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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의 宗 敎와 圓 佛 敎 敎 化 方案 에 관 한 硏 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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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碩 士學 位 論 文

中國 의 宗 敎와 圓 佛 敎 敎 化 方案 에 관 한 硏 究

國 民 大 學校 政 治 大 學院

亞 太 交 流 專 攻 曺 正 鉉

2002

(2)

中國 의 宗 敎와 圓 佛 敎 敎 化 方案 에 관 한 硏 究

指 導 敎授 김 영 진

이 論 文을 碩士 學位 請求 論文 으로 提出 함.

2002年 6月 日

國 民 大 學校 政 治 大 學院

亞 太 交 流 專 攻

曺 正 鉉

(3)

曺正鉉의

碩 士學位 請 求論文 으로 認 准함.

2002년 6월 일

審 査 委 員 長 敎授

審 査 委 員 敎授

審 査 委 員 敎授

國 民 大 學校 政 治 大 學院

(4)

목 차

Ⅰ. 서론

...2

1. 연구의 목적 ...4

2. 연구의 내용 및 방법 ...6

Ⅱ. 중국 종교 변천사

...9

1. 중국 전통사회의 종교 ...9

2.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종교 ...16

3. 개방개혁 시기의 종교 ...27

4. 현재의 중국 종교 현황 ...31

5. 현대 중국불교의 조직과 포교활동 ...39

Ⅲ. 원불교 중국교화 방안...

...43

1. 중국교화의 현황 ...43

2. 중국교화의 제문제 ...55

3. 중국교화 방안 ...61

Ⅳ. 결론

...71

《참고문헌》..

...75

(5)

Ⅰ. 서 론

화석연료로 근대문명을 세웠던 유럽의 쇠퇴, 「철 생산으로 공산주의 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공산주의의 전 세계적 파급을 추구했던 현 실 사회주의의 몰락, 유럽의 근대문명을 모델로 삼아 기를 쓰고 본받았 던 일본과 아시아 경제의 침강, 물질 위주의 지나친 소비의 추구로 인한 윤리와 도덕의 쇠락, 화석연료의 소비로 위기에 처한 지구, 모두가 하드 웨어 시대의 종언을 알려주고 있다. 2000년 전 철은 인간을 쇠기운에 동 화시키기 시작했다. 쇠는 땅을 갈면서 자연에다 인위적 의지를 새겨 넣 기 시작했고, 칼과 창으로 변신하면서 권력을 모아 고대국가를 탄생시켰 다. 그러한 권력은 대규모 살상을 야기했는데 근대는 그 전성기였다. 국 가와 기업, 과학과 종교가 쇠의 기운에 맞게 기계 모델로 조직화했다. 그 모델이 근대무기와 군대를 따라 전 지구로 퍼졌다.

「사랑」과 「자비」는 철기 문명의 난폭성을 내다 본 성인들이 보낸 인류 구원의 절박한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런 문명이 무너지고 있다. 중 후장대한 공장과 국가체계가 철갑옷을 입고 쓰러지고, 불그스레한 녹이 하천을 뒤덮는다. 화석 연료의 고갈을 50년 앞둔 지구의 형상이다.1)

「지구는 과연 멸망할 것인가!」

새로운 천년기인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위와 같은 절박한 세 계 문명의 위기 속에서 미래 세계의 구원을 위한 80여 년 전 원불교 교 조인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2)(이하 소태산 또는 대종사라 함)의 「은혜

1) 김용호, 「철의 문명사 이미 쇠락」, 중앙일보, 1998년 4월 7일자.

2) 본명은 박중빈, 호는 소태산, 1891년(원기 전 25년) 3월 27일 전라남도 영 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에서 탄생. 7세부터 우주 대자연의 모든 현상에 대 해 큰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9세부터는 인생의 모든 일에 대해서도 크게 의 심을 일으켜 이를 깨치기 위해 구도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20여 년의 구 도생활 끝에 26세 되는 1916년 4월 28일 이른 새벽에 우주와 인생의 큰 진리 를 깨침. 대각 후 일성은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 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인데 이것은 원불교 진리관의 핵심인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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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자비」의 성음이 전 지구에 메아리쳐야 할 때가 돌아오고 있음을 절 감해 본다. 대종사는 「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 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사람이 사용하여야 할 물질의 세력은 날로 융성하여, 쇠약한 그 정신을 항복 받아 물질의 지배를 받게 하므로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 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가 없으리요. 그러므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 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3)하면서 꺼져 가는 「사랑」과 「자비」의 메시지를 다시 지피고자 개교의 동기를 원불교 창교와 함께 선포하였다.

물질에 현혹되어 물질을 선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감을 개탄하면서 장차 생령의 고해가 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물질 로 인하여 전 세계 인류의 위기가 올 것을 진단하였다. 따라서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새로운 종교를 건설해 가기 위해서는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을 찾아주고 인류사회의 새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도덕을 제 시해야만 한다는 사명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세상이 말세가 되고 험난 한 때를 당하면 반드시 한 세상을 주장할만한 법을 가진 구세성자가 출 현하여 능히 천지기운을 돌려 그 세상을 바로 잡고 그 인심을 골라놓나 니라」4)라고 대종사는 말하면서 세상 구원의 기치를 들었던 것이다. 20 세기의 대표적 철학자의 한 사람인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는 새 로운 종교사상의 확대를 「세계 의식의 탄생」5)으로 보았는데, 바로 지 금의 시대가 원불교 사상의 확대를 통한 「세계 의식(World Consciousness)의 탄생기」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세계의 강대국

를 말한다. 원불교는 소태산 대종사가 진리를 깨친 1916년 4월 28일을 교단 창립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손정윤 편저, 『원불교대계』, 원불교출판사).

3) 『원불교 전서』, 「정전」, 제1 총서편, 제1장 개교의 동기, 원불교출판사, 1977, 21쪽.

4) 『원불교 전서』, 「대종경」, 전망품 1장, 376쪽.

5) A.N. 화이트헤드 저, 류기종 역, 『종교론』, 종로서적, 1993,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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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에 서서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 국의 종교변천사와 오늘날 중국의 종교상황, 그리고 올해로 10년째가 되 는 원불교의 중국 진출 현황과 교화 방안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연구의 목적

우리나라와 중국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정치, 문화 등 여러 면에 걸쳐 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불교는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흘러 들 어와 새로운 모습의 중국 불교로 정착하여 한국에까지 전해져 오면서 양 국민의 사상과 정신적 기반이 되어왔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중국의 종 교와 원불교의 교화 방향을 연구해 본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보며, 한때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이끌어 오던 미국과 유럽의 선교 열정이 식 어가고 있는 오늘날의 종교 현실에서, 새삼 중국의 종교변천사를 고찰하 고 중국의 종교 현실을 직시해 보면서 궁극적으로 원불교의 교화방안을 연구해 보고자 함은 소수민족인 조선족과 관련되어 있는 종교인 원불교 의 깃대만을 중국 땅에 다른 종교와 더불어서 하나 더 꽂으려는 것이 아 니다. 중국이 근 50년에 걸쳐서 공산주의혁명, 문화대혁명, 개혁개방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 정책을 추구해오는 동안 돌출되어진 여러 가지 문제 들을 종교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함께 해결해 보자는 취지이다.

