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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원불교 중국교화 방안

1. 중국교화의 현황

1) 중국교화 초기 전개과정

원불교 중국교화의 효시는 장적조70)에 의해서이다. 한때 부산지방 교 화의 교두보를 마련했던 장적조는 1936년(원기 21년) 해운사업을 하는 아들이 청진으로 이사를 가자 이를 기회로 북한지역에 최초로 진출하여 청진 지역에서 7명을 입교시켰고, 이듬해인 1937년 만주로 진출하여 각 지에서 행상을 하며 용정, 목단강시, 장춘, 심양 등 중국 동부지방에서 교화활동을 전개하면서 원불교 중국교화의 서막을 열었다. 1940년 12월 에는 목단강시에 정착하여 1945년 5월 29일까지 총 218명의 교도를 확보 하였다.

만주 또는 간도라고 불리는 동북 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교 화는 1941년에 95명으로 가장 많았고, 1942년에는 51명, 일제가 패망하던 1945년에는 16명 등 1936년부터 1945년까지 218명의 교도를 확보하였다.

가장 많은 교도가 있는 지역은 목단강시가 152명으로 전체의 70%를 점 유하였으며, 장춘, 용정, 연길, 대련, 안동, 길림, 심양, 장안, 유하 등지에 도 약간명의 교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동북3성 일대의 교도들의 반수 이상이 이북출신이며 그들 중에서 함경 도 출신이 45.8%를 차지한다. 출신지별로 보면 함경도 100명, 평안도 10 명, 황해도 7명, 강원도 16명, 경상도 52명, 전라도 12명, 충청도 5명, 기 타 7명으로 함경도와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으며 이북출신 교도들이 전

70) 경남 통영 출생, 일찍이 강증산교의 신자가 되었다가 1921년 소태산 대종사에 귀의. 1929년 부산지방 교화 발판을 마련하였고, 초기 중국교화의 장을 열었다.

원불교 교단 초기에 최도화, 박사시화와 함께 교직 없는 교역자로서 교화에 큰 활동을 하였다.

체의 61%(133명)를 차지한다.71)

한편 「원불교 제1대 유공인 역사 1권 전무출신편 장적조」 항에 이렇 게 쓰여 있다. 「선생님은 만주로 가서 다년간 동지들을 구하며 교당 설 립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말못할 파란곡절을 지낸 끝에 비로소 목단강에 교단 건물을 준비하여 놓고 비상시국으로 인하여 총부로 귀환하였 다」72)

다시 말하면 1945년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어수선한 국내외 정세 속에 해방 전 원불교 중국교화의 자취는 접어야 했다.

2) 해방 이후의 중국교화 현황

1945년 8·15 해방 이후의 중국교화는 48년이 지난 1992년 역사적인 한·중 수교 이후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동안 남북분단과 함께 6·

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 절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현재 해방 이후 원불교가 중국교화에 발을 내디딘 지 벌써 10 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어렵게 시 작했던 원불교의 중국교화가 여러 곳에서 나름대로 자리매김 되어지고 있음을 볼 때 이것은 저절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교화에 임하는 교역자 의 희생적 정신과 실천에 기인한 것임을 한 교역자의 말로써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세계를 이뤄 나가는 데에는 혈심혈성, 무아봉공, 이소성대의 정신과 함께 원불교의 교법을 지키고 전하고 실천하는데 있음을 교화현 장에서 체감하였다. 미력한 힘이나마 최선을 다하며 중국교화에 임하면 서 고독한 독수리가 되어 하염없이 먹이를 찾아 맴도는 심정으로 살아왔 다.」73)

71) 원불교교화연구소, 『통일·북한, 북방교화 자료집』, 원광사, 1995, 421-424쪽.

72) 대종사탄생백주년 성업봉찬회, 『원불교 70년 정신사』, 원불교출판사, 746쪽.

73) 김길선, 『원불교 북경교당 교화백서』, 1999년.

위와 같은 정신으로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원불교가 다 시금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현재 북경, 연길, 상해, 훈춘, 청 도, 홍콩에 교당이 마련되어 있다.

3) 중국교당의 설립과 활동상황

① 북경교당

1992년 8월 한·중수교가 되면서 원불교 교정원 당국은 중국교화의 중 요성을 인식하고 여러 방면으로 중국교화를 모색하다가 북경, 심양, 연길 지역에 교역자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북경지역의 교화개척은 반포교당 노홍원 교도회장이 활로를 마련하였 다. 당시 노홍원 교도의 가족으로 주중한국대사관에 재직 중이던 노재원 대사 추천으로 대사관 행정직으로 근무할 일자리를 마련하고 교정원에서 김길선 교무를 정식 사령하면서부터 중국교화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 다.

1993년도에 북경교당 교무로 사령된 김길선 교무는 2월 28일 북경에 도착하여 주중한국대사관 근무를 시작으로 생활 근거를 삼고 이사병행의 정신으로 교화현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첫 번째로 맞이한 대각개교절74) 기념식은 현지 대학교수, 상사직원, 대 사관 직원, 북경지역 유학생회장단을 초청, 노홍원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약 30여명이 국제HOTEL 한국식당 보배원에서 「원광상사 창립기념 식」형식을 빌어 거행하였다. 그 뒤 4축2재의 행사를 지속적으로 거행하 면서 원불교 교도를 규합, 12월 명절대재를 맞이하여 북경대학 석사과정 을 밟고 있는 양천호 교도 집인 북경대학 기숙사에서 정식으로 원불교 북경유학생회를 13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하게 되었다.

