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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복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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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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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 한사군인식2 복기대**. Ⅰ. 머리말 Ⅱ. 중국사서의 낙랑군 인식 1. 요서설 -갈석설2. 평양설의 대두 3. 역도원의 오류 4. ‘증지현’ 혹은 고구려 살수에 대한 고찰. Ⅲ. 평양설의 고착 및 전승 Ⅳ. 한군현의 양지역론 대두 -한반도 만주 두 지역에서 등장-. Ⅴ. 한국사서의 낙랑군 인식 1. 한반도 재만주설 2. 한반도 낙랑설 3. 고고학의 등장과 평양설 확정. Ⅵ. 맺음말. * 이 연구는 교육부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단(AKS-2014-KFR-1230006)의 지원에 의하여 수행된 연구임. ** 인하대학교 교수.

(2) 230 仙道文化 제 25 권. 【국문요약】 동북아시아 학계 고대사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접점은 단연 낙랑군의 위 치이다. 이 낙랑군의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 그 당시의 역사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매우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 사실 이다. 필자는 이런 기본입장에서 한군현 설치 당시부터 시작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군현 관련 문헌을 검토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사료를 근거로 하여 한군현 관련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해보면 한군현 의 설치 초기에는 당시 패수가 있었던 현재 중국의 동북지역인 하북성 지 역에 위치하고 있다가 차이나계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한군현 역시 점 점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패수의 위치가 바뀌면서 한군현의 위치 도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즉 현재 난하는 고대의 패수였고 북위시기 에 이 패수라는 강 이름이 없어졌는데 6세기경 당시 지리학자였던 북위의 역도원이 고구려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 패수를 근 거로 하여 낙랑군을 현재 중국 요녕성 요양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낙 랑군과 평양의 등치관계가 설정되었으며, 그 후 명나라시기에 현재 한반 도에 평양이라는 지명이 보편화되면서 낙랑군도 이 지역으로 옮겨온 것 으로 확인되었다. 이런 변화는 원래 한군현이 설치된 지역에서 시작하여 강 이름과 지명을 따라 오늘날 한반도 평양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것 을 증명하듯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한반도 어디에도 한군현이 있었 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확인이 된다. 그러므로 현재 한반도에 한군현이 있었다는 것은 14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런 변화과정을 알려주는 사료들은 매우 많은데 그동안 학계에서 이를 주 도면밀하게 분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에서 현재 한반도 평 양지역에 한군현이 있었다는 단선적인 주장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3)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31. 그러나 다양한 의견들은 1920년대 단선적으로 한반도로 고정되면서 오 늘날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향후 학계에서 더욱더 치밀한 보완 연구 를 통하여 한군현을 제자리에 놓고 한국 고대사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주제어 : 한군현, 낙랑, 패수, 역도원, 평양성, 정약용, 기자조선.

(4) 232 仙道文化 제 25 권. Ⅰ. 머리말. 동북아시아 고대사연구에서 한군현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 중요성 은 그 위치가 어딘가에 따라서 동북아시아 고대사의 해석 및 지리를 이해 하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 위치에 대하여 많은 논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논쟁은 매우 이해하기 어 려운 출발점에서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 평양에서 시작하여 점점 서쪽으로 옮겨가 최종적으로 6 세기경 현재 차이나의 북경지역으로 옮겨갔다는 주장이고, 다른 한 주장 은 현재 차이나 하북성 동북부지역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그 언저리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두 주장의 공통점은 낙랑군의 종말은 북경지역이라 는 것이나 그 출발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큰 흐름은 한군현의 시작은 평양에서 시작하여 점점 서진을 한 것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평양은 한반도 평양으 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틀에서 한국의 고대사, 그리고 동북아시아 의 고대사 인식 체계가 짜인 것이다. 필자는 이 체계가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줄곧 제기해왔는데 최근에는 한군현이 왜 설치되었나?01) 그리고 그 위치는 어디인가?02)등의 글을 발표 하여 오늘날 거의 통설화 된 낙랑군 한반도기원설과 천관우의 ‘교치설’을 01) 복기대: 「전한(前漢)의 동역(東域) 4군 설치배경과 그 위치에 관하여」 『인문과학연구』 제52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7.3. 02) 낙랑군설치에 관한 기록들은 다음 두 편을 참고해주기 바란다. 참조: 복기대: ‌「전한(前漢)의 동역(東域) 4군 설치배경과 그 위치에 관하여」 『인문과학연구』 제52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7.3. 복기대: ‌「한사군의 인식에 관한 연구1-‘설치’와 ‘교치’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중심으 로-」,『몽골학』 제49호,2017, 한국 몽골학회.

(5)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33. 근거로 하여 한반도 평양 → 차이나03) 요녕성 금주일대 → 차이나 북경일 대로 교치되었다는 설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며 동시에 낙랑은 차이나 현대 요서지역에서 약간의 위치 변화는 있었지만 약 700여 년 존재했었 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한군현과 관련 하여 평양에 있었다는 기록들이 계속하여 제기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 명이 필요한 것이 매우 시급한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야만 한군현 문제를 이해하는데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간 한군현에 관련한 공부를 계속 진행하던 중 왜 평양설이 대두하게 되었나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학계 에 본인의 견해로 제기하기로 한 것이다. 한 가지 먼저 말할 것은 필자가 ‘한사군인식1’을 발표하였을 때 고고학 관련 자료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 었는데 고고학 관련 자료는 분량이 많기 때문에 별도의 기회를 얻어 정리 할 것을 약속하고, 이 글에서는 주로 문헌기록을 근거로 하여 논리를 정 리해 나가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은 이미 앞서서 발표한 세편의 글 을 토대로 하여 정리하는 것이므로 최초의 위치 등등은 다시 언급하지 않 기로 한다.. ① 한군현 한반도설 ② 한군현 요서설. 그림 1. 학설에 따른 한군현 위치 03) 연구자는 논문 중에 ‘차이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 이유는 현재 중국은 많은 왕조가 교체가 되었기 때문에 어느 특정시대를 말하기가 어려워 전체 중국을 아우를 수 있는 용어로 ‘차이나’라는 용어로 대신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연도와 지역이 나오는 것은 그 당시 왕조로 명확하게 표기를 하고 있다..

(6) 234 仙道文化 제 25 권. Ⅱ. 중국사서의 낙랑군 인식. 1. 요서설 -갈석설한군현은 중국의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기록에 잘 남아 있 다.04) 이 기록들을 확인하는 데는 차이나의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차이나의 기록이 우선이다.05) 그러므로 먼저 중국기록을 확인해봐야 한다. 기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인데 중국은 아주 일찍부터 이 낙랑군이 어 디에 있었냐는 논쟁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낙랑군의 위치논쟁은 당대 보다는 후대에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낙랑군관련은 차이나사에 서 볼 때 변경의 역사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따르기 마련이다. 즉 도성부 근의 중심지였다면 역사의 기록들이 자세하게 남았을텐데 변경은 늘 변화 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혼란이 내재되어 있다. 더구나 낙랑 은 북방지역에 위치하여 서진 붕괴 후 약 200년 이상 지속된 5호16국 시 대를 거치면서 많은 사료들이 유실되거나 편찬되지 못해 남북조시대가 되 면서 체제가 정비되고 다시 사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부 남아 있는 기 록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대에서는 서로 다 알기 때문에 찾 아다녀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서는 당대에 쓰인 기록들이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위치변동도 있다 보니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연구자들은 선대의 자료들을 모아 비 교분석해보는 것이다. 그 후 당나라에 들어서면서 역사를 국가에서 편찬 하기 시작하였고 흩어졌던 사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주석서를 많이 활용하 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시기를 나눠서 확인해보도록 한다. 04) 복기대: 「전한(前漢)의 동역(東域) 4군 설치배경과 그 위치에 관하여」, 『인문과학연구』 제52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7.3. 05) 복기대: 「한군현의 인식에 관한 연구1-‘설치’와 ‘교치’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중심으 로-」, 『몽골학』 제49호,2017, 한국 몽골학회.

