바로 이점을 잘 시사해 준다

.

9) 귀국 후

,

몇 년간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출강하면서 가끔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였지만 그것도 잠깐

, 1950

6.25

전쟁이 발발한 당시 급작스레 실종

(

납북

?)

되다보니 한국에 남겨놓은 자료들이 상당히 적다

.

10) 그리하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학계에서는 김구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거의 없었고 김시준이나 홍석표 등 연구자들에 의해 주로 중국의 루쉰과 한국 현대문학의 관계를 논의하는

5) 경성제국대학은 현 서울대학교 전신으로 1923년 일본정부가 서울(당시 京城府)에 설립한 조선 籍贯 최초의 관립종합대학이 다. 당시 1923년 6월 100여 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발기하고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자 이에 일본총독부가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봉쇄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6) 楊向奎, 󰡔百年學案(下)󰡕, 瀋陽: 遼寧人民出版社, 2003, 533쪽.

7) 󰡔東亞日報󰡕1937.8.15. 기사 「朝滿人事交換十四日正式發令」 참고. 투먼(圖門)세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음. 8) 孫知慧, 「忘れられた近代の知識人 ‘金九經’ 關する調査」, 󰡔大谷學報󰡕94: 2, 2015, 91쪽.

9) 稻葉君山著, 楊成能譯, 󰡔漢譯滿洲發達史󰡕, 東亞印刷株式會社奉天支店, 1940, 「稻葉序」 참고. 위의 책은 일본학자 이나바 군 잔(稻葉君山)이 저술한 󰡔增訂滿洲發達史󰡕을 저본으로 한 한역본이다. “……新馬教授, 原姓金, 名九經。槿域秀士, 曾問學於 先師內藤湖南博士。今春創氏為新馬, 易名晉, 退如則其字也。康德七年歲次庚戍三月二十日。建國大學教授文學博士稻葉君山 識。” 김구경이 1940년에 창씨 개명한 후의 이름은 ‘新馬晉’이였다. 李盛平, 󰡔中國近現代人名大辭典󰡕, 中國國際廣播出版社, 1989, 812쪽 참고. 리친푸(李勤璞),󰡔脫解, 喇嘛, 金九經: 中韓文化三考󰡕, 遼寧教育出版社, 2016, 155쪽, 󰡔滿洲紳士錄󰡕 第二 版(1940, 다이렌大連) 참고. 실제 김구경의 창씨개명사실은 당시 조선에 이미 알려졌으나 연구자들의 무관심으로 오랜 세월 동안 잊혀 져 왔었다. 「海外海內의 創氏熱 間島李省長等創氏 ‒ 在滿鮮系官吏의 創氏多數」, 󰡔三千里󰡕 12: 6, 1940.6, 14쪽. 10) 1947년 8월 25일에는 이재욱(李在鬱), 이병기(李秉岐), 송석하(宋錫夏), 홍순혁(洪淳爀), 김구경(金九經, 禪學者) 제씨와 함 께 ‘조선서지학회’를 발기하였다. 귀국 후 행적은 1973년 9월 11일 󰡔京鄕新聞󰡕의 「老敎授(노교수)와 캠퍼스와 學生(학생)」 을 참고.

(4)

마당이나 중

·

한 현대문학의 교류관계 차원에서 가끔 그냥 짚고 넘어가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

11) 김구경의 중국 내 활동 범위도 주로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정되어 논의된 것이 대부분이고 대개는 루쉰과 후스

,

저우쭤 런

,

웨이젠궁 등과 만나서 교류한 사실 외에는 만주 시절의 학문 연구나 인간관계

,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해선 별로 언급된 게 없다

.

동아시아 한

·

·

일 학계에서 김구경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가진 시점은

2015

년이며 현재까지

5

편정도 의 논문이 나왔다

.

최근

3~4

년 사이에 나온 관련 논문 중에 가장 먼저 김구경을 다룬 논문은 孫智慧의 「잊혀 진 근대 지식인 김구경에 관한 조사

(

忘れられた近代の知識人

金九經

關する調査

)

(2015)

이다

.

12) 이 논문은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구경의 일본에서의 상황과 만주 시기의 상황들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

한 편의 조사 논문이지만 일본 측의 새로운 정보들이 적지 않게 반영되어 있어 중요한 참고적 가 치가 있다

.

반면에 중국 측 자료들은 적지 않게 누락되어 있다

.

위 논문에 이어 중국에서도 한 편의 연구 성 과가 나왔는데 바로 중국의 사학자 리친푸

(

李勤璞

)

의 󰡔脫解

,

喇嘛

,

金九經

:

中韓文化三考󰡕

(2016)

이다

.

본 논 문은 주로 리친푸의

김구경편

을 참고하였다

.

13)

김구경편

은 크게 김구경의 생애

,

중국 생활 경력

,

학술 연 구

,

정치적 성향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

리친푸의 연구는 손지혜의 논문에 비해 독자적인 시각이 있을 뿐더 러 논의가 학술적인 깊이가 있다

.

특히 만주 시기 김구경의 신상과 학술 연구 상황들을 보다 전면적이고 자 세히 다루고 있는 동시에 기타 논문들과 달리 김구경 학문의

정치성

(

친일적 성격

,

필자 주

)’,

즉 만주국에 대 한

충성

(

忠誠

)’

문제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어 주목된다

.

14)아울러 리친푸는 김구경 의 학문 정신과 학술 실력을 긍정하면서도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썩 높이 평가하지는 않고 있다

.

같 은 해에 나온 일본의 나카미 다쓰오의 논문 「김구경과 한국의 만주어 문헌 연구의 요람」

(2016)

은 김구경을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만주어와 만주어 문헌 연구에 몰두한 학자로 지목하면서 만주어 연구에서 이룩한 학 문적 성과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

15) 아울러 위 논문은 새로 발굴한 일본 측 자료들을 적지 않게 활용하 고 있어 참고할 가치가 크다

.

이 밖에 정광훈의 「

1930~40

년대 한국 초창기 돈황학 연구

:

김구경

,

한낙연

,

이 상백을 중심으로」

(2016)

라는 연구 성과도 있지만 새로운 자료보다는 이미 많이 알려진 김구경과 후스와의 관련 사실

,

즉 기존의 돈황 자료 󰡔楞伽師資記󰡕를 교감한 사실 등을 다루면서 돈황학 연구에 대한 기여도를 재평가하는데 그치고 있다

.

총적으로

,

·

·

3

국의 최신 논문들은 주로 김구경의 일본 경력과 중국 경력

,

인간관계들을 비교적 자세히 다루면서 사실적 관계를 확인하는 데 치중하여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주고 있으나 리친푸의 연구

(2016)

처럼 김구경의

정치적

성향을 지적하면서 그의 학술적 성과에 대해 확실

11) 김시준, 「魯迅이 만난 韓國人」, 󰡔中國現代文學󰡕 13, 1997, 127~163쪽.

