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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조선학’의 본심감통론이 지닌 시대적 의미

4. 결론

115) 노관범, 2016, 앞의 논문, 422쪽.

116) 이병태, 앞의 논문, 286~287쪽.

117) 이병태, 앞의 논문,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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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조선유학’과 ‘조선유교’ 표현의 개념사」에 대한 토론문

김윤희(한남대)

이 논문은 19세기말~20세기 전반에 걸쳐 제기된 조선유교/유학에 대한 개인저작을 근 대 ‘學知’와 관련하여 고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종교, 국학/지역학의 영향 하에 서 조선유교/유학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초점을 두고 근대 ‘학지’에 대한 방대한 연구성과에서 발견되는 조선유교/유학에 대한 것을 충실하게 소개하고, 나아가 이 를 확인하기 위해 경학원과 동아일보에서 관련 의미장을 구성하고 있다. 근대 학문체계의 형성 과정에서 조선유교/유학에 대한 인식양상과 그것이 식민지에서 전유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로 인해 현재 조선유학/유교에 대한 연구의 내용과 흐름을 이해하게 되 었다.

다만, 논문의 논지와 방향을 좀 더 분명하게 독해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부분에 대 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1. 의미장에 대한 해석의 부재

개념사 방법론은 유교를 지시하는 다양한 어휘와 그 어휘의 의미를 발화주체, 표현양식, 의미망 등을 통해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역사연구관점의 이데올로기적 허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데 유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문은 기존의 근대 ‘학지’연구의 관 점을 승인한 위에 경학원, 동아일보의 유교/유학 의미장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시된 경학원과 동아일보의 의미장에 분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분류가 유효한 것 인지 의문이 든다.

2. 유교 관련 어휘에 대한 탐색의 부재

종교와 학문의 분리는 근대 학지와의 연쇄 과정에 있음은 분명하고, 이 부분에 대한 기 존연구도 본 논문에 소개되어 있다. 기존연구에서는 종교와 학문을 분리하려는 의식적인 시도가 없었다가 근대 ‘학지’를 수용하면서 분리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 관 점 역시 근대 ‘학지’의 규정성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

서구의 경우 신학과 철학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한 것이 아니었는지? 또한 근대 ‘학지’

의 수용과 식민주의의 영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신앙과 학문의 분리에 대해 사유하게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 효과는 무엇인지? 를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의 용례를 보더라도 儒敎는 32이건, 儒學(신분 포함)은 116건 이고, 그 용례도 다르다. 가르침과 배움이란 점에서 유교와 유학이 구분되는 경향이 있었 다. 또한 유사 관련어의 경우, 儒道, 孔道, 斯道, 斯文 등이 나온다. 그 중 斯道와 斯文은 이단이란 용어와 함께 사용되는 빈도가 그 나머지에 비해 높았다. 이들 용례를 거칠게 구 분하자면, 유교는 믿음 또는 이데올로기, 유학은 배워야 하는 지식, 사도와 사문은 문화

또는 문명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고, 종교, 철학, 문화(윤리)를 구분 짓은 인식이 존재했 다고 볼 수 있다.

근대 ‘학지’의 수용 과정에서 일어난, 갑오개혁 이후 성균관이 제사 기능만을 담당한 것 은 믿음+지식의 체계에서 지식을 분리하여 근대 교육(지식)체계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반면 1905년 이후 등장한 유교의 종교화 운동은 ‘지식으로서의 유학’의 위치, 역할이 상 실된 이후에 등장하는 현상으로 봐야 한다. 학교 교과에서 ‘유학’이 근대 ‘수신’ 교육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면서 실용적 지식으로서의 기능 상실이 자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종교화 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유교의 종교화운동은 민족의 정체성, 사 회통합과 직결되어 있었다.(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유교의 종교성이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상 다카하시 도루 이전 유교와 유학을 분리하는 시도는 목적한 바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다카하시가 과연 이 분리에 성공했는지는 다시 볼 필요가 있지만) 그래서 유교/

유학은 종교, 지식, 문화를 통칭하는 어휘로 자주 사용될 수 있었다.

식민지시기(1920년 이후) 조선지식인들이 ‘유학사’보다는 조선문화사, 조선문명사 등에 서 유학을 다루게 된 이유가 여기 있고, 동시에 그들이 유학을 민족성과 관련 지울 수 있 었던 이유도 종교, 지식, 문화로서의 유교/유학이란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식민 주의 계몽 담론이 조선 지식인에게 확대, 이전 가능했던 기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이 분리는 완전하지 않다. 조선시대 지식인이 모두 유학경전을 연구하는 유학연 구자는 아니지 않는가.

근대 ‘학지’에 의해 유교의 재구성이 진행되었다는 기존연구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과정을 모두 식민주의 근대성으로 치환하여 설명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근 대 ‘학지’가 식민주의에 의해 강요되었고, 결국 그 강요로 식민주의 ‘학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동어반복과 같다. 이 과정에는 좀더 복잡한 시도와 원인이 있다.

3. 국학-종교-반성, 지역학-철학-비판에 대한 재고가 필요

따라서 국학과 지역학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국 학과 지역학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로 치환 가능한 용어이고, 이것은 근대 역사주의라는 동일한 인식 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장지연은 종교로 안확은 철학으로 간주한다. 또한 조 선 민족성을 논할 때 식민주의자 역시 유학을 학문체계로만 국한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학문에서 문화로 확장되어 있다.

문서에서 근대 유학의 문화 지형과 조선학 (페이지 8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