(7)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35. 1) 5세기 이전기록 흔히 말하는 25사류에는 어느 지역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전 후 사정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적인 저작이나 혹은 특정 문헌에 서는 저자의 관심사에 따라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낙랑관 련도 그렇다. 낙랑에 관한 기록은 늘 조선과 연관이 있다. 그 이유는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공략하고 난 후에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습관처럼 낙 랑은 조선의 땅에 설치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흔적부터 확인을 해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 중에 응소( 應劭)가06) 말하기를 ‘요동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라는07) 말이 있다. 이 기록은 당나라 때 쓰인 『사기색은』에 인용된 것이지만 다른 문헌과 비 교해볼 때 응소의 생존 시기에 알고 있었던 일을 기록하여 전해진 것으로 그 신뢰성은 높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바탕으로 관련된 문헌을 찾아보도 록 한다. 이 관련된 자료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될 것이다. ➀ 『수 경』08)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흘러 임패현에 이르러 동쪽으 로 바다에 들어간다.’09) 이 기록을 보면 낙랑군에는 패수라는 강이 있는데 이 강은 루방에서 나 06) 응소의 생몰연대가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건안 9년(204)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젊어서는 낙양에 가서 관료도 하였으나 훗날 지방관을 하면서 조조와 원소의 세력 다 툼에서 원소를 택했던 사람이다. 그는 혼란한 시기에 많은 기록들을 수집하고 정리하 였는데, 그이 업적은 훗날 안사고가 많이 참고하였다고 한다. 07) 『사기색은』, 遼東 險瀆縣, 朝鮮王舊都 08) 『水經』 저자는 상흠이라고도 하며, 제작시기는 2~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차이나의 하 천, 수계(水系)를 간 략히 가록한 지리서(地理書)이다. 09) 『수경』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8) 236 仙道文化 제 25 권. 와 동남으로 흘러 임패현에 이르러 동쪽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 기 록을 보면 낙랑군의 동쪽에 바다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훗날 역도원이 공격을 받는 기록이 된다. 『수경』 비슷한 시기에 쓰인 『설문해자』에 기록된 내용을 보자. ➁ 『설문해자』 권11상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을 나와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10) 이 『설문해자』의 내용과 『수경』의 내용은 비슷하다. 다만 간단하게 기록 되어 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5세기경에 편찬된 책으로는 『十三州志』가 있는데 이 책에도 패수와 낙랑군관련 기사가 나온다. ➂ 『十三州志』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을 나와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11) 이 내용은 앞에서 말한 『수경』이나 『설문해자』와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 다. 이 『十三州志』와 비슷한 시기에 쓰인 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송나라 때 배인(裴駰)이 쓴 『사기집해』이다. 이 책에는 무슨 이유인지 그들의 영 토도 아닌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이 들어 있다. 이것을 한 구절씩 보기로 한다. ➃-1 『사기집해』12) 10) 『설문해자』, 권11상 浿水出樂浪鏤方東入海 11) 『十三州志』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盖出其縣南逕鏤方也 12)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기 주석서로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사람 배인(裴駰)이 쓴 것으 로 130권이다. 배인은 삼국지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의 아들이다. 그의 생몰연대는 확 실치 않으나 대략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된다. 아마도 역도원과 거의 같은 시.

(9)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37. ‘창려에 험독이 있다’13) 이 책에 험독현은 창려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창려군이었던지 혹은 창려라는 지역에 험독현이 있다는 것은 확인이 된 것이다. ➃-2 『사기집해』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14) 배인은 신찬이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왕험성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 이었는데 신찬은 그 왕험성의 위치는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 다. 즉 왕험성은 낙랑군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군안에 흐르 는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패수의 동쪽이라 하 였다. 이들 기록의 연대는 대략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것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검성은 위만의 왕검성을 말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볼 때 낙랑 군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북위시대까지는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15) 이것 을 근거로 볼 때 낙랑군과 왕검성이 같은 위치거나 혹은 그 언저리로 보 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디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패수라는 강 이름은 없어졌다. 이는 아마도 패수라는 강의 이름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사람이 아닌가 한다. 배인은 송나라사람이고, 역도원은 북위사람이라는 차이는 있 다. 사마천의 시대로부터 약 600년이 경과한 이 시대에는 『사기』가 상당히 읽혔던 것 같은데, 탈간(脫簡)·착간(錯簡) 또는 서사(書寫) 때의 오기(誤記) 등으로 판본이 각기 달라서 그것을 통일하는 주석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13) 『史記集解』 昌黎有險瀆縣也 14) 『史記集解』 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 15) 『십삼주지』가 편찬된 것은 북위때이다. 그러므로 늦어도 북위때까지는 낙랑군이 존재 했던 것이다..

(10) 238 仙道文化 제 25 권. 2) 6세기 이후 - 한군현의 위치 고증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당나라 때에 들어서면 이 한군현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 이책 저책을 뒤지며 찾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낙랑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게 된 것은 당나라 때 사마정이 『사기색은』을 지으면 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한군현의 위 치가 두 곳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지역이던 갈석 부근이라는 견해와 고구려 도읍지였던 평양이라는 것이다. 먼저 갈석설 을 확인해보자. (1) 갈석설 ➀ 『한서』, 「지리지」‘요동군 험독현’16) “응소가 말하기를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지이다. 물이 험한 곳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다’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의 동쪽에 있다. 험독이라는 지명은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안사고 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 패의 음은 배다’ 하였다17) 이 기록은 당나라 중기 이후에 쓰인 것인데 응소의 말과 신찬의 말을 이어가면서 낙랑군 험독현의 유래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 내용은 위만조 선의 왕검성이 있었던 곳은 험독현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 해주는 것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낙랑군이라는 행정기구가 있는 곳은 조 선현이지만 왕검성이 있었던 곳은 험독현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16) 『한서(漢書)』 이 책은 기원 1세기 중반에 반고에 의하여 지어진 책으로 12제기(帝紀)·8표(表)·10지(志), 70 열전(列傳)으로 전 100권으로 이루어졌다. 『전한서(前漢書)』 또는 『서한서(西漢書)』라고도 한다. 17) 『한서』 「지리지」‘요동군 험독현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 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11)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39. ➁ 『通典』 「변방전」 ‘동이’ ‘고구려조18)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으니,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증험하건대, 장성이 동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 땅으로 들어가니, 지 금도 그 흔적이 있다. 살펴보건대, 상서에서 이르기를, “우갈석을 끼고 황 하로 들어간다.”라고 하였으니, 우갈석은 곧 황하가 바다에 다다르는 곳으 로, 지금의 북평군 남쪽 20여리에 있으니, 고구려 가운데가 좌갈석이 된다. ➂ 『通典』 권 178 주군8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이다. 여기에 갈석산이 있는데 해안가에 우뚝 선 모양을 보고 그 이름을 삼은 것이다. 진(晉)나라 ‘태강지지’에 진나라가 쌓 은 장성이 갈석에서 시작한다 했는데, 지금 고려의 옛 강역에 있다.19) ➃ 『太平寰宇記』20)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 1년 이목장군이 연 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곳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 성현이었다. 『한서』 「지리지」는 말하기를 ‘연나라 남쪽 탁군의 북쪽에 신 성이 있다.’고 했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 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고 했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 (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 18) 『통전』「변방전」 ‘동이’ ‘고구려조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按尚書云:「夾右 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石。” 19) 『통전』 권 178 주군8, 盧龍漢肥如縣。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晉太康地志云,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 舊界. 20) 『太平寰宇記』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 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 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 二十五里.