12) 孫知慧, 「忘れられた近代の知識人 ‘金九經’ 關する調査」, 󰡔大谷學報󰡕 94: 2, 2015.3.

13) 李勤璞, 󰡔脫解, 喇嘛, 金九經: 中韓文化三考󰡕, 瀋陽: 遼寧教育出版社, 2016, 153~235쪽. 이 책의 본론은 모두 3개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제3부분이 김구경에 대한 연구이다.

14) 여기서 말하는 ‘충성(忠誠)’은 주로는 ‘위만주정권(僞滿洲政權)’의 식민지정책에 동조한 태도나 행위를 뜻한 말이다. 이를테 면 창씨개명을 한 것이나 개인적인 글 중에 ‘건국신묘제일(建國神廟祭日)’이라는 표현을 쓴 것, 또는 ‘위만주봉천도서관(僞滿 洲奉天圖書館)’을 특별히 ‘국립도서관(國立圖書館)’으로 표현한 것 등등의 경우들을 가리킨다. 리친푸의 위 저서 194쪽. 15) 나카미 다쓰오, 「김구경과 한국의 만주어 문헌 연구의 요람」, 󰡔알타이학보󰡕 26, 2016, 1~11쪽.

(5)

하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

또한 이와 같은 논문들은 기존의 연구에서 취급하지 않았던 영 역과 자료들을 새로 발굴

,

취급한 특징도 있다

.

이는 최근 김구경에 대한 연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음 을 보여준다

.

필자가 보건대 현 단계 연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보다 보완할 점들이 있다

.

우선

,

상기한 논문들은 학자 김구경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하고 있지만 그 평가들이 일반적인 소개에 그친 채 학문 정신이나 성과에 대한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평가는 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

다음

,

각자 연구들을 보 면 관련 자료들에 대한 정보가 적지 않게 누락되어 있거나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점도 있다

.

예를 들면 일 본이나 한국의 연구자들은 일본 측의 자료는 비교적 자세히 파악하고 있지만 중국 측의 자료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반면에 중국의 연구자들은 일본이나 한국 측 자료에 대한 이해나 파악이 부족 한 등 문제점들이 있다

.

16)그다음

,

김구경의 위만정권

(

僞滿政權

)

에 대한

충성

(

忠誠

)’

이 과연

친일

(

親日

)’

적인 행위였는지 아니면 어떤 살아남기 위한 대응이었는지는 진일보 사실적인 자료로써 검증해야 할 과제도 있다

.

요컨대 어떠한 시각에서 어떻게 식민지 조선 학자 김구경의 진면모를 밝혀내고 그에 걸맞은 정당한 평가를 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하나의 과제로 남아있다

.

상술한 문제들은 상당히 복잡하며 아직도 적지 않은 측면에서 보다 세밀한 실증적 고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

이에 본 논문은 최근의 연구 성과들에 기초하여 김구경의 중국 경력 중

,

특히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 전 까지 만주국에서

공직자 신분

으로 생활해온 경력 때문에 아직 논쟁의 소지가 남아 있는 정치적 성향 문제는 잠시 비켜서 주로 그의 중국 경력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 문인

,

학자들과의 지적인 문화 교류와 학문적 성과들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 그러한 교류가 한

·

중 문화 교류사와 학술교류사

,

나아가서 동아시아

3

국의 문화 교류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

본 논문이 기존 연구 성과들의 미 비점을 진일보 보완하고 향후의 연구방향을 분명히 하는 데 나름의 기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Ⅱ. 중국의 학자, 문인들과의 교류와 협력

김구경의 중국 진출은 대개

1928

년 말이다

.

그가 중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1927

4

월에 조선 의 경성제국대학 법문

(

法文

)

학부에 파견되어 온 베이징대학 교수 웨이젠궁

(

魏建功

, 1901~1980)

의 도움이 있 었기 때문이다

.

17) 당시 베이징대학 중문과를 나온 지

2

년밖에 안된 젊은 조교수 웨이젠궁은 조선 경성제국 대학

(

현재 서울대학교 전신

)

법문

(

法文

)

학부 지나

(

支那

,

식민지시대 일본인들의 중국에 대한 지칭

,

필자 주

)

문학계 주임이자 일본의 유명한 중문학자인 고지마 겐키치로

(

兒鳥獻次郞

, 1866~1931)

의 초청으로 경성제국 대학에서 현대 중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

웨이젠궁은

1927

4

월부터

1928

8

월까지 약

1

4

개월 남짓

16) 2019년까지 한국의 대부분 연구자들은 김구경의 또 다른 이름 ‘김명상(金明常)’과 창씨개명 후의 이름 ‘신마진(新馬晉)’의 존 재를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김구경이 중국 만주에서 중국어로 발표한 학술적 문장들은 거의 파악을 못한 상황이었다. 17) 웨이젠궁은 현대 중국의 유명한 언어 문자 학자이자 교육자로서 자는 ‘국광(國光)’이며 필명으로는 ‘천행(天行)’, ‘문리(文裏/

狸)’, ‘산귀(山鬼)’ 등이 있다.

(6)

이 조선에 체류하다가 베이징대학 중문과에 복귀한다

.

18)

1921

년에 김구경은 일본 교토 오타니대학

(

大谷大學

)

문학부

(

중국문학과

)

에 들어가 불교 철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 교수의 문하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1927

2

월에 졸업한다

.

19)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김구경은 중국의 현대 명인인 샤렌쥐

(

夏蓮居

, 1884~1965)

와도짧게나마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0)또한

20

세기 전반기 일본의 문학거장으로 평가 받는 유명한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芥川龍之介

, 1892~1927)

와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21) 졸업 후 귀국하여 그해

4

9

일부터 서울에 있는 경성제국대학 도 서관에서 장서 관리와 자료 정리 등을 맡아 보게 되는데 그 과정에 당시경성제국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치 고 있던 베이징대학 조교수 웨이젠궁

(

魏建功

)

을 만난다

.

그러다가 김구경은

1927

9

15

일에 경성제국대 부속 도서관 사무직을 사직하고

1928

6

월 중순까지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

(

松都高等普通學校

)

에 재직하던 중

,

학생들의 동맹휴교사건으로 교직을 그만두게 된다

.

22) 삶에 대해 여러 모로 고민하다가

1928

년 연말에 웨이젠궁의 연줄로 일가족을 거느리고 베이징에 오게 된다

.

23) 베이징

(

처음엔 未名社

)

에서

1

년 가까 이 머물던 김구경은

1929

년 말경에 민국정부에 귀화 신청을 하여 그 다음해인

1930

(

民國

19

) 1

월에 귀 화를 허락 받는다

.

24) 귀화의 동기는 분명치 않지만 한일합방 이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의 현실상황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

김구경은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지식인이었지만 당시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러한 방 법으로나마 일제치하 조선을 탈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본다

.

