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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博士學位論文

티무르 朝의 史書, 야즈디 撰

 勝戰記(Ẓafar-nāma)의 譯註

2020年 2月

서울 大學校 大學院 東洋史學科

李 周 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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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朝의 史書, 야즈디 撰

 勝戰記(Ẓafar-nāma)의 譯註

지도교수 김 호 동

이 논문을 문학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19년 11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사학과

이 주 연

이주연의 박사학위논문을 인준함 2020년 1월

위 원 장 (인)

부위원장 (인)

위 원 (인)

위 원 (인)

위 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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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本稿는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서남 아시아, 카프카스 산맥 일대 및 소아시아, 북인도, 중국 서부 등을 정복하 고 대제국을 세웠던 티무르 朝의 始祖 아미르 티무르의 일대기와 그의 수 많은 승전에 관해 기록한 페르시아어 역사서, 『勝戰記』(Ẓafar-nāma)의 解題 및 譯註이다.

아미르 티무르는 14세기 초반에 현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키시(현 샤흐 리 사브즈)에서, 당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차가다이 울루스의 유력 부족인 바룰라스 부 아미르의 아들로 태어나, 25세 무렵에 마와라안 나흐르의 유력 아미르로 등장하였고, 40세가 되던 해에 마와라안나흐르를 통일하였다. 이후 사망할 때 까지 근 35년간 위에서 언급된 드넓은 지역을 점령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고, 중국으로의 원정을 계획하여 현 카자 흐스탄의 도시 오트라르까지 진격하였다가 1405년,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생전에 세계 각지에서 소집한 지식인들을 곁에 두었는데, 그 중에 일부에게 자신의 勝戰 및 功績에 관한 역사서를 작성하도록 명하였다. 또 한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후손들의 후원 하에 여러 역사서가 완성되었 다. 본고에서 번역한 『勝戰記』는 이러한 티무르와 그 후손들의 노력과 후원을 통해 완성된 티무르 조의 여러 역사서 중 하나이다. 이 사서는 1424년, 이란 파르스 지방의 도시 시라즈에서 샤라프 알리 앗 딘 야즈디라 는 史家가 티무르의 손자인 이브라힘 술탄의 명을 받아 완성하였는데, 이 사서는 당시에 이교도 취급을 받았던 투르크 유목 군주이자 황금씨족 출 신도 아니었던 티무르의 군주적 정통성을 구축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 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체 등으로 주목을 받아 수많은 필사 본을 남기며 페르시아-이슬람권을 대표하는 사서 중에 하나로 자리매김하 였다.

이 사서는 티무르를 ‘사힙키란’이라 칭하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 문화

에서 기원하였으며, 목성과 토성의 合一이 발생하였을 때에 태어나 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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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로 세계를 정복하도록 예정된 인물에게 붙여진 칭호이다. 이 개념 안 에는 이슬람 이전 페르시아의 문화 및 군주상 및 신비주의 과학, 즉 천문 학 및 점성술과 수비학, 메시아사상, 수피즘 교리 및 이슬람의 성자숭배 등 다양한 분야의 사상·문화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어, 페르시아-이슬람 문 화권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군주적 정통성 관념이라 볼 수 있다. 이 관념은 티무르 조 후속 국가의 여러 군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티무르는 후속 국가에서 군주적 정통성을 구축할 때 典範이자 기준이 되었다.

『勝戰記』는 신과 예언자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도입부, 티무르의 탄생 및 그와 관련된 神聖한 天球상의 징조, 사서의 特長點, 티무르가 14세기 후반 마와라안나흐르에 등장하기 전의 상황 등을 간략히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티무르의 勝戰에 관한 기사를 시간 순서대 로 나열하였는데, 본고에서는 그 내용을 세 개의 章으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 章은 티무르가 마와라안나흐르의 諸 勢力들과 각축을 벌이면서 유력 아미르로 성장하였고, 결국 대 아미르였던 카라우나스 부의 아미르 후세인 을 물리치고 마와라안나흐르를 통일한 다음, 주변 지역인 호라즘과 모굴리 스탄 초원, 시스탄, 후라산과 마잔다란 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던 1386년 까지를 포괄한다. 두 번째 章은 티무르가 주변 지역의 정복을 완료한 후, 보다 먼 지역으로 1년 이상의 원정을 나섰던 시기에 해당하며, 그 원정 대 상은 주로 이란 서북부 및 카프카스 山地, 이라크와 시리아, 소아시아에 위치한 諸 勢力이었다. 세 번째 章은 티무르의 마지막 원정이자 최장기 원 정인 이란 7년 원정에 해당하는데, 이전 단계에서 이미 이슬람권의 대부분 을 정복하였던 티무르가 이 단계에서는 서쪽의 유럽, 동쪽의 중국과 경계 를 마주하며, 세계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勝戰記』는 전술하였듯이 아름다운 문체 및 티무르의 군주적 정통성

구축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이유로, 티무르 조 이후의 페르시아-이슬람권

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수많은 필사본이 제작되었는데, 현존하는 사본만

200여 개이다. 본고에서는 필자 생전에 제작된 오래된 몇몇 사본들 및 그

사본을 이용하여 제작된 출판본들을 이용하여 역주하였다. 현재까지 출판

본은 인도, 우즈베키스탄, 이란에서 네 차례 출판되었다. 이처럼 사본과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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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타 언어로의 번역본은 많지 않은 편이며, 특히 사서를 구성하는 상당수의 詩를 함께 번역한 완역본은 현재까지 이슬람권 이외의 언어로는 없는 상태이다. 본고에서는 『勝戰記』의 全文 완역을 목 표로 하였으며, 이를 통해 시와 산문이 결합된 페르시아어 역사서의 묘미 또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였다.

주요어 : 아미르 티무르, 사힙키란, 역사서, 이슬람-페르시아 문화, 투 르크, 야즈디

학 번 : 2013-30032

(7)

목 차

해 제

제 1 절 티무르의 정복 전쟁과 정통성 구축 ···1

1. 아미르 티무르 쿠레겐의 정복 사업 ···1

2. 역사서술과 ‘사힙키란’ 정통성 ···11

제 2 절 야즈디가 그린 ‘사힙키란’ 티무르 ···15

1. 야즈디의 생애 ···15

2.『勝戰記』속 정통성의 근거 ···23

제 3절『勝戰記』의 사료적 가치 ···37

1. 각종 분야의 정보 수록 ···38

2. 편찬과정의 정례화 및 자료 선별 ···46

제 4절 사본, 번역 및 연구 ···55

1. 본 번역에 이용된 사본 소개 ···55

2. 기존 번역 및 연구 ···61

본 문 번 역 도입 ···73

Ⅰ. 티무르의 초기 활동 ···98

ⅰ. 마와라안나흐르 통일 (∼1370년) ···98

ⅱ. 단기 원정의 시대 (1370∼1386년) ··· 256

Ⅱ. 장기 원정의 시대 (1386∼1399년) ···387

Ⅲ. 세계 정복의 시대 (1399∼1405년) ···776

티무르의 죽음과 그 후 ···1037

參考文獻 ···1084

상세 목차 ···1122

Abstract ···1138

(8)

표 목 차

[표 1] 현존 사본 현황 ···1098 [표 2] 연대표 ···1118

그 림 목 차

[그림 1] 『勝戰記』관련 지명소개 ··· 1136

[그림 2] 『勝戰記』관련 계보도 ··· 1137

(9)

해 제

제 1 절 티무르의 정복 전쟁과 정통성 구축

1. 아미르 티무르 쿠레겐의 정복 사업

1402년 어느 날, 프랑스의 샤를 6세와 영국의 헨리 4세는 아나톨리아의 앙카라에서 오스만의 바야지드 1세(Bayezid I)를 포로로 잡았던 유목 정복자, 티무르의 서신을 받았 다. 바야지드 1세는 당시로부터 6년 전인 1396년에 다뉴브 강변의 니코폴리스 (Nicopolis)에서 유럽 연합군을 쳐부수며 유럽에 대한 동쪽 發 최대의 적으로 부상하였 고, 그 이후 유럽이 기독교의 聖地로 여겼던 레반트 및 소아시아 동-북부에 위치한 비 잔틴 및 유럽인들의 상업 거점을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발칸반도에 대한 끊임없는 공 세를 이어갔다.1) 그런데 그보다 더 동쪽에서 홀연히 새로운 유목 세력이 등장하여, 이 토록 강력하였던 바야지드를 단번에 포로로 잡은 것이다.