(12) 240 仙道文化 제 25 권. 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치소는 부산(釜山)촌이다. 진나라 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 산(龍山)인데 현의 서쪽25리에 있다. ➄ 『史紀塞隱』 ‘태강지리지’에 전하기를 “낙랑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 성이 여기서 시작한다.”21) 21) 『史紀塞隱』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최근 이 기록에 대하여 많은 의구심을 제기하는데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태강지리지에 실려 있는 내용이 들쑥날쑥하여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므로 신 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서진시대에 편찬된 책인데, 이 책은 서진이 건국되면서 당시 서진의 영역내의 지리관 계와 호구수를 정리한 책으로 본다. 즉 국가의 통계를 내는 기본적인 데이터가 되는 것 이기 때문에 국가의 공식문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명일통지』나, 『대청일통 지』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별로 내용은 달라질것인데 처음에 조사를 하는 과 정에서 누락된 것들이 정밀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다시 등록이 되는 수도 있고, 기록된 것들도 빠지게 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매년 조사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럼 매년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고 나서 그 후대들이 편찬하는 역사와는 다르다. 둘째, 노태돈은 태강 3년에 만든 『태강지리지』 태강 8년에 일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에서 설명한 바를 이해하지 못해서 일 어나는 착오이다. 여기서 문제는 무너진 성을 복구하였다는 것인데 이 성이 무슨 성이 냐 하는 것이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태강 3년에 쓰인 『태강지리지』에 실려 있는 내용은 진의 장성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지 성의 상태 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태강 8년에 성을 수리한다는 기록이 있으면 이 성 이 어느 성인지 등등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당빈이 수리하였다는 성이 앞서 태 강 3년에 쓰인 기록에 나와 있는 장성을 말한다면 태강 3년 기록을 더 보완해주는 것 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세째, 『태강지리지』 자료들이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을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료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회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서진이 무너지면서 5호16국시대가 열린다. 이 시대는 서기 320년경부터 시작되어 수나라가 통일을 할때까지 약 250년가까이 진행되는데, 이 시대는 말그대로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 대한 기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수나라나 당나라와 가까웠던 나라들의 역사만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서진시대 만들어진 문건들이 온전히 남아서 당나라까지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여기저기 조금씩 흩어진 기록들을 모아서 정리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서(晉書)를 편찬해야 했기 때문이다. 진서는 당나라때인 648년에 편찬되었.

(13)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41. 이들 지명에서는 한군현, 갈석산, 장성이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 다. 즉 이 세 지역은 한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키 워드가 들어 있는 기록들을 확인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구체적 으로 낙랑관련 기사를 고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사(正史)기록의 갈석 및 낙랑관련 기록 漢書 1. 『漢書』卷六 行自泰山, 復東巡海上, 至碣 태산으로부터 다시 동으로 해상을 순행하여 「武帝紀」 石. 自遼西歷北邊九原, 歸于 갈석에 이르렀다. 요서로부터 북쪽 변방의 구 第六 甘泉. 원을 지나 감천으로 돌아왔다.. 2. 『漢書』 卷二十五 上「郊祀志」 第五上. 後三年, 游碣石, 考入海方 士, 從上郡歸.. 3년 후 갈석을 유람하고 바다로 들어간 방사 를 살펴보고서 상군을 따라 돌아왔다.. 3. 『漢書』 卷二十五上 「郊祀志」第 五上. 二世元年, 東巡碣石, 並海, 南歷泰山,. 2세 원년에 동으로 갈석을 순행하고 해상을 따라 남으로 태산을 지나갔다.. 4. 5. 『漢書』 故中國山川東北流, 其維, 首 卷二十六 在隴、蜀, 尾沒於勃海碣石. 是 「天文志」 以秦、晉好用兵, 復占太白. 第六 『漢書』卷 二十八上 「地理志」第 八上. 至于王屋;太行、恆山, 至于碣石, 入于海.. 그러므로 중국의 산천이 동북쪽으로 흐르니, 그 벼리가 머리는 농·촉에 있고 꼬리는 발해·갈 석에서 다한다. 이 때문에 진나라와 진나라는 전쟁을 좋아하여 다시 태백을 점하였다.. 왕옥산에 이르면 태행산과 긍산이니,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는데 이 사업에는 반드시 진나라때 기록을 활용해야 했기 때문에 흩어져 있었던 자료 를 모았을 것이다. 참고로 말한다면 진서는 당나라 당대의 고위관료들인 방현령 등이 참여하여 만든 국가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 서의 편찬은 차이나 역사에서 국가가 주관이 되어 역사를 편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네째, 앞서 말한바와 같이 당나라 때 수집한 많은 사료들이 『괄지지』, 『사기집해』, 『사 기색은』,『사기정의』, 『통전』이나 『태평환우기』 그리고 송나라 때 『자치통감』 같은 책에 활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14) 242 仙道文化 제 25 권. 『漢書』卷 都內之錢貫朽而不可. 六十四下 乃探平城之事, 錄冒頓以來數 「嚴朱吾丘 6 爲邊害, 籍兵厲馬,因富民以 主父徐嚴終 攘服之. 西連諸國至于安息, 王賈傳」第 東過碣石以玄菟、樂浪爲郡, 三十四下. 都內의 돈은 꾸러미를 꿴 끈이 노후하여 숫자 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평성의 일을 탐색 하여 모돈이래로 자주 변방에 피해를 입힌 일 을 기록하였고, 병사를 징집하고 무기를 손질 하여 부민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저들을 굴복 시켰습니다. 서로는 여러 나라와 연하여 안식 에 이르렀고, 동으로는 갈석을 지나 현도·낙 랑으로 군을 삼았다.. 晉書. 1. 『晉書』卷一 「帝紀」第一 宣帝. 告成歸老, 待罪舞陽.」遂進 공을 이룸을 고하고 늙음을 이유로 물러나 무양 師, 經孤竹, 越碣石, 次于遼 에서 죄받을 것을 기다렸다. 마침내 진군하여 고 水. 죽을 지나 갈석을 넘어 요수에 주둔하였다.. 2. 동으로 갈석산에 임하여 창해를 바라본다. 물 『晉書』卷 東臨碣石, 以觀滄海. 水何淡 은 고요하고 산 섬들은 우뚝하다. 나무들이 二十三「志」 淡, 山島竦峙. 樹木叢生, 百 빽빽이 자라고 온갖 풀들이 무성하다. 가을바 第十三 樂下 草豐茂. 秋風蕭瑟, 洪波涌起. 람이 싸늘하게 부니 큰 파도가 일어난다.. 遂開拓舊境, 卻地千里. 復秦 『晉書』卷 長城塞, 自溫城洎于碣石, 綿 四十二「列 亙山谷且三千里,分軍屯守, 3 傳」第十二 烽堠相望. 由是邊境獲安, 無 ‘王渾’,‘子濟’ 犬吠之警, 自漢魏征鎮莫之比 焉.. 마침내 옛 영역을 개척해 천리를 넓혔다. 진 나라의 장성새를 회복하였는데 온성에서 갈석 에 이르렀으니, 산과 골짜기를 서로 이은 것 이 거의 삼천리였다. 군을 나누어 지키게 하 여 봉화대와 돈대가 서로 바라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변경이 안정되어 도둑을 경계할 일 이 없어져, 한나라와 위나라가 진압한 이래로 이보다 안정된 적이 없었다.. 隋書. 1. 遼西郡舊置營州,開皇初 置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 一,戶七百五十一。柳城後魏 置營州於和龍城,領建德、 冀陽、昌黎、遼東、樂浪、營丘等 郡,龍城、大興、永樂、帶方、定 荒、石城、廣都、陽武、襄平、新昌、 『隋書』 「地 平剛、柳城、富平等縣。後齊唯留 理志」 建德、冀陽二郡,永樂、帶方、龍 城、大興等縣,其餘並廢。開皇 元年唯留建德一郡,龍城一 縣,其餘並廢。尋又廢郡,改 縣為龍山,十八年改為柳城。 大業初,置遼西郡。有帶方山、 禿黎山、雞鳴山、松山。有渝水、 白狼水。. 요서군 구치에 영주를 설치하였다. 개황초에 총관부를 설치하였고, 대업초에 부를 폐지하 였다. 현 하나를 관할하였는데 호는 751호였 다. 유성은 후위가 영주와 용성에 설치하였 는데, 건덕, 기양, 창려, 요동, 낙랑, 영구등 의 군을 관할하였고, 용성, 대흥, 영락, 대방, 정황, 석성, 광도, 양무, 양평, 신창, 평강, 유 성, 부평현 등을 관할 하였다. 후제때에는 건 덕,기양 두군만 남아 있었고, 영락, 대방, 용 성, 대흥둥의 현은 모두 없앴다. 개황 초기에 는 오직 건덕군 하나, 용성현 하나만 남아 있 었다.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폐군들을 확인 하여 모두 용산으로 하였다. 18년 유성으로 하였다. 대업초에 요서군을 설치하였다. 대방 산, 독려산, 계명산, 송산이 있다. 유수와 백 랑수가 있다..

