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Ⅱ. 중국 종교 변천사

1. 중국 전통사회의 종교

1) 유교

유교는 孔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전통과 사상으로 B.C.

551년에서 B.C. 479년에 시작되었다. 이때는 이른바 춘추전국시대로 이 시대는 殷나라와 周나라로 이어온 중국의 고대 봉건체제가 붕괴되는 과 정이며, 秦나라의 시황제에 의한 통일제국 형성으로 종지부가 찍히기까 지의 중국 역사상 일대 전환기였다. 그 현실은 周왕조의 권위가 쇠퇴하 여 무력이나 경제력이 강한 諸侯들의 할거, 강대국의 실력에 의한 약소 국의 병합, 나아가서는 배신에 의한 國君의 추방·살해와 같은 하극상이 여러 번 있었던 戰國亂世였다.

문화적으로 보면 주왕조는 선행하는 두 왕조인 夏·殷의 문화를 기반 으로 하여 상당히 진보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왕조 창시 후 수백 년이 지난 이 시대에 이르자 그 정치지배의 제도인 봉건제도를 포 함하여 다가 올 새로운 시대에는 사회나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과제 아래 재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공자에 의한 儒 敎의 창시이다.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요약하면 三綱五倫과 仁義禮智라 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孟子와 筍子가 나타나 유교는 더욱 체계화되고 발전되었다. 맹자는 仁을 실천하기 위한 義의 덕을 내세워 仁義을 아울 러 주창했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이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치로서 왕도론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유교는 맹자에 의해 더욱 깊이 있게 정립되었으며 인간 윤리에 대한 오륜도 제창되기 시작하였다. 얼마 뒤에 순자가 나타나 맹자의 성

선설에 반대 이론을 내세웠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악하므 로 禮에 의해서만 수양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성악설’을 주장하고 禮 를 강조하였다. 유교는 이와 같이 공자의 사상을 받드는 가르침으로 자 기를 완성하고 덕을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그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 으며, 공자의 사상을 근본으로 삼고 四書五經을 경전으로 하여 정치, 도 덕의 실천을 가르치는 학문을 유학이라고 한다. 따라서 유학은 유교를 성립시키는 학문을 일컫는데 엄밀히는 철학이라고도 종교라고도 할 수 없고 철학, 종교, 정치, 윤리, 역사 등을 분화되지 않은 채로 인간의 가르 침으로서 발전하여 중국에서는 2,000여 년에 걸쳐 정신문화에 크나큰 영 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秦의 始皇帝(재위 B.C.247∼B.C.210)에 의한 천하통일 이후에 유교는 焚書坑儒와 같은 끔찍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된다. 이것은 질서 의 원리로서의 禮가 성악설의 순자를 거쳐 사회적 신분규정과 법에 의한 제재의 이론으로 발전된 것을 옛 성왕의 德治의 이론을 들어 유자들이 비판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秦代의 억압으로 수난의 역사를 거친 유교가 그 활로를 발견한 것은 漢의 武帝(B.C.159∼B.C.87)때의 일이다. 한 무제는 董仲舒(B.C.179∼

B.C.104)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漢代 유학의 주류적인 관심사는 經書 章句의 해석에 관한 학문이었다.

秦代의 억압으로 묻혀버린 고전을 찾고 그 정통성을 세우려는 노력이었 다.

후한의 말기로부터 晉에 걸친 사회의 불안은 사대부계급 사이에 老莊 思想을 유행케 하였으며, 유교에 대한 반발적인 풍조가 보였다. 論語나 易經의 주석이 노장사상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六朝로부 터 隋·唐에 걸쳐서는 注와 疏가 유행하여 修己治人의 이상은 뒤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宋代에 이르러서는 그 동안 계속되어 온 훈고학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 다. 사상계에서 유교의 지위가 불교와 도교의 세력에 밀리기 시작한 데

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유교의 경서는 그 속에 담겨진 교리를 실생활에 실제로 살리는 점이 중시되고, 그 교리는 불교적·도덕 적 이론을 원용하면서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송대 의 유학을 宋學·程朱學·朱子學이라 하고 또한 新儒學이라고도 부른다.

明에서는 주자학을 官學으로 정하였는데, 이러한 주자학의 고정화를 타파하고 새로운 분야를 여는 王陽明의 陽明學이 흥기하게 되며, 또한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理 우위의 理氣說에 반대하는 羅欽順, 王廷相 등 일련의 氣철학자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들 기철학자들은 물론 철저하지 못하였으나, 淸代의 戴震에 이르러 기철학이 완성되는 길을 열었다.

청대에 이르러서는 顧炎武 등의 이른바 明의 遺老들에 의하여 實學이 제창되었다. 淸學의 성립에는 기의 철학이 그 한 역할을 하였다. 청대의 유학은 공자의 교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서 명말의 관념적인 학문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라 평가되 기도 하나 청조의 정책적 뒷받침과 유교의 경서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풍조가 굳어져 청대의 고증학은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 경전 이외로 전국 시대의 제자의 학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는 한편 유교의 경서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풍조가 굳어졌다. 마침 청조 의 정책에 의한 뒷받침도 있고 해서 청대의 고증학은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가 한 무제 이후 역대에 걸쳐 여러 가지 형태로 그 경향이 변질되 면서 국교의 지위를 지킨 것은 유교가 중국민족의 전통을 잘 지니고 있 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이고, 또 유교 성립의 기반의 변화가 완만한 데 그 한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보겠다.