이 서신은 수사적 표현이 많지 않고 간결하게 기록된 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통 해 당시의 유럽과 오스만, 그리고 티무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천수를 누리실 대 아미르, 티무르 쿠레겐(께서)

왕 루이 드 프랑스, 이 자신의 벗에 대한 수없이 많은 축복과 애정을 수많 은 값진 세계와 더불어 받아들이시길!

기도를 소리 높여 先唱한 후, 이 大아미르의 훌륭한 판단을 통해 (다음과 1) 유럽에서 그들의 성지로 여겨지는 레반트를 탈환하거나 동로마의 영역에 안정을 부여하고 동쪽

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을 통상적으로 ‘십자군’이라 부른다. 첫 번째 십자 군은 1095년∼1099년 사이에 교황 우르반 2세의 명에 따라 비잔틴을 도와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투르크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한 십자군을 일컬으며, 1291년 맘룩이 십자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크레(Acre)를 함락하면서 십자군 원정은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 이후에도 교 황은 여전히 십자군을 조직하여 성지를 탈환하거나 동로마를 돕고자 하였는데, 14세기 이후로 는 유럽 각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교황의 권위가 악화되면서, 거대한 십자군이 조직되지는 못하고 제한된 목표를 위한 작은 규모의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다. 티무르와 오스만이 아나톨 리아 및 레반트 지역에 등장하기 전, 14세기에 십자군의 보루 혹은 유럽 세력의 근거지였던 곳 은 키프로스의 라틴계 왕조, 베니스와 제노아의 여러 식민지들, 에게 해의 여러 섬에 산발적으 로 존재하였던 베니스 및 제노아 출신 자치 세력, 그리고 로도스(Rhodes) 섬의 구호기사단 (Knights Hospitaller)등이 있다(Peter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1221-1410, Edinburgh Gate: Pearson education Limited, 2005, p.237).

(10)

같은 상황이) 나타났다. 즉, 학자인 벗 프란시스(FRNSKS)가 이쪽에 도착하 였고, 왕들의 서신을 가지고 왔으며 (그들이) 대 아미르의 훌륭한 명성과 위 대함과 영광을 수용하였으니, (우리는) 매우 기뻐하였다. 또한 (대 아미르께 서) 말씀하시길, (우리는) 수많은 군대와 함께 전능하신 신의 가호로 진군하 였으며 우리의 적들을 무력화하고 제압하였다. 그 후에 벗인 술타니야의 장 마르히시야(JVĀN MĀRḤSĪĀ?)를 봉사를 위해 파견하였으며 그는 삼가 글 을 썼다 - 어떤 일이 발생하든, 오늘날 우리는 대 아미르로부터 보살핌을 받 고 있고 (그분에게서) 계속 축복받은 서신이 파견되고 있으며, 대 아미르의 건강을 기원하며 생각의 안정을 얻는다. 그리하여 당신의 사신들을 이쪽으로 파견하면 이쪽에서 (우리가) 그들을 환대하고 반길 것이며, 또한 우리의 상인 을 그쪽으로 보내면 (너희가) 그들을 또한 환대해야 하며 그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무력이나 강압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 세계는 상인들에게 많은 번영 을 주시니 어찌 우리가 고집을 피우겠는가. 행운이 있기를! 끝없는 평화와 안녕에 대한 바람으로, 히즈라력 805년 무하람(Muḥarram) 월 초에 기록.2)

이 서신의 내용을 통해, 유럽과 티무르 사이에 일찍이 사신 왕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기 서신은 앙카라 전투 이후에 작성되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 이전의 사신 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으로의 7년 원정을 떠나기 전인 1398-9년경, 티 무르는 자신의 영내에 있던 이란 술타니야(Sulṭāniyya)3)의 대주교 및 수사들을 유럽으 로 파견하였으며, 유럽 군주들은 이 수사들을 통해 티무르에게 답신과 더불어 오스만 무라드 1세(Murād 1)의 아들을 파견하였는데, 1400년에 그들이 티무르의 어전에 도달하 였음은 티무르 조의 여러 사서에서 확인된다.4) 상기 서신은 이와 같은 왕래가 한 차례 2) 현재 이 서신은 프랑스의 국립 문서고(Les Archives nationales)의 AE III (외국 문서 박물관, Musée des documents étrangers) 204번으로 소장되어 있다. 해당 박물관에서 스캔본을 제공하

여 이를 바탕으로 번역하였다(온라인 출처 :

http://www2.culture.gouv.fr/Wave/image/archim/0008 /dafanch06_n303477n00001_2.jp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etter_of_Tamerlane_

to_Charles_VI_1402.jpg). 한편 Silvestre de Sacy의 1822년 논문에는 페르시아어 원문과 술타니 야의 장이 작성한 라틴어 번역문, 그리고 미란샤의 서신에 대한 라틴어 번역문까지 함께 수록 되어 있다(Antoine-Isaac Silvestre de Sacy. "Méemoire sur une correspondance inéedite de Tamerlan avec Charles VI," Histoire et mémoires de l'Institut royal de France 6, 1822. pp.

470-522).

3) 이란 북서부의 도시, 테헤란에서 북서쪽으로 약 2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일 칸국 울제이 투 칸의 聖廟인 거대한 돔이 세워져 있으며, 일 칸국-티무르 조 초기까지 군주가 머무는 주요 동영지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일 칸국 시기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주교가 파견되었는데, 이는 15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4) YZN/Ṣādiq, p.1025. 한편 본 논문에서는 번역 대상인 『勝戰記』 및 주요 사료를 각주에 표기할 때 축약하여 표기하였다. 주요 사료의 축약표기에 관해서는 본 논문의 91∼93페이지를 참고하 시오.

(11)

이루어진 후, 같은 수사들을 재차 파견하여 보낸 두 번째 왕래 때의 것이다.

이 서신은 앙카라 전투가 완료되었던 804AH5) 둘 히자 월 10일(1402년 7월 11일)로 부터 약 20일 정도 경과한 805AH 무하람 월 첫날에 작성되었다. 즉, 서신 속에서 티무 르가 제압하였다는 적은 바로 앙카라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유럽의 적, 오스만의 바야 지드 1세였다. 다만 원문인 페르시아어 서신에서는 적을 제압했다는 대목에 다소 관용 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그것이 바야지드 1세를 특정하고 있는지 불분명하며, 사실상 특정 대상을 지칭한다기보다는 티무르의 뛰어난 전공을 과시하기 위한 상투적 표현에 가깝다. 반면에 이 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한 술타니야의 대주교 장(Jean)는 바야지드 1 세에 대한 티무르와 유럽의 공통적인 적개심을 강조하는 부분을 첨가하였다. 이는 유럽 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신이, 유럽에서 보다 더 큰 환대를 받고자 하는 개인적인 의 도를 반영하였기 때문이나,6) 이러한 사신의 개인적인 첨삭 및 유럽 도착 이후의 여러 저술활동 등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티무르 본인이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반응이 등장하 게 된다.7)

5) 본 논문의 연대 표기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티무르조 사서는 이슬람권의 대부분 의 사서가 그렇듯 히즈라력을 연대표기의 기본 달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건은 히즈라력 日時로 명기되었다. 본문에서는 이를 변환하여 서력과 병기할 것이다. 이 때 표기법은, 연도 뒤에 ‘AH’가 있으면 히즈라력이고, ‘...년’이 있으면 서력이다. 한편 1925년 이란 팔레비 왕 조에서 도입하여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서 현재까지 이용하고 있는 ‘Solar Hijri(Hijrī-yi Shamsī)'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히즈라 사건이 발생한 해(서력 622년)를 紀元으로 하는 페르시 아 태양력의 일종인데, 이 달력으로 연도를 표기할 때에는 ‘Sh.’를 뒤에 붙였다. 이 달력은 주로 현대 이란에서 출판된 도서의 서지사항을 기록할 때 사용하였다. 한편, 동일한 페르시아 태양력 계보에 있으며, 셀주크 조 말릭 샤의 재위시기인 1079년 3월 15일(춘분)을 紀元으로 하는 잘랄 리력은 ‘잘랄리력으로’라 명기하였다. 이 잘랄리력은 셀주크 조 말릭샤에 의해 제정되었는데, 그 이전의 페르시아 태양력보다 치윤법이 정교하게 설정되어있어 이후의 페르시아 태양력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6) Peter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1221-1410, p.243.