(15)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43. 2. 盧龍舊置北平郡,領新昌、朝 鮮二縣。後齊省朝鮮入新昌, 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 如。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 『隋書』 「地 十八年改名盧龍。大業初置北 理志」 平郡。有長城。有關官。有臨渝關。 有覆舟山。有碣石。有玄水、盧水、 溫水、閏水、龍鮮水、巨梁水。有 海。. 노룡현 구지에 북평군을 설치하였는데, 신창 현과 조선현 두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후제 때 조선현이 신창현에 편입되었고, 또 요서군 이 해양현을 아우르게 하고, 비여를 편입시켰 다. 개황6년에 비여를 신창에 편입시켰고, 개 황 18년에 노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업초 에 북편군을 설치하였다. 장성이 있고, 관이 있다, 임유관이 있다. 복주산이 있고, 갈석이 있다. 현수, 노수,온수, 문수, 용선수, 거량수 가 있다. 바다가 있다.. 낙랑의 구체적인 지형지물로 갈석산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갈석산은 현재 중국 하북성 해변에는 몇 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갈석산은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들을 보면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중국 하북성 중, 북부지역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해서 지도를 그려 보면 아 래와 같다.. 그림 2. 초기 낙랑위치 추정지역 다만 여기서 말한 것은 낙랑군이 설치되었을 초기의 상황을 말하는 것 이다. 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낙랑은 이 위치에서 시작하여 그 범위와.

(16) 244 仙道文化 제 25 권. 행정치소가 많이 변하였다. 그러므로 시간이 흘러가면서 변하는 상황들 은 연구과정에서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평양설의 대두 낙랑군 평양설은 오늘날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학설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많은 이론이 제기되고 있는 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설을 보면 제기된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분석해본 바 없이 평양이라는 지명에 의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여기서 말하는 평양이라는 곳 은 현재 북한의 평양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서에 보면 평양이라는 지명은 몇 곳에 있는 것이 때문에 연구자에 따라 많은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러므로 이 평양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갈석산에 있었던 낙랑군이 어떻게 평양이라는 곳에 비정하게 되 었는지 확인도 해봐야 할 것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기록은 북위의 관리였던 역도원의 『수경주』 에 나타나기 시작한다.22) 그는 북위(北魏)의 관리로 6세기경의 사람이다. 역도원이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던 것은 서한이 패수로 국 경선을 삼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북위의 관리로 과거 서한의 영토 중 북방지역에 건설한 왕조이기 때문에 그 왕조 내의 역사를 고증하는 과 정에서 확인이 필요했을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조상이 낙랑공이라는 작 위를 받고 다스린 지역이기 때문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서한의 동북지역 국경선은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고 본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서한의 건국초기 사람이었던 위만이 패수 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을 보게 된 것이다. 이 기록은 『사 22) 역도원은 현재 차이나 하북성 북경지역 사람이다. 그이 생가는 아직도 하북성에 남아 있다. 그의 6세조가 낙랑공이라는 작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낙랑에 대한 관심을 갖은 것이 아닌가 한다..

(17)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45. 기』나 『한서』 를 봤을 것이다. 이런 관심사에서 볼 때 위만이 패수의 서쪽 에서 동쪽으로 건너갔다면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 모두가 패수의 서쪽 에서 동쪽으로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당장 위씨 조선을 공격하러 간 군 대 중 육군은 바로 이 코스를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패수의 방향에 대 한 기록을 볼 때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관리를 하면서 『수경주(水經註)』를 완성하였는데,23) 이 『수경주』는 서기 2~3세기 전후에 상흠이라는 사람이 썼다는『수경(水經)』의 주석서인 데 『수경』이라는 책이 쓰이고 400년이 흐른 후에 나온 것이다.24) 『수경』의 기록에는 낙랑군이 바다를 기준으로 하여 동서남북 어디에 있 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 근거는 바로 낙랑군을 흐르는 패수의 흐르는 방향이 있었기 때문이다.25)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 로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을 보면 패수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간다고 하였다. 즉 낙랑군의 동쪽에는 바다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기록은 비단 『수경』만의 기록은 아니다. 23) 『水經注』 이 책의 저자는 북위의 관리였던 역도원이다. 차이나 북위시대 편찬된 지리서로 편찬 연대는 5~6세기로 추정된다. 전체 40권으로 황하(黃河), 회하(准河) , 양자강(揚子江) 등 1,252개의 중국 각지의 하천을 두루 편력하여, 하천의 계통 ·유역의 연혁 ·도읍 ·경승 ·전설 등을 기술하였다. 『수경』은 2~3세기경에 이루어진 책으로, 하천의 발원 지 ·경류지(經流地) ·합류지 또는 입해지(入海地) 등을 간단히 기록해 놓은 것으로 서, 역도원은 그것을 골격으로 하여 자신의 광범위한 여행 경험과 많은 문헌을 통해 얻 어낸 풍부한 지리적 지식을 정리해 놓았다. 18세기에 보정작업이 있었으며, 1957년 수 경주소(水經註疏)가 출판되었다. 24) 조선 전기에 쓰인 『동국여지승람』을 1900년대 한국학자들이 주석서를 낸 것과 비슷하다. 25) 『水經』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이 기록은 역도원의 수경주보다 약 400년전 기록이라고 추정된다..