특히 중국에서도 「불교가 어떻게 현 시대의 발전에 부응해야 하는 가」라는 문제를 놓고 적극적인 활동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동등한 지구촌사회 구성원으로서 원불교와의 사상적 접맥을 통한 공통적 인 인식을 도출해 봄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비록 중국 정부가 외 래종교의 자국내 포교활동을 금하고 있지만 개방의 물결을 타고 제종교 마다 종교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면서 많은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오늘 날의 세계가 상대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인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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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과거처럼 「죽의 장막」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고수한다는 것이 고루하다는 것을 종교 분야에서도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국이 공산주의 혁명을 거치는 동안 종교에 대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종교 자체내의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은 부분적으로 제종교를 개혁 혁신하는 차원에서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천 년 계속되어 온 봉건적인 전제정부와 함께 했던 불교의 모순들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불 교로의 모색을 지향했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불교를 도구화했다는 부정적 인 이미지를 어느 정도 상쇄하면서 그래도 오늘날에는 세계의 각종 불교 학술대회의 일원이 되어 교류의 폭을 넓히고 있음과 더불어 원불교가 중 국 땅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세계 를 지향하면서 세계가 한 울안 한 권속임을 알고 한 일터에서 공동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원불교가 자유와 개혁의 물결 속에서 새로움을 추구하 고 있는 중국에 뿌리내리고자 함은 중국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요, 우 리의 기쁨이 중국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함에 있을 적에 미력하 나마 원불교가 중국 땅에 뿌리내릴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방법을 제시 하고자 함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또한 중국의 불교협회와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는 원불교가 중국 교화에 대한 새로운 각오와 방향성을 가지고 접근해야만 중국교화의 알 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침내 부처 님의 동체대비의 정신이 활화산처럼 지펴져서 중국인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요, 우리의 마음이 중국인의 마음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21 세기를 희망의 세기로 엮어가는 데에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궁극 적으로 인간 중심주의, 개인 중심주의, 소유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생명 중심주의, 우주 중심주의, 존재 중심주의로 전환하여 인류의 생존과 평화 를 위해 중국의 불교와 원불교가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매진했으면 하는 염원도 함께 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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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의 내용과 방법

본 논문의 구성은 중국종교 변천사, 현재 중국에서의 종교현황, 그리고 원불교 중국포교방안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중국에서의 불교현황 과 원불교 중국포교방안이 본 논문의 초점으로 부각되어져야 함에, 오랜 역사적 굴곡과 더불어 우여곡절을 거친 중국 종교의 변화 모습도 시대상 황과 함께 다루어 봄으로써 원불교 중국 포교방안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 에 보다 충실하도록 했다.

본 논문은 중국에 관한 종교 및 사상, 사회와 문화, 정치에 관한 서적 들과 원불교의 중국 교화에 관한 논문 및 서적들, 보도자료 및 학술자료, 그리고 중국 현지에서의 포교활동 자료들을 중심자료로 하고 논자가 여 러 차례의 중국 현지 방문을 통해서 듣고 목격했던 바를 원불교 중국교 화의 방향성에 맞추어 기술하려 하였다.

먼저 본 연구의 제Ⅱ장은 중국 종교 변천사로 중국 전통사회의 종교,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종교, 개방개혁 시기의 종교, 현재 중국의 종교현황 으로 나누어 중국 전통사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변혁과 함 께 오늘의 중국 종교 상황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고찰하였고 현재 중국의 종교에 대한 기본 정책 방향을 다룸으로써 현실적으로 중국교화에 대한 법적인 대처에 참고하도록 하였다.

특히 본 논문의 성격상 중국의 여러 종교 중에서 원불교와 관계성이 깊은 현대 중국불교의 조직과 포교활동을 상세히 언급하였다. 앞서 시대 별로 간략히 언급되었던 중국에서의 불교현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 였고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는 중국 불교조직인 중국불교협회의 활 동과 개혁개방 이후 오늘날까지 중국 불교의 상황 및 포교활동을 살펴보 면서 기나긴 중국역사와 함께 불교가 중국인의 정서에 내재해 있음을 기 술하려 하였다.

특히 중국 불교가 내세적인 면을 극복하고 현세적 경향으로, 개인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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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목적에서 중생 구원의 목적으로 변하여 마침내는 교리 조직이 가장 발달했던 특징있는 불교로 거듭난 모습들에서 어느 때나 사회와 종교 발 전에 있어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다루려 한다.

제Ⅲ장에서는 원불교 중국교화 방안으로서 해방 전후의 원불교 중국교 화 현황 및 중국 교화의 제문제, 원불교 중국교화의 구체적 방안에 관하 여 서술하였다.

특히 중국 교화 초기 전개과정에서는 원불교가 최초로 중국 땅에 발을 내디딘 사실인 만큼 구체적으로 기술하였고, 북경·연변·훈춘 등 현재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교당의 상황을 활동 중심으로 서술하는 데에 주 안점을 두었다.

중국 교화의 제문제는 중국의 종교법에 대한 대처방안과 해방 전 중국 만주지방에 최초로 진출한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와 원불교와의 법 통 확립, 혁신 불교로서 원불교의 위상 확립을 숙제로 보았다. 안으로는 교단의 내실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교구체제의 확립과 국 제부의 확대개편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중국교화 방안은 원불교가 중국 땅에서 상생의 종교로서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논자의 생각뿐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를 기술하는데 주안점 을 두었다.

특히 중국에서의 원불교 현황과 문제점, 교화방안에 관한 자료는 원불 교 교정원 국제부 소장 자료와 교화훈련부 및 기획실 자료, 문화관광부 의 종교 관련 자료 등을 참고하였고, 원불교 월간지인 「원광」과 원불 교신문의 중국교화에 관한 관련 부분을 살펴보았다. 또한 중국 현지에서 교화활동을 하고 있는 교무들과 교도들 그리고 해외 교화 경험자들의 진 지한 대화도 정리하였다. 한편 중국의 종교제도와 정책, 선교방안에 관한 자료 및 논문은 국회 도서관 소장 자료를 참고하였고, 중국 현지 교당과 의 통신을 통한 관련 자료도 정리하였다.

연구방법에 있어서의 방향은 과거에 대한 사전적 정리보다는 중국 현 장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경험 등 제반 사항들을 점검하고 중국교화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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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제시하는데 방법론적인 접근의 초점을 맞추었다.

제Ⅳ장 결론에서는 중국의 불교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 서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문화대혁명기 에 겪었던 엄청난 탄압을 극복하고 개혁 개방과 더불어 한국의 원불교와 만남으로 인하여 단순한 종교간의 교류를 뛰어넘어 종교의 본질적인 목 적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과 결국 원불교의 중국교화6)방향이 중국 국민이 추구하는 인간의 행복과 사회의 안정과 번영이라는 목적뿐 아니 라, 지구촌의 평화로운 삶에 일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 논고의 끝맺음을 하였다.

6) 교화(敎化) : 원불교의 교법으로 사람을 가르쳐서 훌륭한 인격자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 범부가 변하여 성현이 되게 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바른 믿 음을 갖게 하며 악한 사람이 변하여 착한 사람이 되게 하는 일. 불교의 포교, 기독교의 선교, 전도에 상응하는 말이나 과거 서구종교가 공격적인 선교라 하여 제국주의의 전파에 종교를 앞세웠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상생상화, 인 류공영, 낙원세상 건설이라는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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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중국 종교 변천사

1. 중국 전통사회의 종교

1) 유교

유교는 孔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전통과 사상으로 B.C.

551년에서 B.C. 479년에 시작되었다. 이때는 이른바 춘추전국시대로 이 시대는 殷나라와 周나라로 이어온 중국의 고대 봉건체제가 붕괴되는 과 정이며, 秦나라의 시황제에 의한 통일제국 형성으로 종지부가 찍히기까 지의 중국 역사상 일대 전환기였다. 그 현실은 周왕조의 권위가 쇠퇴하 여 무력이나 경제력이 강한 諸侯들의 할거, 강대국의 실력에 의한 약소 국의 병합, 나아가서는 배신에 의한 國君의 추방·살해와 같은 하극상이 여러 번 있었던 戰國亂世였다.