7) 그는 오늘날 ‘술타니야의 장(Jean of Sultaniyya)’으로 알려진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사로, 1388년 에 나히체반(Naxçıvan)에서 이란의 북서부에 위치한 술타니야(Sulṭāniyya)의 대주교로 임명되었 으며, 티무르가 유럽에 보낸 두 차례의 사신단에 모두 투입되었다. 또한 두 번째로 유럽으로 파 견되어 1403년 파리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티무르에 관한 두 개의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 하나는 1403년에 기록한 티무르에 관한 짧은 언급인데, 그 중에 일부가 라틴어로 번역되어 1405-29년 사이에 작성된 Chronographia regum Francorum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보다 다소 긴 기록은 1404년에 작성된 Libellus de notitia orbis인데, 이는 1937년 그라츠 대학교의 사서 안톤 케른(Anton Kern)에 의해 발견되었다(Peter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1221-1410, pp.242-3). 첫 번째 기록은 Henri Moranvillé, “Mémoire sur Tamerlan et sa cour par un dominicain, en 1403,” Bibliothèque de l'école des chartes 55. 1894, pp.441-464이란 논 문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수록되어 있으며, 두 번째는 안톤 케른이 그 일부를 출간하였다(John of Sultaniyya, “Der “Libellus de Notitia Orbis," Archivum Fratrum Praedicatorum 8, ed.

Anton Kern, Graz: Istituto storico domenicano dí S. Sabina 1938).

두 저술 중에 1403년에 작성된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술타니아의 장은 티무르의 등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럽의 동부에는 키타이의 왕과 타타르의 왕이 있는데, 티무르는 크리스트 교도이자 타타르의 적이었던 키타이의 왕에게서 사람들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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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원문인 상기 서신을 보면 티무르는 샤를 6세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고, 다만 양측 간의 자유로운 무역을 요청하고 있다. 한편 헨리 4세가 보낸 답신을 볼 때 유럽 측에서도 티무르의 이와 같은 요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8) 그러나 이는 두 서 신의 표면적 내용일 뿐이며, 사실 티무르가 단순히 상인들의 자유로운 왕래만을 위해 이와 같은 서신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티무르는 오스만의 침공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샤를 6세에게 자신의 戰功을 자랑하고 자유로운 상인 왕래를 주장하고 있 는데다, 그가 서신을 보낸 날짜는 오스만의 바야지드를 사로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 점이다. 이와 같은 무력에 대한 과시는, 티무르가 각지의 정복 과정에서 종종 이용하였 던 ‘위협을 통한 무혈 승리’ 방식과도 멀지 않은 전략이었다. 한편 유럽에서도 티무르의 서신 및 그의 승전 소식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오스만 바야 지드보다 더욱 강력하면서도 미지에 싸여있는 유목세력이 유럽의 코앞에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중동의 여러 이슬람 세력과 맞서고 있다가 갑자기 몽골제국의 파죽지세를 접하게 된 100여 년 전 상황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앙카라 전투 가 발생한 지 4개월 만에 티무르의 군대는 소아시아의 서쪽에 자리하였던 유럽의 식민 도시 중 하나인 이즈미르(İzmir)9)를 격파하고, 그 성채에 자리하였던 십자군을 돕기 위 해 왔던 유럽의 선박을 향해, 碧眼을 지닌 유럽인의 머리를 포환삼아 날려 보냄으로써 유럽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기도 하였다.10) 이러한 티무르의 행적은 유럽의 여러 왕 들 사이에 그가 기독교 세계에 우호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 역시 몽골제국과 유럽의 접촉이 발생하였던 13세기의 상황과 닮아있었다.11) 그가 스스로를 타타르의 영역이었던 사마르칸트를 차지한 후 키타이의 사람들을 되돌려주었다고 한다(Henri Moranvillé, “Mémoire sur Tamerlan et sa cour par un dominicain, en 1403,” pp.441-3). 이는 당시에 유럽인들이 가진 유럽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왕 이 크리스트 교도라는 발상은 중세 유럽의 오랜 전설이었던 프레스터 존 전설을 반영하고 있으 며, ‘타타르의 왕’이 키타이의 변경부터 유럽의 변경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 다는 점은, 몽골제국에 관한 정보가 그대로 답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15세기 초, 지 리적 개념이었던 ‘키타이’가 가리키는 대상이었던 북중국에는 이미 북원을 몰아내고 건국한 明 이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티무르가 키타이의 왕에게서 사람들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았다가 그들을 돌려주었다는 기록 역시 성립하기 어려웠다. 즉, ‘술타니아의 장’의 기록은 당대 유럽 以 東지방의 실제 상황보다는 유럽인들의 당대 인식을 반영하였던 것으로, 이는 유럽이 여전히 그 들 뿌리 깊은 전설 및 몽골제국 당시의 충격을 통해 받아들인 단편적 지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이 주교는 이러한 당대의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 더 나아가 티무르 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인식을 유럽 내에 심고자 하였던 것이다.

8) Henry Ellis, Original Letters, Illustrative of English History; Including Numerous Royal Letter : from Autographs in the British Museum 3-1, London: R. Bentley, 1846. pp.54-8.

9) 유럽에서는 스미르나(Smyrna)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 터키 이즈미르 주의 주도이며 에게 해 연 안에 위치해 있다. 이스탄불에서 서남쪽으로 약 3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0) YZN/Ṣādiq, p.1174.

11) 일단 유럽의 일부 왕들은 티무르가 기독교 세계에 적대적이라 주장하였다. 한 예로 비잔틴의 당시 황제였던 마뉴엘 팔레올로고스는 앙카라 전투로부터 수개월 지난 후인 1403년 초에 해외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하면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티무르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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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駙馬를 의미하는 ‘쿠레겐’이라 칭한 것도, 유럽인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강력 한 몽골제국의 기억을 이용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사실 티무르가 15세기 초엽에 이처럼 유럽 諸 군주들의 공포의 대상으로 급부상하 게 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나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니었다. 이는 그가 1370년에 마와 라안나흐르(Māvarā' al-Nahr)12)를 통일한 이후, 30년에 걸친 세력 확장을 통해 이슬람 권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티무르는 1336년에 현 우즈베키스탄 중 부의 도시 샤흐리 사브즈에서 몽골제국 차가타이 울루스의 유력 부족인 바룰라스 부의 일원으로 태어나, 1370년에 차가타이 울루스의 쇠퇴 이후 여러 차가타이 아미르들이 할 거 중이었던 마와라안나흐르를 통일하였다. 이후 마와라안나흐르와 가까운 모굴리스탄 (Mughulistan)13) 초원 및 타림분지에 자리하였던 모굴 칸국14)을 대상으로 다섯 차례 2년 후에는 당대의 교황인 이노센트 7세에게 서신을 보내어, 티무르의 목적은 단지 콘스탄티노 플과 그 주변을 장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크리스트 세계를 전복시키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은 비잔틴 황제에게, 양 시칠리아 왕국과 헝가리, 발칸과 루마니아에서 티 무르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모집할 권리를 주었다(Peter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1221-1410, p.239). 반면에 다른 이들은 바야지드보다는 티무르에 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는 티무르가 이전의 몇몇 전쟁에서 크리스트교도들을 학살하지 않고 살려두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 중에는 카스티야(Castilla)의 왕, 엔리케 3세 (Enrique III)가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티무르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앙카라 전투 당시에 카스티 야의 사신인 Pelayo de Sotomayor와 Fernando de Palazuelos가 티무르의 어전에 있었다고 한 다. 그들은 귀국 길에 핫지 무함마드 알 카디(Ḥāji Muḥammad al-Qāẓī)라는 티무르의 사신을 데리고 귀국하였고, 그 다음에 카스티야 측에서 보낸 사신이 바로 클라비조(Ruy Gonzalez de Clavijo), 즉 사마르칸드까지 티무르 조의 영토를 횡단하고 여행기를 남긴 인물이다(Laurence Lockhart, "European Contacts with Persia, 1350-1736,"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6, ed. Peter Jackson, Lawrence Lockhar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p.375).

그런데 후자의 인식을 유럽 내에서 확대·재생산하였던 것이 바로 上記 서신을 유럽으로 전달하 였던 ‘장 마르히시아’였다.