25)

18) 王俊義, 󰡔炎黃文化研究(第1輯)󰡕, 北京: 大象出版社, 2004, 271쪽의 漆永祥의 「魏建功先生朝鮮授課事略」을 참고. 19) 대학교 교수이자 선(禪)사상가인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엽까지 96년이라는 긴

삶을 살다 간 그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사상가이며 저술가이다. 그는 동양의 선학(禪學)과 문화를 서양에 성공적으로 전파한 최초의 불교학자이기도 하다. 김구경의 졸업에 관해서는 1927년 2월 17일 󰡔東亞日報󰡕 중 김구경의 오타니대학 졸업을 취 급한 보도기사를 참고했음.

20) 夏蓮居는 본명이 샤지치웬(夏繼泉)이며, 자가 부자이(溥齋), 호는 취위앤(渠園)이다. 렌쥐(蓮居)는 중년 이후에 얻은 호이다. 현대 중국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불교인사이다. 1925년에 군벌 장중창(張宗昌)이 산동을 관할하던 시기 적화(赤化)를 꾀했 다는 죄명으로 샤렌쥐(夏蓮居)를 잡으려하자 이를 피해 일본으로 도주한다. 1925년(을축년) 12월에 일본에 도착하여 1927 년 2월 1일에 귀국하기까지 약 2년 남짓이 일본에 머물게 되었는데 대부분 시간을 교토(京都)에서 지냈다. 시기에 마침 일 본에 유학중이던 김구경은 스승인 교토대학 나이토 코난(內藤湖南, 또는 ‘內藤虎次郎’이라고도 했음)의 소개로 샤렌쥐를 만 나게 되고 샤렌쥐한테서 잠깐 학문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샤렌쥐는 김구경의 거처에서 일본에 건너온 정인보 (鄭寅普)를 만났고 수일 간 그와 교류한 바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李勤璞, 󰡔脫解, 喇嘛, 金九經: 中韓文化三考󰡕, 瀋陽: 遼寧 教育出版社, 2016, 156~157쪽; 夏莲居, 󰡔夏莲居著述集󰡕, 北京: 東方出版社, 2014, 287~288쪽 ‘贈朝鮮鄭寅普(七首)’ 및 서 문을 참고. 정인보(1893~1950)는 한국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이며, 교육자이다.

21) 孫知慧, 앞의 논문, 96~97쪽. 孫知慧는 󰡔芥川龍之介全集󰡕 第11卷(巖波書店, 1978)의 519쪽을 참고했음. 아쿠타가와 류노 스케는 어려서부터 중국문화와 문학에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1921년에는 상해·항주·소 주·남경·한구·장사·정주·낙양·북경 등지를 유람하고 󰡔上海遊記󰡕, 󰡔江南遊記󰡕 등을 남겨놓았다. 북경에 체류하는 동 안 후스(胡適)와도 몇 번 교류했던 적이 있다.

22) 1915년에 설립된 ‘松都高等普通學校’의 전신은 윤치호(尹致昊)가 1906년에 설립한 한영서원(韓英書院)이다. 한국 네이버 백 과 참고. 나카미 다쓰오, 「김구경과 한국의 만주어문헌 연구의 요람」, 󰡔알타이학보󰡕26, 2016, 5쪽.

23) 김구경이 중국에 들어온 시간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1928년 연말에 들어왔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 는 1929년 초에 들어왔다는 설이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증빙자료는 없다. 본고는 1928년 연말로 추정한다. 리친푸 (李勤璞, 160)와 손지혜(孫知慧, 97) 두 연구자도 모두 1928년 하반기로 인정하고 있다.

24) 「北平特別市市政公報」 29, 1930, 3쪽, ‘市府文電’ 참고.

25) 중국 봉천(瀋陽) 북시장(北市場) 보녕(保寧)에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봉천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三學士(또는 三忠士라고 도 함)의 정신과 절개에 감동되어 청태종이 세웠다는 기념비 ‘삼한산두(三韓山斗)’를 발굴하여 복원하는 일에 직접 참여한 바 있다. 󰡔每日申報󰡕1933년 5월 12일자: 「丙子胡亂의 三忠士, 護國精忠碑發見, 청태종시 감동하야 세웟든 것, 奉天北市場

(7)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김구경은 약

16

년이라는 긴 세월을 중국에서 보냈다

.

이 동안 그의 중국생활은 크게 베이징 생활시기와 선양

(

瀋陽

)

생활시기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 시기는

1928

년 연말부 터

1932

5

월까지이고 둘째 시기는

1932

5

월부터

1945

8

월까지이다

.

26) 아래 상기한 시기별로 김구경 과 중국문인들 간의 교류 양상 및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

1. 베이징 시절 중국 문인들과의 지적 교류

베이징 시절 김구경의 교류 활동은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

갓 베이징에 도착한 김구경은 베 이징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다가

1929

12

월 후부터 베이징대학 강사로 초빙되어

1932

5

월까지 강의를 했다

.

27)그가 베이징대학의 강사로 들어간 것은

1928

년에 저우쭤런이 베이징대학에 처음으로 일본문 학과를 개설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

게다가 두 문인 모두가 일본 유학 경력을 갖고 있고 일본어로 소통이 가 능했던 점

,

김구경 자신이 한문에 능통했던 점 등등의 요소들도 저우쭤런의 선택을 받게 된 요인 중의 하나 였을 것이다

.

당시 김구경은 베이징대학 이문법

(

理文法

)

학원 문학학부와 일본어학부에서 각각 「中

·

·

朝 字音沿革比較硏究」와 「會話」 및 「習作」을 가르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8) 김구경은

1932

5

월 베이징을 떠나기까지 약

3

년 반 가까이 베이징에서 생활하는데 그 시절 가장 인상 깊고 의미 있었던 인연은 루쉰

(

魯 迅

)

과 그 동생 저우쭤런

(

周作人

)

및 그의 주변 인물들 간의 만남 그리고 그 뒤 후스

(

胡適

)

와의 만남이었던 것으로 본다

.

총괄적으로 볼 때

,

김구경과 베이징 문인들과의 교류는 상호 존중

,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문 화적 교류인 동시에 지적 교류였다

.

김구경과 루쉰

(1881~1936)

의 만남은

1929

5

월에 이루어진다

. 1928

년 연말에 베이징에 도착한 김구경 일가는 집을 구하는 동안 잠시 미명사

(

未名社

)

에 머물게 된다

. ‘

미명사

1925

8

월 베이징에서 성립된 중 국현대문학 단체로서 발기인은 루쉰이었다

.

29)

1929

5

25

,

김구경은 이곳에서 노모를 뵙고자 베이징 에 온 루쉰을 만나게 되고 두 문인은 뜻 깊은 교류를 갖게 된다

.

두 문인의 만남에 대해 당시

미명잡지

(

未明 雜志

)’

의 편집이자 루쉰의 수제자였던 리지예

(

李霽野

, 1904~?)