문화적으로 보면 주왕조는 선행하는 두 왕조인 夏·殷의 문화를 기반 으로 하여 상당히 진보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왕조 창시 후 수백 년이 지난 이 시대에 이르자 그 정치지배의 제도인 봉건제도를 포 함하여 다가 올 새로운 시대에는 사회나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과제 아래 재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공자에 의한 儒 敎의 창시이다.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요약하면 三綱五倫과 仁義禮智라 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孟子와 筍子가 나타나 유교는 더욱 체계화되고 발전되었다. 맹자는 仁을 실천하기 위한 義의 덕을 내세워 仁義을 아울 러 주창했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이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치로서 왕도론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유교는 맹자에 의해 더욱 깊이 있게 정립되었으며 인간 윤리에 대한 오륜도 제창되기 시작하였다. 얼마 뒤에 순자가 나타나 맹자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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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에 반대 이론을 내세웠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악하므 로 禮에 의해서만 수양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성악설’을 주장하고 禮 를 강조하였다. 유교는 이와 같이 공자의 사상을 받드는 가르침으로 자 기를 완성하고 덕을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그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 으며, 공자의 사상을 근본으로 삼고 四書五經을 경전으로 하여 정치, 도 덕의 실천을 가르치는 학문을 유학이라고 한다. 따라서 유학은 유교를 성립시키는 학문을 일컫는데 엄밀히는 철학이라고도 종교라고도 할 수 없고 철학, 종교, 정치, 윤리, 역사 등을 분화되지 않은 채로 인간의 가르 침으로서 발전하여 중국에서는 2,000여 년에 걸쳐 정신문화에 크나큰 영 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秦의 始皇帝(재위 B.C.247∼B.C.210)에 의한 천하통일 이후에 유교는 焚書坑儒와 같은 끔찍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된다. 이것은 질서 의 원리로서의 禮가 성악설의 순자를 거쳐 사회적 신분규정과 법에 의한 제재의 이론으로 발전된 것을 옛 성왕의 德治의 이론을 들어 유자들이 비판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秦代의 억압으로 수난의 역사를 거친 유교가 그 활로를 발견한 것은 漢의 武帝(B.C.159∼B.C.87)때의 일이다. 한 무제는 董仲舒(B.C.179∼

B.C.104)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漢代 유학의 주류적인 관심사는 經書 章句의 해석에 관한 학문이었다.

秦代의 억압으로 묻혀버린 고전을 찾고 그 정통성을 세우려는 노력이었 다.

후한의 말기로부터 晉에 걸친 사회의 불안은 사대부계급 사이에 老莊 思想을 유행케 하였으며, 유교에 대한 반발적인 풍조가 보였다. 論語나 易經의 주석이 노장사상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六朝로부 터 隋·唐에 걸쳐서는 注와 疏가 유행하여 修己治人의 이상은 뒤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宋代에 이르러서는 그 동안 계속되어 온 훈고학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 다. 사상계에서 유교의 지위가 불교와 도교의 세력에 밀리기 시작한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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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유교의 경서는 그 속에 담겨진 교리를 실생활에 실제로 살리는 점이 중시되고, 그 교리는 불교적·도덕 적 이론을 원용하면서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송대 의 유학을 宋學·程朱學·朱子學이라 하고 또한 新儒學이라고도 부른다.

明에서는 주자학을 官學으로 정하였는데, 이러한 주자학의 고정화를 타파하고 새로운 분야를 여는 王陽明의 陽明學이 흥기하게 되며, 또한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理 우위의 理氣說에 반대하는 羅欽順, 王廷相 등 일련의 氣철학자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들 기철학자들은 물론 철저하지 못하였으나, 淸代의 戴震에 이르러 기철학이 완성되는 길을 열었다.

청대에 이르러서는 顧炎武 등의 이른바 明의 遺老들에 의하여 實學이 제창되었다. 淸學의 성립에는 기의 철학이 그 한 역할을 하였다. 청대의 유학은 공자의 교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서 명말의 관념적인 학문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라 평가되 기도 하나 청조의 정책적 뒷받침과 유교의 경서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풍조가 굳어져 청대의 고증학은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 경전 이외로 전국 시대의 제자의 학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는 한편 유교의 경서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풍조가 굳어졌다. 마침 청조 의 정책에 의한 뒷받침도 있고 해서 청대의 고증학은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가 한 무제 이후 역대에 걸쳐 여러 가지 형태로 그 경향이 변질되 면서 국교의 지위를 지킨 것은 유교가 중국민족의 전통을 잘 지니고 있 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이고, 또 유교 성립의 기반의 변화가 완만한 데 그 한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보겠다.

2) 道敎

도교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생겨난 종교이나, 중국인들 사이 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창시자가 없고 다른 종교에 서 보이는 체계화된 교리·교의라고 불릴 만한 것이 명확하게 조직화되 어 있지는 않지만 도교는 고대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한 신선사상을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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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도가, 역, 음양, 오행, 위서, 의학, 점성, 복서나 무속신앙을 첨가하 고 불교의 조직이나 체계를 모방하여 정리하였고, 불로장생을 주요 목적 으로 하는 주술 종교적인 경향이 강한 현세 이익적인 자연종교라고 正義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많은 전문가는 이 같은 도교를 성립도교라 부르 며 나아가 민중간에 퍼지고 있는 모든 도교적인 신앙이나 행위라고 하는 틀을 설정하여 그것을 민중도교라고 부르고 있다.

도교에서 처음 교단적 조직을 취한 것은 2세기 중엽의 「太平道」와 이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다고 보는 「五斗米道」이다. 이 둘은 원시도교 라고도 하는데 단순히 병을 고치거나 주술하는 것이 중심이었고 중국 고 대의 봉건사회가 붕괴하고 중앙집권적 왕조지배체제가 확립될 즈음에 나 타난다.

태평도는 이후 黃巾賊의 亂을 일으켜 한때 조정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 을 떨쳤으나, 반란의 중심이었던 장각의 죽음으로 1년도 못되어 평정되 고, 이로 인해 최초의 도교 교단이었던 태평도는 그 맥이 단절된다. 하지 만 오두미도는 후에 天師道라 개명하고 후에 다시 正一敎라 이름을 바꾸 면서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일대에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며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7)

3세기경에는 천사도의 영향을 받아 上淸派가 성립하기도 하며, 5세기 에 집대성된 신선사상을 다분히 받아들이면서 발생한 천사도의 개혁파로 서 新天師道가 있다. 신천사도의 창시자는 寇謙之(365∼448)로 그는 처 음으로 「道敎」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北魏 태무제의 귀의를 받아 도교를 북위의 국교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됨으로써 초기에 서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오두미도와는 달리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신천사도는 교단도교의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고, 이후 도교는 귀족적이 고 왕실 중심적인 교단도교와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도교·민중도교 로 분열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당대·송대에서 보여지는 도교의 양상은 주로 교단도교로서 귀족과 왕 7) 한국종교연구회, 『세계종교사 입문』, 청년사, 1993, 371-3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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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중심으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송대에 이르러서는 각지에 진출한 도 교가 지방의 다양한 민간신앙과 접촉하면서 점차로 서민화되는 반면 당 대의 국가도교는 일전해서 병을 치료하고 사악한 악마를 쫓고 재앙을 없 애고 귀신을 부리는 등의 현세 이익적인 주법으로 그 교법이 변하게 된 다.8)