12) 아랍어로 ‘강 너머의 장소’라는 뜻으로, 이 때의 강은 중앙아시아 아랄해로 흘러드는 아무다리 야(異稱 옥서스, 제이훈) 강이다. 페르시아-이슬람권에서는 예부터 이 강을 기준으로 이란과 투 란을 구분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옥서스 강 너머라는 뜻)으로도 부른다.

13)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동북부, 중국 서부와 키르기즈스탄을 가로지르는 천산 북부에 위치한 초원 이다. 티무르 조 시기에 이곳에는 차가타이 울루스의 동부 세력에 의해 세워진 모굴 칸국이 있 었다.

14) 차가타이 울루스의 동부에서 차가타이 계 후예들에 의해 세워진 국가. 이 나라의 사서인 무함 마드 하이다르 두글라트의 『라시드 史』(Tārīkh-i Rashīdī)에 의하면, 1347년에 두아 칸의 손 자인 투글룩 티무르 칸에 의해 모굴리스탄 초원과 악수(현 중국 신강성 阿克苏)를 거점으로 세 워졌으며, 투글룩 티무르 칸은 마와라안나흐르를 1360년과 61년에 2차례에 걸쳐 침공하기도 하 였다. 본문의 일야스 호자 칸은 투글룩 티무르 칸이 마와라안나흐르로 파견한 그의 아들이다.

이후 일야스 호자 칸이 사망하고 국가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티무르가 이곳으로 6차례 친정 및 수차례 군대를 파견하여 간접적 세력권 하에 두었고, 800AH에 투글룩 티무르 칸의 아들, 히 즈르 호자 칸의 딸인 투켈 하눔은 티무르의 부인이 되었다. 이후 타림분지 및 천산 북부 초원 을 아우르는 유목국가로 존속하였다가, 티무르 조가 멸망할 무렵 우즈벡 카자흐 세력 등에 쫓 겨 타림분지로 영역이 축소되었고, 카쉬가르 및 야르칸드 등지를 거점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17 세기에는 칭기스 칸의 후예인 칸을 대신하여 낙시반디 수피교단의 수피들이 군주가 되었으며, 1679년 청의 침공으로 인해 멸망하였다. 본문에는 이 국가를 자타(Jata)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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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조치 울루스의 남쪽 기지이자 콩기라트(Qonggirat, 본문에는 Ghūnkirāt)15) 부 수 피 가문이 차지하고 있었던 호라즘(Khwārazm)16)을 향해 네 차례 원정, 일 칸국과 차가 타이 울루스의 잔존 세력들 및 토착 타직인 왕조와 종교집단까지 뒤섞여 있었던 후라 산(khurāsān)17) 및 마잔다란(Māzandarān)18)을 향해 세 차례 원정을 떠났다. 이처럼 근 거리를 목표로 한 단기 원정이 끝난 후 뒤이어 장기 원정이 이어졌는데, 이 장기 원정 은 대체로 티무르의 세력 근거지였던 마와라안나흐르를 떠나 3년, 5년, 혹은 7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및 소아시아 일대의 옛 훌레구 울루스 근거지에 머무르면서 동서남북의 여러 세력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북인도나 킵착 초원 (Dasht-i Kibchāq) 및 이르티시 강 유역으로의 원정도 있었다. 이 장기 원정의 마지막 이 바로 전술한 앙카라 전투를 포함한 이란 7년 원정으로, 이 시기에 티무르는 오스만 뿐 아니라,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 할거 중이던 잘라이르 조 (Jalāyr)의 술탄 아흐마드(Sulṭān Aḥmad Shaykh Uways)와 카라 코윤루의 카라 유수프 (Qarā Yūsuf), 조지아(Gurjistān)의 기오르기(Giorgīn)19), 시리아(Shām)와 이집트(Miṣr) 에 위치한 맘룩 조의 바르쿡(Malik al-Zāhir Barqūq)20)을 모두 복속시켰다. 이 지역들 은 그간 티무르가 차지하였던 타 지역에 비해 유럽과 매우 가까웠으므로, 이들에 대한 티무르의 연전연승은 유럽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이란 7년 원정 후, 티무르는 곧바로 중국 원정을 계획하였다. 전술하였듯이 티무르 는 1370년 이후 사방으로 단기원정을 행할 때에 다섯 차례 親征 및 그 이상의 군대 파

15) 본래 몽골리아에서는 북부 흥안령 방향에서 유목하고 있던, 몽골 부족들 중에 두를루킨(칭기스 칸의 출신부족인 키야트와의 관련성이 다소 낮은 부족 집단)에 속한 부족이었다(르네 그루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驛, 서울: 사계절, 1998, p.287). 칭기스 칸의 아내 부르테 우진 이후 칭기스 칸 가문과 활발한 통혼이 이루어졌으며, 이 부족 출신의 카툰 및 부마가 많다(라시드 앗 딘, 『부족지』, 김호동 譯, 파주: 사계절, 2002, p.267-9).

16) 현 우즈베키스탄 서부, 즉 아무다리야 강 하류 근방을 일컫는 지역명이다. 예부터 페르시아 문 화권이었으나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오아시스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몽골제국 시기에 조 치 울루스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아미르들이 이곳에 파견되어 있어, 차가타이 울루스 와 조치 울루스의 갈등의 쟁점이 되었다. 티무르 역시 이러한 인식을 답습하여, 조치 울루스와 여전히 깊은 관계를 지닌 이곳의 지배자 수피 가문(콩기라트 부)을 끊임없이 공격하며 차가타 이 울루스의 영역임을 주장하였다.

17) 현 이란의 동북부를 지칭하는 지역명. 현재에도 후라산에라자비, 북 후라산 주, 남 후라산 주 등 세 개의 州로 구분되어 있다.

18) 이란의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엘부르즈 산맥 북부∼카스피해 사이의 영역. 이란의 대부분 지역보다 습하고 농경이 활발한 곳이다. 본래 이 일대의 이름은 ‘타바리스탄'이었는데, 점차 동 쪽을 마잔다란, 서쪽을 길란으로 나누기 시작하였고, 시대가 갈수록 영역이 세분화되었다.

19) 조지아의 하킴이다. 조지아의 왕조 ‘Bagrationi’는 중세부터 19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티무르 시기의 조지아 군주는 기오르기 7세이며, 본문에서 그를 ‘기오르긴’이라 부르는 것은 그 이유 때 문이다.

20) 1382년부터 1517년 사이에 이집트를 통치하였던 부르지(Burji) 맘룩조의 첫 번째 군주이다. 코 카서스 출신으로 노예가 되어 이전 맘룩조인 바흐리(Bahri) 맘룩조의 아미르인 얄부가 알 우마 리(Yalbugha al-Umari)의 가문에 팔려왔다가 세력을 얻어 군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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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을 통해 쉴 틈 없이 마와라안나흐르 以東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때에 동쪽에 위치하 였던 티무르의 적은 차가타이 울루스의 동부에 자리하였던 여러 차가타이 아미르들, 그 리고 타림분지의 오아시스를 기반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가 베쉬발릭(Beshbaliq, 別失 八里)21) 및 카라호자(Qarākhwāja)22)에 자리하게 된 차가타이 울루스의 계승국, 모굴 칸 국이었다. 티무르는 차가타이 아미르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이르티시 강 너머까지 진 격하였는데 이곳은 당시에 몽골리아 초원 서부에 자리하며 北元의 계승전쟁에 간여 중 이었던 오이라트(Oyirat)23)의 근거지와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결국 오이라트에서 탈출 한 北元 칸의 후보 중 한 사람이 티무르에게 의탁하여 후일을 도모하게 되면서,24) 티무 르는 향후 몽골리아 본토의 칸位 계승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25) 한편 모굴칸국과는 보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모굴 칸국의 3대 칸인 히즈르 호자의 아들을 質子로 삼 고 딸은 아내로 삼아 그들의 완전한 복속을 얻어내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모굴 칸국 과 경계를 마주하였던 사릭 위구르(撒里畏兀兒, Sārīgh Uyghūr)의 明 歸附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티무르는 14세기 말, 명의 洪武帝와 직접적으로 영 향력 싸움을 벌이게 된다.

홍무 27년(1394년) 『明實錄』에는 티무르가 보낸 것으로 알려진 서신에 관한 기록 이 남아있다.

