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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종교

Ⅱ. 중국 종교 변천사

2.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종교

1)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불교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점령하면서 그 해 10월 중화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불교가 역사적으로 지배계급 이 피지배계급을 계속 지배하기 위해 사용한 정신적 무기라고 주장하였 으며, 미래의 극락에서 누릴 복락과 행복을 가르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 금 현재의 처지에 안주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불교의 마음 과 의식에 대한 강조를 공격하였으며 압박과 폭정, 착취 같은 현재의 불 평등과 죄악이 마음의 산물일 뿐 현존하는 사회구조적인 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관념적인 불교학자들을 비난하였다.

12) 한국종교연구회, 앞의 책, 215쪽.

더 나아가 불교의 조화 및 통합의 원리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기본 원리인 모순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였다. 사실상 중국의 모든 불교 종파들이 받아들였던 관념론적 세계관 대신에 공산주의자들은 물질 세계 이외에는 어떠한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 세계관을 주장하였다.13)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산당정권 수립 이후 공산주의 사상과 혁명에 종교 가 미칠 영향을 우려한 나머지 사회주의체제 초기에는 종교의 인정에 대 하여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불교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찬 반의 논란이 있어 왔다.14)

그러나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종교에 반대하는 한편 불교가 과거 중국 문화에 다방면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았고, 사회주의화된 현실 에서도 불교가 중국인민들의 행동과 사고, 사상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중국 공산당정부의 지도자들은 무력으로 불교를 말살 할 경우 인민들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직 그 럴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15)하였으나 근본적인 종교에 대한 견해는 변하 지 않았다. 新四軍이 발행했던 「농민과 혁명」과 八路軍의 「新戰士讀 本」등에도 그러한 지적이 보이는데 陳紹寓는 1935년에 대 종교 전술을 언급하는 가운데에서 유교나 불교 등의 오래된 이데올로기가 대중 가운 데에 깊이 스며들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16)고 말하면서 제반 종교를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대중들의 교육,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고 물질세 계와 사회에 대한 좀 더 과학적인 지식이 두루 퍼지면 그때에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자연적으로 줄어들 것이고, 정부가 직접적으로 종교에 대해 아무런 적대행위를 하지 않아도 마침내는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 다. 이러한 마당에서 중국 공산당은 중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13) K.S. 케네쓰 첸 저, 박혜당 옮김, 『중국불교-하』, 민족사, 1994, 467쪽.

14) 牧田諦亮 외 4인 共著, 양은용 역, 『중국불교사 개설』,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4, 209쪽.

15) K.S. 케네쓰 첸 저, 앞의 책, 498쪽.

16) 구보노리타다 지음, 최준식 옮김, 『도교사』, 분도출판사, 1990, 383쪽.

정책을 표방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88조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라 규정하고, 또한 모택동이 1952년 10월 8일에 티베트 에 대해 행한 「공산당은 종교에 대하여 보호책을 취하며 종교를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어떤 종교를 믿거나 또한 다른 종교를 믿는 것도 평등하게 보호를 가하고 그 신앙을 존중한다. 오늘 날 종교에 대해 취하 는 보호정책은 장래도 또한 마찬가지로 행해질 것이다」라는 강화 등에 서 중공에서도 종교를 긍정하고 불교활동이 공인되었다17)는 근거가 되 었다. 실제로 본토지배의 초기에 공산당 정부는 불교에 대해 적대적인 공공연한 행위는 하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예를 들어 1949년의 제1차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에 승려 거찬과 거사 조박초가 불교대표로 참석하였다.

1950년 공산정부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불교승려, 도사, 무당, 점쟁이는 종교인으로 서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의 기생충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지목한 법령이 8월 4일에 발표되었다. 동시에 사원의 주지들은 지주와 같은 부류로 간주되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광대한 사원토지를 경 영하였고, 농민들의 땀으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농부와 승려, 승려와 주 지사이에 계급적 구별을 지으려는 시도가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 나타났 다.

1951년에 토지 개혁이 시작되면서 두 번째 국면이 전개되었다. 일찍이 1947년에 공산주의자들은 사찰과 사원의 재산 소유권을 박탈한다는 원칙 을 결정하였다. 공산당 정부는 사찰 소유의 토지뿐 아니라 묘당의 토지 까지 징집함으로써 그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토지개혁이 일어날 때마다 사찰과 사원을 유지하고 승단을 먹여 살릴 가장 중요한 수입원을 빼앗겼 다.