당나라에서는 왕실의 성이 노자와 같은 李씨이기 때문에 도교를 특별 히 보호해 주었다. 노자가 교조로 일컬어진 것은 당나라부터인데 이때 왕실과 결탁한 것은 상청파였다. 송나라에서도 한 두 사람의 황제가 도 교를 믿고 보호하였지만 교단이 타락했기 때문에 다음의 金나라 시대부 터는 내부로부터 개혁의 불길이 일었다. 全眞敎, 眞大道敎, 太一敎의 세 교단의 성립이 그것이다.9) 이와 같은 新道敎는 그 특징이 기존의 도교 교단과는 달리 주술적인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며, 민중의 현실적 고뇌를 구제하려 하는 점과 신비적이고 내세적인 구제설보다는 一念으로 올리는 기도나 규범에 대한 신뢰와 실천을 강조하는 구제종교, 혹은 내 면적인 수행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곧 이 들은 과거 왕실의 비호아래 타락해 간 옛 도교에 대항해 일어난 도교의 혁신운동이었던 것이다.10)

그렇지만 도교교단은 明왕조에 이르러서 절대군주제라는 강력한 전제 군주제 아래서 불교와 함께 극심하게 통제되었다. 도사나 여관들은 엄중 한 시험을 통하여 선발되었으며, 또한 그 수를 제한하는 엄격한 조치를 강구했지만 뒤에는 오히려 도첩을 무분별하게 판매함으로써 도사나 승려 의 질적 저하로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불신을 증대시켜 道·佛 양 교단 은 이후 다시 회복할 수 없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청대에 이르러서 도교는 이른바 三敎 혼합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각각 의 특색이 불식되어지면서 근세의 민중신앙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입되는

8) 酒井忠夫 저, 최준식 역, 『도교란 무엇인가』, 민족사, 1991, 58쪽.

9) 최정인, 앞의 책, 280-281쪽.

10) 주정충부 저, 앞의 책, 6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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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된다. 그리고 삼교 혼합의 흐름 속에서는 교단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교단도교가 쇠퇴하 게 되고, 그 사상은 중국 민중의 일상적인 서민적 민간신앙의 중핵으로 서 도교는 계속 유지되게 된다.11) 즉 도교는 그 자리가 원시도교가 발생 되었던 본래적인 곳으로 돌아간 것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도교는 오히려 본래적인 중국의 종교적 욕구에 응답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3) 佛敎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서기 1세기 후반 한대 明帝때였다고 한다.

애초에 불교는 도교와 유사한 것으로 인식되어 중국사회에 들어올 수 있 는 단초를 마련하였지만 불교 경전의 한역은 2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졌고 그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수·당을 거쳐 송·원·명까지 중국불교는 크게 번창하여 독특한 중국불교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현실주의적 성격을 지닌 중국인에게 불교가 처음 전해질 때 충 돌을 면치 못했다. 그 전래 시기는 前漢경으로 소급되고 경전이 본격적 으로 번역된 것은 후한에 들어와서 였으나, 현실을 떠나는 것을 주장하 는 불교의 교의가 현세주의적 사상풍토를 조성하고 있던 당시에 쉽게 수 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신선방술의 하 나로 수용되었다. 중국불교의 초기 수용시기는 대체로 전한 말에서 4세 기말까지 400년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 후 5세기 초에서 6세기말까지 200년간 불교는 착실히 뿌리를 뻗게 되었다.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번 역기술이 발달을 보인 이외에 많은 인도승이 들어왔다. 4세기경 구마라 집의 중국 입성으로 중국의 불교 역사에는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그 는 매우 많은 불교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승조, 도 생 등 유명한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또한 담무참, 보리유지, 진체 등이 나타나 본격적으로 번역을 행하여 학문상·신앙상의 기초를 이룩했다.

11) 위의 책,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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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이 당시의 조류에 대해 비담종·성실종·열반종·지론종·섭론종 등의 명칭을 부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비담』·『성실론』·『열반 경』·『십지경론』·『섭대승론』등이 경론을 연구 대상으로 한 학파에 대한 명칭이었고, 또 이 학파들은 단순한 학파를 넘어 종파로까지 되었 다.

이후 수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불교의 성장에 주요한 기틀을 마련해 주 었다. 중국불교의 기본적인 특징은 인간에 대한 강한 강조인데 이런 특 징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중국에서의 불교는 “내세적인 경향 이 현세적인 경향으로 바뀌었으며, 개인 구원의 목적에서 중생 구원 즉 대승불교로 변했고, 철학적인 면에서는 대립적인 교리가 종합성을 추구 하게 되었으며, 해탈의 방법도 종교적 훈련과 철학적인 이해에서부터 경 건과 실제적인 통찰로 바뀌고 승려보다도 재가신도에 권위가 주어지게 되었다.”이러한 인간 중심의 특징은 중국의 정토종과 선종에서 명확하 게 볼 수 있다. 6세기말부터 8세기 전반에 이르는 150년간 전대의 연구 와 신앙을 기초로 중국 독자의 불교종파를 일으켰다. 가상 길장의 삼론 종, 천태 지의의 천태종, 신행의 삼계교, 도작의 정토종, 도선의 율종, 자 은 규기의 법상종, 현수 법장의 화엄종, 혜능의 선종, 일행의 밀교 등의 종파가 발생된 것이다. 특히 선종은 중국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 는 종파로서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이래 혜능에 이르러 불교계 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선종은 그후 임제·위앙·조동·운문·법안 등 종파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당대에서는 다른 종교들도 공존하고 있었지만 흔히 중국에서의 불교시 대라고 할 수 있다. 종교로서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 등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 불교였기 때문이다.

수·당 이후의 불교는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약적인 발전은 보이지 않았다. 불교의 전 역사를 통틀어 10세기 이후의 불교는 새로운 발전이 나 체계화보다는 그 이전 시대를 계승하고 유지시키는 것에 만족하는 것 으로 보인다. 三武一宗의 法亂을 맞아 쇠퇴의 국면을 맞이한 불교는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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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이르러 대장경 조인 등 다시 활기를 맞는 듯 했지만 그것은 단지 현상유지적 차원이었다. 이 계승시대의 불교의 특징은 제종을 융합하는 경향이다. 이 제종융합의 경향은 선과 교의 一致說로까지 발전되었다. 또 한 유교·도교와의 회통이 주장되어 ‘유불선일치론’등도 나타나 불교가 다른 사상체계와 직면하여 대응해야 했던 시대적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 다.

명·청대에 오면 불교는 이제 화려한 교학의 전개보다는 일반 서민들 가운데로의 확산시대를 맞는다. 이때의 불교는 염불회, 방생회 같은 의례 적 불교의 모습으로 지속되었고 도교나 민간신앙과 습합되어 갔다. 이와 함께 청대에는 승려들이 도덕적으로 극심한 타락을 보여 불교 쇠퇴의 중 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승려들은 이러한 타락 양상의 반면 청 말의 각성한 재가불자들은 거사불교운동을 일으켜 불교부흥에 힘쓰기도 하였다.12)

2.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종교

1)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불교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면서 그 해 10월 중화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불교가 역사적으로 지배계급 이 피지배계급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사용한 정신적 무기라고 주장하였 으며, 미래의 극락에서 누릴 복락과 행복을 가르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 금 현재의 처지에 안주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불교의 마음 과 의식에 대한 강조를 공격하였으며 압박과 폭정, 착취 같은 현재의 불 평등과 죄악이 마음의 산물일 뿐 현존하는 사회구조적인 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관념적인 불교학자들을 비난하였다.