사마르칸트 駙馬 티무르가 수장 迭力必失을 파견하여 表를 바치고 來朝하 며, 말 200필을 조공하였다. 表에서 말하기를, 大明 황제께서 하늘의 밝은 운 명을 받으시고, 四海를 통일하시어, 두 개의 덕을 널리 반포하시며 (중략) 오 늘날 또한 특히 먼 나라에 은혜를 베푸시어, 啇賈之人으로서 중국에 온 모든 이들로 하여금 都邑城池를 보게 하시니, 그 부귀함과 웅장함은, 마치 昏暗之 中을 벗어나 홀연히 밝은 세상을 보게 된 것과 같아, 다행스러움이 이와 같

21) 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창지 후이족 자치주의 지무싸얼 현(吉木萨尔) 북쪽에 위치한 옛 위구르의 수도이자 예부터 중국의 서역 전진기지(北庭)였다.

22) 투르판에서 동쪽으로 50km에 위치한, 옛 高昌城을 의미한다.

23) 바이칼 호 서부, 몽골리아 서북부 산지에 거주하였던 몽골계 부족으로, 칭기스 칸 가문과 많은 통혼관계를 가졌다. 원이 몽골리아 초원으로 돌아갔던 14세기 후반에는 자신이 내세운 칸 후보 를 세우기 위해 동몽골 할하 세력과 끊임없이 전투를 했으며, 15세기 상반기에는 에센타이시가 등장하여 허수아비 칸 대신 스스로 칸에 올랐다. 이 에센타이시와 그의 후손들은 서쪽으로 모 굴 칸국 및 티무르 조를 압박하기도 하였으며 훗날 최후의 유목제국인 준가르의 전신이 된다.

본문에서는 이들을 칼막(Qalmāq)이라 부른다. 한편 오이라트 부 출신 수령은 본문의 모술 및 이라키-아랍 북부에서도 등장한다. 이들은 일 칸국의 잔존 세력으로, 바그다드를 차지하였던 잘 라이르 부와 대립 중이었는데, 티무르가 이들 모두를 소탕하거나 복속시키게 된다.

24) YZN/Ṣādiq, p.879.

25) 그가 미완으로 끝난 티무르의 중국 원정을 통해 사마르칸트에서 중국 변경으로 되돌아와, 칸이 되었다는 기록은 明實錄에 등장한다(『太宗文皇帝實錄』(台北 : 中央研究院歷史語言研究所, 1962) 卷 75, p.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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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또한 칙서를 받들어 위무하고 위로하며, 站譯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 게 하며 도로가 막힘이 없으니, 遠國의 사람으로서 그 도움에 감동하여 성심 을 삼가 받들며, 세계를 비추는 잔(照世之杯)은, 臣의 마음을 넓히고 밝힙니 다. (후략)26)

홍무 27년 9월 9일자 상기 기록에 따르면 티무르는 유럽에 보낸 서신의 내용과 유 사하게, 양국 간의 상인 왕래를 요청하였다. 다만 명실록의 기록 속 티무르의 사신은 전형적인 조공사신이며, 그가 보낸 서신은 奉表라는 단어로 서술되었다. 과연 이처럼 공 손한 내용이 티무르의 실제 의도였는지 의문스럽기는 하나, 본문 중에 ‘세계를 비추는 잔’이라는 단어는 Jām-i jam, 즉 이것을 응시함으로서 세계를 볼 수 있다는 페르시아의 전설적 영웅, 잠시드(Jamshīd)의 잔을 떠올리게 한다. 明代의 중국인들도 이 개념이 사 마르칸드의 티무르에 의해 알려졌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며,27) 특히 明代 이전에는 이와 같은 개념을 중국의 기록 속에서 찾아볼 수 없으므로, 上記 기사가 티무르의 서신을 완 전히 그대로 번역한 것은 아니더라도 티무르 서신의 원형이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준다.

위의 서신이 홍무제에게 전달되었던 1394년 당시, 티무르는 자신의 모든 오르두와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소아시아와 카프카스 산맥 등지에서 쿠르드와 조지아, 투르크 멘 등 그곳의 토착 세력들과 전투를 벌였고, 이듬해인 1395년에는 조치 울루스 툭타미 시의 거점인 볼가 강 유역의 사라이 및 그에 예속되어 있었던 러시아 일대를 침공하였 다. 이 시점에는 동방 경략의 전초기지, 안디잔에 배치하였던 아들 우마르 셰이흐까지 서쪽으로 불러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취약한 동쪽 변방을 지키기 위해 중국과의 평화 관계를 맺어두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1397년부터 사마르칸트의 사신에 관한 기 록을 명실록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395년과 1397년에 홍무제가 파견한 중국 사신, 傅安과 陈德文은 티무르에게 귀환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티무르 조 전역을 떠돌았다고 한다.28)

26)『太祖高皇帝實錄』卷 234, p.3420.

27) 실제로 중국에서 ‘照世之杯’라는 개념은 明代 이후로 등장하는데, 16-7세기 명대의 저술가인 沉 德符는 자신의 저서『万历野获编』에서 설명하기를, 이것이 사마르칸트에서 생산된 신비의 잔 으로, 세상사를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沉德符,『萬曆野獲編』,「補遺」4). 또한 朱国祯는 『涌 幢小品』에서, 사마르칸트가 서쪽 변경에 있고 그 국가에 ‘세상을 밝히는 잔’이 있어, 그것을 조 망함으로서 세계의 사건들을 알 수 있다고 서술하기도 하였다(朱國禎,『湧幢小品』卷 1, "撒馬 兒罕在西邊,其國有照世杯,光明洞達,照之可知世事。洪武二十七年始入貢").

28) 張文德, 『明與帖木兒王朝關係史硏究』, 北京 : 中華書局, 2006, p.35; 『明史』 322卷, 「列傳 220卷, 西域 4, 撒馬兒罕」“五年六月,安等還。初,安至其國被留,朝貢亦絕。尋令人導安遍曆諸 國數萬里,以誇其國廣大。至是帖木兒死,其孫哈裏嗣,乃遣使臣虎歹達等送安還,貢方物.”; 한편 두 사신 중에 한 사람이었을 중국사신의 도래에 관해서는 야즈디의 『勝戰記』에 기록되어 있 으나, 해당 기록에는 그를 억류하였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이 알현한 후, 티무르는 모굴리스탄과의 변경, 현재 타라즈 부근의 아시파라에 건축물과 농경을 확충하는 지시를 내렸 다(YZN/Ṣādiq, p.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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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가 갑자기 이처럼 태도를 바꾼 이유에 대해 현재까지 명확한 정설은 없지만, 1388년 명의 북원 정벌 이후 回回人들에 대해 홍무제가 취한 일련의 조치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를 들면 홍무제는 1392년 2월에는 互市를 방문한 回回와 西 蕃인들 중에 오랫동안 西凉에서 거주하며 本地로 돌아가지 않는 이들에게는, 揚州로 移 住할 것인지 아니면 사마르칸드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제하였고,29) 같은 해 12 월에는 回回軍民 중에 서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사마르칸트로 귀환시켰는데 그 수가 1236인에 달했다고 한다.30) 비슷한 조치로 北元 원정 과정에서 明軍의 포로가 된 回回 상인들을 사마르칸트로 귀환시킨 사례도 있었다.

明의 史書에서 回回란 종족을 불문하고 무슬림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중국 西北의 다른 구성원과 구분되는 외형과 관습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간의 결속은 강한 편이나 타 종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편이었다. 이들은 서쪽의 여러 이슬람 정권과 같은 종교 를 매개로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명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되었다.31) 특 히 홍무제의 상기 조치에 관한 기사를 보면, 그가 중점적으로 이주시켰던 回回들은 본 거지가 사마르칸트이면서 중국 변방에서 오랫동안 체류하며 무역에 종사하는 이들이었 다. 홍무제는 이들이 서북 변방에 있다가 그곳을 거쳐 가는 조공사신과 마주쳤을 때 발 생할 수 있는 邊釁에 대해 걱정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중국 以西 지방의 이슬람권 세계 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어, 향후 서북 변방에 문제를 일으킬 만한 소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중국 내에서 활동하였던 영역 범위는 中外 상인을 위한 互市가 있었 던 중국 서북의 凉州와 蘭州부터 모굴 칸국이 자리한 베쉬발릭과 카라호자까지 사방 천 여 km에 달하는 넓은 지역이었는데, 이곳에 西方의 잠재적인 적이자 옛 왕조인 元 과의 혈연을 주장하는 티무르 조 출신의 상인, 종교인, 군사집단 등이 무역을 빌미로 그 들과 정기적으로 왕래하게 되면, 명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 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들을 이주시키거나 사마르칸트로 귀환시키는 조치는, 티무르에게 중국 원 정이라는 방책을 강구할 만큼 타격이 큰 조치였음이 분명하다. 이 回回가 서북의 다른 구성원들인 몽골계 오이라트(哈剌灰) 혹은 토착 불교도인 위구르(畏兀兒)와는 구분되는 이들이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元의 지배를 통해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된 이들이었다.