더 이상 승려들은 경전을 연구하고 참선하는 종교적 삶을 추구할 수 17) 목전체량 외 4인 공저, 앞의 책, 210쪽.

없었다. 따라서 토지개혁의 공식적인 목적은 불교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 었으나, 결과는 적대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젊은 승려는 환속해야 만 했으며, 승단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적 관념들을 마음에서 몰아내기 위한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승려들은 농사를 짓거나 베를 짜고 바느질하는 수공업자 가 되거나, 채식전문 식당을 운영하거나, 차를 재배하거나 교사가 되었 다.18)

또한 중국의 모든 승려와 신도들을 한데 끌어 모아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1953년에 「중국 불교 협회」를 조직하였다. 회칙에 따르면

「애국심을 드러내고 중국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인민정부의 지도 아래 모든 불교신자들을 결속하기 위하여 협회를 창립한다」 하였다. 여 기에 공산당 기관지는 불교협회 회원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평화를 유지 해야 할 뿐 아니라 친구와 적을 구분하고, 인민의 적들의 사상과 행동을 명확하게 인지해야 하며 모든 적색분자와 간첩 및 반혁명분자들을 찾아 내어 뿌리뽑아야 한다는 성명을 작성 배포하였다.

여기에 「월간 현대불학」이라는 협회 기관지를 발간하여 공산중국의 불교에 관한 주된 정보원19)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불교에 관한 근본 교리를 비롯한 연구 결과를 담은 불교 본래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결국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독립되어 중국 대륙을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모든 역량을 동원했고 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확실한 것 은 전통적으로 있어 왔던 불교나 기독교 등과 같은 종교의 종래의 모습 은 완전히 청산되었다20)는 것이다.

2)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도교

원래부터 도교의 신앙을 미신이라고 받아들였던 중국 공산당은 전쟁

18) 위의 책 498-499쪽.

19) 위의 책, 501쪽.

20) 요시오카 요시토요 지음, 최준식 옮김, 『중국의 도교』, 민족사, 1991, 239쪽.

때 실물교육을 실시하였다. 즉 일본군이 공격하여 올 때 그들이 물러갈 것을 신에게 기원을 하였어도 효과가 없었던 사실을 들어, 믿고 있는 신 들이 실재는 있지 않다고 하여 그러한 신앙을 그만두도록 권하였다. 이 리하여 소위 미신박멸정책과 함께 도교도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소유지 해방, 건물의 전용이 종용되고 종교인의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것이 권장되면서 교리의 연구나 수행 포교 등의 종교활동은 실제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부의 방침에 따라서 농사짓는 일로 돌아가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어 환속 하는 도사가 많아졌다.

소유지의 대부분이 해방됨에 따라, 상당히 많았던 백운관21) 주재 도사 들도 대부분 환속하고, 남아 있는 도사들도 도복을 벗고서 농사일을 하 였던 것은 그러한 사정들을 잘 알게 하는 단면들이다.22)

1950년 10월 20일자 홍콩 대공보 지상에 「북경 백운관 도사의 생산종 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전의 도사나 승려는 노동생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매일 전당 에서 독경하거나 法事를 하는 따위의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적인 직업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한마디로 완전히 사회의 기생충이었다. 해방 이후 북경의 寺廟는 옛 사회와 함께 장사지내져서 일변하였다. 어떤 것 은 정부기관에 차용당하고, 어떤 것은 학교나 공장에 이용되고, 또 어떤 것은 국민들의 셋방으로 임대되었다. 승려나 도사들의 인생관도 변하였 다. 기생충적 사고 방식을 반성하고 전업해서 생산업무에 참가하는 사람 도 이었다. 그들은 진작에 자진하여 노동에 종사하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과거에 대사묘의 주지였던 자들은 모두 대지주들이어서 북경 교외 나 근처의 현에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승려나 도사들은 이 것을 농민에게 소작시켜서 인민의 피와 땀의 결정을 쥐어 짜 편하게 앉 21) 백운관 : 도교의 총본산. 과거 전진교의 시방총림이었으며 북경최대의 도관으

로서 여기서 소유하는 토지는 270여頃에 달했다.

22) 구보노리타다 지음, 정순일 옮김, 『도교와 신선의 세계』, 법인문화사, 1993, 226-227쪽.

아서 먹을 따름이었다」.23)

아서 먹을 따름이었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