12) 한국종교연구회, 앞의 책,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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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불교의 조화 및 통합의 원리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기본 원리인 모순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였다. 사실상 중국의 모든 불교 종파들이 받아들였던 관념론적 세계관 대신에 공산주의자들은 물질 세계 이외에는 어떠한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 세계관을 주장하였다.13)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산당정권 수립 이후 공산주의 사상과 혁명에 종교 가 미칠 영향을 우려한 나머지 사회주의체제 초기에는 종교의 인정에 대 하여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불교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찬 반의 논란이 있어 왔다.14)

그러나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종교에 반대하는 한편 불교가 과거 중국 문화에 다방면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았고, 사회주의화된 현실 에서도 불교가 중국인민들의 행동과 사고, 사상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중국 공산당정부의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불교를 말살 할 경우 인민들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직 그 럴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15)하였으나 근본적인 종교에 대한 견해는 변하 지 않았다. 新四軍이 발행했던 「농민과 혁명」과 八路軍의 「新戰士讀 本」등에도 그러한 지적이 보이는데 陳紹寓는 1935년에 대 종교 전술을 언급하는 가운데에서 유교나 불교 등의 오래된 이데올로기가 대중 가운 데에 깊이 스며들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16)고 말하면서 제반 종교를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대중들의 교육,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고 물질세 계와 사회에 대한 좀 더 과학적인 지식이 두루 퍼지면 그때에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자연적으로 줄어들 것이고, 정부가 직접적으로 종교에 대해 아무런 적대행위를 하지 않아도 마침내는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 다. 이러한 마당에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13) K.S. 케네쓰 첸 저, 박혜당 옮김, 『중국불교-하』, 민족사, 1994, 467쪽.

14) 牧田諦亮 외 4인 共著, 양은용 역, 『중국불교사 개설』,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4, 209쪽.

15) K.S. 케네쓰 첸 저, 앞의 책, 498쪽.

16) 구보노리타다 지음, 최준식 옮김, 『도교사』, 분도출판사, 1990,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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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을 표방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88조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라 규정하고, 또한 모택동이 1952년 10월 8일에 티베트 에 대해 행한 「공산당은 종교에 대하여 보호책을 취하며 종교를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어떤 종교를 믿거나 또한 다른 종교를 믿는 것도 평등하게 보호를 가하고 그 신앙을 존중한다. 오늘 날 종교에 대해 취하 는 보호정책은 장래도 또한 마찬가지로 행해질 것이다」라는 강화 등에 서 중공에서도 종교를 긍정하고 불교활동이 공인되었다17)는 근거가 되 었다. 실제로 본토지배의 초기에 공산당 정부는 불교에 대해 적대적인 공공연한 행위는 하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예를 들어 1949년의 제1차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에 승려 거찬과 거사 조박초가 불교대표로 참석하였다.

1950년 공산정부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불교승려, 도사, 무당, 점쟁이는 종교인으로 서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의 기생충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지목한 법령이 8월 4일에 발표되었다. 동시에 사원의 주지들은 지주와 같은 부류로 간주되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광대한 사원토지를 경 영하였고, 농민들의 땀으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농부와 승려, 승려와 주 지사이에 계급적 구별을 지으려는 시도가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 나타났 다.

1951년에 토지 개혁이 시작되면서 두 번째 국면이 전개되었다. 일찍이 1947년에 공산주의자들은 사찰과 사원의 재산 소유권을 박탈한다는 원칙 을 결정하였다. 공산당 정부는 사찰 소유의 토지뿐 아니라 묘당의 토지 까지 징집함으로써 그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토지개혁이 일어날 때마다 사찰과 사원을 유지하고 승단을 먹여 살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빼앗겼 다.

더 이상 승려들은 경전을 연구하고 참선하는 종교적 삶을 추구할 수 17) 목전체량 외 4인 공저, 앞의 책,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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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따라서 토지개혁의 공식적인 목적은 불교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 었으나, 결과는 적대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젊은 승려는 환속해야 만 했으며, 승단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적 관념들을 마음에서 몰아내기 위한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승려들은 농사를 짓거나 베를 짜고 바느질하는 수공업자 가 되거나, 채식전문 식당을 운영하거나, 차를 재배하거나 교사가 되었 다.18)

또한 중국의 모든 승려와 신도들을 한데 끌어 모아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1953년에 「중국 불교 협회」를 조직하였다. 회칙에 따르면

「애국심을 드러내고 중국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인민정부의 지도 아래 모든 불교신자들을 결속하기 위하여 협회를 창립한다」 하였다. 여 기에 공산당 기관지는 불교협회 회원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평화를 유지 해야 할 뿐 아니라 친구와 적을 구분하고, 인민의 적들의 사상과 행동을 명확하게 인지해야 하며 모든 적색분자와 간첩 및 반혁명분자들을 찾아 내어 뿌리뽑아야 한다는 성명을 작성 배포하였다.

여기에 「월간 현대불학」이라는 협회 기관지를 발간하여 공산중국의 불교에 관한 주된 정보원19)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불교에 관한 근본 교리를 비롯한 연구 결과를 담은 불교 본래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결국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독립되어 중국 대륙을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모든 역량을 동원했고 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확실한 것 은 전통적으로 있어 왔던 불교나 기독교 등과 같은 종교의 종래의 모습 은 완전히 청산되었다20)는 것이다.

2)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도교

원래부터 도교의 신앙을 미신이라고 받아들였던 중국 공산당은 전쟁

18) 위의 책 498-499쪽.

19) 위의 책, 501쪽.

20) 요시오카 요시토요 지음, 최준식 옮김, 『중국의 도교』, 민족사, 1991,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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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실물교육을 실시하였다. 즉 일본군이 공격하여 올 때 그들이 물러갈 것을 신에게 기원을 하였어도 효과가 없었던 사실을 들어, 믿고 있는 신 들이 실재는 있지 않다고 하여 그러한 신앙을 그만두도록 권하였다. 이 리하여 소위 미신박멸정책과 함께 도교도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소유지 해방, 건물의 전용이 종용되고 종교인의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것이 권장되면서 교리의 연구나 수행 포교 등의 종교활동은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농사짓는 일로 돌아가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어 환속 하는 도사가 많아졌다.

소유지의 대부분이 해방됨에 따라, 상당히 많았던 백운관21) 주재 도사 들도 대부분 환속하고, 남아 있는 도사들도 도복을 벗고서 농사일을 하 였던 것은 그러한 사정들을 잘 알게 하는 단면들이다.22)

1950년 10월 20일자 홍콩 대공보 지상에 「북경 백운관 도사의 생산종 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전의 도사나 승려는 노동생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매일 전당 에서 독경하거나 法事를 하는 따위의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적인 직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한마디로 완전히 사회의 기생충이었다. 해방 이후 북경의 寺廟는 옛 사회와 함께 장사지내져서 일변하였다. 어떤 것 은 정부기관에 차용당하고, 어떤 것은 학교나 공장에 이용되고, 또 어떤 것은 국민들의 셋방으로 임대되었다. 승려나 도사들의 인생관도 변하였 다. 기생충적 사고 방식을 반성하고 전업해서 생산업무에 참가하는 사람 도 이었다. 그들은 진작에 자진하여 노동에 종사하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과거에 대사묘의 주지였던 자들은 모두 대지주들이어서 북경 교외 나 근처의 현에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승려나 도사들은 이 것을 농민에게 소작시켜서 인민의 피와 땀의 결정을 쥐어 짜 편하게 앉 21) 백운관 : 도교의 총본산. 과거 전진교의 시방총림이었으며 북경최대의 도관으

로서 여기서 소유하는 토지는 270여頃에 달했다.