이들은 원이 서북 변방으로 파견한 서북 宗王을 따라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 서북 종왕의 대다수는 몽골제국 시기부터 차가타이 계가 다수를 차지하였으므로, 차가 29) 『太祖高皇帝實錄』卷 216, p.3180.

30) 전게서, 卷 223, p.3266.

31) 15세기 무슬림들이 중국 서북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을 다룬 기존의 연구를 보면, 回 回의 세력 증대를 피해 점차 동쪽으로 귀부하는 비무슬림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回 回人 중에는 가깝게는 모굴 칸국, 멀게는 마와라안나흐르와 그 너머 출신들이 다수 있어, 이들 이 서쪽 이슬람 세계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김호동,

「이슬람勢力의 東進과 하미王國의 沒落」,『震檀學報』76, 1993, pp.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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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울루스의 계승을 표방하는 티무르에게 홍무제의 조치는 월권이나 다름없는 조치 였던 것이다.32)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티무르가 명에 보내는 서신에 스스로를 부마로 칭 한 것은, 자기 자신이 몽골제국의 계승자이며 중국 서북의 몽골제국 잔존세력을 통솔할 권리가 있는 군주임을 내세우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티무르의 주 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명은 갈수록 西北邊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해나갔 다. 특히 永樂帝 시기에는 嘉峪關 以西지방에 關西8衛를 부활시켜 베쉬발릭 以東의 서 북지역을 모두 지배체제 안으로 編制하였을 뿐 아니라, 티무르에게 조공을 요구하는 사 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티무르는 클라비호(Ruy González de Clavijo) 및 쉿베르게 르(Johanan Schiltberger)의 여행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직접 미납 조공을 가지고 중국으로 가겠다”라는, 上記의 공손한 서신과는 정 반대의 격양된 반응을 보이며 중국 으로의 원정을 시작하였다.33) 티무르의 원정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

32) 티무르의 중국원정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확정적인 결론이 없다 (Ralph Kauz. Politik und Handel zwischen Ming und Timuriden : China, Iran und Zentralasien im Spätmittelalter, Wiesbaden: Reichert, 2005). 다만 티무르조의 사서 중에 야즈 디의 『勝戰記』에는 타 사서에는 볼 수 없는 중국 원정의 前史를 엿볼 수 있다. 800AH, 이란 5년 원정이 끝난 직후 톤구즈 칸의 사신이 처음으로 도착하였을 때, 티무르는 즉시 모굴 칸국 과의 변경인 아시파라로 군대를 파견하여 병참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봄이 되자 곧바로 인도 원정을 떠났지만 이 인도원정은 중국으로의 원정을 잠시 미루고 치른 원정이라 한다. 즉, 이미 이 시점부터 중국으로의 원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일한 언급이 이란으 로의 7년 원정을 시작할 때에도 동일하게 등장하므로, 티무르는 800AH(1398년 초), 중국의 사 신이 처음으로 야즈디의 『勝戰記』에 등장하였을 때부터 이미 중국 원정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인도 원정에 나섰던 티무르는, 카불에서 칼막으로부터 쫓겨난 타이지 오글란 을 만나게 되었고, 클라비호나 쉿베르게르가 언급하였던 영락제의 사신의 조세 요구 사건도 티 무르에게 중국 원정을 부추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클라비호나 쉿베르게르의 1404년 쿠 릴타이 기록을 보면, 800AH 중국사신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1404년 쿠릴타이에 도착한 중국사신은 본문의 내용처럼 7년 동안 미납된 조공을 요구하였는데, 이 7년이라는 기간 안에 이란 7년 원정 및 인도로의 11개월 원정이 포함된다고 볼 때, 800AH의 중국 사신 역시 조공 요구의 사신일 가능성이 크다.

33) Clavijo, Embassy to Tamerlane 1403-1406,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Curzon, 2006, p.117, 152; Johanan Schiltberger, The Bondage and Travels of J ohann Schiltberger, a Native of Bavaria, in Europe, Asia and Africa, 1396-1427, tr. J. Buchan Telfer, London: Hakluyt society, 1879, p.28. 이에 관한 클라비조의 서술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1403년 에 카스티야의 사신으로 티무르에게 파견되었던 클라비조는, 이란으로의 7년 원정을 마치고 사 마르칸트로 돌아간 티무르를 따라 사마르칸트로 가서 그곳의 1404년 쿠릴타이에 참석하였다.

이 때 중국의 황제가 파견한 사신들이 도달하였는데, 티무르에게 이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였다.

“모든 이가 알고 있듯이 티무르는 중국의 봉토인 토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매년마다 같은 양의 조공을 황제에게 바쳐야만 했다. 그러나 7년간 어떤 조공도 바치지 않으니 티무르는 그 전체를 한꺼번에 갚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티무르는, 이것은 사실이며, 그는 자신의 의 무를 행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사신에게 짐을 주고 싶지 않아, 티무르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갈 것이라 하였다. 이 때의 중국황제는 홍무제의 사망 후 건문제를 거쳐 등극한 영락제인데, 클 라비조는 전임 황제인 홍무제의 사망 후 명에서 발생한 왕자의 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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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던 영락제에게 곧바로 보고되었으므로,34) 만일 티무르가 중간에 사망하지 않았 다면 양 군이 서로 충분한 전투준비를 갖추고 충돌하였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였을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티무르는 14세기 말-15세기 초에 유럽과 중국이라는 양극단의 세계에 커다 란 파급을 일으켰으며, 그 사이의 거대한 영역 대부분을 직간접적인 영향권 하에 두었 다. 당시 티무르의 최대 정복 영역은, 동쪽으로는 현 중국 신장 카라호자와 이르티시 강 유역,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의 西端인 터키 이즈미르, 북쪽으로는 모스크바와 키예프, 남쪽으로는 북인도 델리에 이른다. 놀라운 것은 이 광대한 영역이 티무르 1代에 걸쳐 정복되었다는 점이다. 이렇듯 수많은 전쟁을 통해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 를 거둔 후, 티무르는 주변의 여러 지식인들에게 위탁하여 자신의 공적을 담은 사서를 저술하게 하였고, 그의 후손들도 국가의 始祖인 티무르의 勝戰을 담은 사서를 저술하였 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본문이 될 샤라프 알리 앗 딘 야즈디(Sharaf ‘Alī al-Dīn Yazdī)의 『勝戰記』이다.

2. 역사서술과 ‘사힙키란’ 정통성

티무르 조에 관한 사서의 수는 적은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바 르톨드의 말처럼,35) 존속 기간이 150년이 채 되지 않는 티무르 조에서 ‘연대기’(Tārīkh) 장르에 속하는 현존 史書는 10개 이상이다. 그러나 저자나 書名만 남아있는 사서는 그 보다 더 많고, 그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존재하였음은 알 수 있는 사서까지 합치면 티무 르 조 150년 미만의 기간 동안 역사서술 활동이 극도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 다면 티무르 조에서는 왜 이처럼 역사서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을까.

전술하였듯이 티무르는 거대한 영역을 차지한 후 자신의 공적을 담은 사서를 서술하 도록 직접 명을 내렸는데, 그 결과로 완성된 사서 중에 현존하는 最古의 티무르 조 사 서가 1404년에 완성된 니잠 앗 딘 샤미(Nizām al-Dīn Shāmī)의 『勝戰記』이다. 티무 르의 1395년 바그다드 공격 당시 투항한 샤미는 티무르의 명에 따라 그의 일생에 관한 史書를 저술하게 되었는데, 이 때 티무르가 샤미에게 강조한 것은 티무르의 뜻과 그 가 신들의 행동 중에 (神의) 영원한 행운(Dawlat-i Abad)이 드러나는 바를 기록하되, 일반 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하는 것이었다.36) 이로써 티무르가 사서 작성을 통 해 자신의 군주적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강조하고자 하

34) 『太宗文皇帝實錄』卷 39, p.658; “敕甘肃总兵官左都督宋晟曰回回倒兀言撒马儿罕回回与别失 八里沙迷查干王假道率兵东向”

35) V. V. Bartol’d, Sochineniia 2-2. Moscow: Izd-vo “Nauka," 1964, pp.197-260.