(18) 246 仙道文化 제 25 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역도원이 그가 생존했을 때 낙랑군은 있었지만 패 수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 것이다.26) 그렇기 때문에 차이나 서한 무제가 설치하였다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러나 그는 그의 저서인 『수경주』를 쓰는 과정에서 동북방의 큰 강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패수를 찾는 과정에서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혼동을 일 으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전대에 만들어진 기록들인 『수 경』, 『십삼주지』, 그리고 ‘허신’의 말, 어느 사서인지 분명하지 않은 지리 지를 참고로 하고 있었다. 그때 역도원이 고구려 사신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고구려의 도성이 패수의 북 쪽에 있다는 것과 이 패수는 동에서 나와 서로 흐른다는 말을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역도원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27) 󰡔水經註󰡕에는, 허신이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패수는 낙랑군(樂浪 郡) 패수현(浿水縣)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심삼주지』에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은 동북에 있고, 루방현 은 군의 동쪽에 있는데 아마도 루방현은 그 현의 남쪽에 있는 듯하 다. 옛날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의 서쪽으로부터 이동하여 조 선(朝鮮)에 이르렀다. 조선(朝鮮)은 옛 기자(箕子)의 나라이다. 기 자가 이들에게 義田織信厚約 등 8개의 법을 가르치니 금지하는 것 26) 북위시대에 행정구역으로는 낙랑은 확인이 된다. 그러나 낙랑에 있어야 할 패수는 없 어진 것이다. 27) 『水經註』 許慎云浿水出鏤方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浿水縣在樂浪東北鏤方縣在郡東盖 出其縣南逕鏤方也.昔燕人衞滿自浿水西至朝鮮朝鮮故箕子國也. 箕子教民以義田織信厚 約以八法而下知禁遂成禮俗,戰國時滿乃王之都王險城地方數千里,至其孫右渠漢武帝元封 二年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討右渠破渠于浿水, 遂滅之若浿水東流無渡浿之理, 其地 今髙句麗之國治,余訪蕃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 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 漢武 帝置而西北流故地理志曰浿水西至增地縣入海, 又漢興以朝鮮為逺循遼東故塞至浿水為界 , 考之今古于事差謬盖經誤證也.

(19)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47. 을 알고 예절의 풍속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에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사방 1000리 였다. 그 자손 우거왕에 이르러 한무제가 루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왕을 공격하였는데 우거왕을 패수(浿水)에 서 깨뜨려서 드디어 그들을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으로 흘렀다 면 패수(浿水)를 건널 수 없었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도읍인데 내가 그 나라의 사신들을 만나 물어보니 패수(浿水)의 북쪽에 성( 城)이 있다고 하였다.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간다고 하였다. 낙랑 의 조선현은 낙랑군이 다스리는 현인데, 한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패수는 서로 흘러간다. 옛 지리지에28)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서쪽 으로 증지현(增地縣)에 도달하여 해(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한 한(漢)이 일어났을 때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땅이 너무 멀어 요 동(遼東)의 옛 성을 다시 수리하여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았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여 볼 때 수경(水經)에서 패수가 동쪽으로 흘 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글은 역도원이 상흠의 『수경』을 비롯한 허신, 그리고 『십삼주지』에 기록된 패수관련 기록을 고증하는 것이다. 이 글의 주요 내용 중 패수에 관한 것을 확인하여 분석 해보자. ➊ 서한: 패수를 국경선으로 삼았음. 패수 밖은 조선이었음. ➋ 위만: 패수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서 조선으로 갔음. ➌ 어떤 사람: 패수는 낙랑군 패수현에서 나온다고 하였음. ➍ ‌『수경』의 패수: 패수는 서북에서 나와 임패를 지나 동으로 바다로 들 어간다고 하였음.. 28) 『후한서』 「지리지」, 『한서』 「지리지」 비교.

(20) 248 仙道文化 제 25 권. ➎ 허신29)의 말: 패수는 루방현을 나와서 바다로 들어간다. ➏ ‌『십삼주지』: 패수현은 낙랑군의 동북에 있고, 루방현의 낙랑군의 동 쪽에 있는데 패수는 패수현과 루방현을 지나서 남쪽으로 간다고 하 였음. ➐ ‌고구려 사신: 고구려 국치는 패수의 북쪽에 있는데, 패수는 서쪽으 로 흐른다고 하였음. ➑ ‌옛 지리지(『한서』,혹은 『후한서』): 패수는 낙랑군 증지현을 거쳐 서쪽 바다로 들 어간다고 하였음. ❾ ‌그 결과 패수를 서에서 동으로 흘러간다고 했던 모든 자료는 틀렸 고, 동에서 서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맞음. 그러므로 『수경』을 비롯 한 『십삼주지』 등등의 기록들은 틀렸고, 패수는 평양에 있어야하는 것이고, 낙랑군도 평양으로 가야하는 것임. 이렇게 분석한 것은 『수경주』 내용을 근거로 원문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의 말과 그가 본 지리지에 기록된 패수라는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생각은 그가 전해 내려오는 자료 들은 서한초기의 동북지역 국경선은 패수였고 이 패수는 서북에서 동남 으로 흐르는 강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에 있는 패수는 거꾸로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도원이 알고 있었던 패수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역도원은 낙랑군의 변화과정이나 혹은 강 이름이 변했 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30) 고구려에 패수라는 강이 있다는 것에만 집착 을 한 나머지 고구려의 패수를 서한의 패수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고 구려의 패수의 흐르는 방향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고 하니 앞서 말한 후대 에 만들어진 『한서』 혹은 『후한서』 「지리지」와 더 후대에 만들어졌을 「지리 29) 후한 때 사람. 생몰 연대는 서기 58~147년 이고, 『설문해자』를 지었음 30) 서한시대 패수였던 강은 북위 때 유수(濡水) 였다..

(21)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49. 지」 주석서를 근거로 들어 위만이 건넌 패수도 고구려에 있는 패수로 생 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사기』, 『한서』, 『수경』, ‘허신’의 말, 『13주지』, 『사 기집해』 에 실린 패수관련 내용들을 모두 부정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낙랑군의 위치를 당시 패수가 흐르던 고구려 평양성에 비정해버린 것이 다. 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427년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인데 현재 중국 요녕성 요양이다.31)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낙랑군 평양설이 대두된 것이 다.. 3. 역도원의 오류 차이나는 서기 4세기 초반부터 이른바 5호 16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 든 것이 대혼란시대로 접어드는데 기록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는 훗 날 많은 기록들을 유실시키면서 역사를 고증할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아 주 오래된 자료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황하북방유역을 기반 으로 하는 북위가 건국되면서 북위의 관리였던 역도원은 혼란스러운 자 료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고구려 사 신을 찾아가서 만났다. 역도원은 고구려 사신에게 고구려에 대하여 질문 을 하였는데, 이에 고구려 사신은 답하기를 평양은 패수의 북쪽에 있고, 그 강은 동에서 서로 흐른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러자 여러 의구심 을 떨쳐 버리고 과감하게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31) 훗날 많은 학자들이 대동강 패수설을 주장하는 많은 기록들은 바로 역도원의 방식으로 고증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도원은 몇 가지 큰 실수를 하였다. 첫째, 『수경』의 기록은 낙랑군이 존재 했을 당대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을 절대 로 존중했어야 했다. 둘째, 강의 하구의 위치가 일부 변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180도로 바뀌지는 않는 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즉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갔던 하구가 서쪽바다로 들어가는 일 은 없다. 셋째, 역도원이 살아 있을 때 서한의 낙랑군이 ‘낙량군’으로 바뀌어 엄연히 존재하고 있 었음에도 불 구하고 이를 무시하고『수경주』에 낙랑군을 고구려 평양성에 비정한 것이다..