는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

保寧서」와 󰡔東亞日報󰡕1933년 5월 13일자 「仁祖當年의 三學士 奉天에서 碑石발견, 靑太宗에 屈服 않고 壯烈한 최후, 忠魂 毅魄의 옛자최」 등 보도기사를 참고.

26) 李勤璞, 󰡔脫解, 喇嘛, 金九經: 中韓文化三考󰡕, 瀋楊: 遼寧教育出版社, 2016, 160~165쪽; 孫智慧, 앞의 논문, 94쪽. 27) 󰡔北大圖書部月刊󰡕1: 2, 1929, 91쪽: “本部紀事:人員:主任室事務員金九經, 因事辭職遺缺, 聘由蘇君振潼接替, 業於本月1日

到部購書科.……” 󰡔北大圖書部月刊󰡕은 출간된 시간이 1929년(民國18년) 12월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구경이 교수로 초 빙되어 강의에 나간 시점은 1929년 12월 이후다.

28) 蕭超然等編, 󰡔北京大學校史(1898~1949)󰡕,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88, 286~287쪽. 당시 김구경은 중국학생들에게 ‘中· 日·朝字音沿革比較硏究’라는 과목과 일본어회화 및 글짓기를 가르쳤다고 한다. 󰡔北京大學日刊󰡕(民國二十年九月九日) ‘國文 學系課程指導書摘要’, 󰡔北京大學日刊󰡕(民國二十年十月四日) ‘外國文學系日文組課程大綱’ 참고. 그리고 󰡔校刊柳氏諺文志序󰡕

에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 있다. “庚午辛未兩年, 與在北京大學國文系將中日韓字音沿革之比較研究, 即欲究明其 相互關係”. 여기서 ‘庚午’와 ‘辛未’ 兩年은 각각 ‘民國二十年’(1931)과 ‘民國二十一年’(1932)을 가리킨다.

29) 초창기 멤버들로는 웨이수위앤(韋素園), 웨이충우(韋叢蕪), 리지예(李霽野), 타이징눙(台靜農), 차오징화(曹靖華) 등이었다. 5년 남짓이 운영되어오던 ‘미명사’는 1931년 5월에 경제난과 내홍으로 인해 해체 위기를 맞게 되었고 잇따라 루쉰도 본 단 체에서 탈퇴한다. 薛綏之 主編·副主編 韓立群, 󰡔魯迅生平史料彙編󰡕 第三輯, 天津: 天津人民出版社, 1983, 629~630쪽.

(8)

나는 루쉰 선생의 필적과 관련한 일화를 다시 말하련다

.

루쉰 선생은

1929

5

월에 베이징으로 돌 아와 부모님을 위로하셨다

.

그는 일기에서 일찍

3

차례 미명사에 다녀왔으며

25

일에는

미명사에 가서 저녁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 적고 있다

.

당시 어떤 조선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일본인들의 조 치에 불만을 느껴 일본사람들이 꾸리는 대학에서 나와 베이징에 왔는데 잠시 자리를 찾지 못해 미명사 에 머물고 있었었다

.

루쉰은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로는 조선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

이 조선인은 일찍부터 루쉰 선생을 숭배했으며 선생의 필적을 얻고 싶다고 하면서 준비해 온 정교한 부채를 꺼내 선생께 기념으로 몇 글자 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

그러자 루쉰 선생께서는 겸손하게 자기 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하며 여태껏 연습하지 않아 부채를 더럽힐까 염려된다면서 사양하셨다

.

우리는 루쉰 선생은 평소에 종래로 뽐내지 않으며 재물들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때 곁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각자 제목을 선택하여 몇 줄씩 적어주었다

.

나는 입센의 명언

非完全則 寧無

란 글자를 써주었다

.

선생께서는 내가 쓴 글자를 보고 웃으시더니 부채 뒷면에 시 한 수를 적어주 셨다

.

지금은 다만 선생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만 기억에 있고 도대체 누구의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 다

.

몇 십 년 세월이 흘러갔는데 그 묵적이 아직 세상에 남아있을 런지

?

……

30)

리지예는 조선인 김구경이 일본인들의 식민지 통치에 불만을 느껴 중국으로 오게 되었으며 루쉰과 밤늦도 록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적고 있다

.

하지만 이번의 만남에 대해 루쉰과 김구경 모두 자세한 기록을 남겨놓지 않아 어떻게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 없다

.

다만 추정컨대 루쉰이 김구경 과 논의했던 내용은 주로 조선 국내의 정세나 문화

,

문학 방면의 내용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

첫 만남이었 음에도 폭넓게 많은 것들을 교류했던 것 같다

.

흥미로운 것은 김구경이 루쉰과 리지예의 필적은 물론 그 자 리에 있었던 루쉰의 기타 제자들의 글도 받았다는 사실이다

.

아쉽게도 루쉰이 부채 뒷면에 써주었다는 그 시 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발굴된 자료

(

󰡔루쉰 일기󰡕도 포함

,

필자 주

)

들이 없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 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경과 루쉰 사이에 있었던 문화적 교류는 상당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

김구경과 루쉰의 만남은 총

4

차례에 불과했지만 상호 시를 증정하고 문예잡지를 선물했던 사실과함께 식사도 하고 탁 본도 감상한31) 사실들을통해 두 문인 사이에 이뤄졌던 지적인 문화적 교류는 물론 돈독한 우정까지도 두루 엿볼 수 있다

.

32)

30) 李霽野, 󰡔魯迅先生與未名社󰡕, 長沙: 湖南人民出版社, 1980, 222쪽 참고. “我再重述一件與魯迅先生手跡有關的軼事。魯迅先 生一九二九年五月回到北京省親, 他在日記中寫到, 曾三次到未名社, 二十五日“往未名社談至晚”。當時有個朝鮮人, 因爲不滿意 日本人的措施, 脫離了日本人所辦的大學來到北京, 一時沒有辦法, 就住在未名社。魯迅和他談了很多話, 主要是瞭解朝鮮的情 況。這個人早慕先生的名, 很想得到先生的筆跡, 便拿出一把很精緻的扇面請先生題寫。魯迅先生謙讓地說, 自己的字寫得很不 好, 一向沒有下過功夫, 怕扇面給糟蹋了。我們知道魯迅先生向不擺架子, 他實在愛惜物力。有兩個在座的朋友便各自先題寫幾 行, 我也題寫了易蔔生的名句:“非完全則寧無”。先生看了後笑了笑, 才在扇面後寫上了一首詩。現在只記得不是先生自己的作品, 卻記不起究竟是誰的詩作了。經過幾十年的滄桑, 這墨跡佈置還存在人間否?”