74)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박중빈)가 일원의 진리를 깨치고 원불교를 창립한 날. 원불교 제1의 명절로서 4월 28일이고, 원불교 교도들의 공동생일을 기 념하는 명절이기도 하다. 소태산 대종사는 1891년 5월 5일에 탄생하였고, 1916년 4월 28일에 대각하였다. 불교나 기독교는 석가와 예수의 탄생일을 경축하고 있으 나 원불교는 소태산의 대각일을 경축일로 하고 있다.

유학생들과 법회를 보아 오면서 교당이 없는 관계로 일요일이면 공원 을 장소로 정하고 깔판을 펴고 도시락을 먹으면서 법잔치를 벌였고, 혹 은 추운 날에는 식당에서 법정을 나누며 대종사의 법음이 이곳 중국 땅 에 울려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염원하며 끊임없는 모임을 가졌다.

김길선 교무는 4년 동안 열악한 대사관 근무를 그만두고 교화에 전념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 북경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교화를 병행하 게 되었고 교당 구입에 착수, 교당후보지를 몇 군데 물색해 오다가 외국 인 거주가 가능하며 교통이 편리하고 유학생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북경국제우의화원을 구입하였다. 이는 인천교당 이성규 회장의 원 력과 강남교당 서타원 박청수 교무와 총부지원금을 합하여 1억5천만원을 확보하고 교당에서 진주목걸이 바자회 출품과 면목교당의 희사금, 기타 각 지방 일반교도 희사금을 합하여 총 2억 8천만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교당 구입 후 12월에 5만원(RMB=중국화폐)의 예산으로 천장설계, 이 중창, 법당, 불단조성 등으로 법당을 꾸며 98년 3월에 입주하여 교역자들 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공원과 식당에서 보던 법회를 교 당법당에서 모두 볼 수 있고, 유학생들의 안식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 었다. 그러나 아직도 교당유지관리에 있어서는 현지 교도들과 유학생들 의 경제사정으로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다.

북경교당은 1999년 초에 봉불을 준비하여 오다가 봉불식장을 물색 답 사하고 5월 22일 봉불식을 위한 특별기도 결제로 다함께 기운을 모으기 로 다짐하면서 6월 5일 영산성지에서 인천교도회장 이성규와 1대, 3대 회장단 8명이 봉고식을 올렸으며, 반백일 회향기도를 백두산에서 17명이 올렸고, 훈춘 장애특수학교에 보은사업으로 쌀 50가마를 전달했다. 그리 고 마침내 1999년 8월 29일에 북경교당 봉불식75)을 가지게 되어 13억 인구의 삶 속에 원불교의 정신을 전할 그 터전을 구축하게 되었다.

특별활동으로는 야외법회, 교리연구발표회, 여름하계훈련, 성지순례, 대

75) 원불교 진리(=일원상 진리)의 상징인 일원상을 법당이나 가정, 직장 등에 봉안 하는 의식. 봉안은 신앙의 대상을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다.

각개교절 기념식을 해오면서 교화에 힘을 더해왔다. 특히 대각개교절 기 념식을 매년 대외적으로 현지인들과 함께 하여 원불교를 널리 알린 좋은 기회로 활용하였다. 밀운댐, 녹색휴가촌, 회유현, 안서 저수지 등지에서 매년 진행된 기념식에 참가하는 인원이 점차 늘어 30명으로 시작한 인원 이 무려 150여명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 동안 4축2재와 월 2회 법회를 150여 회에 걸쳐 진행해 왔으며 법요의식에 참석한 수는 3000여명에 이른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북경교당의 역할로 중국불교협회와 중국 국무원 종교국에서 2회에 걸쳐 원불교 중앙총부 방문이 있었고, 북경 조선족 여 성회 초청모임을 2차례에 걸쳐 하였으며, 교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북경대 종교연구소 교수들을 위촉하여 중국어 교전을 발행하는데 가교 역할을 하였다.

② 연변교당

원불교 연변교당은 연길시에 삼동유치원을 개원하는 것과 함께 구상되 었다. 1993년 10월 문영식 교무가 중국교화의 의지를 가지고 어려운 발 걸음을 내디뎌 1994년 1월 연변의학원 외국인 학생 기숙사 2층 회의실에 일원상을 봉안하는 것으로 연길에 원불교의 서막을 열었다. 그 해 3월에 는 연길에 있는 중국인 및 조선족 자녀들을 위한 「삼동유치원 설립 운 영위원회」를 위한 예비모임을 가졌고, 6월에는 백두산 정상 기상대에서 주숙하며 통일 기원식을 올리고 원청 30주년 기념 백두산 물과 한라산 물 합수식76)에 사용할 물을 천지에 내려가 준비하였다.

1994년 9월 14일 연길시 인민정부 교육위원회로부터 유치원 설립 허가 를 받았으며 9월 20일에는 리금화 어린이 외 3명의 선천성 심장병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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