2) 道敎

도교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생겨난 종교이나, 중국인들 사이 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창시자가 없고 다른 종교에 서 보이는 체계화된 교리·교의라고 불릴 만한 것이 명확하게 조직화되 어 있지는 않지만 도교는 고대 민간신앙을 기반으로 한 신선사상을 중심

으로 도가, 역, 음양, 오행, 위서, 의학, 점성, 복서나 무속신앙을 첨가하 고 불교의 조직이나 체계를 모방하여 정리하였고, 불로장생을 주요 목적 으로 하는 주술 종교적인 경향이 강한 현세 이익적인 자연종교라고 正義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많은 전문가는 이 같은 도교를 성립도교라 부르 며 나아가 민중간에 퍼지고 있는 모든 도교적인 신앙이나 행위라고 하는 틀을 설정하여 그것을 민중도교라고 부르고 있다.

도교에서 처음 교단적 조직을 취한 것은 2세기 중엽의 「太平道」와 이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다고 보는 「五斗米道」이다. 이 둘은 원시도교 라고도 하는데 단순히 병을 고치거나 주술하는 것이 중심이었고 중국 고 대의 봉건사회가 붕괴하고 중앙집권적 왕조지배체제가 확립될 즈음에 나 타난다.

태평도는 이후 黃巾賊의 亂을 일으켜 한때 조정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 을 떨쳤으나, 반란의 중심이었던 장각의 죽음으로 1년도 못되어 평정되 고, 이로 인해 최초의 도교 교단이었던 태평도는 그 맥이 단절된다. 하지 만 오두미도는 후에 天師道라 개명하고 후에 다시 正一敎라 이름을 바꾸 면서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일대에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며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7)

3세기경에는 천사도의 영향을 받아 上淸派가 성립하기도 하며, 5세기 에 집대성된 신선사상을 다분히 받아들이면서 발생한 천사도의 개혁파로 서 新天師道가 있다. 신천사도의 창시자는 寇謙之(365∼448)로 그는 처 음으로 「道敎」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北魏 태무제의 귀의를 받아 도교를 북위의 국교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됨으로써 초기에 서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오두미도와는 달리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신천사도는 교단도교의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고, 이후 도교는 귀족적이 고 왕실 중심적인 교단도교와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도교·민중도교 로 분열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당대·송대에서 보여지는 도교의 양상은 주로 교단도교로서 귀족과 왕 7) 한국종교연구회, 『세계종교사 입문』, 청년사, 1993, 371-371쪽.

실을 중심으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송대에 이르러서는 각지에 진출한 도 교가 지방의 다양한 민간신앙과 접촉하면서 점차로 서민화되는 반면 당 대의 국가도교는 일전해서 병을 치료하고 사악한 악마를 쫓고 재앙을 없 애고 귀신을 부리는 등의 현세 이익적인 주법으로 그 교법이 변하게 된 다.8)

당나라에서는 왕실의 성이 노자와 같은 李씨이기 때문에 도교를 특별 히 보호해 주었다. 노자가 교조로 일컬어진 것은 당나라부터인데 이때 왕실과 결탁한 것은 상청파였다. 송나라에서도 한 두 사람의 황제가 도 교를 믿고 보호하였지만 교단이 타락했기 때문에 다음의 金나라 시대부 터는 내부로부터 개혁의 불길이 일었다. 全眞敎, 眞大道敎, 太一敎의 세 교단의 성립이 그것이다.9) 이와 같은 新道敎는 그 특징이 기존의 도교 교단과는 달리 주술적인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며, 민중의 현실적 고뇌를 구제하려 하는 점과 신비적이고 내세적인 구제설보다는 一念으로 올리는 기도나 규범에 대한 신뢰와 실천을 강조하는 구제종교, 혹은 내

당나라에서는 왕실의 성이 노자와 같은 李씨이기 때문에 도교를 특별 히 보호해 주었다. 노자가 교조로 일컬어진 것은 당나라부터인데 이때 왕실과 결탁한 것은 상청파였다. 송나라에서도 한 두 사람의 황제가 도 교를 믿고 보호하였지만 교단이 타락했기 때문에 다음의 金나라 시대부 터는 내부로부터 개혁의 불길이 일었다. 全眞敎, 眞大道敎, 太一敎의 세 교단의 성립이 그것이다.9) 이와 같은 新道敎는 그 특징이 기존의 도교 교단과는 달리 주술적인 경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며, 민중의 현실적 고뇌를 구제하려 하는 점과 신비적이고 내세적인 구제설보다는 一念으로 올리는 기도나 규범에 대한 신뢰와 실천을 강조하는 구제종교, 혹은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