22) 구보노리타다 지음, 정순일 옮김, 『도교와 신선의 세계』, 법인문화사, 1993, 226-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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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먹을 따름이었다」.23)

위의 내용에서처럼 도교의 도사들이나 도교를 유지시키는 생산 재원들 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인하여 재편되었다.

특히 도교는 공산 정권으로부터 반합리적인 동시에, 매우 조악하게 된 주술적인 장생술, 치료술, 除摩術24) 등을 강조하여 사회주의 정권에 이반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각 종교를 평등하게 보고 강제도 금지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혁명이전의 종교 본래의 모습을 공산주의 체제에 맞게 끔 개조하였다. 특히 인민의 이익이 되는 것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하면 서 현재 건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커다란 사찰을 무익하게 버려둘 것이 아니라 공무에 사용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협의해서 적당한 처치를 생각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민의 반감을 사기 때문에 교단이 갖고 있는 토지 만을 특별하게 취급할 수는 없다고 하였고 농민의 수입이 늘면 공업이 흥하고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하면서 도교의 종사자도 독경 이외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25)고 하였다.

그래서 백운관에 살고 있는 도사들은 도복을 벗고 念經祭神하는 것을 버려 두고 호미나 낫을 들고 매일 농사에 종사하게 되었고, 북경 최대의 도관이었던 백운관은 완전히 변하여 도사들은 이미 사회의 기생충이 아 니라 적극적인 생산자로 다시 태어났다26)고 하였다.

한편 1953년 5월 30일부로 인민해방군 상해시 군사관제위원회는 반동 적인 會, 道, 門 등 종교 결사의 단속을 위한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일관 도, 구궁도, 태극도, 선천도, 고봉산도, 옥황도 등의 결사의 책임자와 포 교사, 전도사는 소정의 절차에 따라 모두 공안국에 등록하게끔 결정하였 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일관도 교주 재명원, 구궁도 주령 장지박, 선천 도 주령 송명생 등의 반혁명적, 반인민적 반동활동이 잇달아 적발된 데

23) 요시오카 요시토요, 앞의 책, 239-240쪽.

24) 막스베버 저, 이상률 역, 『유교와 도교』, 문예출판사, 1993, 279쪽.

25) 최정인, 앞의 책, 283쪽.

26) 요시오카 요시토요, 앞의 책, 242쪽.

(25)

에 기인한다.

이러한 회·도·문들은 그 종교적 성격에서 말하면 모두 민중 도교 계 열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인민을 제일 중요시하는 사회 속에서 민 중에게 제일 친숙한 신앙이 인민의 적으로 처리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 인간 사회의 복잡한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27) 급기야는 도교의 총 본산인 백운관에 1950년에 24명 정도의 도사가 있었으나 1966년경에는 극히 소수밖에 남지 않았다.

백운관 사어전 부근에 있는 건물은 연구실, 교실, 도서열람실, 회의실 등으로 전용되고 교실에는 「공산당의 은혜는 깊이가 바다와 같고 모주 석의 공은 산과 같이 높다」라고 쓴 두 글귀가 걸려 있고 도사들은 여기 에서 모택동 사상을 학습해야 했다.28)

도교에서 추구하는 삶의 목표는 정신적 자유이다. 자유로운 정신을 찾 으려면 물질에 얽매일 수 있는 심을 닦아서 심의 정수가 현묘한 작용을 발휘하게 해야 일상심이 寂寥하게 되어 정신이 날개를 펴게 된다29)는 도교의 가르침이, 현실에서 보이는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당시의 상황에 맞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명시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 하였지만 종교는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淸明節의 성묘 도 인민영웅기념비의 단체 참배로 바뀌고 年畵(신년에 붙이는 그림)는 해방군 전사와 아이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그림으로 바뀌었다.30)

한편으로는 일률적인 통제와 관리를 위하여 1957년 4월 14일 朱德 부 주석을 맞이한 가운데 백운관을 대회장으로 해서 중국도교협회를 설립하 였다. 이 때 당연히 백운관의 조리박이 대표가 되어야 했는데 회장에 악 숭대, 부회장에 맹명혜(북경 출신) 진루념(항주 출신), 교청심(서안 출 신), 왕월정(강서 출신), 역심영(사천 출신)등 다섯 사람과 비서장에는 여 운항(강소 출신)이 선출되었고 조리박은 도교협회가 발족되기 전에 백운

27) 위의 책, 243쪽.

28) 구보 노리타다 지음, 최준식 옮김, 앞의 책, 386쪽.

29) 이강수 지음, 『중국고대철학의 이해』, 지식산업사, 1999, 147쪽.

30) 구보노리타다 지음, 최준식 역, 앞의 책,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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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을 떠났다31)는 설이 있고 보면 혼란기에 있어서 혁명인맥의 일면이 종교에까지 침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사회주의체제에서의 기독교

19세기 중반의 아편전쟁은 중국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아편전쟁의 결과 체결된 남경조약과 이를 보완하는 望廈修約, 黃浦條約 에서 자유로운 교회 설립 규정과 개항장에서의 자유로운 선교활동이 가 능하다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이제 중국 정부가 민중에게 신앙의 선택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압도적인 외세의 무력 앞에 포기되었다. 이 기회를 포착하여 서방의 선교사들이 대량으로 중국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32)

1921년 창당된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에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외 적 요인 중의 하나는 당시 중국이 반봉건 반식민지 상황에 있었고 다수 인민은 공산당의 반봉건 반식민지에 힘을 실어 주게 되었으며, 여기서 기독교는 반식민지적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성립 후에는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기독교도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공산당 정부의 감독 하에 三自運動이 추진되었고 정부는 이 운동을 기독교 통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삼자운동은 삼자애국운동이라 고도 하며 自治, 自養, 自傳을 표방하는 진보적 프로테스탄트로부터 유래 한 운동으로 정부의 지도에 따라 反帝, 反封建, 反官僚의 입장에 서서 독 립적, 민주적, 평화적으로 통일된 신중국을 목표로 한다. 자치라는 것은 유럽적인 전통과 지배에서 탈퇴하여 중국적인 제도와 규칙, 의식을 정하 는 것이고, 자양이라는 것은 외국 숭배나 초국가 관념을 버리고 경제적 으로 외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자는 것이며, 자전이라는 것은 독립하여 傳道하는 것으로 중국인 목사들 스스로 신학체계를 세운다는 것도 포함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자운동은 종교적인 면에서 나타난 중국의 내셔

31) 요시오카 요시토요, 앞의 책, 244쪽.

32) 안효열, 「현대 중국의 종교정책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원, 199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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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즘이었는데 이 운동은 당연히 애국운동으로 발전할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각지에 순식간에 널리 퍼졌다.33) 부연하자면 자치는 궁극 적으로 중국의 교회와 제국주의의 연결고리를 제거하여 중국적인 기독교 를 양성하는 것으로 당시 정치적 변혁과 연장선상에서의 자치였다.