31) 孫瑛, 󰡔魯迅在教育部󰡕, 天津: 天津人民出版社, 1979, 77쪽. 루쉰은 평생 동안 장서·탁본·판화 등에 각별한 흥취를 갖고 두루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2) 현재 공식적으로 증명된 만난 횟수는 1929년 5월 25일(리지예 증빙자료, 필자 주)과 같은 달 31일, 6월 2일과 3일 모두 네 차례다. 5월 25일이 가장 이른 기록이고 마지막 기록은 6월 3일이다. 魯迅著, 󰡔魯迅全集󰡕 第十六卷(日記篇), 人民出版 社, 2005, 137쪽. “六月三日, 曇。攜行李赴津浦車站登車. 東風, 紫佩, 淑卿相送. 金九經, 魏建功, 張自塞, 常維鈞, 李霽野, 臺靜農皆來送. 九經贈 󰡔改造󰡕 一本”, 維鈞贈 󰡔宋明通俗小說流傳表󰡕 一本. 二時發北平.” 魯迅著, 󰡔魯迅全集󰡕 第十六卷(日記

(9)

총괄적으로 볼 때 김구경과 루쉰 간의 교류는 상대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지적인 교 류였다

.

루쉰은 당시 조선의 망국과 운명을 진심으로 동정했을 뿐만 아니라

1920

년대 초반부터 북경 지역에 서 활동했던 조선의 아나키스트들과 망명자

,

독립운동가

,

유학생들을 자주 만나주었던 것이다

.

33)이러한 까 닭에 루쉰은 당시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인본주의 사상과 시국에 대한 투철한 비판 정신과 그러한 정신을 일관하게 보여준 문학작품들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숭배의 대상 이 되기도 하였다

.

김구경은 루쉰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인 저우쭤런

(

周作人

, 1885~1967)

과도 깊은 교류가 있었다

.

김구경이 베이징에서 처음 만난 것은 루쉰이었지만 실제로 가장 많이 만나고 교류했던 문인은 저우쭤런이다

.

그의 일 기에는 무려

35

차나 김구경의 이름이34)언급되어 있으며 그 중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경우

(

실제로 만났었을 수도 있음

)

와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한 경우

,

서신만 주고받은 경우들을 빼고도 실제 만난 기록이 무려

15

차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

그만큼 두 문인 사이의 교류가 상당히 빈번했음을 보여준다

.

사실 아나키스트 저우쭤 런은 일찍부터 약소국가인 조선의 문학과 문화의 가치에 대해 나름의 인식과 견해를 갖고 있었고 또 많은 관 심을 보였던 것이다

.

35) 이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식민지 조선의 문인들이나 아나키스트들과 더 가깝게 교 류할 수 있게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

36)

저우쭤런의 일기에서 김구경이 가장 일찍 등장한 시점은

1929

5

24

일이다

.

37) 이후로 김구경의 이름 은 거의

3

년 간 그의 일기장에서 오르내린다

.

베이징 시절 김구경은 저우쭤런을 자주 만났는데 방문 때마다 저우쭤런에게 이런 저런 선물들을 주곤 했었다

.

저우쭤런의 일기에는 조선종이

(

지금의 한지韓紙를 가리킴

,

필자 주

)

나 부채

,

동척

(

銅尺

)

같은 일반 선물들을 받았다는 기록들 외에도 滿文 󰡔盛京賦󰡕와 같이 만주어와 관련한 자료

,

󰡔禪󰡕이나 󰡔楞伽師資記󰡕 등 불경과 관련한 책들을 선물 받았다거나 빌려봤다는 기록들이 있 다

.

38)선물 중에서 우선 흥미로운 것은 김구경이 저우쭤런에게 선물한 세트로 된 동척

(

銅尺

)

이다

.

동척은 중

篇), 人民出版社, 2005, 136쪽 참고. “三十一日 晴. 午後金九經偕塚本善隆, 水野清一, 倉石武四郎來觀造象拓本. 下午…….”

33) 루쉰이 만났던 조선의 망명자나 무정부주의자, 또는 독립 운동가들로는 오상순(吳相淳)·이우관(李又觀, 또는 李丁奎)·유 기석(柳基石)·심여추(沈如秋) 등이 있다.

34) 저우쭤런은 초기 일기에서는 주로 ‘金明常’이란 이름을 썼고 후에는 ‘金九經’이란 이름을 썼다.

35) 일찍 1925년 5월 25일 󰡔語絲󰡕(第28期)에 저우쭤런은 ‘開明’이라는 서명(署名)으로 「崔致遠」, 「鬪法」 등 3편의 조선전설(일 본어판임, 필자 주)을 번역, 소개한 적이 있다. 鐘叔河編訂, 󰡔周作人散文全集(1927~1931)󰡕5, 廣西: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9, 784쪽. “但是我理論地推重朝鮮藝術與其研究的價值, 毫不改變從前的意見。這種意見我知道難免有點失之迂闊, 有點近 於“大亞細亞主義”, 或者又不合現今的實際. 但是這有什麼辦法呢, 兩者都是事實, 只好都承認罷了.” 위 언술을 통해 저우쭤런이 비록 조선 문학예술에 대한 인식에서 현실과의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조선 문학예술의 가치에 한해서는 자신의 분명한 견해 를 갖고 있었음을 보아낼 수 있다.

36) 20~30년대 저우쭤런이 교류했던 조선문인들로는 김구경 외에도 오상순·이우관·유림(柳林, 고자성)·정래동(丁來東)·김 태준(金台俊) 등이 있다.

37) 魯迅博物館 藏, 󰡔周作人日記[中]󰡕(影印本), 鄭州: 大象出版社, 1998, 645쪽. 1929년 5월 24일: “上午往孔德学院上课午返, 下午母亲来. 四时往孔德建为招, 金九經君来一访.……” 위 기록으로 볼 때 이 시점은 루쉰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전날로 추정된다.

38) 󰡔周作人日記[中]󰡕, 658쪽. 1929년 6월 23일: “金九經君贈朝鮮紙四枚.”; 󰡔周作人日記[下]󰡕, 97쪽. 1930년 8월 2일: “上午金明 常君來, 贈團扇兩柄.” 󰡔周作人日記[下]󰡕(影印本), 鄭州: 大象出版社, 1998, 162쪽. 1930년 12월 15일: “上午往北大上課, 還 金君`禪’一冊, 下午二時回家.”; 󰡔周作人日記[下]󰡕, 210쪽. 1932년 3월 20일: “下午……金九經來未見, 留下楞伽師資記一冊.”

(10)

국의 청말

,

민국시기에 유행했던 문방구이다

.

저우쭤런은 일기에서 김구경이 동척에 새긴 문구

上刻所書淸 文

,

木欣欣以向榮

,

二句

.’

를 언급한 적이 있다

.

39) 일기에서는 비록

木欣欣以向榮

,

二句

.’

라 하면서 한 구절만 언급했지만 뒤에 분명

두 구절

(

二句

)

라는 문구가 받쳐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木欣欣以向榮

,

泉涓涓而始流

. (

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르네

.)’

라는 시구가 새겨졌을 것으로 본다

.

이 시구는 중국 의 위진 남북조시기에 크게 문명을 떨쳤던 시인 도연명

(

陶淵明

)

의 작품 「歸去來辭」의 후반부 연에서 따온 것 이었다

.