36) SZN/Simnānī, p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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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바는 티무르 본인이 단순히 훌륭한 치적을 지닌 ‘유능한 군주’를 넘어서, 神의 행운 으로 수많은 치적을 이루어낸 군주라는 점이었다.

사실 티무르가 이처럼 스스로 군주적 정통성을 구축하였던 것은, 반대로 그가 이전 군주들이 내세운 정통성의 근거들을 통해서는 적법한 군주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 었음을 반증한다. 티무르 조가 성립된 14세기 후반은 칼리프나 칼리프가 임명한 군주라 는 이슬람적 정통성이나, 황금씨족의 후손이라는 몽골제국의 정통성 모두 쇠퇴하고 있 는 시점이었다.37) 게다가 칭기스 일족도 아니고 칼리프와도 관계가 없었던 티무르는, 上記의 두 정통성으로는 적법한 군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이 때 티무르 가 내세웠던 새로운 유형의 군주적 정통성이 곧 ‘사힙키란(Ṣāḥib Qirān, 合의 군주)’38) 이다.

이 칭호는 본래 페르시아 문학에서 ‘세계정복자’인 주인공을 가리키는 별호였으며 그 기원은 이슬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힙키란 개념에 관해 선구적인 연구를 진행한 나인딥 찬(Naindeep Singh Chann)은 이슬람-페르시아 문화권의 문학작품에서 사힙키란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사례로 『함자 나마』(Hamza nāma)라는 유명 문학작품 을 예로 들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삼촌이자 성전사였던 아미르 함자에 관한 서사시인 이 작품은 사파비조 이전에 이슬람권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5개의 이야기 중 하 나였다. 이 작품 속 ‘사힙키란’이란 칭호를 지닌 아미르 함자는 성스러운 행성간의 合이 발생하였을 때 태어난 인물로, 용기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여 이슬람을 널리 확산시 켰으며, 피지배민들에게 정의로우면서도 관대한 인물로 묘사된다.39)

특히 13세기에 들어 이 개념은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실제 인물을 다루는 史書에서도 군주의 별호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티무르보다 먼저 ‘사힙키란’ 칭호를 이용하였던 셀주 크 조의 기야스 앗 딘 후스로우 1세(Ghiyāth al-Din Kay khusraw I), 맘룩 조의 바이 바르스 1세(Baybars I), 그리고 일 칸국의 뭉케 칸(Mongke Khan) 등의 공통점에 관해 생각해보면, 이들은 전통적으로 비무슬림으로 인식되는 집단 출신으로 이슬람권 내에서 전통적 방식으로는 군주적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려웠으나, 주로 이슬람권을 무력으로 장악하였던 覇者들이다. 이들이 이슬람권에 처음 들어섰을 때에는 무슬림들에 의해 야 만적인 이교도로 여겨졌지만, 점차 이들의 지배가 오히려 이슬람권에 평화를 가져왔으 37) Beatrice Forbes Manz, “Tamerlane and the symbolism of sovereignty," Iranian Studies

21:1-2, 1989, pp.105-122.

38) 合(Qirān)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둘 이상의 별이 황도 12궁중에 하나의 성좌, 혹은 한 단계 (Daraja, 12궁은 각기 30단계로 나뉘어져 있어 각 단계는 곧 1일 동안 태양이 이동하는 만큼에 해당한다)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사힙키란은 그 중에서도 목성과 토성이 合의 상태에 있을 때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이런 관념은 파흘라비 문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페르시 아 문화권의 이슬람화 이전부터 있어왔던 개념이다(Naindeep Singh Chann, “Lord of the Auspicious Conjunction : Origins of the Ṣāḥib Qirān," Iran and the Caucasus 13, 2009, pp.

93-110).

39) 전게서, p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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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로 이들의 지배를 받는 이슬람 지식인들은 이들의 지배를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 었다. 이와 같은 시대의 필요성 속에서 ‘사힙키란’이라는 정통성이 점차 대두되기 시작 하였는데, 이 정통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사힙키란’이라는 칭호를 마치 자신의 고유명사인 것처럼 轉用하였던 이가 바로 티무르인 것이다.

티무르는 이처럼 페르시아-이슬람권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념을 이용하여.

대중의 뇌리에 자신의 군주적 정통성을 효과적으로 각인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이슬 람적 정통성이나, 혈연적 정통성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군주권을 뒷받침해 줄 정통성 유형은 당시에 정통교리나 지식이라 보기는 어려운 점성술, 수비학, 문자학 등의 신비주의 과학, 메시아사상과 같은 이단적 요소를 지닌 사상, 그리고 페르시아 문학 및 페르시아 군주 이론 등의 이슬람 이전 문화를 반영하였다. 이러한 지식, 사상, 문화는 당대의 주류이자 공식 문화였던 이슬람에 가려져 있었지만, 일부는 이슬람에 포섭되어, 일부는 이슬람에 이단 취급을 받으며 당대에 공존하고 있었고, 특히 대중적으로는 큰 지지를 얻고 있었다.

티무르 조에서 사힙키란이란 칭호를 가장 먼저 사서에 이용한 것이 전술한 샤미의

『勝戰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샤미의 사서에서는 사힙키란이라는 칭호가 가 진 위와 같은 특수한 의미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즉, ‘合의 군주’이자 세계정복자라 는 의미를 지닌 ‘사힙키란’이란 칭호는 과연 어떤 군주상을 일컫는 것인지, 그리고 티무 르의 어떤 면모가 ‘사힙키란’이라는 칭호에 부합하는지, 샤미의 『勝戰記』만 가지고는 그 전말을 파악하기 어렵다.

물론 샤미의 『勝戰記』속에도 신의 행운이 티무르를 돕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예를 들면 티무르가 戰時에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적의 속임수에 걸려 들지 않았던 일화를 서술하면서 ‘아미르 사힙키란은 신께서 도우시는 자(Mu'ayyad min

’And-allah)이며 운명은 그의 처리에 의거한다(Taqdīr Muvāfiq-i Tadbīr-i wū)’고 표현 하였다.40) 즉 티무르는 일반적인 군주가 아니라 신이 군주로 임명한 자였고, 티무르의 행동이 곧 운명에 기록된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표현 아래에 티무르가 꿈을 신의 계시로 해석한 내용이 이어진다. 즉, 티무르가 어느 날 후잔트 강의 범람에 관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통해 구원을 부여하는 것은 신뿐임을 깨닫고, 신이 바라는 바대 로 적과의 화해를 결심하였던 것이다.41) 또한 샤미는, 티무르와 모굴 칸국의 일야스 호 자 칸이 전투를 하기 전, 티무르의 귀에 형체 없는 소리가 들려와 승리를 알려주었다고 도 하였다.42) 이처럼 꿈이나, 형체 없이 귀에 들려오는 소리 등은 이슬람권에서 신이

40) SZN/Simnānī, p.43.

41) 전게서, p.49.

42) 샤미의『勝戰記』에 따르면, ‘신께서 모든 일에서 아미르 사힙키란을 보호하시고, 나날이 그의 행운과 상서로움의 흔적이 드러났으므로, 그의 마음은 신의 가호로 강해지게 되었고 그의 믿음 은 상서로움의 도움으로 인해 커져갔는데, 어느 날 그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어떤 소리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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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한 인간에게 내리는 계시의 한 종류로, 샤미는 이러한 계시와 관련된 일화를 사서 에 기록함으로써 티무르가 신의 계시를 받은 군주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탈리아의 학자 베르나르디니(M. Bernardini)에 의하면 샤미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Shāh nāma의 영웅 기사를 인용하여 티무르의 영웅성을 부각하기도 하였다.43) 다만 샤미의 『勝戰記』는 이 정도의 서술에서 그치고 있으며, ‘사힙키란’이라는 특수한 개념에 걸 맞는 군주적 정통성의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44)

반면에 샤미의 『勝戰記』를 底本 삼아 1424년에 완성된 야즈디의 『勝戰記』는 샤 미의 『勝戰記』속에 있는 개별 사건 및 일화들, 그리고 사건들의 전개 과정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나,45) 그것에 추가적인 서술을 덧붙여 사힙키란이라는 특수한 정통성의 근거 귀에 들려와, “기뻐하며 슬퍼하지 마라, 신께서 너에게 승리를 사여하실 것이다”라 하였다 (SZN/Simnānī, p.26).’