자양은 설사 기독교 단체라 하더라도 중국 밖의 단체의 재정적인 후원 을 단절하여 스스로 교회를 운영하게끔 하는데 있었지만, 본래 목적은 모든 종교 단체와의 재정관계를 단절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자전은 기존 선교조직을 철저히 도태시키고 중국 교회스스로 독립하여 운영하는데 뿌리를 두고 제국주의의 잔재를 철저히 제거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한편 삼자운동의 핵심 축인 삼자위원회는 정부와 교회 사이의 중간역 할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행정일익을 담당하 였다. 삼자위원회의 헌장 29호 문서에도 삼자위원회가 정치와 종교 양면 에서 수행해야 할 목적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회는 중국 기독교 조직을 위한 것이며 목적으로는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 아래 전국 기독교인이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고 국가 법률을 준수하여 자치, 자양, 자전을 견지하며 독립적으로 교회의 방향을 세우며 삼자애국운동의 성과를 보호하고 정부가 주장하는 종교 신앙의 자유 정책에 협력해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 건설이 고도민주, 고도문명의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 되도록 적극 추진하며 대만과 조국이 하나되길 바라면서 조국통일을 실현하고 패권주의를 반대하기 위하여 세계평화를 유지하는데 큰 힘을 공헌하고자 한다.”

1950년대 초기 중국 공산당은 종교단체에 서서히 압력을 가하여 삼자 위원회의 명령을 순응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삼자소멸 종파의 구호아 래 교회의 숫자는 급속히 줄어들었고 많은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다.34)

33) 구보 노리타다 지음, 최준식 옮김, 앞의 책, 385쪽.

34) 진육화, 「현대중국의 종교정책과 선교에 대한 고찰」, 서울신학대학 신학대학 원 석사논문, 1989, 7쪽.

(28)

1952년 말에 이르러 삼자위원회는 이미 교회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 을 장악하였고 교역자들을 위한 학습반에 참가해야만 했는데, 그 목적은 교역자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자아 비판을 하기 위한 강압적인 처사였다.

이 단계에서 비록 교회가 이미 자치, 자양, 자전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삼 자운동의 목표는 교회헌장(Ecclesiastical Constituency)을 포함한 교회의 본래 조직을 제거하고 재조직하여 교회로 하여금 국책을 추진하는 완전 한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954년 7월 삼자준비위원회는 북경에서 「중국 기독교 전국회의」를 개최하고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위원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혁신 의 목적을 애국으로 전제하고 정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35)

결국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기독교는 삼자운동을 중심으로 애국운동으 로 연계하여 중국 신정부중심의 계획된 틀 속으로 흡수되어야만 했으며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모든 종교들이 이러한 맥락에서 그 존재를 축소시 켜야 했다.

4) 문화대혁명 시기의 종교

1965년 11월 10일 姚文元이 문예보에 海瑞罷官36)을 평하는 글을 발표 하면서 문화대혁명의 막이 올랐다. 그 해 12월 모택동이 요문원의 글을 지지한 이래 1960년 봄에 걸쳐 그때까지 사상계를 지배해 온 인사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진행되었다. 1966년 5월 「5·16」통지가 발표된 다음 부터는 당위원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문화 대혁명이 폭발했다.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좀 더 충실한 후계자를 세우고 중국공산당을 개혁하려 했으며, 혁명 이후 세대 들을 혁명사상으로 무장시키고 교육·보건·문화에 있어서 엘리트주의를

35) 위의 논문, 11-12쪽.

36) 해서파관은 명대의 청렴한 관리였던 해서의 행적을 경극화하여 표현한 것임.

모택동의 측근이었던 요문원은 상해의 「문예보」에 발표한 글에서 봉건시대의 농민에게 독재를 행하던 봉건지주관료계급의 한사람인 해서를 영웅시하는 것을 비판함.

(29)

청산할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37)

문화대혁명의 초점이 모택동 사상의 확고부동한 견지를 통한 중국사회 의 전면적 개혁에 맞추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종교도 개혁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종교가 예외 없이 탄압을 받았다.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모택동이 후원한 홍위병38)의 「창의성」

은 문혁이 진행되면서 많은 경우 이들의 혈기 때문에 지나친 탈선을 불 러일으킨 주원인이었다. 문화혁명기간 동안 종교가 특별히 언급된 것은 아니었지만 홍위병들은 모든 중국의 종교를 없애야 할 구세대문화의 일 부라고 생각했으며 자연스럽게 소멸될 때까지 묵인할 대상이 아닌 즉시 근절되어야 할 악폐로 규정하였다. 홍위병들은 打破四舊(舊習, 舊俗, 舊 思想, 舊文化)라는 구호와 함께 종교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이들은 사 찰과 교회, 회교 사원들에 침입하여 성전과 종교문서 문화재들을 파괴하 고 건물을 폐쇄하였으며, 종교인들의 가정에 침입하여 그들의 신앙을 포 기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 기간에 종교인들의 권리는 무시되었으며 가혹한 탄압만이 성행하였 다. 1966년에는 종교업무국이 폐쇄됨으로써 모든 종교가 중국에서 공식 적인 지위를 상실했으며, 新敎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조문은 사문화되 었다. 문혁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평가는 매우 신랄하다.

이는 첫째로, 임표·강청 등 반혁명집단은 左적 착오경향을 이용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종교문제에 대한 정확한 방침과 17년에 걸쳐 종교 공작 방면에서 이룩한 성과를 부정하고 당과 정부의 종교적 공작을 근본적으 로 취소하였다. 중앙에서 지방까지 종교공작부문의 통전을 철폐하고 각 종교의 애국종교조직은 전국적이건 지방적 조직이거나를 막론하고 활동 을 정지시켰다.

37)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 「문화대혁명」, 웅진출판, 1996, 35쪽.

38) 문화혁명의 추진세력이 된 준 군사조직. 군인과 급진적인 대학생, 고등학생 등 으로 구성된 집단. 홍위병이란 모택동이 1927년 조직했던 부대의 이름을 딴 것이 다. 모택동이 당내 개혁파들과 싸우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자신들 스스로 새로운 혁명집단이라 생각하였고 한 때 홍위병은 영웅시되어서 小勇將이 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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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이 와중에서 교당 사묘가 파괴되고 경서가 불에 탔으며, 불상 이 훼손되고 법기가 불태워지고 독경이 금지되고 예배하고 미사 드리는 것 등 일체의 정상적 종교활동이 금지되었다. 종교의 재물이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고대의 고적과 유물 역시 커다란 손상을 입게 되었다.

셋째, 「일체의 牛鬼蛇神을 타도하자」는 명목아래 종교계 인사에 대 한 비판이 진행되고 종교인을 「적대계급」으로 보아 대량의 억울한 사 정을 만들어 내고 일부는 압박 하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였다.39)

1969년 4월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문혁이 종결되었음이 선언되었고, 1976년 9월 모택동의 사망과 10월에 4인방이 체포됨으로써 문화대혁명은 끝을 맺었고 중국 정부의 종교에 대한 방향도 변화되기 시 작했다. 그러나 문화혁명 10년의 종교정책은 전면적으로 종교를 박해하 기 위해 존재했다.

3. 개방개혁 시기의 종교

중국공산당은 집권 이후 공산주의 이념에 입각한 정치체제의 확립에만 몰두하여 가장 경직된 폐쇄적 사회구조를 형성해 왔다. 그 결과 정치·

경제적 후진성과 국민생활의 낙후성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택동 사망 이후 등장한 등소평은 이들 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정치·행 정·경제·군사 등의 개혁정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79년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래 중국은 정치·행정·경 제 개혁에 이어 외국에 대해서는 개방정책을 확대하면서 각국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이려 노력해 왔다. 등소평의 등장 이후 중국은 민주화·개 방정책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과거 모택동의 정치·경제적 유산들을 정리 하고 새로운 이념의 정립과 함께 정치·행정·경제·사회·군사 등 제

39) 안효열, 앞의 논문, 64∼65쪽.