40) 아마 김구경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고 있는 중국 지식인에게 옛날의 생기와 위엄을 되찾아 날로 번성하길 바라는 마음과 두 사람 간의 우정이 끊임없이 흐르는 샘물처럼 영원하기를 바 라는 마음을 담아 전했던 것 같다

.

이는 상대에 대한 존경과 우정의 표현이면서도 나름의 가치가 있는 지적 문화교류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

김구경이 저우쭤런에게 보내준 선물 중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만주어판

<

성경부

(

盛京賦

)>

이다

.

41)

<

성경부

>

는 청고조 누르하치

(

愛新覺羅를 가리킴

,

필자 주

)

가 창작한 부

(

) <

어제

성경부

’(

御製

盛京賦

’)>

를 가리킨다

.

42)

<

성경부

>

는 여진족이 관내로 들어온 후

,

4

대 황제인 건륭

(

누르하치

, 1559~1626)

1743

(32

살 나던 해

,

필자 주

)

처음으로 성경

(

盛京

)

을 시찰 할 당시 조상제

(

祖上祭

)

를 지내면서 지은 시로서 선 조들이 창업 시절에 전쟁에서 세운 공로와 물산의 풍부함

,

인재들이 용솟음쳐 나오던 시대의 정경을 읊조리 고 있다

.

이 작품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양성

(

瀋陽城

)

의 모습을 그린 부

(

)

로서 역사적 가치와 문학

,

예 술적 가치를 동시에 지닌 역작으로 손꼽힌다

. <

어제

성경부

’>

는 청대 누르하치 임금의 명을 받들어 한

·

(

汉满

) 32

개 體

(

방식

)

의 전서

(

篆書

)

로 제작된 것이다

.

43)

이 작품은 일찍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프랑스에까지 전파되기도 했는데 당시 대문호인 볼테르

(1694~1778)

가 프랑스어로 된

<

어제

성경부

’>

를 읽고 경탄을 금치 못한 나머지 건륭황제 앞으로 찬사의 시 한 수를 지어 보냈 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

44) 프랑스어 원판

<

어제

성경부

’>(1770)

2010

11

월에 중국으로 반입되었다

.

45)

39) 魯迅博物館 藏, 󰡔周作人日記[下]󰡕, 26쪽. 1930년 3월 2일: “上午金明常君來贈銅尺一對, 上刻所書淸文,木欣欣以向榮, 二句.”

여기서 ‘清文’은 정교하고 우아한 시구를 가리킨다.

40) 王延棟 注, 󰡔古文觀止 今注今譯」, 石家莊: 花山文藝出版社, 2016, 470-473. 원문: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善萬物之得 時, 感吾生之行休.” 참고 역문: ‘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르네. 호시절 맞은 만물 부러우나 내 인생 은 저물어만 가네.’

41) 󰡔周作人日記[下]󰡕, 1930. 9. 2, 112쪽. “下午明常來, 借來レコド十四枚, 又贈滿文盛京賦一本.”

42) 청태조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는 서예와 문장에 모두 뛰어났다고 한다. 󰡔어제 ‘성경부’󰡕는 서(序), 부(賦), 송(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글자 수는 한자로 약 5천자에 달한다.

43) 32체 전서<어제성경부(禦制‘盛京賦’)>는 1748년에 제작되었는데 만주어로 된 것도 있고 漢·滿어, 또는 漢·滿·蒙어나 漢·滿·蒙·藏어로 된 것도 있다. 또한 그 글씨체가 독자적인 특징이 분명하여 서예계에서는 여러 민족의 문화가 상호 영 향을 주면서 융합된 전형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張萬興, 「漢滿三十二體篆書<禦製盛京賦>的影響及其對中國書法史重構的 啓示」, 󰡔中央民族大學學報󰡕5, 2009, 96쪽.

44) 볼테르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작가로서 유명한 철학적 풍자소설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백과전서󰡕의 편찬에도 참가하였다.

45) 위 번역본은 18세기 60년대에 중국에 와 있던 예수교회사(會士) 치엔더밍(중국명 錢德明, 1718~1793)이 프랑스어로 번역 (주석까지 달았음)하여 1770년 파리에서 출간한 것이다. 중국 선양시당안관(瀋陽市檔案館)의 징소우푸(荊紹福) 관장이 2010년 11월 영국 방문 시 런던대학 아비학원(亞非學院)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우연하게 발견하고 복사하여 국내로 들여왔다. 馬鷹, 「‘禦制盛京賦’從西傳到東歸凝聚眾人智慧」, 󰡔蘭臺世界󰡕7, 2016.4, 1쪽; 張萬興, 「漢滿三十二體篆書‘御製盛 京賦’的影響及其對中國書法史重構的啓示」, 󰡔中央民族大學學報󰡕 5, 2009, 94쪽.

(11)

이처럼 중국 역사상 가장 일찍이 해외에 전파되어 외국문인들의 호평을 받았던 운문

<

성경부

>

를 두고 현재 중 국학계에서는 중국과 서방의 문화교류와 외교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문학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

46)

김구경이 어디서 어떻게 이 책을 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을 증정한 것으로 보아

<

성경부

>

의 작 품성과 중

·

서 문화 및 대외교류사 상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

실제 김구경은 일본어

·

중국어뿐만 아니라 만주어와 몽골어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

47) 위의 사실들을 통해 김구경의 중국 문화와 만주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깊이 있는 인식을 보아낼 수 있는 동시에 그의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도 엿볼 수 있다

.

이외 저우쭤런이 김구경으로부터 󰡔禪󰡕이나 󰡔楞伽師資記󰡕를 빌려보았거나 선물 받았다는 사실도 나름의 의 미가 있다

.

원래 선불교를 전공했던 학자인 만큼 김구경은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지식도 풍부했던 것이 분명하 다

.

관련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

당시 김구경은 자기가 소지하고 있었던 불교 서적이나 직접 편찬한 불교 관련 서적

(

󰡔楞伽師資記󰡕은 김구경이 직접 교감했던 불교서임

)

들을 저우쭤런에게 빌려주었거나 선물했을 것으로 추 정된다

.

이러한 교류사실을 통해 우리는 김구경이 동양학의 중요한 분야인 중국 문화

,

특히 선불교학에 대한 학술적 인식을 저우쭤런과 함께 공유하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

비록

1932

5

,

김구경이 베이징을 떠 나 봉천

(

奉天

,

만주시기에 생긴

瀋陽

의 또 다른 이름임

,

필자 주

)

으로 가면서 두 문인 간의 교류가 막을 내렸 지만 이들이 보여준 돈독한 우의와 진지한 학문적 교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것들을 시사해 준다

.

김구경의 이름은 그가 베이징을 떠난

1932

5

월을 마감으로 저우쭤런의 일기장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

김구경과 권위적인 학술 대가였던 후스

(

胡適

, 1891~1962)

와의 만남과 교류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

김구 경이 베이징대학에 갓 강사로 들어갔을 당시에는 후스가 아직 베이징대학으로 복귀하지 않았었다

.