(22) 250 仙道文化 제 25 권. 역도원이 참고한 「지리지」에 대한 해석이다. 역도원이 본 지리지는 무 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흔히들 『한서』나 『후한서』를 말할 수도 있다. 그 러나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만약 그가 인용한 지리지가 『한서』 「지리지」 주 석문이었다면 이는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서』 본문의 「서남이조선」 열전을 보면 위만이 패수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간 것으 로 기록하고 있다.32)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는 여기서 중대한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군현 설치초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고, 그리고 변화 의 과정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 그는 서한초기에 설치된 낙랑군 이 시종일관 같은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을 한 것이다. 더구나 그의 생존 시기에 낙랑군 인식도 지금의 갈석산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수서』의 기록에서 볼 수 있었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 수를 한 것이다. 그의 실수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패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사기』의 기록은 「조선열전」에서 위만이 ‘서에서 동’으로 건넜다고 하였으니 패수의 방향은 북에서 남의 방 향이다. 『한서』 「조선열전」에서도 그렇다. 그렇다면 당대 사료에서 패수의 방향은 ‘북에서 남’인 것이다. 둘째, 수경에서는 물의 방향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그 선대의 기록인 북에서 남으로의 방향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을 ‘동남’이라고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 내용은 즉 패수는 큰 방 향에서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허신은 패수는 루방을 나와서 동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는데, 이 루방의 위치에 대하여 『십삼주지』에서 낙랑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즉 동쪽에 서 나와서 동으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역시 패수의 32) 『한서』 「서남이열전」 33) 『隋書』 「地理志」 盧龍舊置北平郡,領新昌、朝鮮二縣。後齊省朝鮮入新昌,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 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盧龍。大業初置北平郡。有長城。有關官。有臨渝關。有覆 舟山。有碣石。有玄水、盧水、溫水、閏水、龍鮮水、巨梁水。有海。.

(23)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51. 흐르는 방향은 동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셋째, 『수경』의 기록과 ‘허신’의 말이다. 그들은 패수가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내용에서 일치한다. 이 렇게 일치된 의견은 당시 사람들의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이해를 알려주 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생몰연대가 서기 100년경의 사람들로 추정되는데 거의 비 슷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비슷한데 이 는 당시 한군현 설치 당시의 패수를 이해하고 있는 상황을 알 수 있는 것 이다. 다만 방향이 구체적으로 ‘동남’ 또는 ‘동’이라고 적시가 되면서 앞서 말한 『사기』나 『한서』의 내용을 보완해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 『십삼주지』의 기록이다.34) 이 책에서는 낙랑군 안에 있는 패수현 과 루방현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두 현을 설명하는 의미 는 패수의 흐름을 말하고자 하는데 초점은 루방현의 위치이다. 이 위치가 중요한 것은 아마도 루방현이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 다. 이 기록에 의하면 루방현은 낙랑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 면 패수는 낙랑군의 동북에 있었던 패수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루방 현을 지나 동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섯째, 『史記集解』의 기록이다. 이 『사기집해』는 차이나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사람인 배인이 쓴 책이다. 즉 연대는 역도원과 거의 같은 연대에 쓰인 책이라는 것이다. 그 책에는 역시 패수는 동남으로 흐르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들을 그림으로 그려 보면 아래와 같다. 34) 이 책은 북위의 지리학자인 감인(闞駰)이 한대에 설치된 13개 주에 대한 설명을 한 책 이다. 현재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집본(輯本)만 전해지고 있다. 역도원도 『수경 주』에서 이 책을 많이 활용하였다..

(24) 252 仙道文化 제 25 권. 여섯째, 『수서』 「지리지」이다. 수서지리지 요서군 관련을 보면35) 요서군에 대한 개괄을 하였다. 이 개 괄에서 수나라 요서군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었나 하는 것을 정리하면 서 그 안에 어떤 행정구역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 우리 눈에 익은 낙랑, 대방, 양평, 유성, 유수, 백랑수 등등의 지명들이 거의 대부분 등장하는 것이다. 이 지명들은 곧 수나라 요서군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기록은 노룡현에 대한 기록이다.36) 이 기록을 보면 과거 낙 랑군의 수현이었던 조선현과 신창현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갈석도 있고, 장성도 있고, 임유관도 있다고 기록을 해놓았다. 그리고 바 다가 있다고 하였다. 이 내용들을 볼 때 요서군과 노룡군은 같이 붙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 는데 그것은 요서군의 해양현이 노룡군의 비여현에 들어왔다가 비여현이 신창으로 편입되었다. 이 기록을 볼 때 수나라 때 요서군에 있었던 낙랑 현과 노룡군에 있던 조선현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패수’라는 강 이름이 없다는 것 이다. 이 두 북평과 요서의 행정구역에서 나타나는 임유관과 갈석, 유수 의 위치는 오늘날 차이나 하북성 동북부와 요녕성 서부지역이라는 것이 다. 이들의 위치는 고구려의 서쪽에 있었고, 당시 고구려의 서변은 오늘 35) 遼西郡舊置營州,開皇初置總管府,大業初府廢。統縣一,戶七百五十一。柳城後魏置營州 於和龍城,領建德、冀陽、昌黎、遼東、樂浪、營丘等郡,龍城、大興、永樂、帶方、定荒、石城、廣都、 陽武、襄平、新昌、平剛、柳城、富平等縣。後齊唯留建德、冀陽二郡,永樂、帶方、龍城、大興等 縣,其餘並廢。開皇元年唯留建德一郡,龍城一縣,其餘並廢。尋又廢郡,改縣為龍山, 十八年改為柳城。大業初,置遼西郡。有帶方山、禿黎山、雞鳴山、松山。有渝水、白狼水。 36) 盧龍舊置北平郡,領新昌、朝鮮二縣。後齊省朝鮮入新昌,又省遼西郡並所領海陽縣入肥如。 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盧龍。大業初置北平郡。有長城。有關官。有臨渝關。有覆 舟山。有碣石。有玄水、盧水、溫水、閏水、龍鮮水、巨梁水。有海。.

(25)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53. 날 대릉하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을 참고해보면 한군현이 설치됐을 당시부터 6세기 무렵까지는 낙랑군의 위치는 현재 차이나 요서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위의 관리였던 역도원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도원은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3. 패수의 방향도. (패수는 서북에서 시작하여 동남으로 흐르기 때문에 위만 은 서에서 동으로 이동이 가능 하였다.). 4. ‘증지현(增地縣)’ 혹은 고구려 ‘살수’에 대한 고찰 여기서 다시 역도원의 기록으로 돌아가 보자. 역도원이 본 「지리지」에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기록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 역시 당대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대의 기록이라는 것은 한군현이 설치된 후 약 150년 정도 흐른 후의 얘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될 가능성이 있다. 서한이 왕망에 의하여 무너지면서 일대 혼란으로 빠져든다. 그 와중에 왕망은 서한의 동북지역에 많은 관심을 갖는데 고구려에 대한 강한 적개 심을 보인다. 심지어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하면서 외교적으로 군사적으.