(31)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해 왔다.40)

중국의 근대화 시기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과 영 토주권상실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감, 특히 반제국주의적 자세를 고취시 키는 계기로 작용41)했음에 비추어 볼 때, 개혁개방정책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고 종교에 있어서도 문화혁명기의 암 흑기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 3중전회에서 조자양이 등장하며 종교활동이 전면적으로 회복되 기 시작하였다. 문화혁명기간 동안 종교에 대한 탄압은 4인방의 책임으 로 돌려졌다.

1979년 종교업무국이 부활되어졌고 교회와 사찰과 회교사원들이 중국 전역에서 복구되었고 종교단체들이 재조직되었으며 과학기술, 농업, 산 업, 군비의 「4대 현대화」와 「애국적 임무」에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이 참여하기를 촉구함으로써 통일전선이 재생되었다.

같은 해에 재교육을 위해 수용소에 끌려갔던 기독교 교역자들이 풀려 났으며, 3월에는 홍콩의 중국인 개신교 목회자들이 대륙을 방문하였다.

또한 뉴욕의 국제적인 신학회에 정광훈을 단장으로 한 공인교회 대표단 의 참가 등 기독교계의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해졌다.42)

1982년 등소평 체제가 등장하면서 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제 36조에는 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신앙의 자유가 있다. 어느 국가기관 사회단체 와 개인이든지 공민이 신앙을 갖든지 혹은 신앙을 갖지 않든지 간에 강요 할 수 없다.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한다. 어떤 사람이든지 종교 를 이용해서 반혁명활동을 진행하면 안 된다. 혹은 사회질서를 파괴하거나 공민의 신체건강에 해를 끼치거나, 국가 교육제도의 활동을 방해하는 행위 를 하면 안 된다. 종교는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40) 손종국·유영옥 공저, 『동북아론』, 학문사, 1997, 313쪽.

41) 정재호 편, 『중국정치 연구론』, 나남출판, 2000, 193쪽.

42) 일본크리스챤신문사 편, 김영국 역, 『중공교회』, 생명의 말씀사, 1985, 117쪽.

(32)

이러한 헌법의 규정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종교활동을 보호 육성하고 있는 것으 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국의 지배」를 말하는 것은 로마 교황청의 성직자 임명권 같은 것을 배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한 것처럼 「반혁명활 동」이라든가, 「사회질서 파괴」등의 규정은 공산주의 속성상 종교를 탄압 또는 말살하려는 규정이기도 한 것이다.43)

중국정부는 종교신앙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헌법의 이 규정을 다시 천명하고 아울러 밝히기를 민족자치, 지방의 자치기관을 통하여 각 민족 간부와 대중을 교육하여 종교신앙을 서로 존중하고 공히 국가의 통일과 민족의 단결을 수호해야 한다고 하였다.44)

개혁개방 이후 종교의 자유를 헌법상으로 보장하여 종교자유 정책이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1966년 8월 홍위병이 YMCA 벽보에 「우리는 무신론자이다. 오직 모택동만 믿는다. 우리는 전국 인민에게 호소하여 성경을 태우고 우상을 타파하고 모든 종교단체 들을 해산시킬 것을 촉구한다.」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보더라도 중국에 종교의 자유문제가 헌법상으로 구체화되리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 러나 1979년 3월 15일의 인민일보에 「종교와 봉건미신」이라는 글이 게 재가 되었다. 이 글에서 종교(기독교, 불교, 회교 등)와 미신을 분리시켰 는데, 종교 신앙의 자유를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종교 신앙 자유정책은 종교인과 신도 군중의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장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신앙의 자유(불신앙의 자 유도 포함)를 간섭해서는 안되며 정치와 교육을 간섭해서도 안 된다. 또 해방 이후 이미 폐지된 봉건압박과 착취제도를 회복해서도 안 된다. 또 한 계급의 적들이 종교를 이용하여 반혁명활동과 기타 불법활동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43) 고태우, 『북한의 종교정책』, 1988, 42-43쪽.

44) 유설봉, 「현대 중국의 종교법제」, 『한국종교』21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 구소, 1996, 156쪽.

(33)

이 글이 실린 6개월 이후에 인민일보에 郭駒라는 이름으로 「종교신앙 자유정책의 전면적 관철」45)이라는 글이 실리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국가에 있어서 국민은 종교를 믿건 말건 그런 것은 모두 다 개인적 인 일이다. 인간은 종교신앙의 자유가 있으며, 불신앙의 자유도 있다. 또 한 이런 종교를 믿을 자유도 있고 저런 종교를 믿을 자유도 있다. 정치 적으로 종교를 신앙함으로써 경시를 받아서는 안되며, 각 종교는 정치적 으로 볼 때 평등하다. 또 종교가 통치도구가 되어서는 안되고 그것을 허 락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중국의 종교신앙 자유정책을 실행하는 이론적 근거를 중국 북 경 중앙민족대학 김경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첫째, 사회주의 사회에서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종교신앙을 하고 있다 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며, 또 이 사실이 사회주 의 체제하에서도 종교가 존재하게 되는 사회적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근원이 소멸되기 전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으로 종교를 소멸하려고 하는 염원과 기도는 실제와 부합되지 않는 다. 때문에 사회주의 하에서 종교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도경은 다만 종 교신앙 자유를 보장하는 전제하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문화와 과학기술 사업 및 사회주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가감하는 방법으로 종교를 금지하여서는 안 된다.

둘째, 종교신앙은 정신세계 문제로서 정신문제는 다만 정신적인 수단 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한 사람이 무엇을 신앙하고 무엇을 신앙하지 말 아야 하는 것은 내재적인 신념으로서 그 본질은 자유라고 볼 수 있다.

폭력적인 수단으로 다른 사람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는 할 수 있 어도 강박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라 저렇게 생각하라고는 못한다. 왜냐하 면 그 어떤 사람이든지 이 수단을 대체하는 방법을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철학 인식론상으로 볼 때 사상은 자유적이다. 종교신앙도 역시 일종의 사상표현 형식이기 때문에 종교신앙도 자유적이라고 볼 수 있다.

45) 진육화, 앞의 논문, 23-24쪽.

(34)

종교신앙의 이 특징은 반드시 종교신앙자유정책을 실행할 것을 요구한 다. 중국 헌법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종교신앙자유가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특징에 대한 승인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본질상에서 종교 신앙과 자유는 불가분리적일 뿐만 아니라 헌법 과 법률의 승인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신앙자유는 중국공민이 가지 고 있는 민주권리이다. 노동인민대중은 사회주의국가의 주인으로 본다.

국가와 정부는 다만 공민의 민주권리를 보호하는 의무가 있지 박탈할 권 리는 없다. 공민의 민주권리를 존중하고 수호하는 것은 사회주의국가가 반드시 종교신앙자유정책을 실행하는 정치적 근거이다.

4. 현재의 중국 종교 현황

1) 중국의 종교현황

중국은 방대한 국토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종교 또한 다양하여 다종교 국가라 할 수 있으나 주요 종교로는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 교를 들 수 있다. 이밖에도 일부 소수민족의 특유한 종교 및 지역성격에 따른 민간신앙이 있으나 현재 중국에는 위의 5대종교(불교, 도교, 이슬람 교, 천주교, 기독교) 만이 포교를 인정받고 있다. 소수민족의 특유 종교 민간신앙은 당국의 종교사무국의 보호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통계에 의 하면 현재 중국 각종 종교의 총신도 수는 1억여 명, 종교활동 장소는 85,000여 곳, 종교 교직 인원이 30만 명, 종교단체는 3,000여 개가 있다.

그리고 종교단체에서 종교 교직인원을 배양하는 종교학원은 74개소가 있 다.46)

① 불교

46) 김기민·김영춘, 「원불교 중국교화 방안」,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교화연구 보고서, 2000, 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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