후스는

1917

9

월경부터

1926

년까지 베이징대학 교수로 지내다가

대혁명시기

(

大革命時期

)’(

때는 북벌전쟁시기

),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해외로 나가

10

개월간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면서 견문을 넓힌다

.

귀국 후

,

상하이에서

3

년 반 정도 생활하다가

1930

년 연말에 다시 베이징대학에 복귀하여

1937

년까지 교수

,

교무장

,

문학원 원장 등 직무를 맡고 활약한다

.

김구경이 후스를 만난 시점은

1930

년 연말에 후스가 베이징대학으로 복귀한 바로 그 시기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교류한 시간은 약

1

5

개월 정도였던 것으로 본다

.

48)

김구경과 후스의 교류는 돈황 석실 선불교자료에 대한 교감을 계기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 김구 경은 의미 있는 불교학적 연구 성과를 이룬다

.

후스는

1926

9

월 유럽 방문을 나갔다가 우연하게 파리 국 립도서관과 영국 런던대영박물관에 소장된 돈황 석실 자료 󰡔능가사자기

(

楞伽師資記

)

󰡕를 발견하게 된다

.

자료

46) 張萬興, 앞의 논문, 92쪽.

47) 編譯校注 「滿漢合璧滿洲祭神祭天典禮(一)」(1934年12月10日 󰡔國立奉天圖書館季刊󰡕); 「滿洲語之變遷與滿洲文字之由來」(1940,

󰡔國史文化雜著論文󰡕) 등과 같은 번역문장이나 논문을 통해 그의 만주어실력을 대개 알 수 있다.

48) 歐陽哲生, 「胡適與北京大學」, 󰡔北京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3, 1997, 54쪽. “胡適從1917年9月在北大登臺, 到他1948年 12月14日離去, 在北大實際時間為18年(1919~1925.11; 1930.11~1937.7; 1945.8~1948.12).” 후스는 1937년에 베이징대학 을 떠나 정계에 진출했으나 1945년 8월에 또다시 돌아와 베이징대학 총장을 맡았다가 그해 12월에 다시 떠났다. 현재 김구 경과 후스의 교류관계를 자세히 밝힐 수 있는 자료들은 많지 않다. 주로 후스의 편지 「復金九經」(耿云志·歐陽哲生, 󰡔胡適 書信集(1907~1933)󰡕, 北京: 大學出版社, 1996, 528쪽)이나 김구경의 󰡔楞伽師資記󰡕 교감 서문 같은 것들에서 그 관련 교류 사실들을 얼마간 추적해 볼 수 있다.

(12)

의 중요성을 인지한 후스는 그것들을 각각 영인하여 갖고 귀국한다

.

애초의 계획으로는 󰡔능가사자기󰡕 파리 본과 런던본을 정리 대조하여 연구할 계획이었으나 바쁜 공무 때문에 󰡔능가사자기󰡕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 다가

, 5

년 가까이 지난

1931

1

,

마침 베이징대학에서 근무 중인 조선학자 김구경에게 그 교간

(

校刊

)

을 부탁하게 된다

.

후스로부터 두 판본을 빌린 김구경은 바로 교간에 들어갔고

1931

6

월에 교간을 마친다

.

출판을 앞두고 김구경은 후스에게 서문을 써줄 것을 부탁했고 후스는 흔쾌히 그 부탁을 수락한다

.

서문에서 후스는 자기를 대신해 중요한 작업을 완성해준 김구경에게 특별히 사의를 표하였다

.

49) 이렇게 최종본인 󰡔교 간당사본능가사자기

(

校刊唐寫本楞伽師資記

)

󰡕는

1932

3

월 중국에서 처음으로 활자본으로 출판

,

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

50) 그때로부터

1

년 반이 지난

1933

9

월에 김구경은 이 교간본

(

校刊本

)

을 재교정하여

1935

년에 출간된 강원총서

(

薑園叢書

)

󰡕 전집에 수록하였다

.

51) 이러한 사실을 통해 김구경의 높은 학문열정과 진 지한 학술태도를 엿볼 수 있다

.

만주사변 이후 후스와의 교류는 중단되었지만 김구경은 평생 동안 후스의 학 술정신과 학문능력을 흠모했던 것 같다

.

광복 후인

1947

년에는

,

혼란한 정세에 처한 한국의 교육 정책에 계 발을 주고자 후스의 문장 「爭取學術獨立十年計劃案」

(1947.9)

을 번역하여 조선교육연구회 전문지인 󰡔朝鮮敎 育󰡕

(1947.12)

에 소개하기도 했다

.

52) 이는 후스의 학술이념에 대한 존경이자 숭배이며 학술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이해이기도 하다

.

김구경은 실제 돈황 석실 선불교자료에 대한 교감과 출판을 통해 학문정신과 학문 연구방법 등에서 후스와 여러 모로 적지 않는 것들을 교류했던 것이다

.

김구경은 또 자신을 북경대학에 소개해준 웨이젠궁과도 문화적

,

학술적 측면에서 여러 모로 적지 않은 교 류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

북경대학국문과에서 「중일한자음연혁지비교연구

(

·

·

朝字音沿革比較硏究

)

」를 강의하던 시절에

3

국 언어의 관계를 밝혀보려고 했으나 자료의 결핍으로 결론은 못 쓰고 있다가 음운학자인 웨이젠궁의 견해에서 큰 계발을 받았던 적이 있다

.”

53)김구경이 베이징을 떠나 봉천에 온 뒤 웨이젠궁과의 교 유는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본다

.

그 일례로

1934

7

월 료우닝 선양

(

瀋陽

)

등지에 머물고 있던 김구경은 재차 베이징에 있는 웨이젠궁을 찾아갔는데

(

「유씨언문지

柳氏諺文志

」를 교감

,

간행하고자 했던 시기였을 것으 로 판단됨

,

필자 주

)

그때 웨이젠궁은 절친인 천지촨

(

陳濟川

)

이 운영하는 유명한 서점

내훈각

(

來薰閣

)’

에 김구 경을 소개해 준다

.

김구경은 이 서점에서 한 동안 머물면서 점원인 마젠자이

(

馬健齋

)

를 도와서 「내훈각목

(

49) 耿雲志·歐陽哲生, 󰡔胡適書信集(1901~1933)󰡕(上), 北京: 大學出版社, 1996, 528쪽; 󰡔胡適論學近著󰡕 第一集, 上海: 商務印 書館, 1937, 239쪽.

50) 처음엔 태허법사(太虛法師, 1912~1947, 민국시기 4대 법사 중의 한 사람임)와 호적(胡適)의 서문을 붙여 1932년 3월 발행 하였으나 후에 다시 교감하여 󰡔薑園叢書󰡕에 수록할 때에는 태허의 서문을 삭제하고 후스의 서문만 남겼다. 김구경의 ‘自序’ 를 참고.