(26) 254 仙道文化 제 25 권. 로 고구려와 충돌을 한다. 이때 고구려도 많은 피해를 입는 것으로 보인 다. 이때 왕망은 새로 빼앗은 땅을 낙랑군에 편입을 시키면서 증지현으 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다가 왕망이 무너지고 나서 혼란한 틈을 타 서 고구려는 낙랑국, 낙랑군 등 지역을 빼앗아 고구려 영토에 편입을 시 킨다. 그러자 동한은 낙랑군지역을 고구려 대무신왕 때 빼앗겼다가 다시 광무제가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이를 수복하면서 현재 차이나 요서지 역에 있었던 낙랑의 옛 지역을 수복하고 동시에 바다를 건너 옛 낙랑군의 동쪽지역에서 새로운 땅을 빼앗았는데 이 지역이 요동반도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 지역도 낙랑군으로 편입을 시키고 이를 증지현의 관할로 둔 듯하다. 그런데 이 증지현에는 동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있었는데 그 강이 패수였거나 혹은 동한이 패수로 이름을 붙이거나 한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현재 요양 이남지역이 동한의 영토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은 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서기 50년 이전 시기의 일이라 는 것이다. 즉 낙랑군이 처음 설치된 후 150년이 흐른 후의 일이다. 그렇 기 때문에 반씨 가문에서 『한서』를 편찬할 때 이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그 렇다 보니 이 부분을 『한서』에 넣은 것이 아닌가 한다. 역도원은 이 기록 을 봤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상황을 볼 때 ‘증지현’이라는 말이 나와 『한 서』일 것이라 추정을 하는데 앞으로 더 확인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이 증지현(增地縣)이라는 말은 아마도 더 얻은 땅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한군현이 유지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더 얻게 된 땅이라는 것이다. 낙랑군 속현이 늘었다 줄었다하는 상황은 계속 지속된다.37) 그 한 예가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후한을 공격하여 전쟁을 하는 기록이다.. 37) 이는 『후한서』를 기준으로 한 것인데, 『후한서』는 후한의 일시적인 기록보다 전 시기를 기록하는 것으로 그 큰 틀은 알 수 있지만 연도별 세세한 변화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 므로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27)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55. ❶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大武神王 二十年. (37년)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대무신왕 20년 기록은 한의 행정구역이었던 낙랑군을 공격하여 빼앗은 것이다. 이렇게 낙랑군을 고구려에 빼앗기자 얼마 후 후한 광무제는 군대 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얼마 전 빼앗긴 낙랑군지역을 회복하고 다 시 원래 낙랑지역을 회복하고 더불어 원래 낙랑 땅이 아니던 땅을 얻게 된 것이다.38) ❷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大武神王 二十七年秋九月. (44년 09월(음)) 27년(44) 가을 9월에 한(漢) 광무제가 병력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 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아, 살수(薩水) 이남을 한에 속하게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후한이 고구려한테 빼앗겼던 낙랑지역을 되찾아 다시 낙랑군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땅을 빼앗긴 것으로 볼 수 있다.39) 이 기록과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멸망시킨 기록의 연대차이를 보면 불과 7 년 후의 일이다. 이 차이를 보면 광무제는 그의 13년에 고구려에 빼앗겼 던 낙랑군을 그의 20년에 다시 되찾은 것이다. 고구려는 이때가 민중왕 1 년이다. 이때 고구려는 다시 낙랑 땅을 빼앗기고 살수 이남은 한이 차지 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고구려에서 큰 세력이 이탈하여 한으 로 가서 항복한다.40) 38)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39) 여기서 광무제가 빼앗었던 살수 이남의 땅이 고구려의 땅인지는 알 수 없다. 필자의 생 각으로는 고구려의 땅은 아닌듯하다. 40) 여기서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이런 사건은 서기 50년 이전 시기의 일이라는 것이다. 즉 낙랑군이 처음 설치된 후 150년이 흐른 후의 일이다..

(28) 256 仙道文化 제 25 권. ❸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閔中王 四年冬十月.(47년 10월(음)) 겨울 10월에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 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漢)에 투항하였다.. 41). 여기서 문제는 살수(薩水)인데, 왜냐하면 살수를 경계로 고구려와 후한 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살수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이 기록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기록, 그리고 『삼국사기』 「지리지」에 이름만 남아 있는 지명에 ‘살수’가 비류수와 나란히 남아 있 다. 학계에서는 이 살수를 흔히 청천강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천강이 살수로 추정되는 것은 누구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는 구체적으 로 알 수 없는데 조선 세종 때는 살수가 청천강으로 인식되고 있다.42) 그 러나 정조는 이 청천강이 살수라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있었다.43) ‘살수(薩水)에 대하여 혹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라고 하는데, 을지문 덕(乙支文德)이 군사를 몰래 감추어 놓고 항복을 요청한 것과 우문술(宇 41)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冬十月, 蠶友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42) 살수는 조선초기부터 거명이 되고 있는데, 가장 이른 기록은 『태종실록』이다. 여기에는 조사의반란군이 진압군과 살수에는 전투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태종실 록』에서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음력 2월에 얼음이 얼었는데 두껍게 얼어있어 많은 사람들이 얼음판에 올라갔다가 이 얼음판이 깨 져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에 나오는 살수들은 현재 청천강을 두고 말을 하고 있 으나 확실한 자신감은 없어 보인다. 이런 현상은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의구심이 제 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3) 『홍재전서』 제116권, 수양제(隋煬帝) 薩水或曰今爲淸川江。乙支文德之潛師請降。宇文述之中流兵潰。未知果在此江。而淸川卽一 衣帶水也。尙何能倚爲天塹。恃險出奇歟。綱目所載。旣失其詳。東史所錄。亦多贗傳。或於野乘 佚史有可以考據者歟。幼學李晩膺對。高句麗小國也。而乙支文德破隋師三十餘萬於淸川江 上。殺其將辛世雄。如摧枯拉朽。何其壯也。孟子曰地利不如人和。誠哉是言也。但恨文獻無徵。 不能詳其戰守之策也。樂浪今之平壤也。玄菟今之德源文川也。襄平南蘇。俱在遼東。今屬奉天 府。安市城亦遼東屬縣。而後人妄欲求之於鴨江之東。誠過矣。薩水卽淸川之一名。乙支之潛師 請降。宇文之中流兵潰。俱在此江。而今則不過一小津耳。無乃古之大江。今或堙而爲小耶。抑古 之渡涉在下流廣闊處耶。山川變易。沿革無常。以臣謏寡。不敢質言。.

(29)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57. 文述)의 군사가 물속에서 궤멸된 것이 과연 이 강에서 있었던 일인지 의 심스럽다. 청천강은 폭이 좁은 강에 불과한데, 어떻게 천연의 참호(塹壕) 를 만들어 험준함을 믿고 기발한 계책을 낼 수 있었겠는가. 『강목』의 기록 이 상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기록도 또한 대부분 잘못 전해지고 있으니, 혹 야승(野乘)이나 일사(佚史)에서 근거할 만한 자료가 있는가?’ 유학 이만응(李晩膺)이 대답하였다. ‘살수(薩水)는 곧 청천강의 다른 이름으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군사 를 몰래 감추어 놓고 항복을 요청한 것과 우문술(宇文述)의 군사가 물속 에서 궤멸된 것은 모두 이 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그 마한 나루에 불과하니, 옛날에 큰 강이었던 것이 지금은 혹 물줄기가 막 혀 작아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옛날에 수나라 군사가 강을 건 넌 것은 하류의 광활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산천의 변화란 무상하게 진행 되는 것이어서 신의 좁은 식견으로는 감히 확실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겠 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정조는 살수의 위치에 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답하는 사람도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살수 가 어딘가 하는 것이다. 이 살수에 대한 기록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조선시대 태조 에게 반란을 일으킨 약 3만명의 반란군들이 살수 얼음판에서 전쟁을 하 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시기가 음력 3월이기 때문에 양력으로 치면 4월 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현재 청천강이 계속 얼어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 리고 몇 만의 군대가 말이다. 이 기록을 볼 때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 아 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44) 이 기록이 맞아야 한다면 살수는 양력 3월도 얼 어있어야 하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양력 3월에도 얼어 있어야 하는 강이 있다면 그 가능성은 만주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44) 강 수심이 얕고 바닥이 돌로 쌓여있으면 사망률이 매우 낮다. 그러나 수심이 얕더라도 바닥리 진흙으로 퇴적되어 있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30) 258 仙道文化 제 25 권. 이 살수의 위치에 대하여 명나라 초기 기록에 남아 있는데, 그것은 오 늘날 차이나 요녕성 무순시에 발원하여 서남으로 내려가는 물줄기를 말 하고 있다. 지금은 이 강을 혼하라고 한다. 이 혼하(渾河) 상류를 명나라 시대 기록에서 살수라고 기록하고, 구체적으로 수나라 장수 신세웅이 전 사한 곳이라고 기록해 놓았다.45) 이 기록은 그동안 미궁에 빠져있던 살수 에 관한 기록들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살수가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 기록된 살수와 같은 것이라면 지금의 요동반도 중간 부분에서 고구려는 동한과 남쪽 국경선을 맞대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은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다. 왜냐하면 현재 차이나의 요양, 대련일대지역으로 물의 방향은 대부분이 서남쪽으 로 흐르거나 서쪽으로 흐른다. 또한 많은 후한대의 유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후한의 대표적인 유적은 전실묘이고, 고구려의 대표적인 무덤 양 식은 석실묘이다. 이 두 양식이 만나는 곳이 바로 요양이다. 요양남쪽으 로는 석실무덤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고, 요양북쪽으로 전실묘 역시 거 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특히 대련 쪽에는 전실묘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대련 영성자무덤이 대표적인 무덤이다.. 45) 李賢等, 『大明一統志』 卷25, 遼東都指揮使司, ‘山川’, ‘薩水’. 天順 五年.