43) Michelle Bernardini, "The Shahnama in Timurid Historiography," Shahnama Studies III:

The Reception of the Shahnama, ed. Gabrielle R. van den Berg and Charles Melville, Leiden:

Brill, 2017, pp.162-3.

44) 샤미의 『勝戰記』에서 티무르의 군주적 정통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술타니아의 장이 작성한 라틴어 연대기 속의 그것과 사뭇 비슷하다. 술타니아의 장에 의하면, 티무르는 스스로 천사를 통해 天界와 직접 교통하며, 타인들의 동기와 계획을 꿰뚫어보는 특수한 능력을 지녔다고 공표 하였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서술이 아랍샤의 사서에도 등장하는데, 이처럼 초월적 능력으로 군 주적 정통성을 입증하는 방식은『勝戰記』 등에 수차례 등장하는, 타인의 생각을 꿰뚫어보며 신과 직접 소통하는 군주상과 유사하며, 이 방식이 티무르 재위시기에, 본인에 의해 구축되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주적 정통성은 세계정복자-영웅인 사힙키란이라는 군주적 정 통성으로 아직 특화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베아트리스 만츠는 이것이 샤머니즘적 전통에서 유 래한 것이라 하였으나(Beatrice Forbes Manz, "Tamerlane and the symbolism of sovereignty,"

Iranian Studies 21-1/2, 1988, p.118), 아즈파르 모인은 아랍샤 및 이븐할둔의 글을 인용하여, 티무르가 자신이 거느리는 군사들에게 본인을 수피 셰이흐 혹은 聖者로 위치 지었다고 주장하 였다(A. Azfar Moin, The millennial sovereign : sacred kingship and sainthood in Isla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pp.31-35). 실제로 샤미의『勝戰記』

속 티무르는 자신의 군사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과 같은 존재, 혹은 스스로 쿠란을 가지고 점을 쳐서 앞일을 예언하는 존재, 군사들이 그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죽음을 불사하고 희생하 는 대상으로 등장하며, 이러한 면모는 이후의 여러 사서에 답습되었다.

45) 특정 시기를 선택하여 두 『勝戰記』 및 야즈디의 『勝戰記』와 동시대 사서인 『歷史의 精 髓』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특정 사건의 전개, 즉 줄거리가 무서우리만큼 동일하다. 예를 들어 761AH(1359-60년)에 처음으로 투글룩 티무르 칸이 마와라안나흐르로 진격하였을 때에 관한 양 사서의 서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투글룩 티무르가 마와라안나흐르로 진격 / 차가타이 울 루스 출신인 그의 혈통 / ’자낙불락‘이라는 장소에서 아미르 바야지드 잘라이르의 합류 / 투글 룩 티무르 칸이 아미르인 올쿠누트의 핫지, 벡직, 케레이트의 울룩 툭 티무르를 임명하여 마와 라안나흐르를 지배하도록 함 / 핫지 바룰라스 도망 / 티무르가 귀환하여 아미르들을 만나러 감 / 투글룩 티무르가 그에게 샤흐리 사브즈 투만을 제공 / 투글룩 티무르가 귀환하고 남겨놓은 아미르들이 퇴각 / 아미르 후세인의 등장. 이와 같은 전개 도중에 각 사료 중에 전혀 새로운 이 야기가 첨가되어 있거나, 특정 사실이 제외되어 있는 경우도 없다. 다만 히즈르 야사우리가 투 글룩 티무르에게 합류하였다는 사실이 약간 다른 부분에 배치되어 있는 정도가 차이점이라 볼 수 있다(YZN/Ṣādiq, pp.262-7; ZT/Jawādī 1, pp.319-322). 한편 두 사서의 유사성은 개별적인 일화 및 그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 혹은 등장인물의 생각에 대한 서술상의 일치 등에서 두드러 지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전술한 티무르의 꿈에 관한 일화(이 일화 속의 “화해가 최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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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명백하게 제시함으로써 티무르와 그의 후손들의 의도에 부합하는 사서를 완성하였 다. 야즈디의 『勝戰記』속에 ‘사힙키란’인 티무르의 군주적 정통성을 입증하는 근거들 은 샤미의 『勝戰記』및 여타 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야즈디의 『勝戰記』가 지닌 특징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제 2 절 야즈디가 그린 ‘사힙키란’ 티무르 1. 야즈디의 생애

야즈디의『勝戰記』에서 직간접적으로 제시한, 티무르를 사힙키란이라 볼 수 있는 근거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勝戰記』의 주 내용인 광대한 영토 정복 자체, 2) 천문-점성학, 數祕學(Numerology, 'Īlm al-A'dād)46)과 문자학(Lettrism. ‘Īlm al-Ḥurū f)47), 천년왕국 메시아사상 등 신비주의 과학(Occult Science)적 근거,48) 3) ‘정의로운 군 주상’49)에 부합하는 그의 정의로움과 공정함 등이다. 이 근거들이 반영하고 있는 기저

는 쿠란 문구는 두『勝戰記』와 『歷史의 精髓』에서 동일하게 인용한다, YZN/Ṣādiq, p.367;

ZT/Jawādī 1, p.420)와 형체 없는 소리(YZN/Ṣādiq, p.302; ZT/Jawādī 1, pp.305)에 대한 일화는 야즈디의 『勝戰記』와 『歷史의 精髓』에도 등장한다.

46) 숫자와, 그것에 연관된 하나 이상의 사건 사이의 신비하고 신성한 관계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

또는 어떤 단어나 이름, 문구 등을 구성하는 문자들의 숫자 값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야즈디 의 『勝戰記』 뿐 아니라 여러 페르시아어 사서에서 사용되는 ‘Abjad 시스템’도 수비학의 일부 인 동시에 문자학의 범주에도 들어간다. Abjad 시스템은 아랍 스크립트의 철자가 각기 대응되 는 숫자를 지닌다는 것인데, 이는 셈 어족의 알파벳 순서에 의거한 것이다.

47) 본래 ‘문자학(Lettrism)'이라는 단어는 문자와 관련된 다양한 움직임과 활동 등을 포괄하는 단 어이나, 이슬람권에서의 문자학은 문자에 神聖性 및 신비주의적 관념을 부여하여, 세계를 일종 의 쓰일 수 있는 텍스트로 보는 신비주의 과학적 관념이다. 즉, 세계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문자를 해석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의 이름을 Logogriph (철자를 바꾼 어구를 지닌 수수께끼, Mu'ammā)의 방식으로 분석하면 그의 특성 뿐 아니라 그 의 운명까지도 알 수 있고, 연대표시명(Chronogram, Tārīkh)의 방법으로는 역사 속 숨겨진 비 밀을 看取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Matthew Melvin-Koushki, “Of Islamic Grammatology : Ibn Turka’s Lettrist Metaphysics of Light," Al-'Uṣūr al-Wusṭā 24, 2016, p. 78).

48) Christopher Markiewicz, The Crisis of rule in late Medieval Islam: A Study of Idrīs Bidlīsī (861-926/1457-1520) and Kingship at the Turn of the Sixteenth Century, (PhD diss.), University of Chicago, 2015, p.306.

49) 이슬람권의 군주권(Sovereignty) 및 정통성(Legitimacy)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수렴해보면, 압 바스 칼리프 조의 붕괴 이전에는 주로 예언자 및 칼리프가 군주에게 통치의 권한을 부여하는 이슬람 모델이 군주권의 근원이었고, 1258년 칼리프 조가 몽골에게 멸망한 이후로는 스스로의 신성한 권위를 표방한 칭기스 칸의 ‘투르크-몽골 모델’을 군주권의 근원으로 보아 칭기스 칸과 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한편 칭기스 칸의 지배가 점차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그가 이룩한 ‘세계 정복자’ 적 군주가 점차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갔던 16세기 이후, 이슬람권의 각지에 병존하였 던 정권들은 각기 자신들만의 군주권 및 정통성 모델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12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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