51) 󰡔薑園叢書󰡕는 현재 한국의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과 중국의 국가도서관, 료우닝성(遼寧省)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52) 󰡔조선교육(朝鮮敎育)󰡕은 광복 후, 조선교육연구회(1946년 8월 ‘민주교육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안호상·손진태·사공환·최

현배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에서 1947년 4월 15일 창간한 잡지이다. 1949년 10월까지 통권 18호를 발행하고 중단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450쪽. 「胡適氏의 學術獨立十年計劃案」의 원문은 후스가 1947년 9월 28일 남경의

󰡔中央日報󰡕에 발표했던 문장이다. 김구경은 이 문장을 2~3개월 뒤에 바로 조선 국내에 번역 소개했다.

53) 김구경, 「교간유씨언문지서(校刊柳氏諺文志序)」(1934) 참고. “即欲究明其互相之關系, 但終以材料未備, 結論難覓, 時有友人 魏建功創論陰陽入三聲說, 不帶收韻者爲陰聲, 帶收韻者分三陽三入, 其說頗和於理, 即今觀之, 與柳氏終聲三平三入說實相符合, 亦一奇也。” 김구경은 웨이젠궁의 ‘음양입삼성설(陰陽入三聲說)’이 유희의 ‘종성삼평삼입설(終聲三平三入說)’과 법칙 상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는바, 이 역시 그의 깊은 학식을 보여준다.

(13)

薰閣目

)

」이라는 도서목록을 정리하였다

.

54) 「내훈각목」은 총

6

회까지 나와 있는데 김구경이 관여한 「내훈각 목」은 구체적으로 몇 회인지에 대해서는 현재 알 수 없다

.

55) 향후 더 많은 자료의 발굴과 고증이 필요하다

.

이 밖에 김구경은 베이징의 지식인들인 첸다오쑨

(

錢稻孫

, 1887~1966),

56) 류반눙

(

劉半農

),

반중위인

(

範仲 雲

)

과 日

·

漢통역사 허스장

(

賀嗣章

)

등과도 교류한 적이 있는데 특히 이중에 류반눙과의 교류가 흥미롭다

.

류반눙

(1891~1934)

은 중국신문화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이자 문학가

,

언어학자

,

교육자로서 원명은 서 우펑

(

壽彭

),

또는 밍푸

(

名複

)

이다

.

반눙

(

半農

)

은 후에 고친 이름이다

.

그는 일찍

1920

년에 영국 유학을 다녀 오기도 했었다

.

베이징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시절 김구경은 류반눙과 조선의 민간이야기 번역에 대해 교류한 적이 있었다

.

류반눙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중에 맏딸인 류쇼후이

(

劉小蕙

,

원명은 劉育厚임

,

필자 주

)

가 번역에 관심이 많았다

.

류쇼후이는 어린 나이에 프랑스어에 능통했는데 우연하게 러시아어를 프랑스어 로 번역한 조선의 민간 이야기집을 접하고 중국어로 옮겨놓게 되었다

.

애초에는 중학을 다니던 딸한테 실험 적으로 시킨 번역이었는데 딸이 하도 집요하게 출판을 고집하는 터라 류판눙은 결국 출판을 추진하기로 하고 손수 딸의 번역원고를 수정해 준다

.

그런데 원고를 수정하던 중 몇 군데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어 그 당시 베이징대학 문학원 강사로 있던 김구경한테 자문을 구하게 된다

.

당시 상황을 그는 「

朝鮮民間故事

校後語」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음역한 인명

,

지명은 러시아어 번역과 프랑스어 번역을 거쳤기 때문에 이미 조선의 음과는 전연 달 랐다

.

이점은 다행히 이미 중국 국적을 가진 조선친구 김구경 군이 나를 대신해서 연구하여 비로소 하 나하나 상응한 한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

그렇게 했음에도 그 중에는 아직도 매우 타당치 못한 지명들 이 있어 잠시 그런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

김군이 말하기를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조선에서 매 우 유명한 것들인데 그중에

<

심청

>

한 편만 보더라도 본인은 이 소설과 연극을 스스로 다 연기해 보았 다고 했다

.

나는 이 기회를 빌어 쇼후이

(

小蕙

)

를 대신해 김군에게 감사를 표하는 게 마땅하다

.

……

57)

위 기록으로 보아 류반눙은 󰡔朝鮮民間故事󰡕를 중심으로 원문

(

조선민간이야기

)

과 그 번역을 두고 김구경과

54) 張公瑾, 󰡔民族古籍研究󰡕3,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6, 140쪽. 어떤 자료들에서는 김구경이 第1期 내훈각목(來薰閣 目)편찬을 도와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55) 徐霖, 󰡔生意經󰡕4, 北京: 工商出版社, 1996, 689쪽. 「내훈각목(來薰閣目)」 제1기는 1931년 전후에 편찬되었으며 선인머(沈 尹默)가 표지 글을 쓰고 웨이젠궁(魏建功)이 교정을 보고 인쇄하여 출간한 것이다. 그 후부터는 1, 2년 건너서 한 번씩 출간 하였는데 모두 6기까지 출간한 후 중단하였다. 현전하는 자료들에서는 김구경이 내훈각에 간 시간을 7·7사변 발발 전이라 고만 적고 있지 그 구체적인 시간은 없다. “‘七·七’事變以前, 朝鮮學者金九經來中國, 住在來薰閣書店裏, 閒居無事, 就著手幫 助該店編書目, 此事由店夥馬健齋協助進行.……”

56) 첸다오쑨(錢稻孫)은 중국 현대 저명한 번역자, 작가, 교육자이다. 칭화대학(淸華大學)에서 일본어를 가르친 적이 있으며 도 서관 관장을 맡았던 적도 있다. 1942~43년에는 베이징대학 총장 겸 농학원(農學院)원장 등 직무를 맡았던 바 있다. 중국학 계에서는 대체로 첸다오쑨을 친일문화한간(漢奸)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친일적 행각을 떠나 그의 학문적 성과와 기여를 별개로 보자는 견해도 있다.

57) 류반풍(劉半農)의 「‘朝鮮民間故事’校後語」(1931.10.24.)는 1935년 7월에 출간된 󰡔半農雜文二集󰡕(初版, 良友圖書公司出版) 에 수록되어있다. 본 논문에 언급한 「‘朝鮮民間故事’校後語」원문은 陳子善編, 󰡔劉半農書話󰡕, 杭州: 浙江人民出版社, 2000, 152쪽 참고. “音譯的專名, 也因經過了俄法兩道翻譯, 讀出來已完全不像朝鮮音。這一點, 幸經已入中國籍的朝鮮朋友金九經君 代我研究, 才能逐一找出相當的漢字來; 其中亦許還有不十分妥當的地方, 暫時只能擱著。金君說, 這些故事在朝鮮都很有名; 其 中沈淸一篇, 自己演成了大部的小說和戲劇。我應當在此地代小蕙向金君致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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