(31)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59. 5. 평양설의 고착 및 전승. 그림4. 낙랑군 고구려 평양설 위치 표시도 서진 말 8왕의 난으로 시작된 300년의 분열은 수나라가 수습하여 통일 왕조를 건국하였으나 그 이전의 왕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동북지 역 세력들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실패한 후 무너지고 나서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은 건국직후 고구려와 평화 정 책을 견지하다 태종 때에 이르러 역시 황제가 친정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큰 실패를 하고 전략을 바꾸면서 내정의 안정을 꽤하였다. 이때 당나라는 많은 사서들을 모아서 그간 잊혀졌던 많은 사서들을 모아 각 시 기별로 역사서를 편찬하고, 편찬된 역사서를 새로 편수를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때에 흩어졌던 많은 사료들을 다시 찾거나 모아서 활용 하였다. 그러나 이미 300년이라는 전란을 겪은 터라 일관되게 자료를 다 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 모은 자료들을 활용하여 많은 책들 을 편찬하였다. 그런 책들 중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책들도 여기에 포함.

(32) 260 仙道文化 제 25 권. 이 된다. 그런 과정에서 한군현의 위치에 대한 기록들에 대한 취사선택도 다양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당나라 국가에서 편찬된 역사서와 사찬의 역 사서들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괄지지』를 포함한 국가 공식문서는 낙랑을 고구려 평양지역으로 보고, 사찬의 역사서는 대부분 이 갈석 지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 후 국가에서 편찬하는 역사서에서 낙 랑군의 위치는 평양으로 고정된 듯하다. 그런 책 중에 장수절의 『사기정의』가 있는데 그는 『괄지지』46)를 인용하 면서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결과 적으로 역도원의 주장은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는데 그 후로 편찬되는 평양과 관련되는 대부분의 관찬 사서에는 역도원의 주장 이 실리게 되는 것이다. ❶ 󰡔史記正義󰡕 47) 󰡔괄지지󰡕에서 고려의 도읍 평양성은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험성이고 또 한 옛날에는 조선 땅이라 일컬었다48) 위의 기록들로 인해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낙랑군으로 비정되기 시 작하였다. 고구려 평양성이 원래 서한의 낙랑군지역이었다고 처음 언급한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사기정의』가 아니라 『괄지지』인 것이 다. 즉 『괄지지』에서 처음으로 평양이 곧 낙랑군 지역이라는 기록이 나오. 46) 『괄지지』는 당나라 시기인 638~642년에 당태종의 넷째 아들인 이태가 만든 것으로 당 나라 황실에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여부를 떠나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47) 『사기정의(史記正義)』는 당나라 때 장수절(張守節)이 개원24년 (736년)지은 것이다. 장 수절(張守節)에 대해서는 사기정의(史記正義)를 썼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다. 48) 『史記正義』 括地志云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33)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261. 는 것이다.49) 이 기록은 『사기정의』에 인용되었지만 훗날 많은 역사서에 인용이 되거나 참고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50) 그렇다면 이 평양의 위치 에 대하여 알아보자. 필자는 당나라가 고구려에 얻은 평양지역에 대하여 글을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참고를 위해서 평양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몇 몇 기록을 제시해보기로 한다. ❷ 󰡔舊唐書󰡕 卷199 上 「列傳」 第149 上 ‘東夷’ ‘高麗’51) 고려는 부여로부터 나왔는데 별종이다. 평양에 도읍하였는데 이는 바로 한나라의 낙랑군 옛 땅으로, 경사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 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❸ 󰡔新唐書󰡕 卷220, 「列傳」 第145, ‘東夷’, ‘高麗’. 52).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땅은 동쪽으로 바다를 넘어 신라에 이르 고 남쪽으로도 바다를 넘어 백제에 이르는데 서북쪽은 요수를 건너 영주 와 접하였고 북쪽은 말갈이다. 그 군주는 평양성에 거주하는데 장안성이 라고도 부르며 한나라의 낙랑군이다. 49) 이 기록을 근거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이 오늘날 하북성 북부라는 주장을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지역은 너무도 많 은 변화가 있었던 곳으로, 그 지역에서 고구려 도읍이 몇 백년간 존재했었다는 것은 논 리에 맞지 않는다. 50) 참고로 말하면 이『괄지지』의 저자는 당 태종의 넷째 아들인 이태인데 황자가 편찬한 『괄지지』의 내용을 일반 학자들이 무시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 하는 고구려의 평양은 오늘날의 평양은 아니다. 51) 『舊唐書󰡕 卷199 上 「列傳」 第149 上 ‘東夷’ ‘高麗’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卽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 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 南北 二千里. 52) 『新唐󰡕 卷220, 「列傳」 第145, ‘東夷’, ‘高麗’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 平壤城亦謂長安城 漢樂浪郡也..

(34) 262 仙道文化 제 25 권. ❹-1 󰡔遼史󰡕 「지리지」53) 본래 조선(朝鮮) 땅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옥중 에서 풀어주고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하였다. 그가 8조 법금( 法禁)을 만들어 예의를 숭상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하여 생활이 풍족하 게 되자, 대문을 닫지 않아도 도적질하는 백성이 없었다. 40여 대를 전해 내려왔다. 연(燕)나라 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에 속하였으며, 처음으 로 관리를 두고 성벽을 쌓았다. 진(秦)나라 때에는 요동의 변방에 속하였 다. 한나라 초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옛 공지(空地)에서 왕이 되 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에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眞番)․임둔(臨 屯)․낙랑(樂浪),현도(玄菟) 4군으로 삼았다. 후한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 (幽州) 두 주에 오가며 편입되었으며, 요동(遼東)과 현도는 그 연혁이 일 정하지 않았다. 한나라 말년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이곳을 차지하여, 아 들 공손강(公孫康)에게 전해지고 손자 공손연(公孫淵)이 연왕(燕王)을 자 칭하고 소한(紹漢)이라 연호를 세웠으나, 위(魏)나라에 멸망되었다. 진(晉 )나라가 고려(高麗)를 함락시키자 뒤에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의하였다가 그 아들 모용보(慕容寶)가 고구려의 왕 고안(高安)을 평주목사(平州牧使) 로 삼아 그곳에 살게 하였다. 원위(元魏) 태무제(太武帝)가 그가 살고 있 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사신을 보내니, 요나라 동경(東京)이 본래 이곳이 다.. 53) 『遼史』 「지리지」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 。周武王釋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作八條之教, 尚禮義, 富 農桑, 外戶不閉, 人不為盜。傳四十餘世。燕屬真番、朝鮮, 始置吏、築障。秦屬遼東外徼。漢初, 燕人滿王故空地。武帝元封三年, 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後漢出入青、幽二州, 遼東、玄菟二郡, 沿革不常。漢末為公孫度所據, 傳子康 ; 孫淵, 自稱燕王, 建元紹漢, 魏 滅之。晉陷高麗, 後歸慕容垂;子寶, 以勾麗王安為平州牧居之。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 壤城, 遼東京本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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